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의 전략 (5)

 

 

 

[느헤미야 41-3]

 

 

교회 안에서 “누구를 조롱합니까? 잘 믿고 충성하는 사람들을 조롱합니다. 그러니까 잘 믿고 충성하는 사람에게 ‘예수를 믿고 그 따위 식으로 믿어야 되느냐? 그렇게 주일날 꼭 나가야 되느냐? 그렇게 충성해서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하느냐?’하며 조롱하는 소리를 합니다. 그러므로 말세에는 교인이 교인에게 상처를 받습니다”(인터넷).

 

오늘 본문 느헤미야 4장 1-3절을 보면 조롱을 받는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이 나옵니다. 누가 그들을 조롱하였습니까? 바로 산발랏(1-2절)과 암몬 사람 도비야(3절)였습니다. 산발랏은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을 건축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을 비웃”었습니다(1절). 암몬 사람 도비야도 산발랏과 더불어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을 “업신여기고 비웃”었습니다(2:19). 이것은 산발랏과 도비야가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일을 방해하려는 공작으로서 야비한 심리전을 벌이고 있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그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실망과 두려움을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에게 불어넣으려는 것이었습니다(White). 즉, 예루살렘 성을 재건 못하도록 건축자들의 폐기(morale)를 파괴하려는 의도였습니다(Packer). 이 대적자들을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자들의 심리적 약점을 이용하여 하는 일을 중단시키려고 했습니다. 저는 오늘 산발랏의 조롱(2절)과 도비야의 조롱(3절)을 묵상하면서 사탄의 전략을 한 여섯 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사탄의 전략을 알고 우리 자신이 그 사탄의 유혹에 얼마나 미혹되어 있는지 깨닫고 하나님께 돌이켜 주님만을 바라보며 의지하므로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데 재헌신하며 충성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첫째로 묵상하고자 하는 것은 산발랏의 조롱입니다.

 

느헤미야 4장 2절을 보십시오: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말하여 가로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의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케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필역하려는가, 소화된 돌을 흙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우리는 그의 5가지 조롱 섞인 질문에서 5가지 사단의 전략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1) 산발랏의 조롱 섞인 첫 번째 질문은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의 하는 일이 무엇인가 입니다(2a).

 

여기서 산발랏의 조롱 핵심은 일하는 자들인 유다 백성들(workers)이었습니다. 그는 그들을 가리켜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라고 칭했습니다. 심리전에선 상대방의 약점을 찌르던지 혹은 상대편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한 가지 사실을 그대로 말해 주면 됩니다. 산발랏은 자기 형제인 사마리아 인들과 군대 앞에서 유다 사람들이 자신들이 처한 형편없고도 치욕스러운 상황에 예민하게 반응할 줄 알았기 때문에 유다 백성들을 가리켜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라고 칭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란 말은 “Miserable Jews”, 즉 비참한 혹은 불행한 유다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이 단어의 뿌리(‘mll)는 구약에서 두 가지로 사용되었습니다: (a) 사라지는 혹은 시들고 있는 나무를 가리키는데 사용되었고, (b) 소망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사용되었습니다(사19:8; 호4:3). 본문에서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라고 칭한 것은 유다 사람들은 시들어가는 나무처럼 아무 쓸모없는 사람들이기에 가치 있는 일 또는 훌륭한 일을 어떻게 하겠느냐는 조롱입니다.

 

저는 이 사탄의 전략에 수 없이 넘어갔었고 지금도 자주 넘어가고 있습니다. 마치 산발랏이 유다 백성들에게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라고 칭하였던 것처럼 사탄은 저의 마음에 자꾸만 ‘제임스, 넌 부족해, 넌 연약해, 넌 목사 될 자격이 없어, 넌 쓸모없어’ 등등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사탄의 음성을 종종 하나님의 음성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렇게 제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 겸손인 줄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탄의 교묘한 전략은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기보다 나 자신을 더 바라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사탄은 나 자신만 바라보게 합니다. 특히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과 죄 등등만을 바라보게 만듭니다. 그리고 나서는 사탄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므로 말미암아 저로 하여금 제 자신에게 실망하고 절망까지 하게 만들곤 합니다. 진정한 자아성찰은 나 자신을 알아가므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인데 사탄은 하나님은 알아가지 못하게 하면서 나 자신만 알아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결국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고린도전서 1장27-28절을 붙잡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세상에서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며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는데(고전1:27-28) 사탄은 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고 오직 우리의 미련함과 연약함, 우리의 천함, 멸시 받을 만한 점들과 없음에 초점을 맞추게 합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낙망케 하며 좌절케 하므로 주님의 일을 하지 못하게 만들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2) 산발랏의 조롱 섞인 두 번째 질문은 스스로 견고케 하려는가 입니다(4:2b).

