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영원한 생명을 가졌습니다.”

 

 

 

[요한일서 513-21]

 

 

여러분, 여러분은 영원한 생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유명한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영생” 또는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입니까? 이 말씀을 보면 성경은 영생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는데(롬5:12)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6:23). 여기서 “사망”이란 3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하나님으로부터 분리가 된 ‘영적인 죽음’과 (2) 몸과 영혼이 분리가 될 ‘육체적인 죽음’과 (3) 하나님과 영원하고 완전하게 분리되어 영원한 사망에 처하게 되는 ‘영원한 죽음.’ 그러나 “마지막 아담”(고전15:45)이신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기까지의 복종하심으로 말미암아(빌2:8)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18절, 현대인의 성경). 성경 로마서 6장 23절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여기서 "영생"이란 3가지를 의미합니다: (1) 영생이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엄마 뱃속의 있는 아기가 탯줄로 엄마와 연결돼 있으므로 생명이 있는 것처럼 “영원한 생명”(요일1:2; 5:20)이시요 ‘영원한 탯줄’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연결돼 있는 것이 바로 영생이라는 말입니다. (2) 영생이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성경 요한복음 17장 3절을 보십시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다시 말하면, 영생이란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 따라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요일1:3). (3) 영생이란 주님의 재림 때 몸은 변화하던지(그 때까지 우리가 살아 있다면)(고전15:52-53) 또는 부활하여(그 때에 우리가 이미 죽었다면) 영혼과 연합되어 새 하늘과 새 땅인 천국에 들어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사는 것을 말합니다(살후4:14-16; 계시록 21:1).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할 때 영생을 그저 내세의 영원한 생명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 이유는 영생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현재에도 우리가 부분적으로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생”이란 단어가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곳은 바로 요한복음입니다. 원어 헬라어로 "영생"은 "조에(life) 아이오니오스(eternal)"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조에"(생명)라는 말과 "아이오니오스" (영원한)라는 말이 합쳐진 말입니다. 즉, "영생"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2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인터넷): (1) 이것은 첫째로 시간적으로 "끝없이 지속되는 생명"을 의미하고, (2) 둘째로 질적으로 "인간의 삶과는 다른 신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영생이란 말에는 시간적으로 영원한 삶이란 의미와, 질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누리게 되는 신적인 삶이란 의미를 둘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을 보면 "영생"의 의미는 공관복음(마태복음/ 마가복음/누가복음)처럼 "내세에서 누릴 영원한 축복"도 의미하지만 그보다 "현재"에 누리는 축복을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주님을 믿는 자는 이미 영원한 생명을 가졌으며, 그 축복을 주님 안에서 현실 속에서도 누릴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과연 현재에 우리가 누리는 영생의 축복은 무엇입니까? 적어도 3가지가 있습니다: (1) 영원하신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을 통하여 친밀한 인격적인 교제를(요17:3) 나누는 가운데 주시는 내세의 축복들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하나님의 신적 성품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성경 베드로후서 1장 4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십시오: “이것으로 그리스도는 아주 소중하고 중대한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으며 이 약속을 통해 여러분이 세상의 파괴적인 정욕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도록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현재 이 땅에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분적으로 누리는 영생의 축복은 바로 성령님의 성화 가운데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2) 우리가 현재 부분적으로 누리는 영생의 축복은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된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갈 때에 우리는 천국의 기쁨을 부분적으로나마 맛보는 것입니다. 영생이 있는 신앙인들은 예수님에게 순종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중계명 인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와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합니다(요 3:36; 마 22:37, 39). 그리할 때 우리는 천국 시민권자들로서(빌3:20) 하늘나라에서의 천국 생활을 이 땅에서도 부분적으로 합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에 구원을 이루는 삶이요(2:12), 이것이 바로 이 땅에서 영원한 생명을 부분적으로 누리는 삶입니다. (3) 우리가 현재 부분적으로 누리를 영생의 축복은 바로 평안입니다. 비록 지금 우리가 평화가 없는 세상에 살아가고 있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부분적으로나마 영생의 축복인 하나님의 평강을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누리고 있습니다.

 

성경 요한일서를 보면 “영생” 또는 “영원한 생명”이란 단어가 적어도 6번 나옵니다:

 

  • (1:2, 현대인의 성경) “이 생명이 세상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직접 보았으므로 그분을 여러분에게 증거하며 전합니다. 그분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 (2: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 (3:14, 현대인의 성경)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에 죽음에서 벗어나 이미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 (5:11-12, 현대인의 성경) “그 증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분의 아들 안에 있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모신 사람은 생명을 가졌으나 아들을 모시지 않은 사람은 생명이 없습니다.”

 

  • (5:13, 현대인의 성경) “나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이 글을 씁니다.”

 

  • (5:20,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심으로 참되신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되신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되신 하나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저는 이 여섯 성경 구절 말씀을 ‘샌드위치 법’[헬라어 “교차대구법”(chiasm)]으로 이렇게 도표를 그려보았습니다:

 

(A) (1장 2절) “…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 …”

 

(1) (2장 25절)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 … 영원한 생명이니라”

 

(a) (3장 14절)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에 … 이미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

 

(a’) (5장 11-12절) “그 증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과 … 하나님의 아들을 모신 사람은 생명을 가졌으나 …”

 

(1’) (5장 13절)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 믿는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이 글을 씁니다”

 

(A’) (5장 20절) “예수 그리스도는 …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그리고 저는 이 ‘샌드위치 법’의 여섯 성경구절을 유사한 성경구절끼리 묶어보았습니다: (A) 와 (A’)와 묶었고, (1)과 (1’)를 묶었고, (a)와 (a’)를 묶었습니다. 그랬을 때 저는 “영생” 혹은 “영원한 생명”이란 단어가 나오는 이 요한일서의 여섯 성경구절을 통하여 사도 요한이 우리에게도 주고자 하는 3가지 핵심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3가지 핵심 메시지 이것입니다: (1) 참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이십니다[(A)(1:2) & (A’) (5:20)]. (2)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해 주셨고, 그 약속을 진실 되고 신실하게 지키시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지금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1) (2:25) & (1’) (5:13)]. (3)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우리는 이미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들로서 형제를 사랑합니다[(a) (3:14) & (a’) (5:11-12)]. 기도하며 소망하며 바라는 것은 참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생명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우리는 성령님의 성화의 역사 속에서 예수님을 닮아가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대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으므로 우리가 이미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들 답게 예수님의 이중 계명대로 우리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며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 같이 사랑하므로 이 땅에서도 부분적으로 천국 생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주님만 믿으면 모두 구원 얻으며 영생복락 면류관을 확실히 받을 줄 확신하십니까?(새 찬송가 287장, “예수 앞에 나오면” 후렴) 성경 에베소서 1장 3절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모든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려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는 구원을 받으며 영적인 복, 영원한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받은 영원한 영적인 축복은 무엇입니까? 적어도 5가지가 있습니다:

 

(1) 우리가 이미 받은 영원한 영적인 축복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연결)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분리된 영적으로 죽었고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과 원수 된 죄인이었습니다(롬5:10, 12). 그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그리스도와 아무 관계가 없었고”(현대인의 성경)]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지만(엡2:12)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16절)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습니다(15절, 롬5:10). 다시 말하면, 영원한 생명(요일1:2; 5:20)이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분리되어 영적으로 죽었고 또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되었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첫 번째로 누리고 있는 영원한 영적 축복입니다.

 

(2) 우리가 이미 받은 영원한 영적인 축복은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한 사랑의 교제를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어 하나님과의 관계 및 교제가 단절되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엡2:16)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요일3:1, 현대인의 성경)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을 통해 사랑의 교제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1:3, 현대인의 성경). 이것이 바로 “영생”(영원한 생명)입니다. 성경 요한복음 17장 3절을 보십시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즉,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이 땅에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원한 생명인데 그 영원한 생명이란 참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아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한 사랑의 교제를 누리게 하고 계십니다. 그러다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면서 주님께서 우리를 아신 것같이 우리가 온전히 알게 되어 온전한 사랑의 교제를 충만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고전13:12, 현대인의 성경). 이것이 바로 우리가 두 번째로 누리고 있으며 장차 누릴 영원한 영적 축복입니다.

