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사랑하라

 

 

 

[요한일서 311-24절 말씀 묵상]

 

 

여러분, 여러분도 “변질하는 사랑이 아닌 변화하는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예수님을 믿는 신랑과 신부라면 하나님께 결혼 예배를 드리면서 증인이신 하나님과 하객들 앞에서 서약을 합니다. 그러면 부부는 서약한대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향한 부부의 사랑이 변질되어 가므로 말미암아 그 서약에 불충하고 있습니다. 결혼할 당시에는 서로가 그리고 크게(뜨겁게) 사랑하더니 이제는 그 사랑이 점점 작아지고(식어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부부가 주님 중심된 삶을 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주님 중심된 삶을 살고 있다면 주님의 사랑을 점진적으로 더욱더 체엄하고 깨달아 알아 자연스럽게 그 주님의 사랑으로 배우자를 사랑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월이 지나갈수록 그 부부는 점진적으로 주님의 사랑으로 변화되어가므로 더욱더 풍성해 지는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고 있을 것입니다. 둘 중에 하나입니다. 부부가 주님의 신실한 언약적 사랑을 경험하므로 그 사랑으로 서로에게 서약한데로 사랑하든지(점진적으로 변화하는 사랑) 아니면 그 주님의 사랑을 마음으로 모르고 머리로만 알고 있던지 또는 모르므로 세상적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므로 결국에 가서는 변질되던지(점진적으로 변질하는 사랑) 둘 중에 하나입니다. 점진적으로 변질하는 사랑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부부가 되길 기원합니다.

 

우리는 이미 요한일서 3장 1-10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1, 2절).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야 하는지 이미 5가지로 교훈을 받았습니다: (1) 우리는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우리의 아버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란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1절). (2) 우리는 장차 예수님이 나타나시면 예수님의 형상을 본 받아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보게 될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2절). (3) 우리는 예수님처럼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3절). (4) 우리는 아무도 우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7절). (5) 우리는 의를 행해야 합니다(7절). 여기서 의를 행해야 한다는 말씀은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2:1) 행하시는 대로 우리도 행해야 한다는 말입니다(6절).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사는 것입니다(7-11절). 즉, 우리는 예수님의 이중계명대로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며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 같이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마22:37-40).

 

사도 요한은 이렇게 편지를 쓴 후 오늘 본문 요한일서 3장 11절을 보면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라고 말한 후 18절에 가서도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말했고, 23절에 가서도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은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큰 사랑을 받은 자들로서(1절, 현대인의 성경) 서로 사랑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11, 18, 23절). 저는 그 권면을 구조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 먼저 첫 번째로 오늘 본문 요한일서 3장 12-15절까지는 서로 사랑하지 않고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15절)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고, (2) 그리고 두 번째로 16-24절까지는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24절), 즉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23절). 오늘 본문 요한일서 3장 23절을 보십시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현대인의 성경)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과 연관돼 있음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 요한은 믿음과 순종을 연관해서 말씀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연관성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 야고보서의 말씀을 생각나게 만듭니다: (약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현대인의 성경) “형제 여러분,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실천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런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약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현대인의 성경) “이와 같이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약2:20) “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현대인의 성경) “어리석은 사람들이여,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약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현대인의 성경)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성경은 순종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며(렘42:6, 14, 21) 또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11:6).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인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요일3:23).

 

그러면 먼저 우리는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지 않고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에 대해서 오늘 본문 요한일서 3장 11-15절 중심으로 한 4가지로 생각해 보십시다:

 

