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악인의 길 vs. 의인의 길

 

 

 

[시편 2]

 

 

언젠가 기독교 서점에 갔었을 때 일입니다. 그 서점에서 노회 한 어르신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분이 저에게 '한국에서 계속 사역을 했으면 인기도 있고 했을텐데...'라고 말씀하셨습니다(2001-2003년도에 한국에서 공부 및 사역을 하였음). 그 때는 저는 좀 장난 끼로 돈 계산을 하려고 들고 있었던 "광야의 은혜"라는 책을 그 어르신 목사님에게 보여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한국의 도시 목회보다 미국 Los Angeles에서 광야 목회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광야의 은혜”란 책을 보면 이런 말이 적혀 있습니다: "배운다는 것은 변한다는 것이다. 네가 변하지 않았다면 너는 배운 것이 아니다. ... 네가 변하기 전까지는 지식은 네 것이 아니다." 참으로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말입니다. 광야와 같은 곳에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조금씩이나마 맛보고 있는 저는 특히 지금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맛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설교 준비하고 말씀 선포한 후 이렇게 다시 한 번 상고하면 정돈하여 글을 적어내려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다인가?”라는 질문을 던져 볼 때에 저는 “아니다”라는 대답 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진정한 배움에는 "변화"(transformation)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Hendricks). 그래서 저는 제 자신에게 이렇게 질문을 던져 봅니다: “과연 나는 말씀의 능력으로 어떠한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 것인가?” 저는 여러 변화 중에 주님께서 저를 말씀을 통하여 반석 위에 견고히 세우고 계시는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대로 주님의 세우시는 역사입니다(마16:18). 특히 저는 사역 속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주님께서 저로 하여금 주님의 몸 된 승리장로교회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더욱더 붙잡게 하심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아니, 주님께서는 그 약속의 말씀을 통하여 저를 꼭 붙잡고 계심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또 다른 변화는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여금 제 자신의 영혼에게 말하게 하는 훈련을 시키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훈련은 제가 오래 전에 읽었던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영적 침체"(Spiritual Depression)란 책을 읽은 후부터 주님께서 저를 훈련시키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책을 읽다가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시편 기자가 자기 영혼에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 (시42:5, 11; 43:5)고 선포하면서 나아갔다고 지적했을 때 저에게는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여금 제 자신의 영혼에게 말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종종 사역함에 있어서 힘들 때 제 자신의 영혼에게 주님의 약속인 "내가 ...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16:18)라는 말씀으로 하여금 말씀하게 하므로 성령님께서 저로 하여금 다시금 견고히 서서 힘 있게 사역을 감당케 하심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 저는 성경 시편 1편 말씀을 묵상한 후 교회 몇몇 성도님들에게 각자 자신에게 '매우 복되도다 (자기 이름을 넣어서)야!'라고 자신의 영혼에게 선포할 것을 도전하였습니다. 그 때 저는 "매우 복되도다 제임스야!"라고 제 자신의 영혼에게 선포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저로 하여금 악인의 길을 걷지 않게 하시고 의인의 길을 걷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께서는 저로 하여금 악인의 길을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케 하셨기 때문입니다(시1:1-2). 주님께서는 저로 하여금 신앙의 열매를 맛보며("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생명력 있는 신앙생활을 하면서("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모든 행사가 주님 안에서 다 형통하는 축복("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을 누리게 하고 계시기에 저는 제 자신의 영혼에게 “매우 복되도다 제임스야!”라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 시편 2편 말씀 중심으로 악인의 길과 의인의 길을 연이어 묵상하고자 합니다. 연이어라 함은 시편 기자는 시편 1편을 “복 있는 사람은"(How blessed is the man ...)이라는 말로 시작한 후 시편 2편 마지막 절인 12절 하반부에서도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How blessed are ...)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시편 기자는 시편 1편과 2편의 연관성을 짓고 있기에 우리는 시편 2편도 1편에 연이어 묵상해야 합니다. 그 말씀 묵상의 내용은 "악인의 길"(1:6)과 "의인의 길"(1:6)입니다.

