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요한일서 4장 7-21절]
주님이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시고 세우고 계시는 우리 승리장로교회는 어떠한 공동체가 돼야 합니까? 주님께서 원하시는 공동체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주님께서 세우시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의 공동체로 세우는데 우리는 무엇을 헌신해야 합니까? 우리가 주님의 몸 된 승리장로교회 공동체를 세우시는 주님의 역사에 동참하기 위해선 우리는 거짓이 없는 사랑을 추구해야 합니다(롬12:9). 거짓이 없는 사랑이란 위선이 없는 사랑입니다. 과연 거짓이 없는 사랑, 위선이 없는 사랑을 우리는 어떻게 할 수가 있습니까? 바로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는 것입니다(9절).
우리가 주님의 몸 된 승리장로교회 공동체를 세우시는 주님의 역사에 동참하기 위해선 우리는 거짓이 없는 사랑으로 형제, 자매를 사랑해야 합니다(10절). 과연 우리가 교회 안에서 형제, 자매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한 5가지를 로마서 12장9-13절에서 교훈을 받습니다: (1) 우리는 서로 우애해야 합니다(10절). 이 말씀은 우리가 한 가족과 같이 영적 인연에 서로 끌려 사모하는 마음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해야 합니다(10절). (3) 우리는 부지런히 그리고 열심히 주님을 함께 섬겨야 합니다(11절). (4) 우리는 환난 중에도 소망을 가지고 즐거워하며 인내하는 가운데 특히 기도에 항상 힘써야 합니다(12절). (5) 우리는 서로 대접하기를 힘써야 합니다(13절).
오늘 본문 요한일서 4장 7절 상반절을 보면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현대인의 성경)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저는 이 현대인의 성경 번역 말씀 그대로 제목으로 삼고 오늘 본문 요한일서 4장 7-21절에서 성경이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에 대한 교훈을 한 3가지로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4장 8, 16절을 보십시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 여러분, 혹시 “4영리”(The Four Spiritual Laws)라는 전도지를 보신 적 있으십니까? 4영리라는 전도지는 Campus Crusade of Christ(CCC)라는 기독교 단체에서 만든 전도지로서 오래 전에 쉽게 접할 수 있는 전도지였습니다. 그 전도지의 핵심은 4영리, 즉 4개의 영적 원리라 말할 수 있습니다:
- 첫 번째 영적 원리는 바로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을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입니다.
그리고 이 법에 대한 성경 구절은 바로 요한복음 3장 16절과 10장 10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 내가 온 것은 양(당신)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10).
- 두 번째 영적 원리는 “사람은 죄에 빠져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할 수 없고, 또 그것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입니다.
사람은 죄에 빠져 있습니다: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6:23).
- 세 번째 영적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람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유일한 길입니다. 당신은 그를 통하여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알게 되며, 또 그것을 체험하게 됩니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예수님은 또한 죽음에서 살아나셨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고전15:3-6). 예수 그리스도 만이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5).
