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죄를 이겨야 한다

 

 

 

네가 옳은 일을 했다면 왜 내가 네 예물을 받지 않겠느냐? 그러나 네가 옳은 일을 하지 않으면 죄가 네 문 앞에 도사리고 앉을 것이다. 죄가 너를 다스리고 싶어하여도 너는 죄를 이겨야 한다”(창세기 47, 현대인의 성경).

 

 

신년 초하루 온 가족이 형네 집에서 모여 먼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아버님 세대 분들과 저희 세대들과 저희 자녀들 세대, 이렇게 삼 세대가 한자리에 모여 하나님께 한국어와 영어로 찬양을 드린 후 제 사촌 동생 목사님이 먼저 영어로 구약 성경 여호수아 1장 9절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후 제 아버님께서 신약 성경 고린도후서 5장 14-17절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저는 이 두 설교 말씀을 다시금 묵상할 때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2020년 1월 1일 저희 온 가족에게 들려주시는 공통적인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두 분 목사님이 두 다른 본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셨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두 분 목사님을 사용하시사 두 다른 성경 본문과 두 설교를 통해 우리 전 가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 하나님의 메시지를 저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요약을 해보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옛 사람처럼 육신을 따라 살면서 하나님께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죄와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강하고 담대하며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4장 7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네가 옳은 일을 했다면 왜 내가 네 예물을 받지 않겠느냐? 그러나 네가 옳은 일을 하지 않으면 죄가 네 문 앞에 도사리고 앉을 것이다. 죄가 너를 다스리고 싶어 하여도 너는 죄를 이겨야 한다.”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여 낳은 아들 가인(1절)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5절).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5절).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셨기 때문입니다(4-5절). 그 때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6절).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하나님께서 요나 선지자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욘4:4),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9절). 왜 요나는 이렇게 두 번이나 성낸 것입니까?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셨기 때문입니다(1절, 현대인의 성경). 다시 말하면, 요나가 성낸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사” 니느웨 백성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3:10).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신 것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백성들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셨기 때문입니다(10절).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백성들에게 뜻을 돌이키사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는데 하나님의 종 요나 선지자는 니느웨 백성들을 향한 자신의 뜻을 돌이키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성내었던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께 성내는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겸손히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우리의 뜻 (‘내 뜻’)을 하나님에게까지 관찰하려고 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역경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와 기대한대로 우리를 우리의 역경과 고통 속에서 건져주시지 않으셨을 때 우리는 충분히 하나님에게까지 성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네가 성낼 만한 이유라도 있느냐?”(현대인의 성경)]라고 물으십니다. 이 하나님의 물음에 우리는 “예, 있습니다. 내가 죽고 싶을 정도로 화낼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9절, 현대인의 성경). 즉, 우리는 우리가 보기(생각하기)엔 하나님께 성낼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엔 우리가 하나님에게 성낼만한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엔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에게 성낼만한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니느웨 백성들이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났기에(회개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려는 뜻을 돌이키셨는데 하나님의 종이라는 요나 선지자는 자신의 뜻을 돌이키지 않고 하나님께서 니느웨 백성들에게 재앙을 내리시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니느웨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습니다(4:5). 아니 어떻게 하나님의 도구인 선지자 요나는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셨는데 자기가 무엇이라고 뜻을 돌이키지 않은 것일까요?

 