 

먼저 악인의 길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악인의 길은 어떠한 길입니까? 3 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악인의 길은 분노의 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마치 풍선과 같습니다. 마치 풍선이 폭파하기 일보직전인 것처럼 이 세상 사람의 분노가 터질 것만 같습니다. 힘들고 바쁜 세상 삶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스트레스로 인하여 신경이 예민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분노를 쏟아낼 대상을 찾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미움과 질투와 시기로 말미암아 절제되지 않고 있는 마음의 분노에 더욱더 기름을 붙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저와 여러분은 우리를 대적하는 악인들의 분노를 좀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 이유는 비록 우리가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 살아가고 있으므로 이러한 현실을 피부로는 느낄 수는 없을지 모르겠지만 종교의 자유가 없는 선교지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자기 민족에서 선포하는 자를 감옥에 가두며 핍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시편 2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여기서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라는 말씀은 세상 사람들이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없애고자 "이를 갈며 떠들며 덤비는 태도"를 말합니다(박윤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들이 메시아에 대하여 미움을 품고 덤비는 것을 예언한 이 구약 말씀의 성취를 신약 공관복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뺨을 때리고 얼굴에 침을 뱉고 예수님을 때리며 핍박하는 세상 사람들, 그들은 분노로 가득차서 예수님을 어떻게 서든 죽이려고 이를 갈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분노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구원하시고자 오신 유대인들이였고, 특히 종교 지도자들이 그들의 배후 조종 인물 이였다는 사실입니다. 복을 마다하고 의인의 길을 걷지 아니하고 악인의 길(독사의 자식들의 길)을 걸었던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과 같이 예수님에게 분노했던 사람들은 놀랍게도 우리와 그렇게 멀리 느껴지는 인물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또한 악인의 첫 번째 길인 분노의 길을 걸을 수도 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분노,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꽹과리 치듯 떠드는 '기도'와 '찬양', 예수님을 삶에 없애고자 노력하는 이중인격적인 삶의 태도 등을 생각할 때 혹시 지금 우리는 이 악인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뒤돌아 봐야 합니다.

 

둘째로, 악인의 길은 허사를 경영하는 길입니다.

 

"광야의 은혜"란 책을 보면 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당신의 계획을 연필로 쓴 다음 하나님께 지우개를 드려라."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제 자신의 목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과연 나는 나의 목회 계획을 하나님께 맡기고 있는가? 아니면 나는 영적 완전 주의적 사고방식으로 목회를 하므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도록 양보(yielding)를 하지 않고 있지는 않는지? 그러므로 지금 나는 헛된 목회를 하고 있지는 않는가?’ 이것은 저의 목회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 적용되는 말이라 생각됩니다. 우리는 너무나 우리 계획대로 우리 개인의 삶이나 우리 가정의 삶, 또한 우리 직장과 사업의 삶을 살아드리고 있지는 않는지 우리 자신을 자아 성찰해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 자신과 가정과 사업과 교회를 세우시도록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께 양보를 하고 있는지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자문해 봐야 합니다.

 

성경 시편 2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이 말씀을 보면 세상 사람들이 허사를 경영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 사람들이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없애고자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그것은 허사뿐이라는 말입니다(박윤선).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삼일 만에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여 무덤에 넣었지만 그것이 허사였던 이유는 예수님은 삼일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7절 - "내가 너를 낳았도다"). 이렇게 예수님을 적대시하는 인간의 계획은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계획은 허사를 경영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출애굽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가시지 않으시면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지 않겠다고 말하였던 것입니다(출33:15).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는 계획은 헛된 계획일 뿐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악인의 길은 함께 꾀하는 길이요 대적하는 길입니다.

