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의 전략 (4)
[사도행전 21장27-36절]
조엘 박 목사님의 “맞아 죽을 각오로 쓴 한국교회 비판”이라는 책을 보면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일목요연하게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교단우월주의, 헌금, 교회건축문제, 그리고 잘못된 설교와 기도 등에 대해 다루고 있다고 합니다. 박 목사님은 "한국교회는 둘을 하나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둘 또는 수백 개로 나눠놓고 있으며, 교회와 교단의 막힌 담은 옛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의 장벽보다 높고 견고하다" 면서 "화평과 화목을 위해 십자가를 진 예수 그리스도는 막힌 담을 헐었지만 한국교회는 바벨탑보다 더 견고하게 담을 쌓았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이 책이 출간된 것을 계기로 대형교회를 다니던 교인 3천200여명이 지역교회로 돌아가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출판사 측은 밝혔습니다. 이들은 책 제목인“한국 교회를 향해 통곡하시는 예수”와 같은 '한통예'라는 단체를 만들어 지역교회 복귀운동을 계속 확산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이 책은 지금 세인들에게 비판을 받고 있는 한국교회에 대해 개신교 목사가 직접 비판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잘못과 반드시 개혁해야 할 해법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으며 기독교의 반대세력인 안티들조차 언급하지 못했던 한국교회의 실정을 참회하는 마음으로 기록한 책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인터넷).
여러분은 이러한 교회 비판의 글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과연 저와 여러분 스스로가 교회와 우리 기독교인들 자신을 뒤돌아볼 때에 우리는 어떠한 비판을 할 수 있습니까? 물론 저는 건설적인 비판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저 비판을 위한 비판이나 비건설적인 비판은 교회에 유익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한국 교회를 건설적으로 비판할 필요가 있고 또한 그 비판을 겸허히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를 향한 제 개인적인 비판 중 하나는 바로 교회가 “전투적인 교회”(militant church)가 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예수님 다시 오시는 그 재림의 날까지 영적 싸움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전투적인 교회가 돼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경주를 달리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딤전6:12; 딤후4:7). 우리는 승리의 확신(assurance of victory)을 가지고 영적 싸움을 싸우는 전투적인 크리스천들이 다 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적인 사탄과 그의 전략을 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1장 33절을 보면 우리는 결국 성령님의 예언대로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결박당하는 모습을 봅니다. 이렇게 바울이 결박당하기까지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대적하며 복음을 대적하는 박해자들인 아시아로부터 온 불신 유대인들(27절)이 어떻게 바울을 결박하게까지 만들었는지 그 과정을 한 4가지로 묵상하고자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는 예수님을 대적하고 복음을 대적하며 우리를 대적하는 사탄과 그의 종들의 전략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 패턴을 알아 갈 때 우리는 그 사탄의 유혹을 알아 그 유혹과 싸워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로, 사탄의 전략(유혹)은 “충동”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1장 27절을 보십시오: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인 야고보와 모든 장로들의 권면을 받아들여 나실인을 서약 한 4명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 그들을 위해 각종 희생 제물을 비용을 치러주고 그들의 희생 제사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철저하고 경건한 유대인인가를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바로 그 날이 눈앞에 있을 때 오순절 절기를 위해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바울을 붙잡았습니다(유상섭). 그러면 아시아에서 온 이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모든 무리를 어떻게 충동했습니까? 그들은 사도 바울에 대한 거짓된 주장을 서슴없이 폈습니다. 그 거짓된 주장은 한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유상섭):
(1) 바울은 유대인과 율법과 성전을 대적하여 모든 곳에서 가르치는 자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1장 28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 이 주장은 충분히 유대인들을 충동시킬 수 있을만한 주장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의 정체성과 관련된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즉, 율법과 성전(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정체성을 결정하는데 근본 요소였기 때문에 사도 바울을 가리켜 율법과 성전(예루살렘 성전)을 대적하여 가르치는 자라고 주장한 것은 충분히 모든 유대인들의 마음을 충동시켜 격노케 할 만한 주장 이였습니다.
(2) 바울은 심지어 헬라 인들까지도 성전에 데리고 들어와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는 주장 이였습니다.