 

(3) 우리가 이미 받은 영원한 영적인 축복은 성령님의 성화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신적 성품에 참예하게 되는 것으로서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첫째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창2:17; 3:6; 롬5:12) 하나님과 분리되어 영적으로 죽었고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창1:27)을 상실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고전15:45)이시요 “하나님의 형상”(고후4:4)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시므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과 화목케 되어 그 상실했던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었습니다.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이란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성경 베드로후서 1장 4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십시오: “이것으로 그리스도는 아주 소중하고 중대한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으며 이 약속을 통해 여러분이 세상의 파괴적인 정욕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도록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여케 되었다는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이 된다는 말이 결코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께서 우리를 거룩케(성화) 하시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심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성령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시다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되고 주님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고후3:18). 그리고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낮은 몸[“천한 몸”(현대인의 성경)]을 주님의 “영광의 몸의 형제와 같이 변하게 하”실 것입니다(빌3:21).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세 번째로 누리고 있으며 장차 누릴 영원한 영적 축복입니다.

 

(4) 우리가 이미 받은 영원한 영적인 축복은 우리는 성령님의 열매인 사랑으로 예수님의 이중계명인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천국 시민권자들로서 하늘나라에서의 천국 생활을 이 땅에서도 부분적으로 하므로 천국의 기쁨을 부분적으로나마 맛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았을 때 성경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5:5). 즉,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그 순간에 성령님과 하나님의 신적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는 “성령의 열매”[(갈:5:22) 여기서 “열매”라는 헬라어 단어는 단수임)]인 “사랑”(그 외에 8가지는 “사랑”에 다 포함된다고 생각함)을 맺으시사(22-23절) 우리로 하여금 천국 계명인 예수님의 이중계명 -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와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22:37, 39; 요3:36) - 말씀에 순종케 하고 계십니다. 이 예수님의 이중계명은 천국의 계명으로서 “하늘에 속한 사람들”(고전15:48, 현대인의 성경)이요 하늘에 시민권이 있는(빌3:20) 천국 시민권자들인 우리가 지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사랑할 능력이 없지만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십니다[우리가 “자발적으로 행동하도록” 우리 안에서 “일하십니다” (현대인의 성경)](빌2:13). 이것이 바로 현재에 구원을 이루는 삶입니다(12절: “…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의 교제를 나누면서, 성령님의 성화의 역사 속에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가운데, 성령님의 열매와 사랑케 하시는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가 예수님의 이중계명을 순종할 때에 우리는 이 땅에서도 하늘나라에서의 천국 생활을 부분적으로 하므로 천국의 기쁨을 부분적으로나마 맛보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우리 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가 홀연히 변화되어 예수님의 형상을 온전히 본받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영적인 몸을 입게 되어 하늘나라인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계21:1-2)에 들어가서 완전한 성령 충만, 사랑 충만하여 천국 계명인 예수님의 이중계명을 순종하며 살아가므로 영생복락을 충만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네 번째로 누리고 있으며 장차 누릴 영원한 영적 축복입니다.

 

(5) 우리가 이미 받은 영원한 영적인 축복은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는 것입니다.

 

“평강의 왕”이시요(사9:6) 또한 “평강의 하나님”(롬15:33)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5:1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시므로(골1:20)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있습니다(롬5:1). 또한 우리는 우리의 화평이신 예수님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갈라놓은 담을 헐어서 둘이 하나가 되게 하”시되 “그들을 원수로 만들었던 계명의 율법을 예수님이 자신의 육체적인 죽음으로 폐지하신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로운 백성으로 만들어 화목하게 하고 또 십자가로 그들의 적개심을 죽이고 둘을 한 몸으로 만들어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으므로(엡2:14-16, 현대인의 성경) 우리 이웃과도 화평을 누리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 우리가 평화가 없는 세상에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의 평강을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부분적으로 누리기에 우리는 새 찬송가 413장 “내 평생에 가는 길” 가사처럼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을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1절과 후렴)라고 하나님께 믿음으로 찬양을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우리 주 예수님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우리를 데리고 주님이 계신 하늘나라에 있게 하실 때에(요14:3) 우리는 하나님의 평강을 완전히 그리고 충만하게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다섯 번째로 누리고 있으며 장차 누릴 영원한 영적 축복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5장 13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현대인의 성경) “나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이 글을 씁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여러분은 영원한 생명을 가졌습니다”란 제목 아래 오늘 본문 요한일서 5장 13-21절서 말씀하고 있는 5가지 확신(certainty)(죤 맥아더)에 대해서 묵상하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 확신은, 구원의 확신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확신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5장 13절을 다시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현대인의 성경) “나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이 글을 씁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편지를 쓰면서 자기가 왜 이 편지를 수신자들에게 쓰는지 그 목적이 한 6가지 있다고 생각합니다:

 

(1) 요한일서 14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현대인의 성경)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넘치는 기쁨을 나누려고 이 글을 써 보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자신이 이 요한일서 편지를 쓰는 첫 번째 목적은 “우리의 기쁨”이 그 수신자 형제, 자매들에도 “충만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으로 다시 말한다면, 사도 요한은 그 수신자 형제, 자매들과 “함께 넘치는 기쁨을 나누려고 이 글을 써 보”냈다는 말입니다(4절, 현대인의 성경). 여기서 사도 요한이 말한 “우리의 기쁨”[“넘치는 기쁨”(현대인의 성경)]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면서 누리는 기쁨입니다(3절). 사도 요한은 그 수신자 형제, 자매들도 그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의 충만한 기쁨을 누리길 원했기에 그 목적을 가지고 요한일서 편지를 쓴 것입니다.

 

(2) 요한일서 21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현대인의 성경) “나의 믿음의 자녀들이여,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고 나는 이 편지를 씁니다. ”].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자신이 이 요한일서 편지를 쓰는 두 번째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이유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신 빛이신 하나님(1:5)과 교제한다고 하면서 죄를 짓는 어두운 생활을 그대로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진리대로 살지 않은 거짓말쟁이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6절, 현대인의 성경). 또한 그 이유는 “하나님이 빛 가운데 계시는 것과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서 살면 우리는 서로 교제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7절, 현대인의 성경). 주님 안에서 형제, 자매의 진정한 수평적인 사랑의 교제는 먼저 우리가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수직적인 사랑의 교제를 전제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수직적인 사랑의 교제는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시는 것과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서 행하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 말은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한다고 하면서 죄를 짓는 어두운 생활을 그대로 한다면”(6절, 현대인의 성경) 그것은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빛 되신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진정한 수직적인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주님 안에서 형제, 자매들과도 진정한 수평적인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의 “믿음의 자녀들”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게 하려고” 이 요한일서 편지를 쓴 것입니다(2:1, 현대인의 성경).

 

(3) 요한일서 27-8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자신이 이 요한일서 편지를 쓰는 세 번째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참된 예수님의 계명을 순종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참된 예수님이 계명이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3:23, 현대인의 성경). 사도 요한은 그 수신자들이 “그 형제를 미워하는”(2:9) 죄를 범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길 원했습니다. 그 이유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8절). 그 이유는 그들을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3:1, 현대인의 성경).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그의 요한일서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이 빛이신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하고 있다면 더 이상 형제를 미워하는 죄를 짓는 어두운 생활을 하지 않고(1:6, 현대인의 성경) 예수님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로워서(3:7) 오히려 형제를 사랑하는 의를 행하는(2:29; 3:10) 빛 된 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 속에 온전하게 되어(2:5) 그들 속에 거리낌이 없는(10절) 진리에 속한 자들이요(3:19) 또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 답게 사는 것이기에(14절, 현대인의 성경) 사도 요한은 이 요한일서 편지를 쓴 것입니다.

