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

 

 

 

[시편 11]

 

 

금년 2005년을 뒤돌아 볼 때 생각나는 것 중에 하나는 미국 뉴올리언스에 몰아닥쳤던 허리케인 카트리나입니다. 이 허리케인으로 인해 약 100만 명의 뉴올리언스 사람들이 타주로 이주했어야 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Black Exodus"(흑인들의 출애굽)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왜 이러한 큰 재앙이 뉴올리언스에 임하였는가하면 많은 여론은 제방을 제대로 든든하게 쌓아놓지 못해서 그렇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두 가지 좀 놀라운 사실은 첫째로, 2005년 초에 미 육군이 뉴올리언스 제방 보수비를 3,700만 달러를 요청했는데 정부에서는 390만 달러로 삭감했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뉴올리언스 제방위원회는 제방 관리할 돈으로 카지노를 사들이는 등 방만한 경영을 했다고 합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투자해야 할 때 투자를 못했고 또한 투자한 돈도 제대로 쓰여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 허리케인으로 인해 폰파트레인이라는 호수의 제방 두 군데가 붕괴되면서 뉴올리언스 도시의 대부분의 지역에 물난리가 일어난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터를 잘 쌓아놓았는가 생각해 봅니다. 터를 견고히 쌓아 놓은 마음과 가정과 교회는 어떠한 카트리나 허리케인과 같은 죄악의 물결이 폭풍처럼 몰아쳐도 요동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과 가정과 교회를 지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터를 제대로 쌓는데 투자하지 않고 또한 투자한다 해도 나 자신의 마음과 가정과 교회의 터를 쌓는데 사용하지 않고 다른데 사용한다면 죄악의 물결이 몰아칠 때에 무너지고 부서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의 터와 가정의 터와 교회의 터를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오늘 성경 시편 11편 3절을 보면 시편 기자 다윗은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터"란 단어는 원어 히브리어를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그 터들"입니다. 이것은 "공의와 진실"을 의미합니다(J. Ridderbos). 즉, 다윗이 사울에게 핍박을 받고 있었을 당시에 공의와 진실의 터는 무너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는 어떠합니까? 별 다를 바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공의와 진실의 터가 무너진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한 2 가지로 오늘 본문에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공의와 진실의 터가 무너진 시대에 우리는 더욱더 하나님의 의지해야 합니다.

 

성경 시편 11편 1절을 보십시오: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더러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고.” 이 말씀을 보면 시편 기자 다윗은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다윗은 사울과 그의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으면서 공의와 진실을 발견할 수 없는 시대와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그가 이렇게 고난과 핍박 가운데서 주님을 의지하므로 말미암아 그는 그 와중에서도 하나님으로 인하여 안전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박윤선). 그러나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다윗의 친구들의 제안입니다. 그들은 다윗에게 "새 같이 ... 산으로 도망하라"고 충고했습니다(1절). 그 이유는 "악인 활을 당기고 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데서 쏘려하"(2절)였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설득력 있게 들리는 충고입니다. 악인이 의인인 다윗을 해하려고 하였기 다윗의 친구들은 다윗에게 마치 참새가 산 수풀 속으로 도망가듯이 산으로 도망하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친구들의 설득력 있게 들리는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주님께 피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다윗은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다윗처럼 위험해 처해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 할 것인가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께 피하여 그에게서 안전감을 얻을 것인가 아니면 산으로 도망가라는 친구들의 충고를 듣고 주님 외에 다른 사람이던 것을 의지하여 거기서 안전감을 누릴 것인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대답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외에 다른 사람이던 혹은 다른 것을 의지한다면 진정한 안전감은 없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 외에 다른 사람/것을 의지하면 순간적인 안전감을 있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오직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평안과 안전감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직 주님께 피해야 합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산성이시요 피할 분이십니다. 특히 공의와 진실의 터가 무너진 이 시대에 우리는 공의로우신 하나님, 진실의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말미암아 참된 보호와 안전감을 누려야 합니다.

 

마지막 둘째로, 공의와 진실의 터가 무너진 시대에 우리는 의의 길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

 

왜 우리는 의의 길을 걸어야 합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 시편 11편 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 뵈오리로다.” 의롭다함을 얻는 우리도 의로운 일을 좋아하므로 신실하게 의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특히 위급하면 위급할수록 우리는 더욱더 의의 길을 사수해야 합니다(박윤선). 참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가까왔습니다. 어두움이 극심하고 죄악이 관영한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두움의 세력들은 "마음이 바른 자"(2절)를 유혹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의의 길에서 떠나 죄악 된 길을 걷게 하려고 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정직한 자"(7절)로서 의의 길을 신실하게 끝까지 걷는다는 것은 큰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공의와 진실의 터가 무너진 시대에서 마음을 바르게 하고 의로운 길을 좋아하며 그 길을 걷는다는 것은 큰 도전입니다.

 

우리는 동서남북을 보아도 넓은 악의 길들이 너무나 잘 보이고 잘 들리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좁고 힘든 의의 길을 홀로 걷는다는 것은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 길은 외로운 길이요 주님이 걸어가신 길입니다. 다윗이 이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의지하였던 주님께서 의인과 악인 모두를 다 보고 계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4-7절). 특히 악인을 깊이 찌르듯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4절 - "통촉하시고") "악인과 강포함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5절)는 것을 다윗은 알았기에 주님의 때에 그들을 심판하실 것 또한 알았습니다(6절). 그러한 가운데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의인을 "감찰"(5절)하신다는 사실 또한 믿었습니다. 여기서 "감찰"이란 단어는 "시험"(test)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도와주시기 전에 먼저를 그를 시험하신다는 말입니다. 과연 마음이 바른지(2절), 정직한 자인지(7절) 하나님은 의인을 시험하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지 그를 시험을 하신 후 통과하면 그를 도와주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했고 마음이 바른 자였으면 또한 정직한 자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는 공의와 진실이 무너진 시대입니다. 자칭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 자신을 보아도 우리 마음의 공의와 진실의 터가 너무나 많이 무너져 있습니다. 우리 가정의 터도 무너져 가고 우리 교회의 터도 무너져 가는 듯 해 보입니다. 과연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우리는 더욱더 하나님을 의지하며 우리 마음과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의 공의와 진실의 터를 더욱더 굳세게 세워야 합니다. 참으로 그 터가 굳세게 세워져 그 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우리 가정을 또한 우리 교회를 견고히 세워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어떠한 죄악의 허리케인과 같은 물결이 몰아친다고 하여도 우리는 안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계속 의의 길을 신실하게 걸어가야 합니다. 비록 악의 넓은 길들이 우리 주위에 너무 많이 보이고 들릴지라도 우리는 좁은 의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와 진실의 빛을 이 어두운 세상에 비춰야 합니다.

 

 

 

 

나와 우리의 가정과 교회 터가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마음으로,

 

 

 

제임스 목사 나눔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의의 길을 신실하게 걸어가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