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요한일서 51-5]

 

 

지난주에 존 맥아더 목사님의 “흔들리지 않고 목회의 길 지키는 9 가지 비결”이란 제목 아래 쓴 인터넷 기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 기사의 제목인 책 제목을 보고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아마도 제 마음에 존 맥아더 목사님처럼 흔들리지 않고 목회의 길을 끝까지 신실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잘 감당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존 맥아더 목사님은 약 2 년 전인 2019 년 2 월에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에서 50 주년 목회 기념식이 있었다고 합니다. 20 대에 목회를 시작한 곳에서 70 세가 넘도록 목회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하나님의 크신 은혜라고 말하면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이어 3 대째 목회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특별한 은혜지만, 거의 평생을 한 교회에서 한 성도 무리를 섬기며 사랑하며 말씀을 가르치고 먹이고 돌보며 살았다는 것은 정말 큰 영광이며 축복이라고 기사에 적혀 있습니다. 그는 2019 년 자신이 사역 50 주년을 맞이할 때쯤 “목회, 흔들림이 없이 신실하게”라는 책을 통해 어떻게 그가 사역의 길을 지켰는지, 그가 좇았던 9 가지 원리를 소개했습니다. 참고로 이 9 가지 원리들은 사도 바울이 쓴 고린도후서 4 장에서 발견되는 것들입니다. 저는 그 9 가지 원리들을 영적 성숙을 추구하는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좀 적용을 해 보았습니다:

 

  •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청지기로 보자.
  • 우리는 청지기의 역할을 큰 특권으로 생각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큰 자비라고 생각하자.
  • 우리는 마음을 순결하고 정직하게 지키기로 결단하고 그런 충성스러움이 참된 진실성을 추구하는 핵심요소라고 생각하자.
  •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한 가지 열정으로 채우자.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자 하는 뜨거운 헌신의 마음이다.
  •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결코 헛되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믿고(시 55:11), 따라서 인간이 만든 성공과 실패의 기준에 휘둘리지 말자.
  • 우리는 인간의 갈채나 인정을 구하지 말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겸손히 구하자.
  • 우리는 하나님이 고난을 성화의 수단으로 사용하심을 알고, 그리스도의 고난의 교제에 참여하자.
  • 우리는 성경의 위대한 믿음의 영웅들을 잘 알아가고 그들의 용기를 본받자.
  • 우리는 천국과 위의 것에 마음을 고정하고, 현재의 고난이 그런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임을 믿자.

 

이 9 가지 원리 적용 외에 제가 오늘 말씀과 연관해서 그 기사에 이런 글이 적혀 있어 나눕니다: “목사는 가장 먼저 하나님을 섬긴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성도를 섬긴다. 목사는 가장 먼저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 그 힘으로 성도를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다. 삶의 굴곡이 있고 사역의 성공과 실패가 반복되며 낙심하거나 일어설 때가 있고 평탄하거나 반대로 휘청거릴 때도 있다. 하지만 목사의 영혼의 닻이 하나님께 내려져 있다면, 그는 흔들리지만 휩쓸려 내려가지 않는 신앙을 가지고 사역의 길을 충성스럽게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인터넷). 저는 여기서 “목사는 가장 먼저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에 제 마음의 귀를 기울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5 장 3 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은 부담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란 제목 아래 한 3 가지로 본문 요한일서 5 장 1-5 절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성경 구절 중 하나는 바로 로마서 8 장 28 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획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결국 모든 일이 유익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소망을 갖게 되어 믿음으로 인내하며 견뎌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더 좋아하게 된 계기는 로마서 12 장 2 절 말씀과 연관해서 묵상하고 나서부터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현대인의 성경)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제가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는 은혜는 하나님의 뜻은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완전)하신 뜻이라는 사실입니다. 비록 수많은 때에 그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그 뜻 안에 있고 로마서 8 장 28 절 말씀대로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소망을 가지고 인내하며 견디는 가운데 결국에 가서는 시편 34 편 8 절 말씀대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도 ‘God is good, All the time!’[하나님은 좋으십니다(선하십니다). 항상!]이라고 고백했었던 것입니다. 저는 앞으로도 성경 말씀에 근거한 이 4 가지 원리를 믿음으로 붙잡고 살고 싶습니다: (1) 하나님의 선하십니다(대상 16:34; 시 86:5; 100:5; 107:1; 135:3; 145:9). (2) 하나님의 뜻은 선하십니다(롬 12:2). (3)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롬 8:28). (4)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 것입니다(시 34:8). 그런데 제가 로마서 8 장 28 절 말씀을 좋아하면서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는 부분에 초점을 많이 맞추면서 신앙생활을 했었지 그 구절의 앞부분인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란 말씀에 초점을 그리 많이 두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 요한일서 5 장 1-5 절 말씀을 묵상하게 되면서 저는 특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말씀을 요한일서에 관점에서 좀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인 요한일서 5 장 3 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란 말씀을 묵상하면서 과연 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요한일서 5 장 1-5 절에서 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한 3 가지로 말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5 장 1 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의 자녀들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으십니까?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를 썼을 그 당시에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요한일서 2 장 22 절을 보십시오: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들을 가리켜 “거짓말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거짓말하는 자, 적그리스도가 “지금도 많”이 일어났으며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8 절). 여러분, 지금도 마지막 때입니다. 지금도 적그리스도들, 거짓말 하는 자들이 이 세상에 너무나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요한일서 5 장 1 절에서 사도 요한이 한 말씀처럼 우리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들이 돼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다 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먼저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 장 21 절을 보십시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말씀을 보면 “예수”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와 관련이 있음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란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말씀한 의미는 그 낳을 아들은 구원자이시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라는 단어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 뜻의 의미는 “기름 부은 자”란 뜻입니다. 구약 성경의 히브리어 말로 하면 기름 부은 자란 바로 “메시야”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기름 붓는 것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예언자)의 직분을 성별하는 표였습니다(출 29:7; 삼상 10:1; 16:13; 왕상 19:16)(다국어 성경). 즉, 그리스도란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란 의미입니다. 그러면 사도 요한이 오늘 본문 요한일서 5 장 1 절에서 말씀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자이신 예수님이 그리스도, 즉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이심을 믿는 자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여러분에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으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그 의미는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왕이시요, 제사장이시요, 선지자이심을 믿으십니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왕이시요 제사장이시요 선지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a) 성경은 하나님을 가리켜 만왕의 왕”(King of kings)이라고 말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딤전 6:15)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만왕의 왕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 요한계시록 17 장 14 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b)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대제사장”(High Priest)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 히브리서 3 1 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성경 히브리서 4 장 15 절을 보십시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성경 히브리서 5 장 5, 10 절을 보십시오: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성경 히브리서 9 장 11 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 성경 히브리서 7 장 21 절을 보면 예수님을 가리켜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4 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면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히 살아 계시므로 그분의 제사장직도 영원합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입니다(8:1).