사도행전 21장 28절 하반절에서 29절을 보십시오: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 하니 이는 저희가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성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저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일러라.” 그 당시 성전에는 레위인의 뜰, 이스라엘 남자의 뜰, 여인의 뜰 그리 고 이방인의 뜰이 있었습니다. 근데 이방인이 이방인의 뜰을 넘어서 여인의 뜰을 지나 이스라엘 남자의 뜰까지 경계의 벽을 넘어서 들어왔다는 이들의 주장은 바울이 큰 죄를 범했다는 말입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 당시 경계의 벽에는 경고문이 있었는데 그 경고문에는 이방인들이 경계선을 넘어 들어가면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유상섭 박사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이 여인의 뜰로 들어오는 것도 즉석에서 사형에 처해질 심각한 죄가 되는데, 이를 넘어서 이스라엘 남자의 뜰에까지 들어왔다고 하면 얼마나 심각한 사태인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유상섭). 그러나 이것은 사실에 근거한 주장이 아니라 아시아에서 온 바울의 대적자들인 유대인들이 억측해서 주장을 핀 것입니다(29절)(유상섭). 사실인지 아닌지를 먼저 확인한 후 말을 해야 하는데 그저 추측 속에서 성전 안 이스라엘 남자의 뜰 안에 있었던 모든 유대인 남자들 을 충동시켜 바울을 붙잡게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경험을 이미 이고니온에서도 겪었습니다(14장). 그는 바나바와 함께 이고니온에 가서 항상 하던 대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 을 전했을 때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는 역사도 경험하였지만(1절) 그 때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므로(2절) 두 사도를 능욕하고 돌리 치려고 달려드는(5절) 이러한 고난과 핍박도 겪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여기서 악감을 품게 하였다는 말씀은 영어 성경 NIV를 보면 “poisoned their minds against the brothers”라고 적혀있습니다(2절). 즉,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에 독을 넣어 형제들을 대적하게 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이 얼마나 한심하고 답답한 일입니까? 그런데 이러한 일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처럼 거짓된 주장을 펴서 교인들을 충동시키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뭔가 사실에 근거한 주장이 아니라 그저 추측 가운데서 자기가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에 대하여 주장을 피므로 결국 주위 사람들을 충동하여 자기편을 만들어 그룹을 형성하는 일이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잠언 16장 28절에서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패려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말쟁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렵다는 성경 말씀을 생각할 때 교회 안에서 말쟁이가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말을 자꾸만 만들어서 다른 성도들을 충동시켜 다툼을 일으키는 일이 충분히 교회 안에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가 분쟁에 빠지는 것은 마귀의 거짓말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자꾸 서로 다른 생각이 있음을 부각시키며 충동질하여 다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자꾸 악을 저지르도록 우리를 충동질 합니다. 어떻게 합니까? 창세기 3장을 보면 간교한 뱀이 ‘네가 이 과일을 먹으면 ‘하나님 같이 된다’는 소리를 자꾸만 들려주면서 아담을 충동질 한 것처럼 “사탄이 우리에게 인간에게 자기 주장하려는 의지를 행사 하도록 자꾸 충동질해요. 그래서 자기가 자기 삶의 중심이며 자기 뜻대로 살도록 하며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면서 자기의 힘과 꾀와 그러니까 자기의 자원에 의존해서 자기의 삶과 자기의 행복을 쟁취해 나가도록 자꾸 충동질”하고 있습니다(인터넷). 우리는 이 사탄의 충돌 질로 말미암아 그의 유혹에 넘어가 자기주장을 자꾸만 교회 안에서 피면서 교회의 평화와 질서를 깨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사탄의 충동질이 아닌 학개 1장 15절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흥분시켜 주시므로 말미암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열심히 세워 나아가야 합니다.