첫째로,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지 않고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가인 같은 자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3장 12절을 보십시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현대인의 성경) “여러분은 가인과 같이 되지 마십시오. 그는 마귀에게 속하여 동생을 죽였습니다. 그가 왜 동생을 죽였습니까? 자기 행위는 악하고 동생의 행위는 의로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과연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 돼야 할까요? 아마 이 질문이 우리가 주로 우리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적어도 한번쯤은 그 반대로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과연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던질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언젠가 “이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할 텐데 …”란 제목 아래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이해하려고하기 보다 너무 빨리 오해하는 사람, 진심으로 칭찬하기보다 비판하기를 속히 하는 사람, 참고 인내하기보다 너무 쉽게 함부러 분노하는 사람, 남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기보다 자기 주장하기 바쁜 사람, 이러한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할 텐데 .... ㅠ” 오늘 본문 요한일서 3장 12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가인 같이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한다면, 지금 성경은 “여러분은 가인과 같이 되지 마십시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인”이란 성경 인물은 누구입니까? 창세기에 나오는 인류 최초의 사람인 아담의 맏아들이 바로 가인입니다. 성경을 보면 가인은 “농사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창4:1-2). 그에게는 동생 아벨이 있었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습니다(2절). “추수 때가 되어 가인은 자기 농산물을 여호와께 예물로 드렸고 아벨은 자기 양의 첫 새끼를 잡아 그 중에 제일 살지고 좋은 부분을 여호와께 드렸”는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예물을 기쁘게 받으셨으나 가인의 예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3-4절, 현대인의 성경). “이 일로 인해 가인이 안색이 변할 정도로 몹시 분하여(5절) 결국에는 동생 아벨과 들에 있을 때 자기 아우 아벨을 쳐 죽였습니다(8절). 이렇게 가인은 인류 최초로 사람을 죽인 살인자요 그것도 자기 친동생을 죽인 살인자입니다. 이러한 창세기 4장에 근거한 말씀과 더불어 오늘 본문이 요한일서 3장 12절에서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를 받은 수신자들에게 가인과 같이 되지 말라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현대인의 성경) “… 그는 마귀에게 속하여 동생을 죽였습니다. 그가 왜 동생을 죽였습니까? 자기 행위는 악하고 동생의 행위는 의로 왔기 때문입니다”]. 왜 사도 요한은 가인과 같이 되지 말라고 말했냐면 그 이유는 가인은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아벨)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악한 자에게 속”했다는 말씀을 현대인의 성경은 “마귀에게 속”했다고 번역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인이 자기 친동생 아벨을 죽인 이유는 가인은 마귀에게 속했기 때문이란 말입니다. 가인은 마귀에게 속했기 때문에 그의 행위는 악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행위가 의로운 동생 아벨을 죽였던 것입니다(12절).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분의 계명에 순종하여 서로 사랑함에 있어서 가인과 같이 되지 말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왜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사랑하지 않고 도리어 그를 죽였을까 라는 생각을 다시 해보았습니다. 물론 오늘 본문 요한일서 3장 12절의 말씀대로 가인은 마귀에게 속했고 또한 가인의 행위는 악했기 때문이지만 저는 이 말씀과 더불어 창세기 4장 7절 말씀과 좀 연관해서 묵상해 보았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현대인의 성경) “네가 옳은 일을 했다면 왜 내가 네 예물을 받지 않겠느냐? 그러나 네가 옳은 일을 하지 않으면 죄가 네 문 앞에 도사리고 앉을 것이다. 죄가 너를 다스리고 싶어 하여도 너는 죄를 이겨야 한다”]. 여기서 “선을 행하지 않으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는 말씀은 선을 행하지 않고 있으면 죄가 당신 문에 웅크리고(crouching) 있다는 말입니다. 마치 호랑이가 먹잇감을 노려보면서 잡아먹으려고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죄가 가인의 마음 문에 웅크리고 엎드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가인의 동생인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4절)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셨기 때문입니다(5절). 그러므로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5절). 그것을 아시고 계셨던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고 말씀하신 면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 지니라”(it desires to have you, but you must master it)고 말씀하신 것입니다(7절). 죄가 가인의 마음 문 앞에 웅크리고 있으면서 가인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죄를 다스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자신의 아우인 아벨을 쳐 죽였습니다(8절). 그 결과 가인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그의 대적 마귀(벧전 5:8)에게 져서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죄에 다스림을 받음으로 결국 자기 친동생을 죽이는 살인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가인은 웅크리고 있었던 사자 같은 사단의 밥이 된 것입니다. 달리 말한다면, 가인은 마귀에게 속하게 된 것입니다(요일3:12,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마귀는 가인의 마음에 동생 아벨을 죽이라는 생각을 넣었습니다(요13:2).