 

(c)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선지자”(a prophet)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 신명기 18 장 15 절을 보십시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그래서 사도요한이 쓴 요한복음을 보면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에게 “네가 그 선지쟈냐?”(요 1:21)라고 물었고,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루셨을 때에는 그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the Prophet)”고 말했던 것입니다(6:14).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모세가 신명기 18 장 15 절에서 예언한 “나와 같은 선지자”를 기다렸던 것을 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적을 이루신 예수님을 보고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말했던 것입니다(요 6:14).

 

그러면, 왜 사도 요한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사랑의 하나님께서(요일 4:8, 16)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사(19 절)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10 절) 또한 허물과 죄로 영적으로 죽었던(엡 2:1, 현대인의 성경) “우리를 살리”시려고(요일 4:9) “자기의 독생자”(9 절)시요 그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2:1)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로서(2 절) 또한 “세상의 구주”로(4:14) 이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입니다(10 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는다면(16 절)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 말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만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5 장 5 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현대인의 성경)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니면 누가 세상을 이기겠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으십니까?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를 썼을 그 당시에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성경 요한일서 2 장 22-23 절을 보십시오: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러한 거짓말하는 자, 적그리스도가 “지금도 많”이 일어났으며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고 말씀한 것입니다(18 절). 여러분, 지금도 마지막 때입니다. 지금도 적그리스도들, 거짓말 하는 자들이 이 세상에 너무나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요한일서 5 장 5 절에서 사도 요한이 한 말씀처럼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들이 돼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 의미는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는 하나라는 의미입니다[(요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그 말씀을 빌립보서 2 장 6 절의 말씀으로 말한다면,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요한복음 1 장 1 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서 “말씀”은 성자 예수님을 말씀하는 것인데 사도 요한은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5 장 10 절에서 이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이 말씀을 보면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라고 말씀한 후에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사도 요한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은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4 장에 가서 보면 예수님이 붙잡히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대세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예수님을 칠 증거를 찾고자 했을 때(55 절) 대제사장이 예수님에게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61 절, 현대인의 성경). 그 때 예수님의 대답은 “그렇다. 내가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은 것과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볼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62 절, 현대인의 성경). 그 때 대제사장인 자기 옷을 찢으며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그 신성 모독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말했을 때 모인 사람들이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했습니다(64 절). 즉,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라는 말씀에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신성 모독죄를 사형당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은 한분이신데 예수라는 사람이 자신이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 즉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말씀과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다는 말씀과의 연관성을 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마가복음 14 장 61 절에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라는 대제사장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그렇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미 묵상했듯이 “그리스도”란 “기름 부은 자”라는 의미로서 (히브리어로는 “메시아”)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란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왕 이시요 제사장이시요 선지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란 하나님과 하나이시요 본체시요 하나님이시라는 의미로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말씀의 의미는 한 마디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라는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은 왕 이시요 제사장이시요 선지자이신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그리스도(메시아)라는 말씀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속하시고(요일 4:10) 우리 죄를 없애시려고(3:5) 또한 우리를 살리시려고(4:9) 죄 없으신 깨끗한(3:3, 5) 육체로 오시사(요이 1:7) 화목제물로(요일 2:2; 4:10) 십자가에 스스로 목숨을 버리시사(3:16) 우리에게 구원(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을 말합니다(5:11-13). 그러므로 제가 여러분에게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으십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그 의미는 ‘여러분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여러 번의 죄를 속하시고 없애시며 또한 허물과 죄로 영적으로 죽었던 여러분을 살리시려고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시사 화목제물로 십자가에 스스로 목숨을 버리시사 여러분에게 구원(영생)을 주신 것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아멘!’(믿습니다!)라고 마음과 입술로 대답하시는 그리스도인들이야 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3)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5 장 1 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의 자녀들도 사랑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거듭나셨습니까? 다시 질문한다면, 여러분은 중생했습니까? 여러분은 새 피조물(새사람)이 되었습니까?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성경구절 고린도후서 5 장 17 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현대인의 성경)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존재입니다. 옛 사람은 없어지고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 또는 새 사람이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오늘 본문 요한일서 5 장 1 절과 연관해서 말한다면, 우리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듭나서(중생해서) 새 사람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에베소서 2 장 1 절과 요한일서 4 장 9 절과 연관해서 말한다면, 우리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허물과 죄로 죽었던”[“불순종과 죄 때문에 영적으로 죽었던”(엡 2:1, 현대인의 성경)] 우리가 살게 된 것입니다(요일 4:9). 즉, 우리가 거듭났다, 중생했다는 말은 죽었던 우리가 다시 살아났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누가 우리를 다시 살리셨습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성경 에베소서 2 장 4-5 절을 보십시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무척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크신 사랑으로 죄 때문에 영적으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기 이전에 우리의 옛 사람은 세상의 악한 길을 따르고 마귀에게 순종하며 살았으며 우리 육체의 욕심대로 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았었습니다(2-3 절, 현대인의 성경).