둘째로, 사탄의 전략(유혹)은 “소동”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1장 30절을 보십시오: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결국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추측 속에서 바울을 붙잡고 그에 대한 자기주장을 피므로 성전 안에 있는 모든 이스라엘 남자들을 충동질했습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들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31절을 보면 바울은 이스라엘의 뜰에서 여인의 뜰을 거쳐 이방인의 뜰로 끌려 나와 죽음을 당하려는 찰나에 있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군대의 천부장이 백부장들과 군사들을 이끌고 오기 전까지 바울을 쳐 죽일 작정으로 구타하고 있었습니다(32절)(유상섭). 이렇게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의 충동질로 인하여 예루살렘 성 전체가 소동이 일어나며 요란하게 되었습니다(31절). 지금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 사람들을 충동질을 하여 교회 전체를 요란하게 만드는 일들은 지금도 여기 저기 교회에서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보고 듣습니다. 그런데 그 충동질을 하여 교회를 시끄럽게 하고 요란하게 만드는 장본인들은 자기들이 문제의 원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듯합니다. 오히려 자기가 옳고 상대방이 잘못되었다고 억측을 부리면서 교회의 평화를 깹니다. 그러면서 교회의 평화를 깨고 요란하게 한 장본인은 자기가 아닌 상대방이라고 비난합니다. 사도 바울도 이러한 경험을 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빌립보에서 사도 바울이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만난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16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18절) 귀신을 나오게 하였을 때 그 여종의 주인들이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19절) 가서 하는 말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한다는 것이었습니다(21절). 결국 이 귀신들린 여종의 주인들은 돈 문제로 인하여 (수입이 없어졌으므로) 바울과 실라를 상관들 앞에 끌고 가서 이들이 성을 심히 요란케 한다고 자기주장을 한 것입니다. 이 주인들처럼 교회 안에서 재정 문제로 인하여 충동질하고 소동을 일으키고 요란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번째 사단의 유혹인 소동 또는 요란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의 질서를 지키는데 힘을 써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는 화평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린도전서 14장 33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몸 된 교회 안에서 화평케 하는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셋째로, 사탄의 전략(유혹)은 “소문”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1장 31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의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은 성전 안에 있는 모든 유대인 남자들을 충동하여 예루살렘 성에 소동을 일으켜 결국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고 나아가 그를 죽이려고 할 때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을(보고가) 로마 주둔군의 최고 사령관이 천부장에게까지 들리므로 말미암아(31절) 저가 급히 군사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가서(32절)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했습니다(33절). 그런 후 천부장은 모인 백성들에게 “누구며 무슨 일을 하였느냐”고 물었을 때(33절)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 말로, 어떤 이는 저 말로 부르짖었습니다(34절). 결국 천부장은 소동을 인하여 그 실상을 알 수 없어 바울을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 명했습니다(34절).
과연 소문 퍼지는 속도는 얼마나 빠를까요? 한 인터넷 사이트를 보니까 이러한 흥미로운 글이 있어 나눕니다: “소문이 퍼지는 속도를 수학적 계산으로 분석한 사람이 있다. 소문이 퍼지는 속도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어떤 사람이 3만 명이 사는 작은 도시에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한 소문을 가지고 아침 8시에 나타났다고 하자. 그는 단 세 사람에게 이 소문을 전한다. 이 소문을 전달하는 데 대략 15분이 걸린다고 하자. 그러면 아침 8시 15분에 이 소문은 이 도시에서 네 사람이 알게 된다. 이 소문을 전해들은 세 명의 사람은 각각 그 이야기를 다른 세 명의 친구들에게 이야기한다. 여기에서도 역시 15분이 걸린다.
8시 30분까지 소문을 아는 사람의 수 : 4+(3X3)=13
8시 45분까지 소문을 아는 사람의 수 : 13+(3X9)=40
9시까지 소문을 아는 사람의 수 : 40+(3X27)=121명
9시 15분까지 소문을 아는 사람의 수 : 121+(3X81)=364명
9시 30분까지 소문을 아는 사람의 수 : 343+(3X243)=1,093명
9시 45분까지 소문을 아는 사람의 수 : 1,093+(3X729)=3,280명
10시까지 소문을 아는 사람의 수 : 3,280+(3X2,187)=9,841명
10시 15분까지 소문을 아는 사람의 수 : 9,841+(3X6,561)=29,524명
결국 소도시 사람들이 이 소문을 알게 되는 것은 2시간 30분 이전이면 모두 알게 될 것이다. … 한국에서는 이보다 더 빠를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으로 퍼지는 속도는 아마 상상 초월이기 때문에 아마 2시간이면 몇 백만 명 가까이 갈 수 있지 않을까? 역시 소문의 속도는 대단하다. 말 없는 말이 천리 간다는 것이 맞는 말인 것 같다”(인터넷).