 

저는 “마귀”하면 요한복음 8장 44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현대인의 성경) “너희는 너희 아비인 마귀의 자식이므로 너희 아비가 원하는 것을 하고 싶어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다. 그에게는 진리가 없으므로 그가 진리의 편에 서지 못한다. 그는 거짓말을 할 때마다 자기 본성을 드러낸다. 이것은 그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의 이 말씀을 보면 “마귀”는 “욕심대로” 행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데 실제로 마귀에게 속한 가인은 그의 이름의 뜻인 “획득” 또는 “소유”대로 그는 소유욕과 시기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김희보).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자신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시자 안색이 변할 정도로 몹시 분하고 투기하여 동생 아벨을 쳐 죽인 것입니다. 그는 그의 아비 마귀의 욕심대로 행하되 동생 아벨을 살인한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믿고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성도는 가인과 같이 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가인과 같이 악한 자 마귀에게 속하여 우리의 형제를 질투해서 살인하는 자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저는 “가인과 같이 되지”말라는 말씀을 묵상할 때 “고린도인이 되지 말라”는 교훈이 생각났습니다. 여기서 “고린도인이 되지 말라’는 말은 음행하지 말고 방탕하지 말라는 말입니다(인터넷). 그런데 오늘 본문 요한일서 3장 12절에서 성경은 “가인과 같이 되지” 말라는 말씀을 받을 때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 순종하는 자들로서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해야지 우리가 가인과 같이 되어서 서로 질투하고 서로 욕심내며 설로 죽이는 죄를 범해서는 아니 됩니다. 사도 요한은 이미 요한일서 3장 8절에서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가인처럼 마귀에게 속해서 죄를 범해서는 아니 됩니다. 성경 유다서 1장 11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현대인의 성경) “그들에게는 불행이 닥칠 것입니다. 그들은 가인의 악한 길을 따르고 …”]. 우리는 가인의 악한 길로 행하지 말고 도리어 의로운 아벨의 의로운 길로 행해야 합니다(요일3:12). 우리는 아벨처럼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 또는 더 나은 예배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히11:4). 우리가 하나님께 더 나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선 우리는 마태복음 5장 23-24절 말씀을 무시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여러분, 성경은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려다가 우리 형제, 자매에게 원망들을 만일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면 먼저 그 형제, 자매에게 가서 그 형제, 자매와 화목을 하고 그 후에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형제, 자매를 사랑하면서 화목한 가운데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우리 형제, 자매와 화목하지 않고 다투고 싸우는 등, 이웃 사랑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답시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면 그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참 예배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이웃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바라기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대로 우리도 행하되(요일2:6) 우리는 의를 행해야 합니다(3:10). 즉, 우리는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형제를 사랑합니다(10절).

 

둘째로,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지 않고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세상이 사랑하는 자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3장 13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현대인의 성경) “형제 여러분,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하더라도 놀라지 마십시오”]. 여러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을 미워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마 어느 누구도 세상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싶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든 안 믿는 사람들이든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미워할 수 있다(또는 미워한다 혹은 미워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5장 18절과 23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는 줄 알라. …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세상 사람들이 우리 신자들을 미워하면 그것은 먼저 우리의 주님을 미워하는 것이요 주님을 미워한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미워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이 예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 아버지를 미워하는 이유는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2장 22절에서 이미 말했듯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고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부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요한일서 3장 13절에서 우리에게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좀 달리 적용한다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미워해도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미워하는데 당연하다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를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5장 19절에서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현대인의 성경)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것이라고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아내었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 또한 요한복음 17장 14절과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현대인의 성경)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전했는데 세상은 그들을 미워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세상이 속하지 않은 것처럼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이 사도 요한의 말씀들을 보면 왜 사도 요한이 오늘 본문 요한일서 3장 13절에서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말씀했는지 그 이유를 좀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이유는 우리가 더 이상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제 우리는 주님께 택함을 받아 주님께 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미워한다는 말입니다. 이 사실을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2장에서 한 2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 요한은 주님께 속한 자들과 세상에 속한 자들을 2장에서 2 가지로 묘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1) 사도 요한은 주님께 속한 자들은 진리가 그 속에 있는 자들이요, 세상에 속한 자들은 거짓말하는 자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경 요한일서 2장 4절을 보십시오: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거짓말쟁이며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습니다”]. 먼저 세상에 속한 자들은 거짓말하는 자들이란 사실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성경 요한복음 8장 44절을 보면 “마귀”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일서 2장 4절에서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가리켜 “거짓말쟁이”"라고 현대인의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두 말씀을 연관해서 묵상할 때 우리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인 마귀에게서 난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그 말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자들을 하나님을 계명을 지키는데 거짓으로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므로 그들은 세상에 속한 거짓말쟁이란 말입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주님께 속한 자들은 진리가 그 속에 있는 자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에 속하지 않고 주님께 속한 자들은 진정으로 주님을 아는 자들로서 주님의 계명에 순종한다는 말입니다(요일2:3). 그리고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자들은 진리가 그 속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므로 진리가 그 속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으므로 “이로써 우리가” 주님 안에 있는 줄을 알게 됩니다(5절).