 

이것을 요한일서의 관점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거듭나기 전에(중생하기 전에)의 옛 사람은 어두움에 있으면서 어둠에 행했고(1:6; 2:11), 거짓말을 하고(1:6), 미워했으며(2:9; 3:15),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했으며(2:15), 악을 행하여(3:12), 하나님께 죄를 범했었습니다(8절). 이렇게 영적으로 죽었던 옛 사람인 우리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사 새 사람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 요한일서 5 장 1 절에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로 부터 난 자”(is born of God)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란 말씀은 바로 거듭난 자, 중생한 자를 말합니다. 동일한 단어를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 장 7 절에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면서 사용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 절).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 5 장 1 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즉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난 자/다시 태어난 자란 말씀의 의미는 새롭게 태어난 자(new birth)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에는 계속해서/지속적으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ongoing faith)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 요한은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난 자, 다시 태어난 자는 새 피조물/새 사람답게 살아가는 증거(evidence)가 있다는 것입니다(맥아더). 그 증거는 1 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2가지입니다: (1) “낳으신 이”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또한 (2) 하나님에게서 거듭난 자인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2 가지는 예수님의 이중계명인 (1)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와 (2)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과 같은 의미입니다(마 22:37, 39). 즉,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요일 5:1), 하나님께로부터 새롭게 태어난 거듭난/중생한 그리스도인들이 새 사람답게 살아가는 증거는 예수님의 이중 계명과 사도요한의 요한일서 5 장 1 절 말씀처럼 (1) 하나님을 사랑하며 (2) 형제, 자매(이웃)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5 장 2-3 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현대인의 성경)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킬 때 이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은 부담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성경 구절인 로마서 8 장 28 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과연 여기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누구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란 누구입니까? 로마서 8 장 29- 30 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29 절) 그리고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자들”(30 절)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란 하나님께서 미리부터 사랑하여 돌아보시는 자들입니다[참조: 시 1:6, 호 13:5, 암 3:2, 마 7:23(박윤선)].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선택한 자들로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게 하시사(일반적인 부르심) 예수 그리스를 믿게 하시므로 구원을 얻어(유효한 혹은 특별한 부르심) “성도”(롬 1:7)가 된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요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먼저 그들을 사랑하셨기에(요일 4:19) 그들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여러분, 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입니까? 우리는 본문 요한일서 5 장 1-5 절 말씀 중심으로 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인지 이미 3 가지로 묵상했습니다: (1)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1 절). (2)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5 절). (3)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1 절). 오늘 본문 요한일서 5 장 2-3 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현대인의 성경)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킬 때 이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은 부담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입니다(3 절). 다시 말하면,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음으로 거듭난(중생한) 자들, 새 사람들(새 피조물)로서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킨다는 말씀을 묵상할 때 동일한 저자인 사도 요한이 쓴 요한복음 14 장 21 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현대인의 성경) “내 계명을 간직하여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며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낼 것이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4 장 21 절에서나 오늘 본문 요한일서 5 장 3 절에서나 일관성 있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일관성 말씀이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성경적으로 증명해 보여야 합니다. 우리가 이미 묵상한 요한일서 4 장 7 절에 근거해서 제가 이런 짧은 묵상의 글을 썼었습니다: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서로 사랑하는 자는 진정으로 거듭난 자(중생한 자)요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자입니다. 반대로, 주님의 계명에 불순종하여 서로 미워하고 있는 자는 진정으로 거듭난 자가 아니요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자가 아닙니다.” 제가 이런 짧은 묵상 글을 쓰게 되면서 배우게 된 점은 내가 진정으로 거듭난 자라면, 중생한 자라면, 새 사람이 되었다면, 주님의 계명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시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요한일서 5 장 3 절에서 우리에게도 하고 있는 말씀은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면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증명해 보이는 방법은 4 장 7 절의 말씀과 일관된 것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5:3).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우리는 그저 말로만 ‘하나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며 찬양하는데서 끝나면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고백대로, 찬양한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 고백대로, 찬양한대로 산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요한이 말씀하고 있는 그 ‘하나님의 계명’은 무엇입니까? 요한일서 3 장 23 절을 보십시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현대인의 성경)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다시금 묵상하면, 만일 우리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있다면, 그리고 그 믿음이 진정으로 살아있는 믿음이라면, 우리는 행함으로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증명해 보이는 방법은 하나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계명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4:19). 어떻게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요한일서 4 장 9-10 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 성부 하나님의 사랑은 영적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시려고 자기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사랑입니다.

 

그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죄 없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십자가에 버리신 사랑입니다. 그 보내시고 버리신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3:1, 현대인의 성경).