 

여기 두 번째 질문에서 산발랏의 조롱 핵심은 일 자체(work), 즉 예루살렘 성 재건이었습니다. 이 조롱을 다시 말하면 “그들은 과연 자기들이 시작한 일이 어떤 일인지 제대로 알고 있는가?”라는 말이라고 John White는 말하고 있고 J. I. Packer은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일은 확실히 그들의 능력 밖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승리장로교회를 조롱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가리켜 ‘너희처럼 숫자가 적고 연약한 교회가 어떻게 승리장로교회를 다시 재건할 수 있느냐?’ ‘너희가 어떻게 남미 사역을 감당하려고 하느냐?’는 등등의 조롱 어린 질문으로 우리의 연약함과 감당할 수 없다는 비판을 계속하는 것과 같은 조롱입니다. 사역에 지쳐있고 힘이 빠져 있을 때 이러한 조롱은 치명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John White는 “자신이 시작한 어떤 일에 대하여 의구심이 일어나려 할 때 자신이 이미 느끼는 두려움을 다른 사람이 말해주는 것이 가장 듣기 싫은 것이다” 고 말하면서 느헤미야 4장 10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유다 사람들의 연약한 상황과 말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이르기를 흙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담부하는 자의 힘이 쇠하였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고.” 이미 유다 백성들은 지쳐 있었습니다. 일이 아직 많이 남았는데 그들은 지쳐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루살렘 성을 재건할 수 있을지 없을지 의구심이 들고 있었습니다. 그 때 산발랏의 이 두 번째 조롱인 “스스로 견고케 하려는가”는 치명적이었습니다.

 

이 사탄의 전략, 참으로 무서운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사탄은 먼저 우리들이 얼마나 미약한지를 부각시킨 후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탄의 전략은 우리의 작음과 동시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의 크기를 더 크게 부각시키므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나 같이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이 저렇게 주님을 위해서 큰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들게 하므로 우리 스스로 낙심케 하며 좌절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낙심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것은 사탄은 이 모든 미혹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연약하고 부족해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그가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 감당케 하시면 어떠한 큰일이라 할지라도 주님을 위해서 믿음으로 시도 할 텐데 사탄은 아예 시작도 못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리고 사탄은 큰일을 부각시키면서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더욱더 작게 보게 만들고 또한 그는 큰일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므로 우리로 하여금 낙심케 하고 좌절하게 하며 절망하게까지 만듭니다.

 

(3) 산발랏의 조롱 섞인 세 번째 질문은 제사를 드리려는가 입니다(2c).

 

이 세 번째 조롱은 그 뜻이 분명하게 와 닿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John White는 말하기를 산발랏은 “하나님께 대한 그들(유다 백성들)의 믿음(faith)을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과연 저들은 기도가 성벽을 높여 줄 수 있다고 착각하는가?’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산발랏의 조롱입니까? 유다 사람들을 조롱하고 그들의 일인 예루살렘 성 재건하는 일을 조롱하더니 이젠 그들의 신앙을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산발랏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돕는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는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사탄은 우리의 믿음(신앙)을 공격합니다. 처음엔 우리의 연약함, 그리고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 그리고 이렇게 사탄은 우리의 믿음까지도 공격하여 의심을 들게 만듭니다. 사탄은 ‘기도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는가? 주님의 전을 세우는 일에 기도와 예배로 되겠는가?’라고 우리를 조롱 합니다. 예를 들어, 전도 집회를 위하여 또한 태신자를 위하여 중보 기도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냐는 조롱을 듣는 다면 과연 여러분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혹여나 사탄의 전략에 넘어가 ‘진짜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응답하실까? 과연 나의 태신자가 복음을 받아들일까?’라는 의심이 들지 않겠습니까?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버리고 의심의 길을 걷게 합니다. 사탄은 우리 안에 불신을 일으킵니다. 그리고는 결국 불신앙 가운데 불충성하게 만듭니다.

 

(4) 산발랏의 조롱 섞인 네 번째 질문은 하루에 필역하려는가 입니다(2d).

이 네 번째 조롱의 핵심은 일을 완성할 수 있는 능력(capability), 즉 ‘짧은 시간 안에 예루살렘 성을 재건할 수 있느냐’입니다. 안 그래도 “힘이 쇠하”(10절)여 지쳐있었고 또한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고 말하고 있었던 유다 백성들에게 산발랏은 이렇게 크고 힘든 일을 얼마나 걸려서 끝낼 수 있을 것인지 더욱더 낙심케 하려는 의도로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산발랏은 유다 백성들의 무능력함을 공격하므로 힘들고 지쳐 있는 상태에서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일을 포기하게 만들려고 한 것입니다. 힘들고 지쳐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 더 이상 참으며 견디지 말고 인내의 한계를 인정하고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이 큰 일을 중단하게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사탄의 조롱이요 유혹입니다. 사탄은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림에 있어서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매우 커 보이게 하고 동시에 우리가 그 큰일을 감당하기엔 너무 작아 보이게 만들므로 우리로 하여금 인내하지 못하게 만들며 또한 포기하게 만들고자 애씁니다. 특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짧은지를 부각시키므로 우리로 하여금 힘들고 지친 상태에서 주님을 섬기는 일을 중단하게 만듭니다. 사탄은 우리의 무능력함과 감당해야 할 일의 크기를 부각시키는 가운데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없다는 생각을 들게 하므로 결국은 ‘주님, 저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주님의 사역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5) 산발랏의 조롱 섞인 마지막 다섯 번째 질문은 소화된 돌을 흙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입니다(2e).