 

성경 시편 2편 2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이 말씀을 보면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자 세상 지도자들이 함께 꾀하여 대적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들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고자 하였습니다(3절). 즉,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자 한 악인들은 진리를 무거운 멍에를 여기므로 그 멍에를 벗어버리고자 진리를 거부하고 벗어버리고자 한 것입니다(박윤선). 이 말씀은 저로 하여금 다윗 왕을 죽이고자 했던 압살롬의 모사인 아히도벨을 생각나게 하였습니다. 만일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모사를 들었다면 그는 그의 아버지인 다윗 왕을 죽일 수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모사인 후새를 압살롬에게 보내사 후새의 꾀로 하여금 아히도벨의 꾀를 이기게 하셨습니다(삼하17:14). 그래서 결국에는 다윗 왕은 살고 압살롬이 죽습니다(18:14-15). 이 성경 이야기를 생각할 때 결국 세상의 군왕들이던 관원들이던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대적하여 함께 꾀하여 보았자 하나님 보시기엔 웃기는 일이요 하나님께서 비웃으십니다(시2:4).

 

저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 "기름 받은 자"(2절)는 물론 메시아 이신 예수님을 가리키지만 지금 현세에 목회자들을 가리킬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 사람들이 함께 꾀하여 목회자를 대적할 때에 하나님은 하늘에서 웃으시고 비웃고 계신다는 생각도 듭니다. 얼마나 교회 안에서 기름 받은 자를 함부로 대적하며 함께 꾀하여 '목회자 밀어내기'를 열심히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분을 발하며 진노하실 것(5절)을 왜 그들은 생각지 못하고 있는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영적으로 암흑의 시대입니다.

 

그러면 의인의 길은 어떠한 길입니까? 3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의인의 길은 회개의 길입니다.

 

성경 시편 2편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이 말씀에서 "...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 교훈을 받을지어다"하신 말씀은 회개를 권면하는 말입니다(박윤선). 즉, 참된 지혜와 교훈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분노의 길과 허사를 경영하는 길과 함께 꾀하며 대적하는 길에서 급속히 돌이켜 회개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의인의 길은 섬김의 길입니다.

성경 시편 2편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성경은 어떻게 섬기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경외함으로" 섬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떨며 즐거워하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후에도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저는 그저 제가 해야 할 일을 마땅히 한 것뿐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섬기는 자가 돼야 합니다(눅17:10).

 

마지막 셋째로, 의인의 길은 예배의 길입니다.

 

성경 시편 2편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이 말씀을 보면 성경은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라는 뜻입니다(박윤선). 그런데 왠지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예수님을 잡으러 온 가룟 유다가 예수님에게 입 맞춘 장면이 생각납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악인 가룟 유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오히려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으면 더 좋았을 뻔 했던 그가 예수님을 입 맞춘 모습이 생각납니다. 물론 이러한 행동은 의인의 길을 걷는 자의 행동은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가룟 유다의 행동은 악인의 길을 걷는 자의 행동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예수님은 가룟 유다처럼 거짓된 입술로 예배하는 거짓된 예배자의 악을 지적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가 주님께서 지적하시는 거짓된 예배를 하나님께 매 주일 드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가 입술로는 주님을 존경하며 찬양하며 경배를 드리고는 있는데 혹시 마음을 주님에게서 먼 것은 아닌지요? 혹시 우리의 입술은 가룟 유다처럼 거짓된 입술은 아닌지요? 의인의 길을 걷는 자는 진실한 입술로 주님을 예배합니다(12절). 우리는 이 의인의 길을 걷는 자들이 돼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의롭다 함을 얻어 의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떻게 살아드려야 합니까? 만일 지금 우리가 악인의 길을 걷고 있다면 우리는 돌이켜 회개하여 주님을 경외함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진실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악인들이 분노하고 허사를 경영하며 함께 꾀하여 우리를 대적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우리의 피난처로 삼고 주님 걸어가신 의인의 길을 신실하게 묵묵히 걸어야 합니다. 그러한 자가 바로 매우 복된 사람입니다.

 

 

 

 

의인의 길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밟는 주님의 종이 되길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회개와 섬김과 예배를 추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