로마서 9장 20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우리가 누군데 감히 하나님께 항의할 수 있겠습니까? 만들어진 물건이 그것을 만든 자에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하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누군데 감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믿음으로 겸허히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우리 뜻을 하나님에게까지 관철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토기장이가 같은 흙으로 귀하게 쓰일 그릇과 천하게 쓰일 그릇을 만들 권리가 없습니까?” (21절, 현대인의 성경) 저는 그 원인이 우리가 겟세마네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셨던 기도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현대인의 성경) “… '아버지, 할 수만 있으면 이 고난의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마26:39). 즉, 우리는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라는 예수님의 기도를 배우지 못했기에 우리가 원하는 것(우리의 뜻)을 하나님에게까지 관철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 고난의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라는 간구만 하나님께 드리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39절, 현대인의 성경).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기도를 응답해 주시지 않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며 심지어 하나님께 분노까지 하는 것입니다. 마치 요나 선지자처럼 자신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는 하나님께서 주신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다가(욘4:6) 하나님께서 그 박넝쿨을 시들어 버리게 하셨을 때(7절) 그 시들어 버린 박넝쿨로 말미암아 죽고 싶을 정도로 화내었던 것처럼(9절, 현대인의 성경) 우리도 우리의 괴로움을 하나님께 아뢰므로 하나님께서 그 괴로움을 면하게 해주셨을 때에는 크게 기뻐하다가도 다시금 괴로움을 당할 때에는 하나님께 심히 분노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라고 말씀하신 후(창4:6)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현대인의 성경) “네가 옳은 일을 했다면 왜 내가 네 예물을 받지 않겠느냐? 그러나 네가 옳은 일을 하지 않으면 죄가 네 문 앞에 도사리고 앉을 것이다. 죄가 너를 다스리고 싶어 하여도 너는 죄를 이겨야 한다”](7절).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한 3가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인은 선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4장 7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현대인의 성경) “네가 옳은 일을 했다면 왜 내가 네 예물을 받지 않겠느냐?”]. 가인은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을 하지 않았기에 하나님께서 그의 제물을 받지 아니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예배의 삶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올바른 예배의 삶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선을 행하는 것, 옳은 일을 행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현대인의 성경) “우리를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함을 받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미리 준비하셔서 우리가 그렇게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새창조하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일”을 위해서입니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서(고후5:17) 선한 일을 위해서 새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선한 일을 하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선한 일을 함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받쳐야 합니다. 저는 그 교훈을 이번 주 화요일 아내와 함께 본 영화 “A Hidden Life”에서 또 받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자기 신념을 위해 나치 독일에 맞섰던 오스트리아의 군인 프란츠 예거슈테터는 독일 나치군 들에게 사형을 당하기에 앞서 자기 아내를 만나게 되는데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Do the right thing’(옳은 일을 하세요). 영화 주인공 프란츠 예거슈테터에게 있어서 옳은 일이란 비록 가톨릭 주교가 로마서 13장 1절 말씀대로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고 말했지만 프란츠 에거슈테터는 자기 신념 상 악한 히틀러 지도자에게는 복종하지 않는 것(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사형을 당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본 후 아내하고 집에 돌아오면서 영화에 대한 대화 속에서 두 분에 대해 얘기를 나눴습니다. 첫 번째 분은 제 장인 어르신입니다. 저는 제 아내에게 장인 어르신은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자신의 신념을 위해 어떠한 역경과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묵묵히 주님의 일을 하시다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으셨다고 말했습니다. 두 번째 분은 예수님입니다. 저는 제 아내에게 그 영화를 본 후 그 영화의 주인공이 결국에는 사형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모습이 생각이 났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과 같이 선한 일, 옳은 일을 위해 생명조차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을 보십시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내가 달려갈 길을 다 가고 주 예수님에게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기쁜 소식을 증거하는 일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주님께 받은 사명을 완수함에 있어서는 우리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로, 죄가 가인의 마음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창세기 4장 7절 중반절을 보십시오: “…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네가 옳은 일을 하지 않으면 죄가 네 문 앞에 도사리고 앉을 것이다”](And if you do not do well, sin is crouching at the door). 저는 이 말씀을 영어성경으로 읽으면 “crouching”이란 단어를 생각할 때 오래 전에 보았던 주윤발 영화 “와호장룡”이 생각납니다. 그 이유는 그 영화의 영어 제목이 “Crouching Tiger”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crouching’이란 단어의 한국어 의미는 “웅크림”입니다(네이버 사전). 마치 호랑이가 먹잇감을 노리고 조용히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선을 행하지 않으면 죄가 문에 우리를 삼키려고 웅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주님을 위하여 선을 행하면서 살지 않으면 마치 호랑이가 먹잇감을 노리고 그 먹잇감 앞에서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가 그 먹잇감을 잡아먹는 것처럼 죄는 우리 마음 문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대로 선을 행하면서 살지 않으면 우리를 ‘삼켜서'’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죄를 범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에서 지금 우리 마음 문 앞에서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실 뿐만 아니라(계3:20) 사탄도 마치 웅크리고 앉아 있는 사자처럼 우리 마음 문에 엎드려 우리의 옛 사람을 자극하고 주장케하사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 가장 간교한 뱀이(1절) 여자인 하와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묻습니다(1절). 그 때 하와는 뱀에게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다고 대답했습니다(2-3절).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창세기 2장 16-17절 말씀과 비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과 비교하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 사람”인 아담에게만 명령을 하셨는데 그의 아내인 하와도 하나님의 명령을 알고 있는 것을 보면(3:3) 아담은 하와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가르쳐준 게 분명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2:16-17)고 말씀하셨는데 하와는 뱀에게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3:2-3)고 말했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2:17)고 명하셨는데 하와는 뱀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3:3)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먹지 말라”고 명하셨는데 하와는 “먹지도 말고” 뿐만 아니라 “만지지도 말라”고까지 뱀에게 말했습니다. 즉, 하와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남편인 아담에게 명령하신 말씀에 “만지지도 말라”는 말을 추가한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반드시(surely)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2:17) 하와는 뱀에게 “죽을까 하노라”(3:3)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뱀은 하와에게 “너희가 결코(surely) 죽지 아니하리라”(3:4)고 말한 것을 보면 하와보다 뱀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명령(2:17)을 더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간교한 사탄은 우리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탄은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든지(참고: 계시록 22:18) 가감하며(신4;2) 우리를 미혹하고 속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죄를 범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죄는 우리를 원하고 있습니다(창4:7). 현대인의 성경 번역으로 말한다면, 이렇게 죄는 우리를 다스리고 싶어 합니다(7절, 현대인의 성경). 그런데 큰 문제는 우리는 죄를 다스릴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큰 문제는 죄를 이기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7절, 현대인의 성경). 그러기에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6-7절) 그의 아우 아벨을 쳐 죽인 것입니다(8절).

