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의 얼굴과 천사의 얼굴
[사도행전 6장 8-15절]
트리처 콜린스 신드롬(Treacher Collins Syndrome)을 아십니까? 2005년 3월 1일 저녁 TV 시청자들은 ‘얼굴 없는 아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세 살배기 이 여아는 미국 플로리다 주 오렌지 파크에 살고 있다. 이름은 줄리애너. 아이는 위턱과 뺨, 눈구멍, 귓바퀴 등을 구성하는 뼈가 30%밖에 없는 상태에서 태어났다. 이처럼 뼈가 제대로 구성되지 않아 '얼굴 없는 상태'가 된 증상을 '트리처 콜린스 신드롬(Treacher Collins Syndrome)'이라고 하는데 의료진은 “줄리애너의 상태가 지금까지 사례 중 최악”이라고 입을 모았다. 아이는 14번의 외과수술을 받았다. 앞으로도 최소한 30번 이상 수술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해군에 근무하고 있는 부부는 “사랑스러운 이 딸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며 감사한다. 아빠인 톰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을 결코 주시지 않는다. 딸이 모든 이에게 보여줄 많은 것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얼굴이 없어도 ‘선물’이라며 감사하는데 선물을 ‘가치 없는 상품’으로 여긴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인터넷). 이 트리처 콜린스 신드롬에 걸린 줄리애너에 대한 한 인터넷 기사에 반응들 중 최고의 발언은 “우리 나라였다면 아이가 버려졌거나, 아이가 부모님 손에 자라더라도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안 받아줄 듯....” 그 다음 발언은 “우리 딸아이가 이렇게 말하네요”: “오늘 자고 내일 눈떴을 때 우리나라 대한민국도 저런 (편견 없는 동심의) 나라가 되어있으면 좋겠다.. 왠지 씁쓸해지고 부끄러워지는 .. 딸아이와의대화 ... 반성되네…”. 그 다음 발언은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장애인이나, 어려운 사람들 볼 때마다 생각하는 건데, 손발 멀쩡하고, 몸 멀쩡한 거만해도 우리는 감사히 생각해야한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가?”(인터넷).
우리의 얼굴은 어떠합니까? 우리도 ‘얼굴 없는 아이’처럼 ‘얼굴 없는 크리스천’이 아닙니까? 링컨의 그 유명한 말을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사람 나이 사십이 넘어서면 자신의 얼굴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한다.” “모든 찌끼가 가라앉은 구정물통은 맑은 물처럼 보이지만 막대기로 속을 한 번 뒤집어 놓으면 콩나물 대가리, 밥풀, 무 조각 등 가라앉은 것이 모두 떠오르고 맙니다. 사람의 인격도 그 속을 뒤집어 보아야 압니다. 평안하고 은혜 받았을 때야 모두 천사의 얼굴입니다. 속상할 때 보아야 그 속을 알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속을 뒤집어 놓았을 때 무엇이 떠올랐습니까? 천사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온유하고 부드럽고 맑은 그 모습은 누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얼굴이었습니다“(인터넷).
오늘 본문 사도행전 6장 15절을 보면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는 말씀을 보면서 천사의 얼굴과 사탄의 얼굴은 어떠한지 오늘 본문 말씀 중심으로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의 얼굴이 어떠한 얼굴이 돼야 하는지 또한 어떠한 얼굴이 되면 안 되는지 교훈을 받기를 원합니다.
먼저, 사탄의 얼굴을 생각해 보십시다.
