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시편 5]

 

 

언젠가 장인, 장모님을 모시고 저희 집 아이들과 함께 조카의 생일 축하 식사를 하는 식당으로 운전하고 간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저는 그 식당으로 가는 지리를 잘 몰라서 컴퓨터 인터넷으로 방향(direction)을 받아서 운전해서 약속한 식당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즐거운 식사 시간을 함께 보내 후 저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제가 길을 잃은 이유는 왔었던 길로 다시 거꾸로 가면 되었을 텐데 저는 그러지 않고 다른 길로 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 제가 다른 길로 간 이유는 제 생각엔 다른 길로 가도 분명히 저희 집으로 가는 고속도로가 나올 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 길을 잃고 헤매는 저를 보시면서 장인 어르신은 좀 걱정을 하셨습니다. 그 때 저는 장인 어르신에게 ‘저를 신뢰하지 않으십니까?  저를 믿으세요, 아버님.  이 길로 가도 분명히 집으로 가는 고속도로는 나옵니다’라고 장담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선택한 다른 길로 운전하고 가다가 길을 잃어버려서 결국에는 집에서 반대 방향으로 많이 갔었습니다. 결국 저는 제 마음 속으로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근처 주유소에 내려서 길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리고 주유소에서 일하는 사람이 가르쳐준 대로 하여 우리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제가 얻은 교훈은 확신을 갖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잘못된 사실에 근거한 확신은 위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사실에 근거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제 추측에 근거하여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를 비행기 안에서 내려 보면 바둑판과 같습니다. 길들이 거의 다 똑바로 된 길들이 잘 나열 돼 있습니다. 그리고 구부러진(curve) 길은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로스앤젤레스에서는 길을 찾기가 좀 쉬운 편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택했던 그 다른 길이 분명히 똑바로 돼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그 길은 좀 구부러진 길이였던 것 같습니다.  제가 운전하면서 보기에는 그 길이 똑바른 길인 줄 알았는데 아마도 그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신앙의 길 또한 항상 똑바른 길만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신앙의 길에도 구부러진 길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똑바른 길을 걸어야 하는데 구부러진 길이 똑바른 길인 줄 확신하고 그냥 무턱대고 그 잘못된 사실에 근거하여 확신을 가지고 그 길을 택해서 걸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좋지 않은 선택의 결과를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똑바른 길을 선택하여 똑바로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똑바른 길은 어떠한 길입니까? 

 

       성경 시편 5편 8절 말씀을 보면 시편 기자 다윗은 하나님께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구부러진 길도 많이 보이고 유혹하는 길들도 많이 있었을 텐데 다윗은 하나님께 주님의 길을 똑바로 걷기를 기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주님의 길을 똑바로 걸었습니다. 저는 성경 시편 5편 말씀 중심으로 주님의 길을 똑바로 걷는 삶은 어떠한 삶인가 한 3 가지로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주님의 길을 똑바로 걷는 삶은 기도의 삶입니다.

 

성경 시편 5편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사를 통촉하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요즘 저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면서 기도를 제대로 하지 못하므로 주님의 길을 똑바로 걷지 못하고 있는 제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들춰내 주시고 계심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저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제 자신을 모습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일관성이 없는 우왕좌왕하는 목회 사역, 그 이유는 제 기도의 삶에 문제가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저로 하여금 기도케 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저로 하여금 회개케 하시면서 더 이상 우왕좌왕하면서 길을 걷는 게 아니라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의 뜻을 깨달아 주님의 길을 똑바로 걷게 하시고 계십니다.  주님의 길을 똑바로 걷는 자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칠 수 있는 위험 속에서 자기의 “심사”[“하나님께 집중된 생각 혹은 바친 마음”(박윤선)]를 하나님께 아룁니다(1절).  다시 말하면, 그는 자기의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 간구합니다.  시편 기자는 특히 자기 마음을 “아침에”(3절) 쏟아 기도한 후 그 기도가 응답되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3절).  스펄전 목사님은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기도는 그날의 생활을 여는 열쇠이고, 그 날의 생활을 닫는 자물쇠여야 한다”(박윤선).  즉, 우리는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 아침에 일찍 일어나 하나님께 “주님, 주님의 길을 오늘도 똑바로 걷게 하소서”라고 기도한 후 그 주님의 길을 신실하게 걷다가 밤에 하루 일과를 마치면서 잠에 들기 전에 우리는 하루를 뒤돌아보면서 주님의 길을 똑바로 걷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유익한 하루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루로 인하여 달콤한 잠을 잘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 생활의 열쇠와 자물쇠가 되어야 할 기도를 우리가 하지 아니할 때 우리는 죄악에 노출이 되어 주님과 함께 유하기보다(dwell) 악이 우리와 함께 유할 위험이 클 것입니다(4절).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며 기도로 하루를 마치는 좋은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둘째로, 주님의 길을 똑바로 걷는 삶은 경배의 삶입니다.

