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주님을 의지하라!

 

 

 

[시편 9]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낙망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갈망하게 합니다. 결국 낙망은 갈망으로, 또한 갈망은 하나님을 소망케 하므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케 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시편 42편 11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자기의 영혼에게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고 선포하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주님을 의지할 것을 다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이런 저런 일로 낙망을 할지라도 성령 하나님께서는 그 낙망을 돌이켜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변화시켜 주시사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하나님을 의지케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시편 9편 10절에서 시편 기자 다윗은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주님을 의지하는 자는 어떻게 행동하는지 오늘 성경 시편 9편 말씀 중심으로 한 3가지로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주님을 의지하는 자는 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주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성경 시편 9편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시편 기자 다윗이 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주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원수들과 그들의 나라들을 패전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윗이 감사하고 기뻐하며 즐거워했던 것은 자기의 원수들이 패망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위대하심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박윤선).

 

과연 나는 무엇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뻐하며 즐거워하는가 자문해 봅니다. 과연 나는 다윗처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나타나므로 전심으로 감사하며 주님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보다 하나님의 행하심 때문에 감사하며 주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봅니다. 그리할 때 저는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을 의지하는 근거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이기보다 그의 행하심이기 때문입니다. 어찌 제가 하나님의 행하심을 다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하나님의 행하심에 근거하여 주님을 의지한다면 제 명철로 이해하지 못하는 그의 행하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의지하기보다 주님 외에 다른 것들을 의지하는 죄를 범할 때가 수 없이 많습니다.

 

진정으로 주님만을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나타나므로 전심으로 감사하며 즐거워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4절)을 깨닫고 경험하였기에 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즐거워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통하여 그의 공의가 들어났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기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신 주님께서 "보좌에 앉으사"(4절) 악인을 책망하시고, 멸하시고, "영영히 도말"(5, 6절)하신 과거의 사건을 회상하면서 현재 고난과 핍박 가운데서 주님께 감사하며 그를 기뻐하며 즐거워하였습니다. 우리도 현재의 고난과 역경 속에서 과거를 뒤돌아보면서 경험했던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회상하므로 하나님께 전심으로 감사하며 그를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자세로 현재의 고난과 역경을 접해야 합니다.

 

둘째로, 주님을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을 자기의 "산성"으로 삼습니다.

 

성경 시편 8편 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는 또 압제를 당하는 자의 산성이시요 환난 때의 산성이시로다.” 시편 기자 다윗은 "사망의 문"과 같은 상황에 처해있을 때, 미워하는 자에게 고난을 당하고 있었을 때(13절) 과거에 경험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즉 그의 공의로우심을 회상하면서 주님께 전심으로 감사하며 그를 기뻐하고 즐거워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 죽음에 가까운 상황에서 주님을 자기의 산성으로 삼았습니다. 오늘 본문 9절에서 주님이 "환난 때에 산성이시로다"라고 다윗은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환난"이란 단어는 "삐체로"라는 어원에서 왔으며 그 의미는 "끊어졌다"입니다(박윤선). 즉, 다윗은 모든 소망이 다 끊어진 상황에서 주님을 자기의 산성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귀한 신앙입니까? 죽음의 문에 이르러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므로 그를 자기의 산성으로 삼아 피하는 다윗의 모습, 참으로 귀한 신앙의 표현입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이 세상의 모든 소망이 다 끊어져 소망이 없어 보일 때 주님을 우리의 산성으로 삼고 그 주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 주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10절). 또한 우리 주님은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요(12절), 우리의 곤고를 보시는 긍휼이 풍성하신 주님이시기에(13절) 우리는 그 주님을 우리의 산성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는 우리를 잊지 아니하시고, 아니 잊을 수도 없으시고, 우리를 영영히 실망치 않게 하시는 주님이시기에(18절) 우리는 그 주님을 꼭 우리의 산성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환난 때에 그에게 피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의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마지막 셋째로, 주님을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성경 시편 9편 2, 11, 14절을 보십시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 너희는 시온에 거하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찌어다 …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같은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시편 기자 다윗은 자기의 산성이 되시는 주님께서 자기를 의지하고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긍휼히 여기사 사망의 문에서 건져 주시고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을 믿음으로 소망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찬양 드릴 것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사망의 문(13절)에서 시온의 문(14절)으로 인도해 주실 줄을 믿었던 다윗은 그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구약에 나오는 다윗의 찬양은 저로 하여금 신약 성경 사도행전 16장 25절에 나오는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양한 말씀을 기억케 하였습니다: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그리했을 때에 바울과 실라는 그 감옥에서 구원(건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어떠한 역경과 어려움 속에서도 이렇게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어려운 일 당할 때 나의 믿음 적으나 의지하는 내 주를 더욱 의지합니다. 세월 지나 갈수록 의지할 것뿐일세 아무 일을 만나도 예수 의지 합니다"(찬송가 342장 1절과 후렴).

 

주님의 이름을 아는 성도는 주님의 의지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의지하는 자는 과거를 뒤돌아보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경험한 일을 묵상하는 가운데 현재 고통과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께 전심으로 감사하며 주님을 기뻐하여 즐거워하는 자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그는 주님을 자기의 산성으로 삼고 그에게 피합니다. 특히 세상의 모든 소망이 끊어졌을 때에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찬송가 539장)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입니다. 그리할 때 찬양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그의 영광과 능력을 들어내실 것입니다.

 

 

 

주님을 나의 산성으로 삼은,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세월 지나 갈수록 의지할 분이 오직 주님 한분이심을 고백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