사탄의 외모는 온전한 아름다움입니다(겔28:12-13). 찰스 스탠리는 그의 책 “마음 전쟁”(When the enemy strikes)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은 사탄이 ‘광명한 천사’의 얼굴로 나타난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자기의 얼굴을 감추고 ‘남의 탈’을 쓰고 옵니다. 이것을 성경은 ‘양의 탈을 쓴 늑대’라고 표현합니다(인터넷). 사탄은 누구입니까? 사탄의 이름을 보십시오: 사탄, 악마 (비방하는 자), 루시퍼(아침의 아들), 바알세블(파리의 왕- 마 12:24), 그리고 벨리알(불법자- 고후 6:15) 마귀(요일 5:19) 유혹하는 자(살전 3:5) 세상의 임금 (요12:31) 이 시대의 신(고후 4:4),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 2:2) 형제를 참소하는 자(계 12:10) 그리고 빛의 천사( 나쁜 빛-고후 11:14) 뱀(계12:9) 그리고 용(계 12:3). 사탄의 속성을 보십시오: 사탄은 창조된 천사적 존재입니다. 그는 천사의 영역의 부분으로 창조 되었었습니다. (엡6:11-12, 겔 24:18) 그리고 그들 모두의 순위에서 가장 높은 자입니다(겔 28:12-14). 사탄의 행동은 무엇입니까? 사탄은 모든 면에서 가능한 한 악을 키워 하나님의 계획에 반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간접적인 행동은 사탄은 세상(이곳에서 사탄은 극히 자유로움과 힘을 갖고 있으며(요12:31;요일 5:19)과 육신을 통해 간접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세상과 육신과 악은 기독교인의 세 가지 분리된 적이 아닙니다. 차라리 사탄은 우리 안에 있는 육적본성을(롬 7:18; 갈 5:19-21)이용하도록 악한 세상의(요일 2:13-15) 체계를 통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직접적인 행동은 사탄은 묘사 , 유혹, 공격, 소유에 의해 직접적으로 행동 합니다. 믿는 자 안에서의 역사는 (2) 사탄은 믿는 자를 유혹합니다(자만하도록- 역대기상21:1-8; 세속적으로-요2:15; 야고보 5:1-7; 비도덕적으로- 고전 7:5; 거짓말하도록 –행 5:3; 실망하도록-베전 5:6-10; 용서하지 않는 자가 되도록-고후 2:10-11), (2) 사탄은 믿는 자의 사역을 방해한다(살전 2:18; 계 2:10), (3) 사탄은 믿는 자 가운데서 잘못된 가르침을 촉진시킨다.(요일 4:1-4), (4) 사탄은 분노, 슬픔, 분을 촉진시킨다(엡 4:26-27; 고후 2:5-11)(인터넷).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단의 종노릇하여 스데반과 더불어 변론하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리버디노”(the Freedmen) (9절), 즉, “자유인들의 회당” 사람들로서 전에는 포로였다가 자유를 얻게 된 사람들로서 각각 구레네,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길리기아 출신의 흩어진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이였습니다(9절, 유상섭). 과연 사단의 종노릇하던 이들은 어떻게 스데반을 공격하였습니까? 한 마디로 말한다면, 그들은 사람들을 선동하여 거짓 증거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11을 보십시오: “사람들을 가르쳐 말시키되 이 사람이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하고.” 여기서 “가르쳐 말시키다”(secretly persuaded)라는 말씀은 유일하게 여기에서만 사용된 헬라어로 그 뜻은 사람들을 선동하여 지시하는 대로 행동하게 만드는 행위를 의미합니다(유상섭). 스데반을 대적하는 자유인들의 회당 사람들은 사람들을 내세워 자기들을 거짓 증거로 대변하도록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거짓 선전토록 만들었습니다. 그 거짓 증거 또는 거짓 선전은 무엇이었습니까? “이 사람(스데반)이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였습니다(11절).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매수하여 세운 자들은 스데반이 하는 말을 전혀 들은 바도 없는데 그들이 마치 스데반이 한 말의 목격자인 것처럼 내세우고 있다는 점입니다(유상섭). 스데반을 공격하는 사단의 종노릇하는 자들은 거짓말을 꾸며서 스데반이 신성모독의 죄를 범했다고 스데반이 하는 말을 전혀 들은 바도 없는 자들을 매수하여 거짓 증거케 한 것입니다. 결국 매수된 자들이 공공장소로 나가서 스데반이 성전과 모세를 거스르는 신성 모독의 말을 한다면 백성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을 선동하여 혹은 “충동시켜”(stirred up)(12절) 그들로 하여금 모두 하나가 되어 스데반에게 몰려오게 만들었습니다. 흥미롭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대적하던 자들도 합동작전, 사도들을 대적하던 자들도 합동작전,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스데반 안수 집사를 대적하는 자들도 자유인들의 회당 사람들과 백성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하나가 되어 스데반을 없이하고자 거짓 증언을 하는 것 말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 사단의 종들은 매수한 사람들을 법정에서 거짓 증인 역할까지 시켰습니다(13절). 그들이 거짓 증인으로 산헤드린 법정 앞에서 한 말은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아니하는 도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는 것이었습니다(유상섭). 거짓된 마음으로 거짓 증거를 하는 이 사단의 종들은 거룩한 성전과 거룩한 모세 율법을 빙자하여 진정으로 거룩한 스데반 집사를 공격한 것입니다.