 

성경 시편 5편 7절 말씀을 보십시오: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 시편 기자 다윗은 경배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는 그의 주위에 셀 수 없는 “오만한 자”들(5절), 주님이 미워하시는 “행악 자”들(5절), 주님이 멸하실 “거짓말 하는 자”들 (6절), 그리고 주님이 싫어하시는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들(6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경배를 드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다들 구부러진 길을 걷고 있는데 어떻게 다윗은 주님의 길을 똑바로 걸을 수 있었을까요? 우리 주위에도 주님의 길을 똑바로 걷기보다 구부러진 길을 걷던지 아니면 주님의 길을 삐뚤삐뚤 걷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윗은 자기가 맞이한 상황을 초월하여 주님의 길을 똑바로 걸을 수 있었는가 생각해 볼 때에 저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1) 첫 번째 이유는 다윗은 주님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으므로주님의 길을 똑바로 걸을 수 있었습니다(7)

 

그는 이 모든 극악한 자들의 행동을 보고 자기 자신이 가고자 하는 선한 길을 가기 위해선 “자기의 힘을 믿지 못하고 다만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박윤선).  많은 극악한 자들, 많은 핍박과 역경들, 많은 고통과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께 경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었기 때문입니다. 

 

(2) 두 번째 이유는 다윗은 주님을 경외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어려운 상황을 초월하여 온전히 “나의 왕, 나의 하나님”께(2절) 경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악을 미워하는 자이기에 구부러진 길을 택하기보다 주님의 길을 택하여 똑바로 걷습니다.

 

많고 많은 극악한 자들의 대적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긍휼로 말미암아 하나님만 바라보며 그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었던 다윗, 그는 기도하는 자였기에 그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많은 역경과 어려움, 아픔과 상처 속에서라도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어려운 환경에 치우쳐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찬양과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기도의 삶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경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주님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지도 못하고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도 없기에 많은 어려움과 많은 유혹 가운데서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 예배를 위하여 월요일부터 기도로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일 “주의 집에 들어가”(7절) 하나님을 경배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이 바로 주님의 길을 똑 바로 걷는 삶입니다.

      

마지막 셋째로, 주님의 길을 똑바로 걷는 삶은 기쁨의 삶입니다.

 

성경 시편 5편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과연 기쁨이란 무엇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느끼고 경험해야 할 기쁨인 무엇인가 생각해 볼 때에 저는 예수님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성경에 ‘예수님이 기뻐하시더라’라는 말씀이 있는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제 짧은 지식으로는 그러한 말씀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생각난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성령님이 그에게 강림하셨을 때 하늘로서 난 소리, 즉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란 말씀이 생각났습니다(눅3:22).  왜 하나님 아버지는 독생자 예수님을 기뻐하셨는가 생각해 볼 때에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베들레헴에서 골고다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순종하셨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삶인 베들레헴에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과연 그는 ‘기뻐하셨다’라는 말씀이 성경에 쓰여 있는가 또 다시 질문해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비참한 삶, 불쌍한 삶, 슬픔의 삶 … 그러나 저는 하나님 아버지 보시기엔 예수님의 기쁨의 삶을 사셨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우리의 삶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기쁨’은 없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해야 할 진정한 기쁨이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입니다.  그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은 또한 성자 예수님의 기쁨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길을 똑바로 걷는 기도의 삶과 하나님을 경배하는 삶을 바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을 맛보면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기쁨은 주님의 길을 똑바로 걷고 있는 모든 성도들의 기쁨이요(“다 기뻐하며”) 또한 영원한 기쁨(“영영히 기뻐 외치며”)입니다(11절).  이 기쁨의 대상은 오직 “주님” 한분이십니다(“주를 즐거워하리로다”)(11절).  주님 한분으로만 기쁨으로 삼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어느 누가 자기들을 이해할 수 없다 할지라도 자신들을 향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주님 한분으로 기뻐하는 가운데 주님의 길을 똑바로, 신실하게, 그리고 끝까지 걸어갈 것입니다.

 

       언젠가 수요기도회 때 저는 저희 구역 특송을 하려고 본당 앞으로 나아갔을 때 저희 집 막내 딸 예은이가 좀 늦게 앞으로 뛰어 나와 제 아내의 손을 잡으려고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이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의 길을 똑바로 걷길 원하면 주님의 손을 꼭 잡아야 하겠다.  아니 주님께서 내 손을 꼭 붙잡아 주셔야 주님의 길을 똑 바로 걸을 수 있겠다.’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꼭 잡아 주셔서 많은 풍파와 역경과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주님 부르시는 그 날까지 주님의 길을 신실하게 똑바로 걸어갈 수가 있습니다. 기도의 길이요, 경배의 길이요 기쁨의 길인 주님의 길,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똑바로 오늘도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외로운 광야를 고독의 동산으로 만들어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손을 듣고 찬송가 470장을 부른 후 하나님께 간절히 참석한 성도님들과 부르짖은 후 마음에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의 평강을 경험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