 

(4) 요한일서 212-14절을 보십시오: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자신이 이 요한일서 편지를 쓰는 네 번째 목적은 그들의 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함을 받았고, 그들이 태초부터 계신 분을 알았으며 또한 그들이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들의 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함을 받았다는 것은 비록 그들이 성령님의 통해 빛 되신 하나님 아버지와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를 하면서 죄를 범하지 말아야했지만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한다고 하면서 죄를 짓는 어두운 생활을 그대로 한다면”(1:6, 현대인의 성경)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9절). 그리고 만일 누가 죄를 짓더라도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우리 죄를 위해 화목 제물이 되셨던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에(2:1-2, 현대인의 성경) 그들의 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하고자 사도 요한은 이 요한일서 편지를 그 수신자들에게 쓴 것입니다. 또한 사도 요한은 그 수신자들이 태초부터 계신 생명의 말씀이시요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1:1-3) 알고 있었기에 이 요한일서 편지를 그들에게 썼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의 죄가 사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있었기에 사도 요한은 그들로 하여금 더욱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또한 친밀한 교제를 가지길 원해서 그들에게 이 요한일서 편지를 쓴 것입니다. 또한 사도 요한은 그 수신자들이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흉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에(2:14) 그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다 지나갈 (17절)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고(15절)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이 되길 원했기에(17절) 이 요한일서 편지를 그들에게 썼습니다. 특히 그는 “지금은 마지막 때”요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고(18절) “거짓말하는 자”(22절)와 그들을 ‘미혹하는 자들”(26절)과의 영적 싸움에서 그 수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서 계속해서 싸워 승리의 삶을 살기를 원하여(14절, 현대인의 성경) 이 요한일서 편지를 그들에게 쓴 것입니다.

 

(5) 요한일서 221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이라.”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자신이 이 요한일서 편지를 쓰는 다섯 번째 목적은 그들이 이미 “진리를 알고 거짓은 진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21절, 현대인의 성경). 사도 요한은 “지금은 마지막 때”인줄을 알고 있었고 이미 “많은 적그리스도”가 나타났으며(18절) 그들은 “거짓말하는 자”들이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며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적그리스도”[“그리스도의 원수”(현대인의 성경)]임을 알고 있었습니다(22절). 그리고 그는 참된 그리스도인이야 말로 마지막 때에 나타난 많은 적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19절).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 수신자 형제, 자매들이 이미 거룩하신 하나님께 성령을 받아 “이 모든 것”(20절, 현대인의 성경)인 “지금은 마지막 때라”는 사실과 “지금은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다는 것(18절)을 알고 있었기에 이 요한일서 편지를 그 수신자 형제, 자매들에게 써서 그들로 하여금 “처음부터 들은 것”을 그들 안에 거하게 하”고자[“잊지 않도록 하”고자(24절, 현대인의 성경)] 이 요한일서 편지를 쓴 것입니다. 여기서 그들이 “처음부터 들은 것”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도 요한이 직접 보고 그들에게 전한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가 아닐까요?(1:1-2) 한 마디로, 요한일서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이 “처음부터 들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거짓말하며 미혹하는 적그리스도들이 나타나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고,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있었기에(2:22) 사도 요한은 이 요한일서 편지를 그 수신자들에게 써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입니다”(5:1, 현대인의 성경),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니면 누가 세상을 이기겠습니까?”(5절, 현대인의 성경)라고 말하므로 그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진리”(2:21)인 예수님이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음을 잊지 않도록 하고자 이 요한일서 편지를 쓴 것입니다(24절, 현대인의 성경).

 

(6) 요한일서 513절을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자신이 이 요한일서 편지를 쓰는 여섯 번째 목적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들은 이미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 수신자 형제, 자매들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1:2, 현대인의 성경)를 믿되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고(5:1) 또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들이 이 “진리”를 알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거짓”은 “진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2:21, 현대인의 성경) 이 요한일서 편지를 그들에게서 써서 “하나님의 아들을 모신” 그들, 즉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1:2; 5:20)를 믿는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영원한 생명”을 이미 가졌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이 요한일서 편지를 쓴 것입니다(5:11-13, 현대인의 성경).

 

오늘 본문 요한일서 5장 13절 말씀을 보면 사도 요한은 왜 자기가 이 요한일서 편지를 수신자들에게 쓰는지 그 목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목적이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은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동일한 저자 사도 요한이 쓴 요한복음 20장 31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왜 요한복음을 기록했는지 그 목적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여러분이 믿게 하고 또 여러분이 믿고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이다”(현대인의 성경). 여기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이중적인 목적(twofold purpose)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1)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게 하는 것과 (2)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이름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요한일서 5장 13절에서 왜 요한일서를 기록했는지 그 목적을 말하고 있는데 그 목적이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현대인의 성경). 그 말은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쓴 목적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직도 믿지 않는 사람들(unbelievers)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므로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었지만 그가 요한일서를 썼을 때에 그 목적은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원한 생명을 얻은 신자들 (believers)로 하여금 구원의 확신(assurance of salvation)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MacArthur).

 

우리가 2021년 2월 17일 수요기도회 때 원로 목사님을 통해 “구원의 확신”이란 제목 아래 로마서 8장 28-29절 말씀을 받았었습니다. 성경 로마서 8장 28-29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구원”이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18절)으로서 ‘영생’(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구원”이란 미래의 구원의 완성을 말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우리가 부활/변화하여 천국에 들어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영생복락을 누리면서 영원히 살 것을 말합니다. 어떠한 사람들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가 하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28절)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28절)란 “곧 그(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28절)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성부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로서(28절) 반드시 구원을 받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이란 구원이고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란 ‘효력 있는/특별한 부르심’을 입은 자들로서 “하나님의 영(성령님)이 하시는 일로서 우리의 죄와 비참을 깨닫게 하시고(회개), 또 우리의 마음을 밝혀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며, 우리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능히 우리를 권하여 복음 가운데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하신 것(회심)”입니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31). 이러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28절)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 말씀의 의미는 우리의 일평생 모든 것(우리의 죄도 포함)을 합해서 최고의 선인 ‘구원’을 이루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함을 배웠습니다.

 

여러분, 성경 요한일서 5장 13절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은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현대인의 성경). 우리가 이미 묵상한 요한일서 5장 11-12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현대인의 성경) “그 증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분의 아들 안에 있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모신 사람은 생명을 가졌으나 아들을 모시지 않은 사람은 생명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증거”(9절),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신 증거(10절)를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11절). 한 마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는 말씀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영생이 있다는 것입니다(12절). 그 이유는 그들은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셨기 때문입니다(12절, 현대인의 성경). 여러분은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셨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저와 여러분은 이미 영원한 생명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을 가진 우리는 더욱 힘써 우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므로 언제든지 실족하지 않아야 합니다(벧후1:10). 그리고 우리는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님의 일에 열심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고전15:58, 현대인의 성경).

 

둘째 확신은, 기도 응답의 확신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만 구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확신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시면서 기도 응답의 확신이 있으십니까? 제가 2020년 11월 8일에 시편 55편 16-17절 말씀을 묵상하다가 “왜 나는 기도 응답의 확신이 없는 것일까?”라는 제목 아래 쓴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왜 나는 기도 응답의 확신이 없는 것일까? 왜 나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안서는 것일까? 어쩌면 그 이유는 지금 나는 상황에 이끌림을 받아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 상황이 내가 보기에 좋아지고 있으면, 나는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시고 계시다는 생각 속에서 기도의 확신을 갖게 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상황이 내가 보기에 나빠지고 있으면, 나는 기도의 확신을 가질 수가 없다. 어쩌면 그 이유는 지금 나는 내 기대감에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 기대감은 고통당하고 있는 지체들이 그 고통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더 이상 고통을 당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중독이나 질병에서 고침을 받길 원하여 기도하고 있다. 이러한 기도의 기대는 당연하고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만일(?)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기대한대로 되지 않고 있으면 어떻게 기도의 확신을 가지고 계속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나?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의 기도를 배우고 싶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 26:39). 내가 기도 응답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선 상황이나 기대에 초점을 맞추고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에 초점을 맞추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구원이시다. 예수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이다.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는 이 구원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간구케 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4:8, 16). 사랑의 하나님께서 나같이 영적으로 죽고 또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과 원수 된 죄인을 먼저 사랑하셔서 구원해 주셨다. 이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을 알고 믿고 있다면 성부 하나님께 하나님의 뜻대로 나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롬8:27) 성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기도 응답의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5장 14-15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우리는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뜻대로만 구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구한 것을 받은 것도 알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 요한이나 요한일서의 편지를 받는 수신자 성도들만 가질 수 있는 기도 응답의 확신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어 영원한 생명을 얻은 저와 여러분도 이 기도 응답의 확신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 비결은 “하나님의 뜻대로만 구하면”입니다(14절, 현대인의 성경). 다시 말하면, 우리가 기도 응답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비결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만 구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적어도 3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 첫째 문제는,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가 대부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실제로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습니까? 실제로 우리는 성경 66권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이 뜻조차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을 보면 성경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그런데 과연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 하나님의 뜻대로 항상 기뻐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제가 되게 해주세요’라고 몇 번이나 하나님께 기도했나요? 또 다른 예는, 성경 데살로니가전서 4장 3절을 보면 성경은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의 뜻은 여러분이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과연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얼마나 하나님의 뜻대로 저를 거룩하게 해주세요 라고 간구했나요? 또 다른 예는, 성경 요한복음 6장 40절을 보면 성경은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과연 우리가 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예수님을 믿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이것을 위해 얼마나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나요? 이렇게 우리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기에 우리의 기도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만 기도하지 않고 있는 게 큰 문제라 생각합니다.