 

  • 성자 예수님의 사랑은 요한일서 3 16 절 현대인의 성경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 일로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시요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1:1-2)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로(2:2) 죄가 전혀 없으신 데도 불구하고 “우리 죄를 없애려고”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셔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3:5, 현대인의 성경). 이 세상에 오시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구주”로(4:14) 오셨고 “육체로 오”셨습니다(2 절; 요이 7)(육체로 오신 사랑 혹은 성육신 사랑). 그리고 화목제물로 십자가에 스스로 목숨을 버리시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를 만족케 하셨습니다(요일 2:2)(스스로 목숨을 버리신 사랑).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에서 벗어나(3:14, 현대인의 성경)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직접 약속해 주신 영원한 생명(구원)을 주셨습니다(2:25, 현대인의 성경; 5:11-13).

 

  • 성령 하나님의 사랑은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4:2)과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2:22)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우리로 하여금 시인케 하셨고(4:2, 15), 우리를 살리셨습니다(9 )[예수님을 시인케(믿게)하신 사랑 및 영적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사랑].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게 하실 뿐만 아니라(3:24, 현대인의 성경)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 거하게(살게) 하십니다(4:13). 또한 성령 하나님은 “진리의 영”으로서(4:6)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사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게(거하게, 생활하게) 하고 계십니다(2:27,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이 성령 하나님은 사랑의 영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사랑 안에 거하”게(사랑 안에서 살게)하십니다(4:16). 즉, 성령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계명에 순종케 하시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우리의 형제, 자매(이웃)을 사랑하게 하십니다(21 절; 참고: 롬 5:5).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시므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실 것입니다(요일 4:17). 성령 하나님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게 하십니다(18 절).

 

이렇게 성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19 절).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5:2).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입니다(3 절).

 

오늘 2 월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감사한 것은 제 기억으로는 작년 2020 년 이 맘쯤에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우리 교회가 온라인 예배를 드리기 시작해서 오늘까지 오면서 약 1 년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 온 교우 식구들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호해주시고 지켜주시며 또한 여러 모로 힘든 상황에서도 여기까지 도와주시고, 인도해주시며, 공급해 주셨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작년에 여러분에게도 이렇게 어렵고 힘든 코로나 바이러스 시대에 우리는 더욱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더욱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추구하는 기회로 삼자고 권면했었습니다. 지난 1 년을 뒤돌아 볼 때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조금 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리게 하시니 그 또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새해 2021 년을 맞이하여 우리 교회 표어를 “영적 성숙의 해”로 정하고 우리 모두가 이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우리 각자의 영적 성장과 성숙을 도모하는 이 한해가 되길 기원하면서 노력하자고 도전했습니다. 특히 신년 예배 때 골로새서 1 장 9-12 절 말씀 중심으로 우리는 3 가지 교훈을 받았습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점점 자라나야 합니다(10 절). (2)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채워져야 합니다(9 절). (3) 우리는 주님을 믿는 성도다운 생활을 해야 합니다(10 절). 여기서 주님을 믿는 성도다운 생활이란 (a) 선한 열매를 맺는 것(10 절), (b) 모든 일을 기쁨으로 참고 견디는 것(11 절), 그리고 (c)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것입니다(12 절). 이 3 가지 교훈을 요한일서 말씀의 관점으로 말한다면 이렇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1)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을 더욱더 알아가야 합니다(요일 4:8, 16). (2) 우리는 하나님의 뜻(계명)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자라나고 더욱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3:23). (3) 우리는 성도다운 생활인 (a) 사랑의 열매를 맺으며, (b) 그 과정에 모든 일을 기쁨으로 참고 견디며, 또한 (c)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기 위해선 우리는 먼저 사랑의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요일 4:8, 16). 특히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을 더욱더 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주일에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을 간략하게 묵상했었습니다: (1) 성부 하나님의 사랑은 허물과 죄로 (영적으로) 죽었던(엡 2:1) 우리를 살리시고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해서 화목제물로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사랑이요(요일 4:9, 10) 십자가에 버리신 사랑입니다. 이 성부 하나님의 보내신 사랑과 버리신 크신 사랑으로 하나님과 원수였던 우리가(롬 5:10)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요일 3:1). (2) 성자 예수님의 사랑은 보내신 성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이 세상에 육체로 오신 사랑(2:2; 요이 7) 또는 성육신 사랑이요 또한 화목제물로 하나님의 진노를 만족케 하시고자(2:2) 십자가에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 사랑입니다(3:16). 그 결과 우리는 영원한 생명(구원)을 받았습니다(2:25, 현대인의 성경; 5:11-13). (3) 성령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살리신 사랑(4:9) 또는 우리를 거듭나게(중생케) 하신 사랑 또는 우리를 새 피조물(새 사람으)로 만드신 사랑이요 또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과(2:22) 하나님의 아들이심(4:2, 15)을 시인케 하신 사랑 또는 우리를 회심케 하신 사랑입니다. 이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을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께서(6 절) 우리를 가르쳐 주시사 깨닫게 하시므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하나님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부담스러운 것이 아닙니다”(현대인의 성경)]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3 절). 무슨 뜻일까요?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우리가 익히 들어 아는 마태복음 11 장 28-30 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그리고 저는 제가 2009 년 7 월 19 일에 “제가 추구하고 싶은 영성”이란 글을 쓴 것을 제 블로그에서 찾아 다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글에 오늘 본문 요한일서 5 장 3 절에서 사도 요한이 말씀한 하나님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라는 말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어 나눕니다: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셔서 쉬게 해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에게 배우는 것이 마음이 쉼을 얻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멍에를 메고도 쉼을 누릴 수 있는 그 단계까지 올라가야 참다운 영성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멍에의 무게에 눌려서 정신도 못 차리는 그 상태는 참다운 영성이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멍에는 쉽고 주님의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십니다(마 11:30). 십자가가의 무게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지만 십자가 무게도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또 주님을 사랑해서 멘 것이기 때문에 가볍게 느껴질 수 있는 그 영력이라야 영성이 밑바탕 된 영력입니다. 저는 이러한 영성을 추구하고 싶습니다. 제게 주어진 멍에를 메면서도 주님을 사랑해서 멘 것이기에 그 멍에가 쉽고 가볍게 느낄 수 있는 영성을 말입니다. 멍에를 메고도 마음의 불안함 속에서 우왕좌왕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쉼을 얻는 영성을 추구하고 싶습니다(마 11:28, 29). 비록 고통과 아픔이 있을지라도 그 와중에 주님 안에서 쉼을 얻을 수 있는 영성, 그러한 가운데서 더욱더 예수님의 인격인 그의 온유함과 겸손함(마 11:29)을 본받아 가는 영성, 참으로 매력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영성에서 흘러나오는 영력이야 말로 진정한 영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한 영력으로 그리스도를 더욱더 담대히 전파하는 목회자가 되길 기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계명들은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셔서 베풀어주신 그 크신 구원의 사랑과 은혜로 인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의 짐을 짊어지시고 화목 제물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실 수 있으셨을까요?(빌 2:8) 우리 모두의 원죄,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 등 모든 죄의 짐을 지신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그 무거운 우리의 죄의 짐을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실 수 있으셨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시고 또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요일 3:16). 히브리서 12 장 2 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우리 믿음의 근원이시며 우리 믿음을 완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은 장차 누릴 기쁨을 위하여 부끄러움과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셨으며 …”]. 예수님은 장차 누릴 기쁨을 위하여 우리의 모든 죄의 짐을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난주에 신학교 선배 목사님 한분이 코로나 바이러스로 소천하신 53 세의 동료 목사님의 미망인 사모님과 두 아드님과 영어 복음성가 “The Afters - Well Done”(‘잘했다’)를 나눴다고 말하시면서 그 사모님과 두 아드님에게 너무 많은 위로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둘째 아드님이 조사를 하면서 주님께서 자기 아버지에게 “Well done, My faithful servant”(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말씀하실 것이라고 언급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는 그 글을 동문 목사님들 카카오톡 방에서 읽었을 때 얼마 전 고 헨드릭슨 목사님의 장례 축제 예배를 참석했었을 때 고인의 아드님 중 한 분이 조사를 자신의 형수님을 통해 하셨을 때 자신의 아버지가 주님 앞에 설 때에 “Well done, My faithful servant”(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들으실 것이라고 언급한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그 조사 후 영어 복음 성가 “The Afters – Well Done”이란 찬양을 평생 처음 들었는데 그 찬양을 들으면서 제 마음이 뭉클해지면서 그 가사가 하나님께 저의 간절한 기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영어 복음성가 가사를 한국어로 번역해 보았습니다:

 

‘내 고통이 사라지면 어떨까?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걱정이 사라지면 어떨까? (주님) 당신이 제 이름을 부르시고 제가 당신을 마주 보는 그 순간은 어떨까요? 저는 당신이 말하는 것을 듣기 위해 평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잘 했다 잘 했어 내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너가 속한 곳에 온 것을 환영한다. 잘 했다 잘 했어 내 사랑하는 자녀야. 너는 경주를 마쳤고 이젠 집에 있다. 너가 속한 곳에 온 것을 환영한다.’

눈물이 씻겨지면 어떨까? 그리고 모든 깨진 것은 마침내 완전하게 되면 어떨까? 제가 그렇게 아름다운 사랑 앞에 서서 당신의 영광에 들어갈 때 어떻게 될까요? 저는 그날을 위해 평생을 기다리고 있어요

저는 당신이 말씀하는 것을 듣기 위해 제 삶을 살 것입니다:

‘잘 했다 잘 했어 내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너가 속한 곳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 잘 했다 잘 했어 내 사랑하는 자녀야. 너는 경주를 마쳤고 이제 집에 있다. 너가 속한 곳에 온것을 환영한다.’

제가 그 소리를 들으면 어떨까요? 하늘의 모든 천사들이 외치는 소리요. ‘노래합니다. 거룩, 거룩, 거룩. 당신은 주님입니다(3x).

저는 그날을 위해 제 평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당신의 말씀을 듣기 위해 살거예요:

‘잘 했다 잘 했어 내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너가 속한 곳에 온 것을 환영한다. 잘 했다 잘 했어 내 사랑하는 자녀. 너는 경주를 마쳤고 이젠 집에 있다. 너가 속한 곳에 온 것을 환영한다. 잘 했어.’

 

우리 모두가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닌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서로 사랑하다가 주님 앞에 설 때에 주님께 “잘 했다 잘 했어 내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받을 수 있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한 1, 2 주 전에 어느 한 기독교 신문 웹 사이트에서 어느 목사님이 쓰신 “요한일서”에 관한 책 소개하는 글이 있어서 좀 흥미를 가지고 읽어보았습니다. 제가 좀 흥미를 갖게 된 이유는 아무래도 매 주일마다 요한일서를 묵상하며 설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책 소개 글을 내용 중에 제가 관심을 갖게 된 점은 그 책의 저자가 요한일서를 3 가지 주제로 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3 가지 주제란 “사랑”과 “진리”와 “교제”입니다. 그런데 저는 요한일서를 묵상하고 설교하면서 저자인 사도 요한이 4 가지 주제를 대조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4 가지란 “빛”과 “어두움”(요일 1:5), “진리”와 “거짓”(6 절), “사랑”과 “미움”(2:9) 그리고 “의로움”과 “악” 혹은 “불의”(3:12)입니다. 그래서 저는 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 목사님의 3 가지 주제와 저의 4 가지 주제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저는 이 정도까지 좀 정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그 목사님의 3 가지 주제를 다시금 생각할 때 이렇게 좀 정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1) 성부 하나님 아버지는 “사랑”이시다. 요한일서 4 장 8, 16 절을 보십시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2) 성자 예수님은 “진리”이시다. 요한복음 14 장 6 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3) 성령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와 진리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케 하신다. 요한일서 1 장 3 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저는 이 3 가지 진리를 이렇게 도표를 그려보았습니다:

 

                                           성부 하나님

                                              (사랑)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

                          (진리)                                   (교제)

 

 

저는 이 3 가지 주제인 “사랑”과 “진리”와 “교제”로 요한일서를 전체(1 장 1 절에서 5 장 21 절)를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우리를 “요한일서” 책(편지)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점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이것은 “요한일서” 뿐만 아니라 특히 “로마서”도 마찬가지라 생각함). 그 한 예로, 우리가 요한일서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1) 사랑이신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어떻게 사랑하셨는지(요일 4:19)의 관점으로 요한일서 책을 묵상할 필요가 있고, (2) 진리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5:1, 5)과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3:23-24)의 관점으로 요한일서 책을 묵상할 필요가 있고, (3) 성령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사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며 이웃을 사랑케 하시며(5:1) 또한 세상과 싸워 승리케 하시는지(5 절)의 관점으로 요한일서 책을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요한일서를 묵상하고 설교해 오면서 “요한일서” 편지를 쓴 사도 요한이 4 가지 주제를 대조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위에 “요한일서” 책을 쓰신 그 목사님의 3 주제와 제가 제안한 4 주제를 비교하면 “사랑”과 “진리”라는 2 주제는 동일합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3 번째 주제를 “교제”라고 말했고, 저는 “빛”과 “의로움”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목사님은 “사랑”, “진리”, “교제”가 요한일서 책의 3 가지 주제라고 말한 반면에, 저는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에서 4 가지 주제를 대조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사도 요한은 “사랑”이란 주제를 말하면서 동시에 사랑의 반대인 ‘미움’에 대해서도 말씀을 하였고, “진리”란 주제만 말씀한 것이 아니라 ‘거짓’에 대해서도 말씀을 하였고, 또한 “빛”과 ‘어두움’ 그리고 “의로움”과 ‘악’ 혹은 ‘불의’에 대해서도 말씀하였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4 가지 주제의 대조를 특히 오늘 본문이 요한일서 5 장 4-5 절 말씀과 연관해서 묵상할 때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요한일서 5 장 4-5 절을 보십시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여기서 사도 요한은 “이기느니라”, “이기는” 그리고 “이기는 자”란 말씀을 3 번이나 하고 있고 또한 “세상”이란 단어를 3 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믿음”이란 단어와 “믿는 자”란 단어를 사용하면서 누가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지를 두 마디 말씀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4 절), 그리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5 절). 이 사실을 종합해서 생각할 때 지금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난자” 즉 사랑의 하나님(4:8, 16)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사(19 절) 우리에게 큰 사랑을 베푸사(3:1) “자기의 독생자”를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해서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고(4:9, 10),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2:2)이신“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1 절)께서는 “우리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시므로(3:16, 현대인의 성경)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5:1, 4)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셨고(1, 5 절),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으므로(3:1, 2) 지금 우리는 “세상”과 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도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2:15). 그 이유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16 절). 그리고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17 절). 그러므로 거듭난 우리들, 중생한 우리들, 새 피조물(새 사람)이 된 우리들은 이 세상과 싸워야 합니다. 또한 제가 제안한 요한일서 전체의 4 가지 주제를 생각할 때 우리가 싸워야 할 이 “세상”이란 (1) 어두운 세상이요 (1:5, 6; 2:8, 9, 11), (2) 거짓된 세상이요(1:6, 8, 10; 2:4, 21, 22; 4:1, 6, 20), (3) 미움의 세상이요(2:9, 11; 3:12-15; 4:20) 또한 (4) 악한 세상이요 불의한 세상입니다(1:9; 2:2, 13, 14, 16; 3:12; 5:17, 18, 19, 21). 우리는 이러한 세상과 싸워야 합니다. 이 영적 싸움에서 승리의 비결은 “믿음”입니다. 사도 요한의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5:4).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1, 5 절)인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1, 4 절), 즉 거듭난 자, 중생한 자, 새 피조물이 된 하나님의 자녀들(3:1, 2)은 “세상을 이기느니라”는 것입니다(5:4, 5).

 

여러분,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militant church)요 또한 승리하는 교회(triumph church)입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은 이미 십자가상에서 죽음과 사단을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나 자신과 죄악과 세상과 사단과 전투해야 합니다. 전투하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군병들로서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영적 전쟁에 임해야 합니다. 영적 전쟁에 임하되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오늘 받아 순종하길 기원합니다:

 

(1)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교제(사귐)를 신실하게 또한 친밀하게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을 더 깊에, 더 많이, 더 넓게, 더 높게 알아가야 합니다.

 

(2) 우리는 거듭난(중생한) 자들이요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빛 가운데 거하면서 진리를 행하되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며 의를 행해야 합니다.