- 네 번째 영적 원리는 “우리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각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알게 되며, 또 그것을 체험하게 됩니다”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2:8-9). 우리는 각자의 초청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제가 이 4영리가 생각난 이유는 바로 첫 번째 원리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을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4영리 전도지가 제일 먼저 강조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4장 8절과 16절을 보면 저자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 이 두 성경 구절 말씀을 보면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시기에 이 사랑의 하나님을 알고 또한 이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고 있다면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 요한이 오늘 본문 8절과 16절에서 두 번이나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한 이유는 왜 우리가 주님의 계명대로(2:24) 서로 사랑해야 하는지(23절, 4:7) 그 궁극적인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고(4:8, 16) 그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되(16절) 우리에게 크신 사랑을 베푸시사 그 큰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3:1, 현대인의 성경). 즉, 사랑의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3:11, 23; 4:7). 결국 우리가 예수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1) 하나님은 사랑이시고(4:8, 16), (2) 그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이란 말씀입니다(19절).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요한일서 4장 19절에서 “우리가 사랑함으로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현대인의 성경)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존재(God’s being)가 “사랑”이시고, 하나님의 행하심(God’s doing)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존재(our being)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에 우리의 행함(our doing)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듯이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 요한일서 4장 8, 16절에 적혀 있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요한일서 1장 1절부터 오늘 본문 4장 21절까지 사도 요한이 하나님은 누구시라고 말씀하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1장 1절부터 쭉 다시 읽으면서 그가 하나님은 누구라고 말씀하는지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리했을 때 제일 먼저 접한 말씀이 바로 요한일서 1장 5절에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1장 9절에서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의로우시다’라는 말씀이 2장 29절과 3장7절에도 나옵니다. 그리고 2장 1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로우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장 3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깨끗하시다(pure)’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일서 4장 2절에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요한일서 4장 8, 16절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즉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말씀을 찾다가 성부 하나님은 빛이시고, 미쁘시고, 의로우시고, 사랑이시라는 말씀과 성자 예수님은 의로우시고 깨끗하시다는 말씀,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신다(또는 시인케 하신다)는 말씀을 찾아 한 2 가지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 첫 번째로 생각하게 된 것은, 성자 예수님께서 깨끗하시다(pure)라는 말씀입니다(3:3).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다는 뜻입니다(5절). 이 말씀을 요한일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존재에 적용을 한다면, 요한일서 1장 5절 말씀처럼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또한 1장 9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미쁘시고 의로우시다’는 말씀은 하나님에게는 불성실함과 불의가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요한일서 4장 8, 1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에 성자 예수님께서 깨끗하시다는 말씀을 적용하면 뭐라 말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에게는 미움이 없으시다는 것이 아닐까요? 좀 달리 요한일서 2장 5절(참고: 요일4:12)에 근거해서 말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온전한(완전한) 사랑이다 가 아닐까요?
(2) 두 번째로 생각하게 된 것은, 제가 이미 여러분에게 말한 것처럼 요한일서에는 4가지 중요한 주제인 (a) 빛, (b) 진리, (c) 사랑, (d) 의로움입니다. 그리고 그 연관성이 무엇일까 라는 질문이 들었습니다.
그리했을 때 저는 이러한 결론을 좀 내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요, 하나님은 진리이시며, 하나님은 사랑이시요,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이 말씀은, 빛이신 하나님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 진리이신 하나님에게는 거짓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 사랑의 하나님에게는 미움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 의로우신 하나님에게는 불의가(악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결론을 오늘 본문 4장 7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현대인의 성경)라는 말씀과 연관해서 묵상할 때 이러한 적용을 해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4:8, 16). 우리는 빛 되신 하나님(1:5)의 자녀로서(3:1, 2) 진리이신(1:6)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3:23, 24).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의로우신 줄을 아는 자가 행하는 의입니다(2:29).’
CCC의 4영리의 첫 번째 영적 원리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을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입니다. 저는 이 원리를 다시금 생각할 때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위한 놀라운 구원의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고 믿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존재(God’s being)는 사랑입니다. 그 존재에서 그분의 행하심(God’s doing)인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하십시다.”