우리는 교회 안에서 악성 루머를 퍼트려서는 아니 됩니다. 인터넷을 보니까 한 미국 이민 한인 교회 당회에서 2007년12월9일 날짜로 “건강하고 바른 교회 정립을 위하여, 소위 ‘퀸사모’라고 자칭하는 불법 집단에 대한 권면과 경고의 글”라는 제목 아래 글이 나와 있어 좀 보았습니다. 그 글 내용 중 보니까 “자칭 ‘퀸사모’에 대한 권면과 경고의 배경”이란 소주제 아래 이런 글이 있어 나눕니다: “본 교회 당회는 지난 1년 6개월 동안 있었던 자칭 ‘퀸사모’라는 일부 극소수 그룹이 악성루머를 퍼뜨리고 불온 문서를 일반 성도들에게 보낸 모든 사실에 대해서 증거를 확보하고 있으며, 관련된 것으로 판단되는 성도들에게 직접적으로 물어본 결과 단 한 사람도 ‘퀸사모’ 멤버임을 자인하는 성도가 없었다. 이들은 교회에 악의적인 루머를 퍼뜨리고 특정성도 또는 사역자를 근거 없이 모함해 왔지만 사랑의 권면과 하나 되는 교회를 위하여 지금까지 그 소수그룹의 회개를 바라며 기다려왔던 것이 사실이다. 조사 결과, 이들의 언사와 행동은 성도라고 불려서도 안 될 정도로 악의적이고 근거 없는 모함에 불과했다.” 오히려 우리 교회는 안디옥 교회처럼(행11:22) 소문난 교회가 돼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과 함께 하므로 수다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주님께 돌아오고 있다는 소문이 나는 교회가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21절). 또한 우리 교회는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우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는 교회가 되길 기원합니다.
마지막 넷째로, 사탄의 전략(유혹)은 “포행”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1장 35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포행을 인하여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소동과 요란의 소문을 듣고 바울이 백성들에게 붙잡혀 매 맞고 있었을 때(32절) 로마 주둔군의 최고 사령관이 천부장이 백부장들과 군사들과 도착하여(32절) 무리들에게 바울이 “누구며 무슨 일을 하였느냐”고 물었을 때(33절) 사건의 진상을 소동으로 인하여 파악할 수 없는 관계로 우선 바울을 주둔군 진영 안으로 데려 가라고 명했습니다(34절). 이에 바울이 인솔을 받아 느린 걸음으로 진영으로 연결된 계단으로 갈 때 군인들은 무리들의 폭력전인 조짐을 포착 하고 바울을 들고 갔습니다(35절)(유상섭). 군인들이 이렇게 심상치 않은 조짐을 파악한 것은 백성의 무리가 그들을 뒤따르며 바울을 제거하라고 외쳐댔기 때문입니다[(36절) “우리가 그를 없이 하자”가 아니라, “너(천부장)는 그를 제거하라”임](유상섭). 이러한 외침은 천부장에게 바울을 제거하라고 압력을 가하는 외침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도 총독 빌라도에게 “너는 이 사람을 제거하고 우리에게 바라바를 석방하라”고 외쳤던 것(눅23:18)을 생각할 때 사도 바울도 예수님처럼 고난당하는 모습을 우리는 봅니다. 결국 이 사탄의 유혹인 “포행”의 최종적인 목적은 사람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사탄과 그의 종들은 유혹하고 악행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과연 교인들끼리 다투고 싸우면서 폭력적일 수가 있습니까? 욕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가 봅니다. 교회 안에서나 특히 교회 밖에서 교회 직분자들이 서슴없이 욕하는 것을 들을 때 참 담담합니다. 어느 교회는 제직회 때도 장로님이 화가 나서 욕을 하고 다투었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교회 안에서 멱살을 잡고 또한 교회 밖에서 혈기 있는 세상 사람들처럼 폭력을 사용한다면 과연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이러한 폭력적인 행동을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난 주 한국 야후 인터넷 판 뉴스를 보니까 술자리에서 목사 세 사람이 술 먹다가 아마 교회 다니지 않는 분인지 어떻게 목사님이 술을 먹냐고 라고 말해서 폭행한 사건을 기사로 읽은 기억이 납니다. 참 할 말이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폭언과 폭력을 휘둘러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결코 포행자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포행을 당하고 고난을 당할지라도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림에 있어서 복음 전하는 사명 외에도 주님을 위해서 고난 받는 것도 사명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탄은 교회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교회 안에서 교인들을 충동시켜 소동을 일으키며 교회를 요란케 하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그는 악성 루머(소문)까지 퍼트리게 만들어서 교회의 평화를 깨고 질서를 무너트리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폭언과 폭력적인 행동으로 인하여 결국 하나님의 자녀를 공동체 안에서 좇아내는(제거하는) 일까지 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사탄의 공격에 대항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의 전략인 충동(질), 소동(요란), 소문 및 포행을 우리는 대항해야 합니다. 바라기는 우리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질서가 있는 교회, 평화가 있는 교회, 믿음의 소문이 나는 교회, 그리고 사랑이 있는 교회가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