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나의 머리를 드시는 하나님

 

 

 

[시편 3]

 

 

여러분, “고개 숙인 남자”란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이사를 갔는데 남편은 트럭에 어디에 앉아갈까?”라는 질문에 두 선택이 있다고 합니다: (1) “운전수 옆에 조수석”과 (2) “뒤쪽의 짐칸.”  “뒤쪽의 짐칸”이란 대답의 이유는 (1) “짐을 보호하기 위해”, (2) “가족을 태우느라 자리가 없어서”, (3) “돈을 아끼려고”, 그리고 (4) 재미삼아”가 있습니다.  무엇인줄 아십니까?  위에 1~4번엔 대답이 없고 정답은 “제발 버리지 말고 데려가 달라”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하.  한 쪽으로는 웃기는 대답이지만 다른 한쪽으로 보면 안타까운 한국의 현실이라 생각합니다. 조기퇴직으로 고개 숙인 한국 남자들, “실직 증후군”이라고 해서 “나는 인생의 낙오자가 됐다”는 생각 및 “’나’ 하나만을 믿고 살아온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을 대할 수 없다”는 증상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상실감, 배신감, 패배감 그리고 좌절감 등으로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인터넷).  저는 이 “고개 숙인 남자”들에 대하여 한국 한 인터넷 웹 사이트에서 기사를 읽고 ‘고개 숙인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고개 숙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충분히 ‘상실감,’ ‘배신감,’ ‘패배감’ 및 ‘좌절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고개 숙이게 만드는 ‘감’은 바로 “죄책감”입니다: “나의 죄 때문에 내 자식이 이렇게 되었구나,” “나의 죄 때문에 내 가정이 이 모양 이 꼴이구나” 등등. 우리 자신의 마음에 들리는 이러한 음성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상실감과 패배감, 좌절감, 특히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 시편 3편 말씀에 나오는 시편 기자인 다윗도 충분히 고개를 숙일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윗은 자기의 충실한 군인 우리아를 죽이고 밧세바를 빼앗아 자기 아내로 삼은 죄로 말미암아 자신의 아들인 압살롬에게 도망 다니는 신세로 전락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충분히 있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시편 3편은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 지은 시”입니다).  ‘나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이 모양 이 꼴이구나,’ ‘가장으로서 내가 책임을 다 못하여 우리 집이 이렇게 되었구나’ 등등 다윗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볼 때 그는 충분히 고개를 숙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오늘 성경 시편 3편 3절 하 반절 말씀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은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하나님)”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우리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는 다윗의 고백입니까?  저는 오늘 “나의 머리를 드시는 하나님”이란 제목 아래 오늘 성경 시편 3편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은혜를 겸손히 받길 원합니다.

 
첫째로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많아지는 나의 대적’”(Increase of my adversaries) 입니다.

 