 

여러분, 왜 우리는 죄를 이기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죄로 하여금 우리를 다스리게 허용하고 있는 것일까요? 특히 왜 우리는 우리 가정에 죄가 침투해서 우리로 하여금 서로에게 죄를 짓고 하나님께 죄를 범하도록 하고 있는 것일까요?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해야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는 것일까요? 저는 그 원리를 어제 신년 초하루에 온 가족 예배 때 아버님 목사님과 사촌 동생 목사님이 선포할 말씀 내용 중심으로 한 3 가지를 생각하며 적용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현대인의 성경)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존재입니다. 옛 사람은 없어지고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한 사람”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14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갈5:24).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아야 합니다(롬13:14). 우리는 땅에 있는 지체인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란 우상 숭배를 죽여야 합니다(골3:5). 우리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말아야 합니다(고후5:16).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시므로 우리는 더 이상 육신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롬8;9, 현대인의 성경).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살지 말고 오직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고후5:15).

 

둘째로, 우리는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여호수아 1장 9절을 보십시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현대인의 성경) “내가 너에게 마음을 굳게 먹고 용기를 가지라고 하지 않았느냐! 너는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말아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겠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사탄과 죽음과 싸워 승리하셨음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믿음으로 나 자신과 세상과 죄와 사탄과 죽음과 싸우는 것입니다. 싸우되 우리는 임마누엘 믿음으로 싸웁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영적 전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수1:9).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강하도 담대하며 두려워하지 않고 놀라지 않는 것입니다(9절).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책을 항상 읽고 밤낮으로 묵상하며 그 가운데 기록된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키는데 헌신했습니다(8절, 현대인의 성경). 비록 우리가 수 없이 많은 때에 그 헌신한대로 살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오직 강하고 담대하여 하나님의 명령한 그 말씀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아야 합니다(7절).

 

셋째로, 우리는 옳은 일을 하므로 죄를 이겨야 합니다.

 

창세기 4장 7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십시오: “네가 옳은 일을 했다면 왜 내가 네 예물을 받지 않겠느냐? 그러나 네가 옳은 일을 하지 않으면 죄가 네 문 앞에 도사리고 앉을 것이다. 죄가 너를 다스리고 싶어 하여도 너는 죄를 이겨야 한다.” 만일 우리가 옳은 일을 하지 않으면 죄는 웅크린 사자처럼 우리 마음 문 앞에 도사리고 앉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죄는 우리를 다스리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인 우리는 죄에 다스림을 받지 않고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 우리는 문 밖에 서서 두드리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어 주님께서 우리에게로 들어와 우리와 더불어 먹고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먹습니다(계시록 3:20). 그리고 우리는 목자 되신 주님의 음성만 듣고 주님을 따릅니다(요10:3-5).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간교한 사탄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창3:1-5). 우리는 사탄의 꾐에 넘어가지 않습니다(13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의 유혹과 미혹을 물리치고 진리에 순종합니다. 우리는 진리로 날마다 양심이 건강해져서 어떠한 역경과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진리에 순종하여 옳은 일을 하므로 마음의 자유를 누립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새해 2020년을 맞이했습니다. 신년 초하루에 전 가족 모임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두 분 목사님을 통해 여호수아 1장 9절과 고린도후서 5장 14-17절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비록 두 분 목사님이 두 다른 성경 본문으로 두 설교를 하셨지만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공통적인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메시지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옛 사람처럼 육신을 따라 살면서 하나님께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죄와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강하고 담대하며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므로(고후5:14)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강하고 담대하며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고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고 믿음으로 죄와 싸워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