둘째로, 성경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4장 9-1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은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가 그를 통해 살 수 있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제물로 삼아주셨습니다”]. 김태광씨가 쓴 “지혜의 소금창고”라는 책을 보면 이런 글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한 순간의 연출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실천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인터넷). 진실한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리고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을 실천하므로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 또한 큰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축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대"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웃을 사랑함에 있어서 상대방으로부터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마음이 들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가를 바라지 말고 사랑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이웃 사랑함에 있어서 조건 없이 사랑해야 큰 축복을 누리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이러한 큰 축복을 누리며 기쁨을 맛보는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4장 9-10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은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가 그를 통해 살 수 있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제물로 삼아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기의 깨끗한 사랑(3:3) 또는 온전한(완전한) 사랑(2:5; 4:12)을 나타내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나요?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독생자 예수님을 “화목제물”과 “세상의 구주”로 세상에 보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9, 10, 14절). 여기서 “화목제물”이란 우리가 이미 2장 2절에서 묵상한 것처럼 “화목 제물”(propitiation)이란 단어는 “만족”(satisfaction)이란 의미로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 제물로 받쳐져 죽으시므로 죄를 형벌하셔야 했던 하나님의 거룩하신 요구를 만족케 하신 것을 가리킵니다(MacArthur). 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화목제물과 세상의 구주로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까? 그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 목적은 우리 죄를 속하여(죄에서 구원)(10절)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입니다(9절). 요한일서 3장 5절을 보면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엡2:1). 성경 에베소서 2장 1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면 “여러분은 불순종과 죄 때문에 영적으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으므로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습니다(롬5:12). 우리는 영적으로 죽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무력한 상태에 있을 때에”(6절, 현대인의 성경),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8절, 현대인의 성경),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10절,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인들을 위해 죽으시므로 (6절)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10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8절, 현대인의 성경).
여러분, 이 나타내신바 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넓고 높고 깊은지 우리는 알아가야 합니다(엡3:18-19).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죽었을 뿐만 아니라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죄를 속하고(요일4:10), 구원하고, 살리려고(9절)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 제물”(10절)과 “세상의 구주”(14절)로 보내신 사랑(9-10절)을 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미 요한일서 3장 16절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 일로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 일이 얼마나 크고 넓고 높고 깊은 사랑일까요? 요한일서 1장 1-2절을 보면 성경은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시요 “영원한 생명"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태초부터 있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신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신바 된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라고 오늘 본문 요한일서 4장 9절에서 말씀하고 있는데 1장 1-2절에서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신 “영원한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온전한(완전한) 사랑은 하나님의 독생하신 예수님을 화목 제물과 세상의 구주로 보내시므로 나타내신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알고 믿고 있습니다”(4:16, 현대인의 성경).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인정)하는 자들입니다(15절).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입니다(3:23). 이러한 자들을 가리켜 성경은 우리는 “그 사랑 안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4:16, 현대인의 성경). 즉,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도 하나님 안에 거하고(살고) 있으십니다(15절).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13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으므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살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화목 제물과 세상의 구주로 이 세상에 보내시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아 새 생명,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새 찬송가 303장 “날 위하여 십자가의”를 찬양하십시다: (1절) “날 위하여 십자가의 중한 고통 받으사 대신 죽은 주 예수의 사랑하신 은혜여 보배로운 피를 흘려 영영 죽을 죄에서 구속함을 받은 우리 어찌 찬양 안할까.”
마지막 셋째로, 성경은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4장 11,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제가 개인적으로 좀 늦게나마 좋아하게 된 책 저자가 있습니다. 제가 그 분의 책을 처음 접한 후 그분의 책이 좋아서 웬만하면 그 분의 책을 다 사서 읽었습니다. 그 저자의 이름은 이언 두기드(Iain M. Duguid)란 분으로서 동부 웨스트민스터 구약학 교수님이십니다. 그 분의 쓴 “스바냐, 학개, 말라기” 주석을 읽으면서 제가 이런 글을 써보았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것은 모든 영적인 문제의 뿌리입니다 (말 1:2). 예수 십자가 대속 죽으심을 통하여 나타내신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인격적으로 경험하지 못한 마음은 다양한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 말라기 1장 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모든 영적인 문제의 뿌리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모든 영적인 문제의 뿌리라는 말입니다.