 

(3) 우리는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또한 이 세상과 교제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이요 안목의 정욕이요 이 세상의 자랑으로서 다 지나갈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어두운 세상이요 거짓된 세상이요 미움과 악과 불의가 가득 찬 세상과 싸워야 합니다. 싸우되 우리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싸워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승리하셨음을 믿고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우리는 전투적인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마지막 셋째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승리한다는 진리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5 장 4-5 절을 보십시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의 자녀들은 누구나 세상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것은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니면 누가 세상을 이기겠습니까?”] 여러분,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militant church)요 또한 승리하는 교회(triumph church)입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은 이미 십자가상에서 죽음과 사단을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나 자신과 죄악과 세상과 사단과 전투해야 합니다. 전투하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군병들로서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영적 전쟁에 임해야 합니다. 임하되 우리는 승리의 확신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승리의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성경 여호수아 1 장 1-9 절 말씀 중심으로 묵상한 승리의 비결 4 가지입니다:

 

  • 승리의 비결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성경 여호수아 1 장 3-4, 6b, 13 절을 보십시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 …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였나니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 언약의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맹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젓과 꿀이 흐르는 풍성한 땅이 이스라엘의 영토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던 여호수아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12 절) 모세가 명령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는 말을 기억하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13 절).

 

우리 또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은 마태복음 16 장 18 절 말씀입니다: “… 내가 … 내 교회를 세우리니 …”(I will build my church). 우리 교회는 주님의 교회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교회는 주님께서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약속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억할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약속의 말씀을 기념해야 합니다. 언약의 하나님께서 이 약속의 말씀을 반드시 그리고 신실하게 이루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믿음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 승리의 비결은 하나님의 함께하심입니다.

 

성경 여호수아 1 장 5, 9b, 17 절과 3 장 7 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러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 우리는 범사에 모세에게 순종한 것 같이 당신에게 순종하려니와 오직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모세와 함께 계시던 것 같이 당신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나이다 …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와도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결코 그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가 어디로 가든지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계신 것을 알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의 평생에 그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임마누엘 하나님이십니다. 즉, 그 분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마 1:23). 그리고 이 임마누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십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롬 8:31). 우리는 임마누엘 믿음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3) 승리의 비결은 강하고 담대히 하는 것입니다.

 

성경 여호수아 1 장 6a, 7a, 9a, 18 절을 보십시오: “강하고 담대하라 …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 누구든지 당신의 명령을 거역하며 당신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니 오직 강하고 담대하소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여호수아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신 언약의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는데 그가 누구를 두려워하며 무엇으로 놀라겠습니까. 하나님뿐만 아니라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 사람들도 여호수아에게 “오직 강하고 담대하소서”라고 말하였습니다.

 

성경 이사야 41 장 10 절을 보십시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반드시 성취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며 우리를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굳세게 하여 오직 믿음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4) 승리의 비결은 하나님께서 명령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성경 여호수아 1 장 7-8 절을 보십시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 책임은 바로 바로 하나님께서 명령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 명하신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평탄케 하시며 형통케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형통의 비결이요 승리의 비결입니다. 그 비결은 하나님의 명령을 다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고 알고 있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다 지켜 행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 지켜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다 지켜 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을 다 지켜 행하지 못하는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일 3:23).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입니다(요 6:29). 우리가 이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해야 합니다(시 1:2). 그리고 우리는 묵상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롬 10:17).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의 진보가 있어야 합니다(빌 1:25). 그리고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힘입어(롬 8:26)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5 장 4-5 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의 자녀들은 누구나 세상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것은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니면 누가 세상을 이기겠습니까?”] 여기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란 우리가 이미 1 절에서 묵상한바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난 자/다시 태어난 자란 뜻으로서 그 의미는 새롭게 태어난 자(new birth)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에는 계속해서/지속적으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ongoing faith)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 요한은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난 자, 다시 태어난 자는 새 피조물/새 사람답게 살아가는 증거(evidence)가 있다는 것입니다(맥아더). 그 증거는 2 가지입니다: (1) “낳으신 이”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또한 (2) 하나님에게서 거듭난 자인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입니다(1 절).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1 절), 하나님께로부터 새롭게 태어난 거듭난/중생한 그리스도인들이 새 사람답게 살아가는 증거는 예수님의 이중 계명(마 22:37, 39)과 사도요한의 요한일서 5 장 1 절 말씀처럼 (1) 하나님을 사랑하며 (2) 형제, 자매(이웃)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요일 5:4)고 말씀했는데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난(중생한) 자들이요 새 피조물인 우리가 이기는 “세상”은 무엇일까요? 저는 “세상”이란 단어를 생각할 때 요한일서 2 장 15-17 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우리 거듭난(중생한) 자들, 새 사람이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싸워서 이겨야 할 “세상”이 무엇인지를 좀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인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것을 창세기 3 장 6 절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뱀”이 아담의 아내인 “여자”(하와)를 미혹해서 선악과를 먹게 했을 때 성경은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먹음직도 하고”는 요한일서 2 장 16 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육신의 정욕”이고, “보암직도 하고”는 “안목의 정욕”이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하다는 말씀은 “이생의 자랑”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 유혹에 넘어가므로 하나님께 죄를 범했습니다. 그것을 요한일서 2 장 15 절로 말한다면, 첫째 아담(하와를 책임진 가정의 대표요 인류의 대표로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므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하고 패배했습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을 때 승리하셨습니다. 성경 마태복음 4 장 1 절부터 보면 예수님께서 공생애(public ministry)를 시작하시기 전에 40 일 동안 금식하신 후 주리셨을 때(2 절) “시험하는 자”(3 절) “마귀”(1 절)가 예수님을 3 가지로 시험을 했습니다.

 

  • 첫 번째 시험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였습니다(3 ).