성경 시편 3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이 말씀을 보면 다윗은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나를 치는 자가” 많고(1절) 또한 “많은 사람이 있어” 자기에게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2절).  여기 시편 3편 1-2절 말씀에서 ‘많다’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나옵니다.  이 단어가 이렇게 세 번이나 반복되는 것을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대적들은 점점 많아지면 많아졌지 적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면서’(1:1-2) “의인의 길”(6절)을 걸을 때에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자들이 우리를 대적할 것이며 그들의 세력은 점점 커질 것입니다(3:1-2).  그래서 시편 기자는 시편 2편2절에서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함께) 꾀”한다고 말한 것입니다(2:2).  이것을 우리가 어디서 확실하게 볼 수 있는가하면 “기름 받은 자”(2절)이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삶 속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기 전에 흥미로운 사실은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눅23:12).  예수님을 대적함에 있어서 원수지간이었던 헤롯과 빌라도가 친구가 되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를 대적함에 있어서도 세상 사람들은 친구가 되어 함께 우리를 넘어트리고자 힘을 합치고 있습니다.  어느 면으로 보면 대적이 점점 많아진다는 것은 둘 중에 하나라 생각합니다: (1) 다윗처럼 내가 거룩하신 하나님께 지은 죄가 커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징계이던지, 아니면 (2) 의인의 길을 신실하게 걷고 있다는 증거.  믿는 자라도 넘어트리고자 우는 사자처럼 달려드는 우리의 대적들(참고: 벧전5:8), 이들이 우리에게 주고자하는 치명타는 무엇입니까?  바로 다윗에게 많은 대적들이 한말인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는 음성입니다(시3:2).  많은 대적들이 다윗의 영혼에게 한 말은 ‘하나님께서 너를 건져주지 않을 것이다, 그가 너를 구원해 주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이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을 넘어트리는데 아주 치명적인 사탄의 음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음성은 우리가 역경과 위기 가운데 지치고 쓰러질 때 아주 잘 들리는 음성입니다.  ‘봐라, 너가 지금 이러한 고통과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께서는 너는 도와주시지 않고 있잖냐’라는 식으로의 음성이 우리의 영혼에게 들릴 때 약화된 영력 속에서 너무나 잘 들리는 이 음성이 우리의 영혼을 낙망케 하며 불안케 하기에 충분합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믿음으로 이겨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찬송가 397장 후렴).

 

마지막 둘째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이 성장하는 믿음”(Increase of my faith) 입니다.

 

많아지는 나의 대적(Increase of my adversaries)은 나의 믿음이 성장하는(Increase of my faith)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성장하는 믿음은 어떠한 믿음인지 한 3 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성장하는 믿음은 “’그러나믿음또는 역행하는 믿음입니다

 

성경 시편 3편 3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이 말씀을 보면 한국어 성경에는 접속사가 없지만 원어 히브리어 성경이나 또한 영어 성경을 보면 “But”(그러나)이란 접속사가 있습니다.  즉, 시편 기자 다윗은 많아지는 대적들이 자기를 치려고 하고 그들이 자기에게 ‘하나님이 너를 건져주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그 말들에 동요되지 않고 오히려 자기의 신앙고백인 ‘하나님은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라고 담대히 고백하였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바로 ‘역행하는 믿음’입니다(박윤선).  “신앙은 역경과 역리를 오히려 즐”깁니다(박윤선). 우리는 세상의 죄악 된 물결을 역류해야 합니다.  마치 폭포수를 역류해서 올라간다는 한 물고기처럼 우리 또한 세상의 죄악의 폭포수를 역류해서 올라가야 합니다.  이 얼마나 큰 도전입니까?  그런데 시편기자 다윗은 지금 많은 대적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상황에서 그 대적들이 ‘하나님은 너를 도와주시지 않는다’ 음성을 역리하여 ‘하나님은 나의 보호해 주시고(“나의 방패시요”), 나에게 영광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며(“나의 영광이시요”) 더 나아가서 나에게 소망과 위로와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박윤선).  이 얼마나 놀라운 신앙고백입니까?  우리는 이러한 다윗의 “그러나” 믿음 또는 “역행하는 믿음”을 추구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 영혼에게 무슨 말을 할지라도, 아니 우리 자신이 우리 영혼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어떠한 말을 할지라도 우리는 바른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자들이 되야 합니다.  우리는 어느 누가 하나님에 대하여 거짓말을 할지라도 그 거짓말에 속지 말고 대항하여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저런 하나님이시다고 진리의 말씀을 고백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 영혼에게 선포하며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또는 우리 안에 침투해 있는 대적들과 싸워 승리해야 합니다.

