15: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라!

 

 

 

[시편 15]

 

 

어떻게 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요동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견고한 믿음 가운데서 흔들림이 없이 우리가 신앙 고백한대로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오늘 저는 CNN 뉴스를 통해서 West Virginia 탄광에서 폭발로 13명중 12명이 사망하고 한명이 지금도 위독한 상태에 있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41시간 동안이나 그 깊은 탄광에 갇혀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엔 13명이 다 살아있다는 잘못된 소식을 듣고 어느 한 교회에서 모여 있었던 가족, 친지, 친구들은 교회 종을 울리면서 기뻐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나 같은 죄인” (Amazing Grace)이란 찬송을 불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3시간 후에야 그 정보가 잘못된 정보였음을 알고 12명이 죽고 1명만 구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그 교회에 있었던 한 사람은 첫 잘못된 정보 때는 “They were praising God”(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했어요)라고 말하면서 3시간 후 두 번째 바른 정보 때는 “They were cursing”(그들은 저주했어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때에 그 탄광을 소유한 회사의 회장 Hatified란 사람은 말하기를 “We prayed for 13 miracles.  We want to celebrate the one miracle that was delivered”(우리는 13명의 이적을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건짐을 받은 한 명의 이적을 축제하길 원합니다).  첫 번째 잘못된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Amazing Grace”를 찬양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두 번째 바른 소식을 듣고 저주를 했었는지 우리는 그 심정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왠지 신앙의 흔들림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근데 이러한 흔들림은 이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쁠 때는 우리가 찬양하고 감사하지만 힘들고 어려울 때, 특히 사랑하는 이의 죽음 가운데서 우리는 그 때에도 일관성 있게 감사하고 찬양하기보다 하나님을 원망하며 저주까지 할 때도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일관성이 결핍된 흔들리는 신앙의 원인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고 그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지 못하는 연약함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성경 시편 15편 말씀으로 말하자면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 시편 15편 1절을 보면 시편 기자 다윗은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 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라는 뜻입니다.  그 질문 가운데 다윗은 열개의 대답을 오늘 본문에서 주고 있습니다.  그 열개의 대답을 저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는 십계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십계명을 잘 지켜 나아갈 때에 우리는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이다”는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5절).  그러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는 십계명은 무엇입니까?

 

      첫 번째 계명은, 정직하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 시편 15편 2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정직하게 행하며 …. "  여기서 “정직”이란 ‘순수함’ 혹은 ‘성실함’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이중생활과 반대되며 변덕 없는 성품을 의미합니다(박윤선).  그 예로 욥을 들 수가 있습니다.  성경 욥기 2장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욥을 자랑하시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 없이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  욥은 사단의 공격으로 극심한 고통 중에서 있었지만 그는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했던 욥은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었을 지라도, 심지어 자기의 자식들이 다 죽었을 지라도 그는 입술로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성품이 정직하였기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정직한 자는 환경과 사람과 심지어 사단까지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죄를 멀리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다윗은 “어리석은 자”들이 그를 포위하여 박해할지라도 순정(정직)을 지켰습니다(시14편).  그 이유는 그는 하나님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 그는 알았기 때문입니다(대상29:17).

 

두 번째 계명은, 공의를 일삼으라는 말씀입니다.

 

성경 시편 15편 2절 중반절을 보십시오: “… 공의를 일삼으며 ….”  여기서 “공의”란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을 의미합니다(박윤선).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은 것을 사람으로 하여금 옳은 것으로 보이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사탄의 계략인지 모릅니다.  그 예로 창세기 3장에 나오는 “그 여자”(하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뱀이 그 여자에게 와서 그녀로 하여금 선악과를 따 먹게 할 때에 그 선악과를 따 먹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것이 결코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탄은 그녀로 하여금 그 선악과를 “보암직도”하게 만들었습니다(창3:6).  지금도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안목의 정욕에 빠기게 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것은 사람이 보기에 옳지 않은 것으로 보이게 만들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지 않은 것을 사람이 보기에는 옳게 보이도록 속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어떠한 사탄의 유혹이 있었을지라도 의롭다 함을 받은 자로서 의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사람이 보기에가 아닌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행하는 의로운 삶을 삶았습니다.

 

세 번째 계명은, 마음에 진실을 말하라는 말씀입니다.

 

성경 시편 15편 2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다윗은 주님께서 중심에 진실함을 원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51:6). 그랬기에 그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기 위해서는 마음에 진실함을 말해야 할 것 또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중생활을 하는 변덕 있는 성품을 가진 자들은 마음에 진실을 말하기보다 마음에 거짓을 말합니다.  그러한 자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지 못합니다.  마음으로는 미워하면서 말로는 사랑하는 척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지 못하므로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을 행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공의를 행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삶을 살지 말라고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에게와 사람들에게 마음에 진실을 말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 계명은, 혀로 참소치 말라는 말씀입니다.