 

이것을 창세기 3 장 6 절의 관점으로 말한다면, “먹음직도 하고”이고 요한일서 2 장 16 절의 관점으로 말한다면, “육신의 정욕”을 자극하는 유혹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 신명기 8 장 3 절 말씀을 인용하셔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 4:4).

 

  • 두 번째 시험은,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5-6).

 

여기서 마귀는 시편 91 편 11-12 절 말씀을 인용하였지만 좀 다릅니다: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이것을 창세기 3 장 6 절의 관점으로 말한다면,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하다이고, 요한일서 2 장 16 절의 관점으로 말한다면, “이생의 자랑”을 자극하는 유혹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 신명기 6 장 16 절을 인용하셔서 마귀의 두 번째 시험도 이기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 4:7).

 

  • 세 번째 시험은,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것을 창세기 3 장 6 절의 관점으로 말한다면, “보암직도 하고”이고 요한일서 2 장 16 절의 관점으로 말한다면, “안목의 정욕”을 자극하는 유혹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 신명기 6 장 13 절을 인용하셔서 마귀에 세 번째 시험도 이기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10).

 

결국 우리가 싸워 이겨야 할 세상은 요한일서 2 장 16 절에서 사도 요한이 이미 말씀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참고: 창 3:6; 마 4:1-11).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요한일서 5 장 4 절에서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로부터 거듭난(중생한) 새 피조물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2:15)인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 싸워 승리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외에 하나님께로부터 거듭난 (중생한) 우리 새 사람들이 싸워서 이겨야 할 것이 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도요한이 오늘 본문 요한일서 5 장 1 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1) 하나님을 사랑하며 (2) 형제, 자매(이웃)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참고: 마 22:37, 39). 다시 말하면, 우리가 싸워 승리해야 할 영적 전쟁은 예수님의 이중계명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이중계명을 순종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요일 2:17). 사도 요한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17 절)고 말씀했는데 그 구체적인 의미는 우리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고(15 절) 하나님을 사랑하며, 주님 안에서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5:1). 우리가 이렇게 주님의 계명대로 형제, 자매를 사랑하므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 알”수가 있습니다(3:14).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형제, 자매를 사랑할 때 우리는 “이미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14 절,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마귀는 계속해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이중계명을 불순종하게 미혹/유혹해서 우리 형제, 자매들(이웃들)을 미워하게 만들므로 죄를 범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가인처럼 형제를 미워하게 만들어 어둠에 있는 자로 만들려고 하고 있고(2:9), 우리 속에 거리낌이 있게 만들고자 애쓰고 있습니다(10 절). 한 마디로, 마귀는 우리가 형제, 자매를 미워하므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3:15, 현대인의 성경). 이 영적 전쟁을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하나님께로부터 거듭난(중생한) 새 사람들은 이긴다고 사도 요한은 말씀하고 있습니다(5:4).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는 세상을 이기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5 절).

 

그러면 사도 요한은 우리가 어떻게 승리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요한일서 5 장 4 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제가 몇 주 전에 “믿음의 장”인 히브리서 11 장을 읽고 묵상하면서 쓴 짧은 묵상 글 중 몇 개만 나눕니다: (1) 비록 나는 주님께 언젠가는 부르심을 받아 이 땅에서 죽을지라도 나는 주님을 향한 믿음으로서 죽은 후에라도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과 교회 식구들과 주위에 형제, 자매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히브리서 11:4). (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는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하나님이 계신 것과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는 자로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요,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사는 자입니다(히 11:5-6, 창 5:24). (3)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가 이 세상의 보화보다 더 큰 재물입니다(히브리서 11:26). (4)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요일 4:20) 보는 것 같이 하여(히 11:27) 보는 바 우리 식구와 교회 형제/자매와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요일 4:20; 마 22:39). (5) “믿음으로, 비록 그 믿음이 홍해 바다 앞에서 그 두려운 상황을 보고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믿음이라 할지라도(히 11:29; 출 14:10-12), 우리는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야 합니다(히 11:34). 우리가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 위해선 주님의 능력의 말씀에 사로 잡혀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현대인의 성경)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곳곳에 향기처럼 퍼지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고후 2:14).

 

우리가 이미 묵상한 요한일서 2 장 13 절과 14 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들은 마귀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지 좀 알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형제, 자매를 미워하라는 마귀의 유혹과 어떻게 싸워 이길 수 있는지 그 비결을 좀 알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 비결은 우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강하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강력한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강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그 말씀을 믿는 우리의 믿음이 그만큼 견고하며 굳게 서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요한일서 5 장 4 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새 찬송가 357 장 “주 믿는 사람 일어나” 2 절과 후렴 가사입니다: (2 절) “온 인류 마귀 궤휼로 큰 죄에 빠지니 진리로 띠를 띠고서 늘 기도 드리세 참 믿고 의지 하면서 겁 없이 나갈 때 주 예수 믿는 힘으로 온 세상 이기네”; (후렴)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여러분, 믿음이 이깁니다. 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이 죄악 된 세상과 마귀와 싸워 이깁니다. 비록 마귀가 우리로 하여금 자꾸만(계속해서) 형제, 자매를 미워하게 만들고자 유혹을 하고 있지만 그 유혹을 이기는 승리는 우리의 믿음입니다(요일 5:4).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신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은 “세상에 있는 자”보다 더 크시기에[마귀보다 더 능력이 크시기 때문에 (현대인의 성경)](4:4) 우리는 믿음으로 이 세상과 마귀와 싸워 승리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믿음에 견고히 서서 예수님의 계명대로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같이 사랑하므로 우리 마음에 기쁨이 충만하길 기원합니다(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