 

(2) 둘째 문제는,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 우리의 뜻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내용들을 살펴보면 대부분은 우리는 우리의 뜻을 하나님께 구했지 하나님의 뜻을 구한 기도는 그리 많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는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뜻대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 셋째 문제는,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의 뜻대로 하나님께 기도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지 않고 우리의 뜻을 하나님께 관철하려고 하는 기도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람산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신 예수님의 기도를 본받아야(배워야) 합니다: “아버지, 만일 아버지의 뜻이면,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되게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하여 주십시오” (눅22:42, 새번역).

 

새 찬송가 549장 “내 주여 뜻대로” 3절 가사는 이렇습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아멘.” 이 찬송가를 작사한 분은 바로 벤쟈민슈몰크 목사님입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온 유럽과 전 독일을 휩쓴지 100여년이상의 세월이 지나면서 루터교회는 쇠퇴일로를 걷게되었습니다. 종교개혁가의 후손이기도 한 벤쟈민 슈몰크 목사는 마지막 하나 남은 조그만 교회의 목사로 넓은 지역을 순회하며 교인들을 섬기고 있었는데.. 그러나 넓은 지역을 두 부부가 순회하기엔 역부족이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 먼 곳으로 심방 가는 날이 많게 되었습니다. 벤쟈민 슈몰크 목사가 32살이 되던 해인 1704년 그해 겨울. 아들 둘을 남겨둔 채 슈몰크 부부는 먼 심방을 가게 되었는데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오래전부터 미뤄온 심방이어서 다녀와야만 했습니다. 다음날 먼 심방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살던 집이 불이 나 전소되어 이미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문제는 집이 아니라 그 안에 자고 있던 두 아들이었습니다. 슈몰크 부부는 울부짖는 짐승처럼 미친 듯이 잿더미를 파헤치기 시작했고 자고 있던 두 아들은 서로 부둥켜 안 은채 새까맣게 타죽어 있었습니다. ‘아아! 어찌 이런 일이..다른 일도 아니고 하나님의 일을 하다 돌아왔는데 사랑하는 두 아들이 불에 타 죽을 수 있단말인가? ...” 슈몰크 부부는 처절하게 한참을 울부짖었습니다. 고난 중에 기진한 슈몰크는 그 순간 자기를 위해 죽으신 겟세마네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고 '살든지 죽든지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란 시문이 순간 떠올랐습니다.”(인터넷). 그래서 벤쟈민 슈몰크 목사님이 작사한 가사가 바로 “내 주여 뜻대로” 찬송가입니다:

 

(1절)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 간 주 인도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2절)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큰 근심 중에도 낙심케 마소서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3절)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아멘.”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편지에서 기도에 관하여 오늘 본문 요한일서 5장 14-15절 외에 3장 21-22절에서도 이미 언급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현대인의 성경)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양심이 우리를 책망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여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3장 21-22절에서 하나님께 기도 응답 받는 비결은 “우리가 그(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그(하나님)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으로서 그 하나님의 계명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23절). 즉, 우리의 믿음은 살아 있는 믿음으로서 예수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때에 “우리는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해야 합니다(18절). 그러면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할 수 있습니다(19절). 그리할 때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21절). 이것은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 2장 10절에서 이미 말한 “거리낌이 없”는 사랑입니다. 이 말씀을 한 후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요한일서 5장 14절에 와서는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우리는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뜻대로만 구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기도 응답의 확신은 “하나님의 뜻대로만 구하면”된다고 말씀하고 있지만 요한일서 3장 22절을 보면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교훈을 받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기도 응답의 비결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서 하나님의 뜻대로만 구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승리장로교회 41주년 설립 기념 로마서 8장 암송의 시간을 준비하면서 은혜 받은 로마서 8장 26-27절과 34절 말씀이 그 문제의 해결이라 믿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6-27, 34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이 말씀에서 받은 위로와 힘은 “성령님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신다는 사실입니다(26절). 여기서 우리의 연약함이란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26절). 왜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본문 요한일서 5장 14절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만 구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롬8:26). 그런데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로마서 8장 26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성령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까?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고 계십니다(26절). 친히 간구하시되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대로”(27절)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고 계십니다. 흥미로운 점은 여기서 성경은 “성령도”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로마서 8장 35절에 가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 예수님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은 감란 산에서 “아버지, 만일 아버지의 뜻이면,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되게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하여 주십시오”(눅22:42, 새번역)라고 기도하셨던 분으로서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구하고 그 뜻에 순종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우편에서 간구하실 때에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간구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즉,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간구하시고, 성령 하나님도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성부 하나님께 간구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 성자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의 간구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외면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는 성자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만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요한일서 5장 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구한 것을 받은 것도 알게 됩니다”]. 성자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만 간구하고 계시기에 우리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뜻대로만 구하면”(14절,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15절, 현대인의 성경).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기도 응답의 확신입니다.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요한일서 5장 16-17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만” 기도하는 것에 대한 실례(illustration)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현대인의 성경)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보게 될 때 그것이 죽을죄가 아니라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를 살려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죽을죄가 있습니다. 그것에 대하여 나는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의롭지 못한 모든 것이 죄이지만 죽지 않을 죄도 있습니다”]. 이 실례를 보면 사도 요한은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십시오”)라고 권면하고 있는데 여기서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이란 무엇일까요?(16, 17절) 저는 그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죄’라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 근거는 요한일서 3장 14절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에 죽음에서 벗어나 이미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좀 달리 말한다면, 그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그 형제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성경 요한일서 3장 15절을 보십시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현대인의 성경)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살인자입니다. 살인자에게 영원한 생명이 없다는 것은 여러분도 알고 있는 일입니다”]. 이러한 죄를 계속해서 짓고 있는 형제를 보게 될 때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라는 것입니다(5:16).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현대인의 성경)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를 살려주실 것입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6절).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만 구”는 기도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14절, 현대인의 성경).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현대인의 성경)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라고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눅23:34). 성경 사도행전 7장 60절을 보면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51절)이 스데반 집사를 돌로 칠 때에 스데반 집사는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현대인의 성경) “주님,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소서”]라고 기도한 후 숨을 거뒀습니다(60절).

 

그런데 오늘 본문 요한일서 5장 16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죽을죄가 있습니다. 그것에 대하여 나는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말씀의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사도 요한이 “구하라 하지 않”는 “사망에 이르는 죄”가 무엇일까요? 그 “사망에 이르는 죄”가 무엇이기에 사도 요한은 “그것에 대하여 나는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제 생각엔 그 “사망에 이르는 죄”란 “거짓말하는 자”(2:22)인 “적그리스도”(18절)를 따르는 “많은 적그리스도”들(18절)과 “미혹하는 자들”(26절)의 “모든 거짓” (21절)대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 하”며,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22절) 것을 가리키지 않나 생각합니다. 어쩌면 사도 요한의 이 요한일서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 가운데에는 거짓 선생들(the false teachers)의 거짓말에 미혹이 되어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고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 공동체 안에 있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KJV 성경 주석). 이들은 요한일서 2장 19절의 말씀처럼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한 자들로서 이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를 따르는 적그리스도들의 영향을 받은 불신자들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절하므로 불신 속에서 죽음으로 결국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기에 사도 요한은 “그것에 대하여 나는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라고 편지를 쓰지 않았나 생각됩니다(5:16, 현대인의 성경).