제가 언젠가 이사야 43장 4절과 49장 15절과 시편 46편 1절 말씀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런 글을 썼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향한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1) 성경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존귀하게 여기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43장 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모두는 하나님 보시기에 존귀한 자들 입니다. 어떻게 우리와 같은 죄인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존귀한 자들이 된 것입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2) 성경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영원히 잊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49장 15절을 보십시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어머니가 젖 먹는 자식을 잊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잊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3)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피난처와 힘, 그리고 환난 중에 큰 도움이 되어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46편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요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께 피하십시다. 그가 우리를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4장 11, 19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여러분,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나요? 우리가 이미 묵상한 요한일서 4장 9-10절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시고 우리를 살리시려고 독생자 예수님을 이 세상의 화목 제물로 보내셨습니다. 여기서 “화목 제물”(propitiation)이란 단어는 “만족”(satisfaction)이란 의미로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 제물로 받쳐져 죽으시므로 죄를 형벌하셔야 했던 하나님의 거룩하신 요구를 만족케 하신 것을 가리킵니다(MacArthur).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11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현대인의 성경)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토록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에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9절).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먼저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전혀 아닙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해 주시지 않는 이상은 우리는 예수님의 이중계명의 첫째 계명대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마22:37). 여러분, 어떻게 허물과 죄로 죽었던(불순종과 죄 때문에 영적으로 죽었던)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할 수가 있겠습니까?(엡2:1) 어떻게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롬5:10)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먼저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해 주시지 않았으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먼저 사랑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요한일서 4장 19절에서 “우리가 사랑함으로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현대인의 성경)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고 있을까요? 한 5 가지로 오늘 본문 요한일서 4장 7-21절에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 성경은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4장 7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현대인의 성경)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왔습니다”]. 여기서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요한일서 편지를 받는 수신자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했는데 이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헬라어 의미는 ‘아가패토이’로서 우리가 익히 들어 아는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이란 단어입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사랑하는 자들’이란 뜻입니다[“divinely-loved ones,” that is, “beloved ones, loved by God”(Wuest’s Word Studies in the Greek New Testament)]. 그리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라고 사도 요한이 말했는데 그 의미는 ‘우리가 계속해서(지속적으로 또는 습관적으로) 서로 사랑하자’는 말입니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이미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주님의 계명대로 주님이 우리를 계속해서 사랑하고 계시듯이 우리도 서로 계속해서 사랑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요한은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for love is from God)라고 말씀했는데 그 의미는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라는 뜻입니다. 그 말은 사도 요한이 4장 8절과 16절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씀한 것처럼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는 먼저 사랑하셔서 우리가 그 사랑을 알게 되었기에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간단하게 말한다면, 사랑의 하나님이 사랑의 근원(source)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성령 하나님을 통해 우리 안에 거하셔서 성령님의 열매인 사랑을 맺어주시고 계시기에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7절).
그 말씀을 좀 반대로 생각하면 사랑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면, 미움은 마귀 사탄에게 속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1장 5절에 “…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 …”고 말씀한 후 2장 9절에 와서는 “빛 가운데 있다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11절에 와서는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라고 말씀하므로 하나님은 빛이시고, 마귀 사탄은 어두움이며, 그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지만(10절),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라고 말씀(대조)하고 있습니다(11절). 결국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만, 미움은 마귀 사탄에게 속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귀 사탄에게 속한 그 미움은 세상으로부터 온 것입니다(16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but is from the world).” 그러나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기에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15절) 오히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입니다(17절). 그 하나님의 뜻은 바로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3:23).