거룩하지 못한 자들이 거룩한 척하면서 거짓 증인의 삶을 살면서 거짓 증거를 일삼습니다. 이들은 오늘 본문 11절의 거짓 증인들처럼 듣지도 못한 것을 들었다고 거짓말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속히 하지 않고 오히려 사탄의 음성을 속히 듣는 가운데서 거짓말을 일삼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 가지 사탄의 역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직접 듣지도 안했으면서 들었다는 식으로 말을 하므로 오히려 서로를 모함하는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요한삼서 1장 9-10절을 보면 “이도드레베”(Diotrephes)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그는 사도들을 망령되이 폄론하였던 인물이었습니다. 지금 말로 한다면 그는 목회자를 헐뜯고 비방하는 자였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영혼은 크게 잘못된 영혼입니다. 교회 내에서 성도들이 목회자를 험담하고 비판하는 것은 디오디레베와 같이 영혼이 잘못된 사람입니다. 성도들은 목회자뿐만 아니라 성도 상호간에 절대로 중상모략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마귀의 유혹에 빠져 마귀의 앞잡이 노릇하는 행위입니다. 서로가 중상모략하면 관계가 깨어집니다. 그것은 마귀가 노리는 목표입니다. 그리하여 교회가 분란에 휩싸이게 하여 분열을 일으키려는 마귀의 책략입니다. 교회 내에서 주의 형제들을 헐뜯고 모함하고, 그리하여 분열과 반목을 조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영혼이 잘못된 디오드레베와 같은 사람입니다(인터넷). 주의 형제들을 비방하고 중상 모략하는 일은 망령된 일입니다(10절). 우리는 그런 사람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요, 교회의 화평을 해치는 쓴 뿌리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엄히 경계해야 합니다(인터넷). 그리고 우리는 사단의 종노릇하는 자들이 거짓 증거를 하면서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 안에서 목사를 모함하고 장로를 모함하고 성도를 모함하므로 교인들을 충동시키는 것을 매우 경계해야 합니다. 어느 분야에서 아직 준비되지 않은 사람을 바르게 인도하는 것이 선도라면, 문서나 언동으로 순진한 대중을 그릇된 사상으로 은근히 부채질하여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신념에 대하여 의혹이나 불신 또는 분노를 하도록 짖는 일이 선동입니다. 교회에서는 선도자가 많으면 평안하지만, 집요한 선동자가 있어 조직적으로 활동하면 분열과 힘 빼기 술수에 말려들어 갑니다.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천적은 떠버리 선동자들입니다. 선동하는 자들은 자신의 실체를 감추고 그럴듯한 말로 남의 엷은 귀를 농락하는 자들입니다(인터넷).