 

제가 대학교 때 제자 훈련을 받으면서 배운 5가지 확신 중에 기도 응답의 확신 구절이 아직도 생각이 납니다. 그 성경 구절은 요한복음 16장 24절입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이 말씀을 배운 후 제 기억으로는 그 후에 제가 임원으로 섬기던 기독교 동아리에서 새벽기도회를 제가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말이 새벽기도회였지 오전 7시에 classroom 하나를 빌려서 기도회를 가졌었습니다. 그 때 저는 아마 대학교 4학년인가 5학년이었고 참석했던 후배들은 1, 2학년 지체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교를 갔었는데 처음 2년 동안은 한인 학생회에서 하는 새벽기도회에 참석하지 않았었습니다. 제 핑계는 공부하는데 너무 어렵고 바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3학년에 한인 학생회 회장이 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본을 보이고자 새벽기도회를 나아가기 시작했었습니다. 그 때 주신 은혜로 신학교를 끝까지 마쳤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그 신학교를 졸업한 후 저희 교회에 베버리(Beverly) 건물로 이주했었을 때 저는 전도사였음에도 불구하고 2층에 있는 방에서 자면서 3층 본당에서 담임 목사님이 인도하시던 새벽기도회를 참석하지 않았었습니다. 이렇게 저의 기도 생활은 엉망이었습니다. 신실성도 없었고 마지못해 새벽기도회라도 참여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다가 약 18년 전에 주님께서 저에게 약속의 말씀인 마태복음 16장 18절 말씀을 주시사 한국에서 다시 미국 승리장로교회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담임 목사로서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는 지금까지 목회를 해오면서 그 주님의 약속의 말씀만을 붙잡을 수밖에 없게 섭리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결코 저는 승리장로교회를 세울 수 없음을 점진적으로 깊이 깨닫고 인정케 하시는 가운데 오직 주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주님의 교회는 주님만이 세우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성령님께서는 로마서 8장 26-27절과 34절 말씀으로 기도 응답의 확신의 근거는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저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심과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저를 위해 친히 간구하고 계심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해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저의 책임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 따라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감람산에서의 간구처럼 “내 뜻대로 되게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눅22:42, 새 번역). 그리할 때 “우리는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뜻대로만 구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요일5:14, 현대인의 성경).

 

셋째 확신은, 승리의 확신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죄와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한다는 승리의 확신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5장 1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의 자녀는 계속해서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를 지켜 주시기 때문에 악한 마귀도 그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제자 훈련의 기초 가운데 배우는 5가지 확신(5 Assurances) 중에는 “승리의 확신” (Assurance of Victory)이 있습니다. 그 승리의 확신 성경 구절은 바로 고린도전서 10장 13절 말씀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여러분이 당한 시험은 모든 사람들이 다 당하는 시험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므로 여러분이 감당할 수 없는 시험당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여러분이 시험을 당할 때에 피할 길을 마련해 주셔서 감당할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여기서 “시험”이란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시험(God’s test)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시험”이란 사탄의 유혹(Satan’s temptation)을 가리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다가 “사탄의 유혹”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어 짧게 묵상한 글을 여러 개 적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쓴 “사탄의 유혹 (1)”은 성경 누가복음 4장 1-13절에 예수님께서 구속자로서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사탄에게 3가지로 유혹 을 당하셨는데 흥미로운 점은 예수님께서 사역을 끝내(완성하)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사탄이 예수님을 또 다시 3번 ‘스스로 구원 하라’고 유혹을 했다는 것입니다: (a) (눅23: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b) (36-37절)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c) (39절)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이 사탄의 유혹의 목적은 구속자로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대시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과 끝에는 사탄의 유혹이 있었습니다. “사탄의 유혹 (2)”은, 사탄이 우리에게 주는 유혹은 고난이 없는 십자가요, 십자가가 없는 복음이요, 복음이 없는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사탄의 유혹 (3)”은, 사도행전 21장에 근거하여 3가지로 짧게 묵상한 글로서 사탄의 유혹 3가지는 (1) “소동”(30절)과 (2) “소문”(31절)과 (3) “폭행”입니다(35절). 사탄은 지금도 교회 안에서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추측 속에서 충동질을 하게 만들어 소동을 일으키므로 교회를 요란하게 만들고 있습니다(“소동”). 그 뿐만 아니라 사탄은 지금도 교회 안에서 악성 루머를 퍼트립니다(“소문”). 그리고 사탄은 지금도 교회 안에서 사람들을 유혹하여 언행으로 폭행을 가하게 만들고 있습니다(“폭행”). 이 “사탄의 유혹”에 관한 글 3개 외에 저는 성경을 읽다가 “사탄의 전략”이란 제목 아래 9개의 묵상을 글을 써보았습니다. 존 맥아더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능한 한 거짓을 많이 퍼뜨려 진리를 부인하고 오염시키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 사탄의 주된 전략이다"(맥아더).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상은 비복음적이며 비진리인 거짓에 많이 오염돼 있습니다. 우리는 상호 존중이란 시대의 흐름 아래 진리와 거짓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혼동하고 있으며 혼합주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사탄의 전략”에 대해서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사탄의 전략도 좀 알아야 어떻게 대응할 수 있고 싸워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영적 전쟁을 함에 있어서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승리의 확신 성경구절인 고린도전서 10장 13절 말씀이 중요합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확신을 해야 하는 사실 3가지가 있습니다: (1)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사탄의 유혹은 당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라는 것입니다[(13절상) “여러분이 당한 시험은 모든 사람들이 당하는 시험입니다”(현대인의 성경)]. (2)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므로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유혹당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13절중)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므로 여러분이 감당할 수 없는 시험당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현대인의 성경)]. (3) 신실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유혹을 당할 때에 피할 길을 마련해 주셔서 감당할 수 있게 하신다는 것임[(13절하) “여러분이 시험을 당할 때에 피할 길을 마련해 주셔서 감당할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5장 18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의 자녀는 계속해서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를 지켜 주시기 때문에 악한 마귀도 그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여기서 사도 요한이 말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의 자녀”]란 우리가 이미 요한일서 5장 1절과 5절에서 배웠듯이 하나님께로부터 거듭난 자 또는 중생한 자를 말합니다. 요한일서 5장 1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거듭나 자/중생한 자란 의미입니다. 그리고 요한일서 5장 5-6절에서 사도 요한은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고 말씀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를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즉, 현대인의 성경은 요한일서 5장 5-6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누구나 세상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것을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니면 누가 세상을 이기겠습니까?”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3장 1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큰 사랑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 이 말씀들을 종합해서 생각할 때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즉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음으로 거듭나(중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요한일서 5장 18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하나님의 자녀)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고 말했는데 현대인의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는 계속해서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이 말씀은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 3장 9절에서도 이미 말씀을 했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의 자녀들은 계속해서 죄를 짓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씨가 그 사람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에게서 태어났으므로 계속 죄를 지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두 성경구절에서 사도 요한이 말씀하는 핵심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즉 하나님께로부터 거듭난(중생한) 자인 하나님의 자녀들은 “계속해서”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씨”가 하나님의 자녀들 속에 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3:9).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의 씨”란 무엇일까요? 성경 베드로전서 1장 23-25절을 보십시오(현대인의 성경): “여러분이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않을 씨로 된 것이며 영원히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과 같습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영광은 들의 꽃과 같아서 그 풀이 마르고 꽃은 떨어지나 주의 말씀은 영원히 존재한다.' 이 말씀이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기쁜 소식(복음)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씨”(요일3:9)란 하나님의 “썩지 않을 씨”(벧전1:23)로서 그것은 “영원히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요(23절), 즉 하나님의 “복음”입니다(25절). 그리고 이 “복음”은 로마서 1장 16절을 보면 “모든 믿는 자게에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현대인의 성경) “모든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을 종합해서 생각할 때 요한일서 3장 9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씨”란 “영원히 살아 있는 하나님의” “복음”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생각합니다. 그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하나님의 자녀들 속에 거하고 있기에 “계속해서”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9절).

 

그런데 실제로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인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경 요한일서 3장 2-3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장차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예수님이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어 그분의 참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희망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처럼 자신을 깨끗이 지켜야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이미 3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1) 이 말씀이 내포된 뜻은 장차 예수님이 나타나시면(이 세상에 다시 오시면) 우리가 예수님처럼 죄를 범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죄를 알지도 못하는 죄가 없는 사람들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주님을 향하여 가진 미래의 소망입니다(3절). 마지막 나팔이 나면 우리는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되(고전15:51) 주님께서는 우리의 “낮은 몸”(“천한 몸”)을 변화시키시사 자기의 “영광의 몸”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변하게 하실 것입니다(빌3:21). 그 영광의 몸은 예수님처럼 죄를 범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죄를 알지도 못한 죄가 없는 영광스러운 몸입니다.