 

(2) 성장하는 믿음은 기도하는 믿음입니다

 

성경 시편 3편 4, 7, 8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셀라) …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셀라).” 이 말씀을 보면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께 부르짖는 모습을 봅니다(예: 4절 –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  그는 대적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더욱더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기도한 것 같습니다.  특히 그는 과거의 기도 응답에 근거하여(7절) 기도 응답의 확신을 가지고 지금 자기가 당면한 역경과 위기에서의 하나님의 구원(건져주심)을 간구하였습니다.  비록 대적들은 ‘하나님께서 너를 구원해 주시지 않을 것이다’라고 계속 말하였지만 다윗은 그 음성에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은 나의 구원자’라는 사실을 믿고 자기 영혼에게 그 사실을 선포해 나아가면서 믿음으로 하나님께 구원을 위하여 간구하며 나아갔습니다.  다윗은 “여호와여 일어나소서”라고 간구하면서 자기의 일어나 많은 대적들을 어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였습니다(7절).  이 사실은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 귀한 교훈이란 우리가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무한함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간구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훈에 비춰볼 때에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무한함을 의지할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신앙은 결코 성장하는 믿음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아직도 인간의 한계를 모르고 자기 자신을 의지하여 대적들과 싸우려고 하는 신앙인은 그 싸움에 오래 버티지 못하고 패배감과 좌절감을 맛볼 수밖에 없습니다.  사탄은 자꾸만 우리 영혼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피곤하고 졸립지, 기도하지 말고 자라.  기도하지 않고도 너는 목회를 할 수 있다.  너 자신을 의지하고 마음 것 목회를 해라.  그러다가 안 되면 기도해도 늦지 않다.’  과연 사탄의 계략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탄의 계략은 ‘너 안에 무한한 능력이 있다.  너 자신을 의지하라. 너가 바로 하나님이다'라는 거짓말을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의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3) 성장하는 믿음은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성경 시편 3편 6절 말씀을 보십시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 이다.” 이 말씀을 보면 시편 기자 다윗은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 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대적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우리의 두려움도 더 많아지기 마련인데 다윗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장하는 믿음의 소유자의 반응입니다. 진정으로 성장 하는 믿음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은 대적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기도를 많이 하는 가운데 두려움이 적어집니다.  두려움은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윗처럼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선포하며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다윗이 그렇게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은 역행하는 믿음을 지지하는 기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때 사람을 향한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앞과 뒤를 보호하시는 방패가 되시는 하나님, 많은 대적들로 말미암아 오히려 더 큰 영광을 자기에게 나타내실 하나님, 그리고 좌절감과 낙망과 패배감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소망과 위로와 승리를 주시는 머리를 드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있었기에 그는 대적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는 누워 잠을 잤습니다(5절).  위기 속에 잠을 잘 수 있는 담대한 성도, 이 얼마나 놀라운 믿음입니까?  아 무리 바다 표면에 파도가 크게 칠지라도 바다가 깊으면 깊을수록 그 깊은 바다 밑에는 잔잔함이 있듯이 우리의 대적들이 아무리 날뛰고 우리를 공격해 올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믿는 믿음의 깊이가 있다면 우리는 잠잠히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 잠잠함이 바로 우리의 힘입니다[(사 30:15) “…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in quietness and trust is your strength)].

 

여러분, 세상은 우리의 머리를 고개 숙이게 만들려고 합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상실감과 배신감, 패배감과 좌절감 또한 죄책감을 맛보게 하므로 우리로 하여금 고개 숙인 그리스도인으로 만들려고 별의 별 시도를 다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많은 대적들을 보내고 있으며 또한 많은 고통과 역경으로 우리를 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 귀에 ‘하나님은 너를 건져주시지 않을꺼야’라고 말하므로 우리로 하여금 구원자 하나님을 의지하며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사단의 역사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우리의 믿음이 성장해야함을 깊이 인식하여 성장하는 믿음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 성장하는 믿음은 역행하는 믿음이요, 기도하는 믿음이요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바라기는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찬송가 397장 후렴)라고 찬양하면서 승리자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성장하는 믿음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나의 삶 가운데서 구원의 은총으로 함께 해 주신 임마누엘 주님께 감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