 

(2) 사도 요한은 주님께 속한 자들은 빛 가운데 있는 자들이요, 세상에 속한 자들은 어둠에 있는 자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경 요한일서 2장 9절을 보십시오: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현대인의 성경) “빛 가운데 산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면 아직도 어두움 속에 사는 사람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2장 4절 현대인의 성경에서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 말한 후 9절에 와서는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두 말씀을 보면 사도 요한의 이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 가운데에서는 ‘나는 하나님을 안다’, ‘나는 빛 가운데 있다’고 말은 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하면서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지금 현대 교회 안에서도 ‘주님을 압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만하면서 실제로 행동으로는 주님의 계명을 어기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미워하는 우리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와 여러분도 그럴 때가 수 없이 많지 않습니까? 특히 우리는 성경 에베소서 5장 8절에서 “너희는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말씀을 알고 있으면서도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지 못하고 아직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 어둠에 있는 자들처럼 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면 어둠에 있는 자들처럼 행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사도 요한에 의하면 그것은 바로 형제를 미워하는 것입니다(요일2:9). 성경 요한일서 2장 11절을 보십시오: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두움 속에 있고 어두움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에 그는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렇게 형제를 미워하는 어둠에 있는 자들은 세상이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3:13).

 

오늘 본문 요한일서 3장 13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현대인의 성경) “형제 여러분,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하더라도 놀라지 마십시오”]. 이 말씀을 적용하자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미워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불신자들은 신자들을 미워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 요한복음 3장 19절을 보십시오: ”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불신자들이 신자들을 미워하는 이유는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둠을 사랑하는 세상 사람들이 빛의 자녀들인 신자들을 미워하는 이유는 빛의 자녀들의 하나님의 계명 순종의 삶은 “열매 없는 어둠의 일”을 “책망”하기 때문입니다(엡 5:11). 당연한 것 아닌가요? 빛이 어둠에 비취면 어둠의 일을 당연히 들어나지 않나요? 이와 같이, 빛의 자녀들인 신자들의 빛 된 삶은 이 세상의 어둠의 일을 들춰냅니다. 그러므로 어둠에 있는 자들은 빛의 자녀들을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사도 요한은 말하고 있습니다(요일3:13). 그러므로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지 않고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15절) 세상이 사랑하는 자입니다(13절). 세상이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10절). 다시 말하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기에(10절,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의 자녀인 저와 여러분(3:1, 2)을 미워한다는 것입니다(13절). 요한일서 3장 10절의 말씀으로 말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마귀의 자녀들”이기에 마귀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귀의 자녀들은 “의를 행하지 아니하”고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합니다(10절). 그러기에 그들은 의를 행하며 그 형제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를 미워하며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의를 행하지 않고 그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이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큰 사랑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입니다(1, 2절).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하나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1절). 비록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이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때에 미워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이상히 여기기보다 당연히 여길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므로 이 세상이 미워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셋째로,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지 않고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사망에 머물러 있는 자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3장 14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에 죽음에서 벗어나 이미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미국 캘리포니아의 최저 임금(minimum wage)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2020년 1월 날짜로 직원 또는 종업원이 25명 미만인 경우는 시간당 $12이고, 26명 이상이면 시간당 $13이라고 합니다(인터넷). 제가 아르바이트 했던 1980년대에 최저 임금은 $3.10이었으니까(인터넷) 약 40년 사이에 거의 $9-10이 늘어난 것입니다. 당연이 직원이나 종업원은 일한만큼 대가로 급여를 지급받아야 합니다. 받되 성경은 고용주가 종업원에게 지불해야 할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헤 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신24:15).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그가 가난하므로 그 품삯을 간절히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15절). 신명기 24장 15절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의 품삯을 해가지기 전에 지불하십시오. 그는 가난하기 때문에 그 돈이 당장 필요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그 품삯을 당일에 주지 않으면 그가 그 일을 여호와께 호소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그 일로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사도 바울 당시에 로마 병사들은 받는 봉급이 있었다고 합니다. 마치 지금도 군인들은 정부에서 지급하는 봉급이 있듯이 말입니다. 그 1세기 당시로마 병사들이 받는 봉급은 “하루치의 양식을 받기도 하고, 의복을 받기도 하고, 돈을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로마 병사들이나 그 당시 노동에 대한 보상 또는 보수로 받는 것을 가리며 “삯”(wages)이라고 했다고 합니다(인터넷).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내려가면서 로마서 6장 23절 상반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현대인의 성경) “죄의 대가는 죽음이지만 …”]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망”이란 단어가 성경에 어떤 의미로 써졌는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성경은 “사망”이란 단어를 3가지 의미로 사용 했습니다:

 

(1) 사망이란 영적인 죽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영적인 죽음이란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가리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인류의 첫 사람인 아담은 언약의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영적으로 죽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가 되었습니다. 즉, 그는 영적으로 죽은 자였습니다. 그리고 이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롬5:12). 그리고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2절). 즉 아담의 원죄(original sin)로 말미암아 인류의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지었고 사망, 즉 영적인 죽음이 우리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자들이었습니다. 이 분리된 자들의 상태를 로마서 5장에서 사도 바울은 한 3가지로 묘사를 했습니다: (a)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현대인의 성경) “우리가 아직 무력한 상태에 있을 때”](롬5:6), (b)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8절), (c)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10절). 이러한 상태에 있었던 우리를 성경 에베소서 2장 1절에서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 사망이란 육체적인 죽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육체적인 죽음이란 우리가 이 땅에서 살다가 죽으면 몸과 영혼이 분리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세상의 의학적인 관점으로 육체저인 죽음을 생각하면 우리의 호흡이 끊어지고 심장이 멈추는 것을 죽음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적인 관점에서의 육체적인 죽음은 우리의 영혼이 몸에서 떠나는 것을 죽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죽으시기 전에 큰 소리로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셨습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고 누가복음 23장 46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육체적인 죽음은 단순히 호흡이 끊기고 심장이 멈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몸에서 분리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분리 되서 우리의 영혼은 천국으로 가고 우리의 몸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3) 사망이란 영원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영원한 죽음”이란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고 있는 “둘째 사망”을 가리킵니다(계 20:6, 11, 14; 21:8). 그러면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고 있는 “둘째 사망”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모든 인간이 영원히 처하게 될 최후의 사망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 최후의 사망의 상태란 최후 심판으로써 하나님과 영원하고 완전하게 분리되어 영원한 사망에 처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인터넷).

 