(2) 성경은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4장 7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현대인의 성경)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나서 하나님을 알지만”]. 여기서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났다(is born of God)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 의미는 주님의 계명대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자들은 거듭난 자들(중생한 자들)이란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화목제물(2:2)로 십자가에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3:16)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2:1)를 믿어(3:23) 구원을 받은 자들은 거듭난 자들(중생한 자들)로서 주님 안에서 새 생명을 얻었고 새 피조물들입니다. 이 새 피조물들, 새로운 사람들, 거듭난 자들은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서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거듭남’(중생)(born again)에 대해서 이미 요한일서 2장 29절에서 말씀을 했었습니다: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여기서 “의를 행하는 자”란 예수 그리스도(주님) 안에 있는 자로서 예수님의 계명대로 형제를 사랑하는 자요, 이렇게 예수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의를 행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주님에게서 난 자요(is born of Him), 바로 의로우신 하나님의 자녀들이란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27, 28절, 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사랑하는 자들이야 말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사도 요한은 말씀하고 있습니다(4:7).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4장 8절을 보십시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현대인의 성경)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그 사랑의 하나님을 아노라고 하면서 형제, 자매를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다 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릅니다”(8절). 또 누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사도 요한은 말씀하고 있는가 하면 죄를 범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한다고 3장 6절에 말씀하였습니다. 오히려 사도 요한은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8절). 즉,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10절). 요한일서 3장 10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현대인의 성경) “이것으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분명하게 구별됩니다. 의로운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나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1, 2절).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큰 사랑을 베푸시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1절, 현대인의 성경).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의를 행하는 자요 그 형제를 사랑하는 자입니다(10절).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서로 사랑하므로 거듭난(중생한) 자답게 살며 또한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것은 사랑의 삶으로 증명해 보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3) 성경은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4장 20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 잠언 26장 24-25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위선자는 아첨하는 말로 자신의 감정을 숨긴다. 그의 말이 아무리 좋게 들려도 그것을 믿을 수 없는 것은 그 마음에 추악한 생각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마음으로는 상대방을 미워하면서도 겉으로는 친절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위선입니다. 위선자는 상대방을 향하여 악한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도 입술로는 매끄러운 말을 하고 상대방의 비위를 맞추되 자기의 악한 마음을 매우 따뜻한(열렬한) 사랑의 말로 가장합니다(23절). 여러분, 위선적인 사랑은 어떠한 사랑입니까? 입술로는 “I love you”(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지만 마음으로는 미워하는 것, 이것이 위선적인 사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입술로는 주님을 존경한다고 말하면서 마음으로는 주님을 떠나 자꾸만 우상숭배의 죄를 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7장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4장 20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장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예수님의 마가복음 7장 6절 말씀과 연관해서 묵상할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외식”은 “입술로는”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는 우리의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면서도, 보이는 형제, 자매에게는 우리의 죄를 자백하지 않고 용서를 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 생각됩니다. 왜 우리는 이러한 외식의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일까요?
저는 제 안에 이러한 “외식”이 있음을 얼마 전에서야 조금 깨닫게 되어 이러한 글을 썼습니다(2020. 9. 2.): 내 안에 “외식”은 먼저 영적 거울인 하나님의 말씀에 나 자신을 반영해 보므로 “내 눈 속에서 들보”를 보기보다 “들보”가 있는 내 눈으로 상대방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는데 빠릅니다.“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성령 하나님께서 누가복음 6장 41-42절을 읽다가 묵상케 하시는 가운데 그 말씀에 제 자신을 뒤돌아보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성경 누가복음 6장 41-42절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어느 성경 해설을 보니까 이러한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 가식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하나님과 자기 양심을 속이는 심각한 죄이다”(성경 해설). 여러분, 가식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네이버 사전을 보니까 “가식”이란 “말이나 행동 따위를 거짓으로 꾸밈”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님께서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명하셨는데 마음속으로는 내 이웃을 미워하면서, 겉으로 말과 행동으로는 사랑하는 척하는 것은 가식적인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요한일서 4장 20절 상반절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2 가지로 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a) 첫째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라는 말씀을 묵상할 때 15절 말씀과 좀 연관해서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오늘 본문 20절과 15절 두 구절 다 “누구든지”로 시작하는 것을 보고 두 성경 구절의 연관성이 있지 않나 생각되었습니다. 그 연관성이란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15절)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20절). 그 이유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는 자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알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16절,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는 자는 그 사랑 안에 거하기에(16절)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20절).