 

여기서 산발랏의 조롱 핵심은 건축 재료(materials)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을 재건함에 있어서 필요한 돌들이 이미 소화되어서 소용없다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예루살렘 성 주위에 있었던 소화된 돌들은 아직도 건축 재료로 쓰기에 좋은 것들이었다고 White는 말하고 있습니다. Packer도 그 때 소화된 것은 성문이었고 성벽은 무너트렸기 때문에 거의 모든 돌들은 다시 사용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산발랏은 유다 백성들을 실망시키려고 맞는 말(소화된 성문 재료는 쓸 수 없었음)과 더불어 틀린 말(소화된 돌들은 쓸모가 있었음)을 슬쩍 내뱉었던 것입니다.

 

이 산발랏의 조롱 섞인 질문을 생각해 볼 때 참으로 사탄은 진리와 거짓을 섞어서 우리를 유혹한다는 사실을 좀 더 확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치 예수님을 유혹할 때 사탄이 구약 말씀을 좀 삐뚤어서 인용한 것처럼 사탄은 무조건 거짓말로만 우리를 유혹하는 게 아니라 거짓말 더하기 진리(진리 + 거짓말)로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 한 예로 저희 교회를 생각해 볼 때 사탄은 우리들로 하여금 종종 이런 말을 하게 만듭니다: ‘우리 교회는 일꾼이 없습니다.’ 각자 주어진 은사대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엘리야처럼 ‘저 밖에 섬기는 사람이 없습니다’라는 식의 생각과 발언을 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엘리야 외에 바알에게 절하지 않은 7,000명을 준비해 놓으셨는데 두렵고 낙망하여 지친 엘리야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처럼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교회가 작다 보니 일할 사람도 없고 자원(resources)도 부족하고 등등 자꾸만 이런 것들에 초점을 맞추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낙망케 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일을 중단케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사탄의 전략은 교묘합니다.

 

이 산발랏의 5가지 조롱 후 오늘 본문 느헤미야 43절에 보면 암몬 사람 도비야의 조롱이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마지막 두 번째로 묵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도비야의 조롱은 이것이었습니다: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섰다가 가로되 저들의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3).

 

여기서 도비야의 조롱 핵심은 완성된 생산물(finished product), 즉 예루살렘 성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이 건축하고 있는 예루살렘 성이 다 완성 될 찌라도 너무나 약해서 여우가 성벽에 올라가도 곧 무너진다고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너지리라’는 히브리어 단어의 의미는 ‘(벽)의 터진 곳, 갈라진 틈’(a breach)입니다. 즉, 여우가 올라가도 예루살렘 성벽에는 갈라진 틈이 생길 것이라는 조롱입니다.

 

저는 이 도비야의 조롱을 잊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약 5년 전 주님께서 승리장로교회로 다시 인도해 주시고 느헤미야를 묵상하며 설교케 하셨는데 그 때 이 도비야의 조롱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제 삶에 “틈”을 많이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를 받으면서 주님께서 주님의 몸 된 승리장로교회를 세우시겠다는 약속의 말씀(마16:18)을 성취해 나아가심에 있어서 먼저 교회의 담임 목사인 저를 세우시고자 하신다는 마음의 확신이 들었습니다. ‘목사인 내가 먼저 제대로 세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과 더불어 이렇게 틈이 많은 사람인데 왜 주님께서는 나 같은 자를 세워서 승리장로교회를 세우시려고 하는지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라는 찬송가 410장 1절을 찬양케 하셨습니다. 그런 후 이렇게 약 5년 지난 후 이 본문 말씀을 다시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이 산발랏의 조롱 섞인 5가지 질문을 통하여 제 자신이 얼마나 사탄에 노출돼있는지 제 자신의 틈을 보게 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저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의 말씀으로 다시금 힘을 주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 자신의 미약함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강하심과 능력을 바라보게 하시므로 힘을 주시고 계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몸 된 승리장로교회를 세우는 일의 크기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므로 담대하게 해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음성과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게 지혜를 주시므로 말미암아 저로 하여금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시고 계십니다. 또한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게 하시는 가운데 저로 하여금 인내하며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주님의 역사에 동참하게 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일꾼이 부족하다고 불평하는 저에게 주님께서 세우고 계시는 신실한 일꾼들을 보게 하시므로 힘을 얻게 하시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승리장로교회 여러분, 승리장로교회를 세우는 일에 있어서 주님의 약속의 말씀인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마태복음 16장 18절 말씀을 붙잡고 어떠한 대적들의 조롱에도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재건하는 일에 우리 다 같이 충실히 섬기십시다. 우리의 대적들이 우리가 부족하고 미약한 사람들이라고 조롱할지라도, 우리의 하는 일을 조롱하며 우리의 능력과 가지고 있는 자원을 조롱할지라도, 더 나아가서 우리의 믿음과 인내를 조롱하며 도전할지라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일에 다 함께 동참하십시다. 온전히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