우리는 양의 탈을 쓴 늑대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양처럼 순하게 보일지라도 늑대처럼 사람들을 선동하여 모함하므로 하나님의 종들을 대적하므로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비록 그들의 얼굴이 사탄처럼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며 광명한 천사의 얼굴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둘째로, 천사의 얼굴을 생각해 보십시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6장 15절을 보십시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여기서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했을 때에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다고 말씀하였는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것은 스데반이 이미 부활의 영광중에 있는 예수님을 닮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하는 사람임을 보여줍니다(유상섭). 이것은 스데반이 평강, 사랑, 기쁨으로 충만하여 그의 얼굴이 빛나는 모습을 말함입니다(박윤선).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입니까?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고소하고 당시의 권력자들이 협박하는 상황에서, 주눅이 들고 겁에 질려 사색이 될 법도 하였으나 어떻게 스데반의 모습은 오히려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 원인을 오늘 본문 말씀 8절과 10절에서 찾아봅니다. 곧 스데반 집사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였고(8절) 또한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의 대적자들이 능히 당치 못하였습니다. 즉, 스데반 집사는 은혜 충만, 권능 충만, 지혜 충만, 성령 충만하였기에 협박받는 상황에서도 천사의 얼굴과 같이 진정한 천사의 광채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러한 광채는 우리로 하여금 구약에 모세를 상기시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십계명이 새겨진 돌 판을 들고 내려오는 모세의 얼굴에는 광채가 났었고 이를 보고 사람들이 두려워하자 모세는 수건으로 얼굴을 덮어 가리웠다는 말씀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모세가 빛나는 얼굴, 즉 천사 같은 얼굴을 가지게 된 것은 모세는 하나님과 친구처럼 대화하며 그 명령을 받아 순종했었기 때문이었습니다(인터넷). “광채는 히브리어로 '카란'(karan)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상징인 광채가 모세의 얼굴에 나타났다는 것은 그의 신앙이 최고조에 달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광채 나는 얼굴이란, 하나님의 영광이 반영된 인간의 모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 충만한 상태를 표현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광채 나는 얼굴은 하나님이 보실 때 최고의 수준에 이른 것을 뜻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가장 완전한 인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인터넷).
그러나 과연 우리 크리스천들의 얼굴은 어떠한 것입니까? “미국 크리스천의 두 얼굴”란 제목 아래 쓰여 진 인터넷 기사를 보면 미국 어느 목회자(Anthony B. Robinson)의 설교 내용 중 이러한 말씀이 있었다고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전통적인 삼위일체가 오늘날엔 ‘나, 나 자신, 내 것’이라는 현대적인 삼위일체로 바뀌어졌다(The traditional Trinity of Christianity has been replaced by the modern trinity of ‘Me, Myself and Mine’).” 삼위 일체 하나님을 닮아가야 하는 우리 크리스천들이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된 삶을 살아가기보다 이기주의 적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을 면책하는 말씀입니다. 결국 우리 미국에 살아가고 있는 크리스천들은 하나의 얼굴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 같이 보이지만 또 다른 얼굴은 이기주의에 빠져 점점 나 밖에 모르는 ‘나의 얼굴’이 더욱더 뚜렷이 보이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우리는 스데반처럼 은혜 충만, 권능 충만, 지혜 충만,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는 광채가 우리 얼굴에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대적하며 핍박하는 자들조차도 우리의 얼굴에서 스데반처럼 “천사의 얼굴”을 봐야 합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예수님의 얼굴을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의 얼굴을 회복하는 것”이란 인터넷 기사를 보면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몇 년 동안 고생해 완성한 ‘최후의 만찬’을 공개하기 위해 지인들을 초청했다. 드디어 천이 벗겨지고 작품이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사람들의 입에서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한 친구가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대단한 작품이군. 예수의 손에 들린 저 광채 나는 유리잔을 보세요.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때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붓을 들어 유리잔 부분을 뭉개버렸다. 깜짝 놀란 사람들을 향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말했다. “이 작품은 실패한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의 시선이 예수의 얼굴에 집중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유리잔에 시선이 모아졌다면 그것은 제 의도를 벗어난 것이지요.” 그는 유리잔이 예수의 표정을 가리지 않도록 다시 그림을 그려 완성시켰다. 현대인들은 종종 예수의 손에 들린 광채 나는 유리잔에 환호하는 우를 범한다. 신앙은 삶의 본질을 찾는 과정이다. 신앙은 유리잔에 가려진 예수의 얼굴을 회복하는 것이다”(인터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