(b) 둘째로 생각하게 된 점은 “거짓말 하는 자”란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미 요한일서 2장 22절에서 “거짓말 하는 자”에 대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이 말씀을 생각할 때 사도 요한은 “거짓말 하는 자”는 누구인지 2 가지로 말씀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1) 거짓말 하는 자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 (2) 거짓말 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 이 두 가지 진리를 연관해서 묵상할 때 저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인정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그리스도로서 제사장과 왕과 선지자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시되 결국에는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은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구세주의 사랑으로 구원을 받은 우리가 그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할 진데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우리 형제를 미워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요한일서 4장 20절 하반절에서 “…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거짓말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노라고 말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인데 그렇게 거짓말하는 자는 실제로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자기 자신의 입술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은 하지만 보이는 그 형제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일 뿐입니다. 진실 된 그리스도인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또한 보이는 형제를 사랑합니다. 21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형제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계명을 예수님에게 받았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아닙니다. 새 찬송가 463장 “신자 되기 원합니다” 2절 가사가 생각납니다: “사랑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사랑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저는 이 찬송을 하나님께 부르면서 제 기도 제목으로 삼고 마음속으로 온전한 사랑(미움 등이 섞이지 않는 순전한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또한 이웃을 사랑하길 기원했고 지금도 기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진심으로 온전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말미암아 우리 이웃을 그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우리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4) 성경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계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4장 12절을 보십시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그분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복음성가 “나의 안에 거하라” 가사를 보면 이렇습니다: “나의 안에 거하라 나는 네 하나님이니/ 모든 환난 가운데 너를 지키는 자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널 도와주리니/ 놀라지 말라 네 손 잡아 주리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너의 하나님이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노라 너를 사랑하는 네 여호와라.” 이 복음성가 가사를 보면 여러 성경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a) “나의 안에 거하라”: (요15: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b) “모든 환난 가운데 너를 지키는 자라”: (시121:7)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c)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널 도와주리니 놀라지 말라 네 손 잡아 주리라”: (사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d)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사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 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e)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여 여기노라”: (사43:4)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이 성경구절들 중 요한복음 15장 9절 하반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셨는데 10절을 보면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방법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그러면 예수님의 계명은 무엇입니까? 12절 보십시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7절도 보십시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현대인의 성경)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사도 요한은 이 주님의 계명에 대해서 요한일서 3장 23-24절에서도 말씀했습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살고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해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때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거하고(살고) 하나님께서도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을 통해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 4장 13절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으므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살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4장 12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그분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이 말씀과 요한일서 3장 23-24절 말씀과의 유사점은 주님의 계명인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또 하나의 유사점은 우리가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사신다)는 사실입니다. 좀 다른 점은 우리가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때 요한일서 3장 24절에서는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한다(산다)고 말씀하고 있는 반면에 4장 12절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미 요한일서 2장 5절에서 “누구든지 그(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다고 말씀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우리에게서 완전해 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때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고(2:5; 4:12),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3:24)고 사도 요한은 말씀하고 있는데, 사도 요한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2:14), 영원한 생명(영생)이 우리 속에 거한다(3:14, 15)고 말씀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고 오늘 본문 요한일서 4장 4, 13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들을 묵상할 때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사랑이신 하나님(4:8, 16)이 우리 안에 거하실 뿐만 아니라(3:24),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요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1:1-3)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요,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4:4, 13). 즉,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때 성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사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는 신자들입니다(15절). 그리고 성경은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5절). 또한 성경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2절). 우리가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서로 사랑하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길 기원합니다.