 

성경 시편 15편 3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  여기서 “참소”란 단어는 “발”을 의미합니다.  즉, 발을 가지고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말로서 남을 해롭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박윤선).  한 마디로, 혀로 참소한다는 말은 남을 넘어지게 하는 말(stumbling speech)을 가리킵니다. 그러한 말 중에는 헛소문을 퍼트리던지 이웃에 대해 수군수군 하던지 결국은 이웃을 해롭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는 성도의 삶이 아닙니다.  우리의 발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이 돼야지 결코 남을 해롭게 하는 말을 퍼트리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말이란 중요합니다.  하루를 시작할 때 만남 속에서 한 마디의 따뜻한 말이나 칭찬, 격려 또는 남을 유쾌하게 하는 말을 듣고 시작하면 참으로 좋지만 하루를 시작하면서 남을 헐뜯는 말이나 부정적인 얘기를 하면서 혹은 들으면서 시작하면 참 어둡고 무거운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서 4장 6절에서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르게 함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여기서 주목하게 된 단어는 “고르게”입니다.  항상 은혜 가운데서 말해야 하는데 참으로 실천하기가 쉽지 않고 더 나아가서 고르게 하는 것은 참으로 은혜와 더불어 지혜가 필요함을 느낍니다. 

다섯 번째 계명은, 벗에게 행악치 말라는 말씀입니다.

 

성경 시편 15편 3절 중반절을 보십시오: “… 그 벗에게 행악치 아니하며 ….”  이 명령은 위에서 나눈 세 번째 계명인 “공의를 일삼으라”는 말씀과 대조를 이룹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을 행해야지 그 벗에게 행악해서는 아니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그 이웃을 해아지 않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가 우리 벗에게 어떠한 행악을 범할 수 있습니까?  한 예로, 우리 벗이 죄를 범했을지라도 그것을 책임지고 자복할 때에, 공의를 일삼는 사람은 그를 용서하고 용납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회개한 심령을 하나님께서 옳게 보시고 자기와의 교통을 허락하시기 때문입니다(눅18:13, 14) (박윤선).  그러나 그 벗에게 행악하는 자는 이미 회개한 심령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옳게 보심에도 불구하고 그를 자기는 옳게 보지 않고 오히려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와의 교제를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벗에게 행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기 위해서는 우리 벗에게 행악치 말아야 합니다.

 

여섯 번째 계명은, 그 이웃을 훼방치 말라는 말씀입니다.

 

성경 시편 15편 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성경 야고보서 3장 9-11절을 보면 혀의 목적은 하나님을 찬송하며 감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사람을 해하면 혀의 목적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특히 사도 야고보는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4절).  그는 이러한 지혜는 세상 적이요 정욕 적이요 마귀 적이다(15절)라로 말하면서 그 결과는 요란과 악한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6절).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기 위해서 우리 이웃을 훼방치 않고 오히려 이웃에게 정직하게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음에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일곱 번째 계명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라는 말씀입니다.

 

성경 시편 15편 4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그 눈이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  여기서 “망령된 자”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로서 우리는 그런 악한 자에게 환심을 얻으려고 존경할 필요가 없습니다(박윤선, 칼빈).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우리가 존대해야 합니다.  성경 시편 25편14절을 보면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사람들로서 우리는 그들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경외하는 자와 함께 하십니다(103:13, 17).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멸시하는 자를 멸시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존대하므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해야 합니다.

 

여덟 번째 계명은, 서원한 것을 갚으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 15편 4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하나님은 그의 앞에서 작정한 것을 실행하는 자를 기뻐하십니다(박윤선).  여기서 “서원한 것이란 하나님의 진리와 선에 대하여 서원한 것을 말합니다.  성경 전도서 5장4절을 보면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 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원을 함부로 해서는 아니 됩니다.  만일 우리가 서원을 했다면 우리는 그 서원을 기필코 갚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할 수 있습니다.

아홉 번째 계명은, 변리로 대금치 말라는 말씀입니다.

 

성경 시편 15편 5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  옛날 유대 율법에, 농부들에게 변리로 대금함을 금한 것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일 가운데 하나였다고 합니다(레25:35-38).  그래서 히브리법에서는 동료 히브리인들에게는 변리 대금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 목적은 가난한 자의 고통을 줄이려고 한 것입니다.  이 율법을 무시하는 자는 돈만 아는 자 입니다(박윤선).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기 위해서는 이웃 사랑 함에 있어서 변리로 대금치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 열 번째 계명은,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성경 시편 15편 5절 중반절을 보십시오: “…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아니하는 자니 ….”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명하고 있습니다: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을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출23:8).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기 위해서는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아면 아니 됩니다.

 

성경 시편 15편 5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기 위한 십계명을 충실히 잘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않는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위에 십계명을 충실히 지켜 행하므로 우리의 신앙 삶이 요동함이 없이 견고히 서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거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요동치 아니하고 믿음의 반석 위에 견고히 서 있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