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 기도의 과정

 

 

 

[시편 13]

 

 

          A. W. 토저 목사님의 "이것이 성공이다"란 책을 보면 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존중해야 한다.  그들의 현재의 모습을 보면 존경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어린양의 보혈과 성령님의 새롭게 하시는 능력을 통해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 그들을 존중해야 한다."  사람들이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본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변화되어가고 있지 않으면 볼 수가 없습니다.  상대방이 변화되길 바라면서 '왜 저 사람은 저렇게 변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내 자신이 변화되어 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 내 자신이 변화받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은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가 접한 상황이 변하기 전에 우리 자신이 변화 받는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기도하기 전과 기도한 후가 달라야 합니다.  예를 들어, 기도하기 전에는 평화가 없었고 미움이 가득 찼었고 불안과 근심에 쌓여있었을지 모르지만 기도 후에는 마음에 평화와 사랑과 확신으로 가득 차는 역사를 경험해야 합니다.


       오늘 성경 시편 13편을 보면 시편 기자 다윗은 기도하기 전과 기도한 후가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기도하기 전과 기도하는 중과 기도한 후가 어떠하였는지 그의 기도의 과정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누리길 원합니다.


       첫째로, 다윗의 기도하기 전은 "어느 때까지니이까?"(How long?)였습니다.  

 

성경 시편 13편 1-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시편 기자 다윗은 하나님께서 부르짖으면서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네 번이나 말하였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원수"(4절)로 말미암아 지치고 지칠 정도로 역경에 처하여 심령이 심히 우울한 가운데서 하나님께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호소하였습니다(박윤선).  이러한 탄식은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친구들 전도함에 있어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 가끔 안타까움 속에서 '주님,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호소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오랜 역경 앞에서 인내의 한계와 나의 능력의 한계를 느낄 때 "어느 때까지니이까?"하고 탄식의 기도를 드려 보신 적이 없으신지요? 신앙생활 하면서 우리는 다윗처럼 심령이 우울해 질 때기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엘리야도 로뎀나무 아래에서 우울해서 죽기를 구했었습니다. 우리도 우울해서 어찌할 바를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때에 낙망하기보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는 더욱더 무릎을 끓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낮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체험하는 때로 있지만, 밤과 같이 영적으로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음이 역시 은혜이다." 맞습니다.  영적으로 갑갑하고 안타까움을 느끼기에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탄식하면서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윗이 영적으로 갑갑하고 안타까움을 느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를 영영히 잊으셨다는 느낌과 주님께서 그의 얼굴을 자신에게서 숨기고 계시다는 느낌 때문이었습니다(1절).  그가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였다고 말하였는데(2절) 여기서 "경영하고"란 말은 "고통으로 인하여 이 생각 저 생각하면서, 염려 가운데 있음을 의미"합니다(박윤선).  즉, 다윗의 영혼은 고통으로 인하여 이 생각 저 생각하면서 염려가운데 있었으므로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고통으로 인하여 이 생각 저 생각... 염려하는 가운데 불안해하고 근심 가운데 있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박윤선 박사님은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 "사람이 마음 고통을 신앙으로 당하면, 바로 깨닫는 것도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로 받게 된다.  그러나 은혜의 하나님을 떠난 염려, 곧, 불신앙적인 마음고생은 해롭다." 우리는 더 이상 불신앙적인 마음고생, 해롭고 유익하지 못한 이러한 염려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 겸손히 무릎을 꿇고 주님께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불신앙의 탄식이 아닌 신앙의 탄식을 해야 합니다.


       둘째로, 다윗의 기도하는 중은 그는 '두려움' 가운데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성경 시편 13편 3-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하오며 두렵건 데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니이다.”  여기서 "사망의 잠"은, "하나님 은혜에서 떨어진 영적 죽음"을 가리킵니다(박윤선).  원수로 말미암아 역경 속에서 심령이 지치고 우울함이 깊어지면 길어질수록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도우심을 못 받으면 점점 영안이 어두워질 위험이 있고 그러다보면 영적 사망에 빠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박윤선).  다윗은 이런 영적 죽음을 경계하는 세상 근심이 아닌 신령한 근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원수가 승리할까 두려워했기에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는 자기의 원수를 하나님의 원수로 생각하였기에 그 원수를 이기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원수를 이기기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원수가 이기므로 자기가 요동되어 그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두려워하므로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즉, 다윗은 요동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그는 "여호와여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3절).  여기서 "생각하사"란 단어의 직역은 "보아 주소서"입니다(박윤선).  다윗은 자기의 영안이 열려 하나님을 보기를 원하기보다 하나님이 자기를 보아 주시길 더욱더 원했습니다.  그 다음에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영안을 열어주시므로 하나님을 보길 원했습니다.  

 

토저 목사님의 친구는 이러한 말을 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작은 하나님을 보는 것보다 적은 사람들이 모여서 크신 하나님을 보는 것이 더 낮다."  귀한 말입니다.  우리는 예배 가운데 크신 하나님을 보고 느껴야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기도 중에 크신 하나님을 보고 느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눈에는 다른 것들(역경, 어려움, 문제 등등)이 작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다른 것들이 자꾸 크게 보이는 불 신앙적 탄식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면 크신 하나님은 작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처럼 두려움 가운데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중에 크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기도 후 우리에게는 변화가 일을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로, 기도한 후에 다윗에게는 변화가 있었습니다.

 

어떠한 변화가 있었습니까?  우리는 다윗에게서 한 3가지 변화를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1)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습니다.

 

성경 시편 13편 5절을 보십시오: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다윗은 기도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잊은 것 같이 느끼고 그의 얼굴을 가리우시는 것 같았지만 기도 중에 인자하신 하나님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기도 후 그 인자하신 하나님을 계속 의지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2) 다윗은 주님의 구원을 기뻐하였습니다.

 

성경 시편 13편 5절을 다시 보십시오: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기도하기 전 지치고 심령이 우울했던 다윗은 기도 후에 주님의 구원을 기뻐하였습니다.  이것은 구원의 확신으로 말미암아 온 기쁨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기도하는 가운데 구원자이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3) 다윗은 하나님을 찬송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성경 시편 13편 6절을 보십시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다윗이 하나님을 찬송하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후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후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주님의 후대하심을 기도 중에 믿음으로 경험할 때에 우리는 오히려 역경 속에서도 바울과 실라처럼 감옥에서도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습니다(행16:25).


       기도는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겐 큰 특권이요 축복입니다.  지속되는 역경과 어려움 속에서 지치고 우리의 심령이 우울해 질 때에라도 오히려 우리는 신앙적 탄식으로 '주님여, 어느 때까지리이까"라고 호소하면서 영적으로 안타까움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으니 이 얼마나 귀한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우리가 두려움 가운데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중에 크신 하나님, 위대하신 하나님, 인자하신 하나님, 구원자 하나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을 경험할 때 우리는 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 후에 변화된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더욱더 의지하며 그의 구원을 확신하며 기뻐하므로 그의 후대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시 150:6).

 

 


기도의 사람 야고보(James)가 되고 싶은,

 


제임스 목사 나눔
(말씀과 기도에 힘쓰길 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