(5) 성경은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온전히 이루어지면(완성되면) 우리가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4장 17절을 보십시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현대인의 성경) “이것으로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되어 우리가 떳떳하게 심판 날을 맞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같아지기 때문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요한일서를 생각할 때 잊을 수 없는 성경 말씀은 바로 요한일서 4장 18절 상반절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 제가 이 말씀을 잊을 수 없는 이유는 지난날에 형제, 자매들을 상담할 때 이 말씀이 자주 생각나서 나눴기 때문입니다. 그 만큼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두려움이 있는 지체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지체는 결혼하기에 앞서서 마음에 두려움이 있었는데 그 두려움은 부모님의 이혼으로 인해 자기 자신도 결혼을 해서 실패할까봐의 두려움이었던 것 같습니다. 분명히 오늘 본문 요한일서 4장 18절에서 현대인의 성경은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오히려 두려움을 내쫓습니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왜 우리 안에는 두려움이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우리의 사랑이 “완전한 사랑”, 즉 “온전한 사랑”, 즉 ‘성숙한 사랑’(MacArthur)이 아니기 때문입니다(18절). 그리고 우리의 사랑이 온전하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그만큼 하나님의 계명인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에 불순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2절; 2:5).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우리의 사랑이 온전하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기보다 우리의 형제, 자매를 미워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2:11). 그래서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자들은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벌 받을 일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4:18,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여 사랑을 온전히 이룬 성도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먼저 사랑하셨듯이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고 있기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오히려 “완전한 사랑은 오히려 두려움을 내쫓습니다”(18절, 현대인의 성경).
오늘 본문 요한일서 4장 17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현대인의 성경) “이것으로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되어 우리가 떳떳하게 심판 날을 맞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같아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질 수 있을까요? 저는 이 질문을 던지면서 묵상할 때 우리가 이미 묵상한 요한일서 2장 10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여기서 ‘거리낌이 없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그 뜻을 이해 하는데 도움이 되는 성경 구절 3개가 요한복음에 있습니다: (1) (요6: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2) (요11: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3) (요16: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동일한 저자인 사도요한이 쓴 요한복음의 이 석절 말씀을 보면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1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거리낌이 없다’는 말씀의 의미는 ‘걸림이 없다’ 또는 ‘실족하지 않는다’는 의미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걸림이 없고 실족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지금 저와 여러분의 마음에는 거리낌이 없으십니까? 참 빛이신 예수님 가운데 거하여 우리가 형제, 자매를 사랑하므로 우리 속에 걸림이 되는 것이 없고 실족하지 않고 있습니까? 아니면 지금 우리가 빛 가운데 있다고 하면서 누군가를 미워하므로 우리 속에 거리낌이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마음에 걸림이 있지 않습니까? 혹시 지그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므로 실족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4:17). 여러분, 우리기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기 위해선 우리 속에 거리낌이 없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담대함을 가지기 위해선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알고 믿”는 자들로서(16절, 현대인의 성경) 또한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셨기”에(19절, 현대인의 성경), 그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고 있다면 성경은 우리가 “거짓말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0절, 현대인의 성경).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아노라 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그것은 우리가 거짓말하는 것이요 진리가 우리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2:4). 우리는 진실 된 그리스도인이 돼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 속에는 거리낌이 없을 것이며(2:10), 우리 양심이 우리를 책망하지 않으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여”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을 것입니다”(3:21-22, 현대인의 성경).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22절, 현대인의 성경).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오히려 “담대함을 얻어” 주님 앞에 설 것입니다(2:28, 현대인의 성경).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대로 우리 모두 서로 사랑하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일4:8, 16). 하나님은 사랑시기에 이 사랑의 하나님을 알고 또한 이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고 있다면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God’s being)는 사랑입니다. 그 존재에서 그분의 행하심(God’s doing)인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9-10절).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독생자 예수님을 화목제물과 세상의 구주로 세상에 보내시사 우리 죄를 속하여(죄에서 구원하여)주시고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아 새 생명,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 구원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우리는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1, 19절).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오늘 본문 요한일서 4장 7-21절에서 한 5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성경은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4:7상). (2) 성경은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7절하). (3) 성경은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0절). (4) 성경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계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2절). (5) 성경은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온전히 이루어지면(완성되면) 우리가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7절).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