 

(2)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는 우리 신자(성도)들은 이미 그리스도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분과 함께 장사되었기에 (6:4) “이미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2, 현대인의 성경).

 

이것은 이미 과거에 이루어 진 것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도 함께 죽었으므로(5절) 우리는 이미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들이란 말입니다(2절).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우리의 옛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므로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입니다(6절). 이 사실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 7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에 대하여 이미 죽은 사람은 죄에서 해방된 것입니다”(현대인의 성경).

 

(3) 우리가 이미 과거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예수님과 함께 장사되었으므로 이미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지만(6:4-5) 앞으로 장차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면 홀연히 변화되어 예수님처럼 죄가 없는 사람들이 되기 전까지(고전15:51, 3:21, 요일3:2) 현재 어떻게 주님 안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미래의 소망과 우리가 이미 과거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함께 장사되었다는 사실 사이에 살고 있는 우리는 현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질문입니다.

 

저는 이 질문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바울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이미” (Already) (과거)와 “아직도”(Not yet)(미래) 사이인 교회 시대(church age)에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오해하여 많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이미 받았기에 한번 구원을 받았으면 잃지 않는다고 배워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죄를 짓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죄를 짓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 빌립보서 2장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여기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의 뜻은 행함(선행)으로 구원을 받으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엡2:8-9, 롬8:22-24). 구원이란 과거, 현재, 미래형입니다: (1) 구원의 과거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요일5:12-13). (2) 구원의 미래란 장차 우리가 예수님 재림하시는 날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행16:31, 롬10:9). (3) 구원의 현재란 “너희 구원을 이루라”입니다(빌2:12). 그러면 과거의 구원과 미래의 구원(의 완성) 사이에 현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구원”이란 영생입니다. 즉,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당신들의 영원한 생명을 이루십시오’ (당신들은 영원한 생명이 있는 자들 답게 사십시오) 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 있는 자(천국백성)들 답께 사는 것은 바로 천국의 계명인 예수님의 이중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하라는 말씀을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22:37-39). 이것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십니다(빌2:13).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욕도 주시고, 또 그것을 행할 힘도 주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성령의 열매인 사랑을 맺으시사(갈5:22-23)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며 또한 이웃을 사랑하게 만드십니다.

 

우리가 이미 과거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예수님과 함께 장사되었으므로 이미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지만(롬6:4-5) 앞으로 장차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면 홀연히 변화되어 예수님처럼 죄가 없는 사람들이 되기 전까지(고전15:51, 빌3:21, 요일3:2) 현재 어떻게 주님 안에서 살아야 하는가 하면 이미 우리가 묵상한 요한일서 2장 29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의를 행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즉,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구원을 이루라”는 말하였는데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2장 29절에서 의를 행하라고 말하였습니다. 성경 요한일서 2장 29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안다면 의롭게 사는 사람들이 모두 그분의 자녀들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여기서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어 거듭난 자들로서 하나님이 의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아 우리 또한 의로운 자들이란 말입니다(롬 4:25). 그러므로 의로운 자들은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가르치시는 대로 언제나 의를 행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 안에서 생활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의를 행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이미 죄에 대하여 죽었고 장차 예수님처럼 죄가 없는 사람들이 되기 전까지 이 교회에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처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왕이신 의로우신 예수님을 구해야 합니다. 즉, 우리는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일2:1) 행하시는 대로 우리도 행해야 합니다(6절).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계명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7-11절). 예수님의 계명은 마태복음 22장 37-4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먼저 의를 행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중계명 중 첫 번째 계명대로 주 하나님을 우리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계명을 요한일서의 관점으로 말한다면 요한일서 2장 15-17절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의미는 다 지나가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인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의 깨끗하심과 같이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는 것(3:3)은 의를 행하는 것인데 그의 행하는 것이란 첫째로 다 지나가는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대로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 뜻을 행하면서 사는 것입니다(2:15-17). 그 다음에 의를 행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중계명 중 두 번째 계명대로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계명을 요한일서의 관점으로 말한다면 요한일서 2장 3-11절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인데 그 말씀을 요약한다면 형제를 사랑하고 미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계명의 순종하여 그 형제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습니다(5절). 그리고 그는 빛 가운데 거하여[“빛 가운데 살기 때문에” (현대인의 성경)] 자기 속에 거리낄 만한 것이 없습니다(10절, 현대인의 성경).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즉 하나님께로부터 거듭난(중생한)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계속해서 죄를 짓지 않고자 죄와 사탄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이 영적 전쟁을 함에 있어서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죄와 사탄과 싸워 승리하셨다는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전투적인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우리가 주님을 향하여 가진 미래의 소망인 장차 예수님이 나타나시면(이 세상에 다시 오시면) 우리가 예수님처럼 죄를 범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죄를 알지도 못하는 죄가 없는 사람들이 될 것이라는 믿음의 소망을 가지고 영적 전쟁을 해야 합니다. 이 영적 전쟁을 함에 있어서 우리는 오늘 본문 요한일서 5장 18절 하반절의 말씀을 믿음으로 붙잡고 죄와 사탄과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 못하느니라.” 여기서 “악한 자”는 사탄을 가리키는데(맥아더) 사도 요한은 “악한 자”인 사탄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인 하나님의 자녀를 “만지지도 못”한다(해치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이신 성령으로 잉태하시고(마1:18, 20) 이 세상에 나타나신(요일1:2) “하나님의 아들”(현대인의 성경)이신(5: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1절) 하나님의 자녀를 지키시기 때문입니다(18절). 성경 시편 121편 3-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넷째 확신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확신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즉 거듭난(중생한) 자는 하나님께 속하였지 사탄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확신입니다.

 

성경 요한일서 5장 19절을 보십시오: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현대인의 성경)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온 세상은 마귀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는 오직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사도 요한은 말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자녀들, 아니면 (2) 사탄의 자녀들(맥아더). 성경 요한일서 3장 10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현대인의 성경) “이것으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분명하게 구별됩니다. 의로운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나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을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0절, 현대인의 성경). 그 구별하는 방법은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현대인의 성경)라는 것입니다(10절). 여기서 사도 요한이 말씀하고 있는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란 바로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를 가리킵니다(10절). 다시 말하면, 사탄(마귀)의 자녀들은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들로서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의를 행하는 자”들(7절)로서 “그 형제를 사랑”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0절). 성경 요한일서 3장 7절을 보십시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현대인의 성경) “자녀들이여, 여러분은 아무에게도 속지 마십시오.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의로운 사람입니다”]. 사도 요한은 “의를 행하는 자는” 예수님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는 이미 요한일서 2장 1절에서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했고 2장 6절에 가서는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예수님)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의를 행하는 자”(3:7)는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2:1)와 같이 자기도 의를 행한다는 것입니다(6절). 이 말씀들을 종합해서 오늘 본문 요한일서 5장 19절 말씀과 연관해서 묵상하면 그 결론은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예수께서 행하시는 데로 자기도 행”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5장 19절을 보십시오: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현대인의 성경)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온 세상은 마귀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요한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다’라는 말씀을 원어 헬라어를 문자적으로 직역을 하면 ‘우리는 하나님께로 부터’(We are from God)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요한일서 5장 1절과 4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는 헬라어를 직역하면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낳습니다’(He is born of God)라는 말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오늘 본문 요한일서 5장 19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다 라는 말씀과 5장 1, 4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란 말씀 둘 다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부터”라는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의미는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다(19절)라는 말씀은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난자”(1, 4절)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인 우리는 사도 요한의 증거(9절)인“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고(1절) 또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을 뿐만 아니라(5절) “하나님의 증거”인 하나님의 아들(9, 10절)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들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안에는(10절) “영원한 생명”(11절, 현대인의 성경)이 있다는 것입니다(12절).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요한일서 5장 19절에서 “또 아는 것(And we know)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다고 말했는데 여기서 사도 요한이 “또”라고 말한 이유는 18절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We know)고 이미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오늘 본문 19절을 시작하면서 “또 아는 것”이라고 말을 한 것이고 20절에 “또 아는 것”이라고 또 말을 했습니다. 이 외에도 요한일서 5장만 봐도 사도 요한은 2절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we know)”고 말했고, 15절에서도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we know)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we know)”고 두 번이나 말했습니다. 이렇게 사도 요한은 ‘우리가 안다’(we know)라는 말을 요한일서 5장에서만 6번이나 말했는데 그 의미는 ‘확실히 안다’(know for sure)와 그 알고 있는 진리를 계속해서 즐기고 있는 것(enjoy knowing the truth continually)을 의미합니다(KJV 성경 주석).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그러면 1장부터 4장까지 ‘우리가 안다’(we know)라는 말씀이 또 어디에 나오는지 궁금해서 찾아보았습니다. 한 10번 정도 나오는 것 같습니다:

 

(1) (요일2: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we know),”

 

(2) (5절)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we know),”

 

(3) (18절)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we know),”

 

(4) (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We know)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5) (14절)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We know)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6) (16절)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We know)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7) (19절)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We will know)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8) (4: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we know),”

 

(9) (13절)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we know),”

 

(10) (16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We have come to know)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저는 요한일서1-4장에 ‘우리가 안다’(we know)라고 적힌 10개의 말씀과 요한일서 5장에 나온 6개의 말씀, 도합 16개의 말씀 중심으로 사도 요한이 오늘 본문 요한일서 5장 19절에서 어떻게 자기와 요한일서 편지를 받는 수신자 성도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했을 때 한 14 가지 결론을 내릴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우리는 …

 

(1) 예수님을 아는 자들로서 예수님을 안다는 증거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입니다(2:3).

 

(2) 예수님(주님) 안에 있는 자들로서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습니다(5절).

 

(3) “지금은 마지막 때”인 줄 아는 자들로서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들었고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들이 일어난 것을 압니다(18절).

 

(4)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면(재림하시면) 우리가 예수님과 같을 줄을 압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예수님 그 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3:2).

 

(5)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영생)으로 들어간 줄을 압니다(14절).

 

(6)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다는 것으로 사랑을 압니다(16절).

 

(7)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함으로서(18절) 진리에 속한 줄을 압니다(19절).

 

(8) 진리의 영(성령님)과 미혹의 영을 아는 자들로서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께 속한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는 자들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4:6).

 

(9) 성령님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압니다(13절).

 

(10)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알고 믿습니다(16절).

 

(11)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합니다(5:2).

 

(1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주님이 들으시는 줄을 압니다(15절).

 

(13)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즉 거듭난 자(중생한 자)는 계속해서 범죄하지 않는 것을 압니다(18절).

 

(14)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지각을 주셨다는 것을 압니다(20절).

 

(15) 우리는 그 지각으로 “참된 자”이신 예수님을 알고 우리가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신 참되신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20절).

 

그런 후 저는 이 14가지 결론 중 다음에 묵상할 20절은 빼고 나머지 13개 중심으로 다시금 저와 여러분이(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줄을 어떻게 확실히 알 수 있는지를 한 3 가지로 요약을 해 보았습니다:

 

(1)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알고 믿습니다(4:16).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만일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라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다는 것으로 사랑을 알고 있습니다(3:16). 그리고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이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시므로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압니다(4;13).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줄을 압니다(5:15).

 

(2)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라면 우리는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의 계명을 지킵니다(2:3, 5).

 

여기서 예수님의 계명이란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3:14; 5:2).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라면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되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합니다(3:19). 결코 계속해서 형제를 미워하는 죄를 범하지 않습니다(5:18).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사망에서 생명(영생)으로 들어간 줄을 알 뿐 아니라(14절)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압니다(19절).

 

(3)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라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줄을 압니다(3:2).

 

그 이유는 우리는 예수님을 그 모습 그 대로 뵐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2절). 그러기에 하나님께 속한 우리는 지금이 마지막 때인 줄 알고 있습니다(2:18). 그리고 우리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과 미혹의 영을 앎으로 하나님의 종들의 말씀을 듣고 결코 거짓말로 미혹하는 자들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4:6). 즉, 우리는 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영원한 복음”(계14:6)]을 듣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며(2:22),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22절) 다른 복음(갈1:6-9; 고후11:4), 거짓된 복음을 듣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요한일서 5장 19절 하반절에서 이것 또한 확실히 하는 것은 “…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현대인의 성경) “온 세상은 마귀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라고 말씀했는데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여러분, 이 죄악 된 악한 세상은 “악한 자”인 마귀(사탄)의 지배 아래 있음. 비록 지금 우리가 사탄의 지배 아래 있는 이 세상(This Age)에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께 속한” 우리는 다가오는 세상(The Coming Age)인 하늘에 소망하면서 이 세상에서도 세상과 구별된(참고: 3:10, 현대인의 성경) 하늘의 속한 자들(고전15:40, 48, 49)[천국 시민권 자들답게(빌3:20)]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하늘에 속한 자들 또는 천국 시민권 자답게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제가 2014년 9월 29일에 “천국 시민권자의 생활”이란 제목 아래 이런 글을 쓴 것을 나눕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빌3:20).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1:27). 천국 시민으로서의 책임은 천국의 법을 지켜 행해야 합니다. 그 천국의 법은 예수님의 이중 계명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눅10:27). 우리가 이 계명을 순종할 때에 우리는 천국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우리 가정에서 이 계명을 순종할 때에 주님께서는 우리의 가정을 천국화 이루어 나아가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가정이 천국화 이뤄 나아갈 때에 주님께서는 우리 가정을 주님의 증인 공동체로 사용하시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케 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가정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정의 삶으로 증거합니다.” 이것이 바로 다가오는 세상(천국)에서 충만히 누리는 영원한 생명을 이 세상에서 부분적으로 누리는 삶입니다. 우리가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에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어 우리의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요 15:9-12).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비췰 때에 우리 마음속에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This Age)에서 다가오는 세상(The Coming Age)인 천국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새찬송가 293장 "주의 사랑 비칠 때에", 1, 4절).

 

우리는 지금 “악한 자”인 사탄(마귀)이 지배 아래 있는 이 세상에 살면서 예수님의 말씀인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마10:16). 어떻게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요한일서의 관점으로 볼 때 우리는 “악한 자”인 사탄과 싸워(영적 전쟁을 하여) 이기는 승리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제가 이리 생각하는 근거는 요한일서 2장 13, 14절과 4장 4절입니다: (2:13) “…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2:14)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현대인의 성경) “청년들이여, 내가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여러분이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서 마귀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4: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현대인의 성경) “자녀들이여, 여러분은 하나님께 속하였고 거짓 예언자들을 이겼습니다. 이것은 여러분 안에 계시는 분이 세상에 있는 마귀보다 더 능력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 영적 전쟁의 승리의 비결은 하나님께 속한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이 세상에 있는 마귀보다 더 능력이 크시다는 것(4:4)과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2:14) 믿는 “우리의 믿음”입니다(5:4). 이 진리를 좀 구체적으로 적용한다면 2가지입니다:

 

(1)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을 알아 가는데 헌신해야 합니다.

 

성경 요한일서 2장 13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 .” 여기서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는 “태초부터 계신 이”는 누구입니까? 우리가 이미 묵상한 요한일서 1장 1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말한 후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되었다고 말했습니다(2절). 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십니다(2:2). 즉,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 제물로 받쳐져 죽으시므로 죄를 형벌하셔야 했던 하나님의 거룩하신 요구를 만족케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의로우신 대언자이십니다(1절). 하나님의 법정에 섰는데 사탄이 재판장이신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를 기소(prosecutes)를 할 때에 피고 측 변호사(defense attorney)가 되신 예수님께서는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십니다.

 

성경 요한일서 2장 14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갈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아 가는데 힘써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 2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요한일서 1장 5절을 보면 성경은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분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5절). (2) 요한일서 4장 8절과 16절 보면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독생자 예수님을 화목 제물로 이 세상에 보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4:9-10). 그 이유는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서입니다(10절). 하나님께 속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주님은 “세상에 있는 마귀보다 더 능력이 크”시다는 진리(4:4, 현대인이 성경)을 믿음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2) 우리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적 전쟁에 승리해야 합니다.

 

성경 요한일서 2장 14절을 보십시오: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현대인의 성경) “…청년들이여, 내가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여러분이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서 마귀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마귀의 유혹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비결은 우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강하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강력한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강한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그 말씀을 믿는 우리의 믿음이 그만큼 견고하며 굳게 서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5장 4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의 자녀들은 누구나 세상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것은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거듭난(중생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 속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확고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라는 사실을 확신해야 합니다. 지금 비록 우리가 사탄(마귀)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자들로서 다가오는 저 세상인 하늘에 시민권자 답게 예수님의 이중계명에 순종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비록 사탄이 우리를 미혹하여 형제, 자매를 미워하게 만들려고 할지라도 우리는 이미 영생을 받은 자들로서 하나님을 함께 사랑하며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 영적 전쟁을 우리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주님과 하나님 아버지를 알아가는 지식에서 자라나며 또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서 믿음으로 사탄의 유혹과 싸워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마귀가 지배하는 악한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께 속한 자들 답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 이웃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면서 예수님의 재림과 하늘나라의 삶을 잘 준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마지막 다섯째 확신은, 예수 그리스도는 참되신 하나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시라는 확신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성경 마태복음 16장 13절부터 보면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13절, 현대인의 성경). 그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나 예언자들 중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14절, 현대인의 성경). 그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15절, 현대인의 성경). 그 때 시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16절). 그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현대인의 성경) “너는 행복한 사람이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저는 이 마태복음 16장 18절의 예수님의 말씀인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받고 다시 주님의 몸 된 승리장로교회 돌아오게 되어 지금까지 이 주님의 약속의 말씀에 붙들린바 되어 목회를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저에게는 이 마태복음 16장 18절 말씀이 너무나 중요하고, 귀하며, 의지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지금도 이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께 ‘주님, 주님의 교회인 승리장로교회를 주님께서 세우신다고 약속하셨사오니 주님의 뜻대로 주님의 교회를 세워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기도 가운데 저는 우리 모두가 사도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바른 신앙 고백을 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길 기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 신앙 고백한대로 살아드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길 기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이 반석 위에” 견고히 세워주시사 요동함과 흔들림이 없는 든든한 우리 교회가 되길 기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주님께서 우리 교회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나 자신과 세상과 죄악과 사탄과 죽음과 싸워 승리하는 교회로 세워주시길 기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5장 20절을 보십시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심으로 참되신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되신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되신 하나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여기서 사도 요한은 마지막 다섯 번째 확신(certainty)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확신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생명이시라는 확신입니다[(20절 하반절, 현대인의 성경) “예수 그리스도는 참되신 하나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죤 맥아더 목사님에 의하면 이 다섯 번째 확신의 진리가 사도 요한의 요한일서 전체를 요약(summation)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맥아더). 그 정도로 이 다섯 번째 마지막 확신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한 3가지 중요한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1)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에게 지각을 주셨다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5장 20절을 보십시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심으로 …”]. 이미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1장 2절에서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현대인의 성경) “이 생명이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라고 말씀했는데 이렇게 오늘 본문 5장 20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렀다[(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동사는 현재형으로서 그 의미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기 계시다(“HE IS HERE”)는 것입니다(Critical and Explanatory, on the Old and New Testaments 주석). 과연 우리가 이 의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저는 20절 하반절에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라는 말씀에서 그 대답을 찾아보았습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여기 계시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듭난(중생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이미 영원한 생명이 있기에(13절)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여기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지각”(understanding) [(현대인의 성경) “깨달음”]을 주시고 계시다고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요한일서 5장 20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사도 요한이 여기 5장 20절에서만 사용을 했는데 그 헬라어는 두 단어의 합성어로서 “through”(통하여) + “mind”(마음)라는 문자적 의미가 있습니다. 이 의미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선 성경 출애굽기 36장 1절 말씀이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여호와께서 지혜와 총명을 부으사 성소에 쓸 모든 일을 할 줄 알게 하신 자들은 모두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할 것이니라.” 즉,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우리에게 주시는 지각(깨달음)은 “곧 여호와께서 지혜와 총명을 부으”시므로 “지혜로운 사람”이 된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 마태복음 16장 1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도 베드로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고백을 들으시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가 사도 베드로에게 “알게”하셨다(revealed)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성경 말씀을 종합해서 오늘 본문 요한일서 5장 20절의 “지각”이란 단어를 생각할 때 그 의미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지혜를 주시므로 깨닫게 하신다는 의미라 생각합니다.

 

(2) 하나님 아들이 오셔서 우리에게 지각을 주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참된 자이신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또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란 것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5장 20절을 보십시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심으로 참되신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되신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자기가 요한일서 편지를 써내려갔을 때 요한일서 2장 18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알았습니다. 흥미로운 대조는 지금 이 세상(This Age)은 “악한 자”인 사탄(마귀)의 지배 아래 있고(5:19, 현대인의 성경) 이미 많은 적그리스도들이 나타나서(2:18) 거짓말로 미혹하여(22, 26절)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케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을 부인하게 만들고 있는 상황에서 (22절) 다가오는 세상(The Coming Age)의 주님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지각(깨달음)을 주시므로 “참된 자”이신 하나님을 알게 하셨다는 것입니다(5:20)[(요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 특히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요한일서 5장 21절에서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현대인의 성경)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온갖 우상으로부터 여러분 자신을 지키십시오”]고 말씀했는데 여기서 “우상”과 20절에서 “참된 자”이신 하나님과 대조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지각을 주시므로 참 하나님을 알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알게 하셨기에 우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해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사도 요한은 참 하나님을 알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아는(20절)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들로서(19절) 이 세상을 지배하는 사탄(마귀)의 미혹적인 모든 거짓말들인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다’라는 거짓말로 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맥아더).

 

(3) 예수 그리스도는 참되신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생명이시라는 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5장 20절을 보십시오: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현대인의 성경) “예수 그리스도는 참되신 하나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분명히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을 당한 이유가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신성모독 죄’임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 요한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요19:6)고 외친 이유가 예수가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경 누가복음 5장 21절을 보십시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현대인의 성경) “그러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군데 감히 하나님을 모독하는가? 하나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수군거렸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생각하여 수군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한 중풍 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내리”는 것으로 인해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으로 보시고”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했기 때문입니다(18-20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는 하나님만 죄를 사할 수 있는데 예수라는 사람이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하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신성 모독죄로 여긴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그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예수란 사람이 하나님을 “내 아버지” 라고 말하고(마11:27)과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말했기에(27:43) 예수는 신성 모독의 죄를 범했으므로 마땅히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야 한다고 믿었기에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그리도 소리를 질렀던 것입니다. 또한 사도 요한은 “거짓말 하는 자”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며 또한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2:22) 그 뿐만 아니라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지 않는(4:15) 무리들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요한일서 5장에 와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1절)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5절)에 대해서 증거한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인 사도 요한의 증거를 받는다면 더욱 큰 증거인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의 아들에 대한 증거를 받아들여야 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요?(5:9)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증거를 믿음으로 받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1, 12절). 그리고 나서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요한일서 5장 20절 하반절에서 우리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 그리고 그 알고 있는 진리를 계속해서 즐기고 있는 것[“또 아는 것”(20절)]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참되신 하나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라는 진리입니다(20절, 현대인의 성경).

 

사도 요한은 자신의 편지를 받는 수신자 성도들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과 (1절)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을 뿐만 아니라(5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참되신 하나님”이심을 그 성도들이 확실히 알고 그 진리를 계속해서 즐기고 있길 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 수신자 성도들이 참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생명”이심을 확실히 알고 그 진리를 계속해서 즐기고 있길 원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편지를 쓰기 시작하면서 1장 1절과 2절에서 참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하면서 예수님을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1절)이요 “이 영원한 생명”(2절)이라고 말씀을 했는데 이렇게 요한일서 편지 쓰기를 마치면서 5장 20절 하반절에서 참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이십니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동일한 저자인 사도 요한이 쓴 요한복음도 보면 1장 1절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고 시작했는데 요한복음의 결론이라는 20장 31절을 보면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두 책(요한복음과 요한일서)을 보면 사도 요한은 참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을 해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요한복음과 요한일서를 썼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되신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생명이심을 확실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되신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생명이시다 라는 진리를 계속해서 즐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지각(깨달음)을 주시길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지각(깨달음)으로 참되신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아 알아 참되신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생명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예수님의 이중계명인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와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마22:37, 39)에 순종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 이 땅에서도 천국 생활을 부분적으로 누리면서 영생 복락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참되신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생명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21년 12월 26일, 하나님이 주시는 지각으로 예수님을 더욱더 알아가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