사도 바울이 로마서 6장 23절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말했을 때 “사망”이란 의미는 이 성경적인 3가지 의미가 다 포함돼 있습니다. 즉, 죄의 삯이 사망이란 말씀은 죄의 삯은 영적인 죽음, 육체적인 죽음 그리고 영원한 죽음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3장 14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에 죽음에서 벗어나 이미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이 말씀의 문맥을 보면 사도 요한은 두 그룹의 사람들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한 그룹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의를 행하”되(10절)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대로(2:6) 주님의 계명인(3, 4절) “서로 사랑”하는 자들이고(3:11), 다른 한 그룹은 “마귀의 자녀들”로서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들이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들입니다(10절). 사도 요한은 첫 번째 그룹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안다고 말한 반면에, 두 번째 그룹에 속한 하나님께 속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마귀의 자녀들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들로서 아직도 “사망에 머물러 있”다고 말했습니다(14절). 이 말씀은 간단하게 요약해서 대조한다면, “이미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형제를 사랑하지만, 아직도 사망에 머물러 있는 마귀의 자녀들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14절, 현대인의 성경). 오히려 사망에 머물러 있는 마귀의 자녀들은 형제를 미워합니다(15절). 그러므로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지 않고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자”는 아직도 “사망에 머물러 있”는 자란 말입니다. 즉, 그는 영적으로 죽은 자요 육체적으로도 죽을 자요 또한 영원한 죽음을 맞이할 사람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지만 “하나님의 은사” 또는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영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6:23, 현대인의 성경). 비록 한 사람 첫째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지만(5:12) 또 다른 한 사람이신 둘째 아담 또는 마지막 아담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순종으로 말미암아 이 하나님께서 거저주시는 선물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습니다(15절). 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빌립보서 2장 12절 말씀처럼 이 땅에 사는 동안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한 의미는 ‘당신들의 영원한 생명을 이루십시오’(당신들은 영원한 생명이 있는 자들답게 사십시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한 생명이 있는 자답게 사는 삶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영원한 생명이 있는 자들은 천국 시민권자들로서(빌3:20) 천국 백성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천국 백성답게 산다는 것은 곧 천국의 계명인 예수님의 이중계명대로 우리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 우리의 하나님을 사랑하며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마22:37-39). 성경 빌립보서 2장 13절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 신자들에게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욕도 주시고, 또 그것을 행할 힘도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성령의 열매인 사랑을 맺으시사(갈5:22-23)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며 또한 이웃을 사랑하게 만들고 계십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형제, 자매를 사랑하므로 사망에서 벗어나 이미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요일3:14, 현대인의 성경).

 

넷째로,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지 않고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살인하는 자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3장 15절을 보십시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현대인의 성경)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살인자입니다. 살인자에게 영원한 생명이 없다는 것은 여러분도 알고 있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가족 식구이든 교회 식구이든 이웃을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함에 있어서 양심에 거리낌이 없으십니까? 여러분도 주일 예배 당에 올라와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린다고 하면서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알면서도(마5:23) 그 형제와 먼저 화목하지도 않고 예배를 드릴 때가 있지 않습니까? 주일 아침 예배당에 올라오면서도 부부가 서로 다툴 때도 있고, 자식들과도 언짢은 일도 있으면서도 교회에 와서는 성도들 서로 간에 좀 껄끄러운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릴 때가 많지 않나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배드리기 전에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마5:24). 과연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습니까? 왠지 교회란 공동체 안에서도 서로의 관계가 껄끄러운 사람들이 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서로 껄끄러운 관계이면서도 표면적으로는 예배당에 올라와 서로 악수나 인사를 하면서 한 자리에 앉아 거룩하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인간의 사랑은 연약하고 부족하며 신뢰할 수 없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께서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하시므로 말미암아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형제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교회의 통일성(unity)을 지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형제 사랑을 가리켜 성경 요한일서 2장 10절은 ‘거리낌이 없는 형제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는 형제 사랑에 관한 거리낌이 있다면 그 거리낌은 왜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바로 형제를 미워하기 때문입니다(11절).

 

성경은 이렇게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2장 11절을 보십시오: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빛이십니다.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십니다(1:5).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한다면 어두운 가운데 행하는 것이므로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6절). 성경은 이렇게 거짓말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행하므로 갈 곳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11). 어두움이 형제를 미워하는 자의 눈을 멀게 한 것입니다(11절). 그 결과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으므로 말미암아 진리 가운데 행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머리로는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 줄 알면서도 미움으로 차 있는 어두운 마음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을 뿐 아니라 상대방 형제의 사랑조차도 받기를 거부합니다. 빛 가운데 있다고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입니다(2:9).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 온전케 되지 못한 자입니다(5절). 빛의 자녀로서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3장 15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현대인의 성경)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살인자입니다. 살인자에게 영원한 생명이 없다는 것은 여러분도 알고 있는 일입니다”]. 성경은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3:13). 어느 면으로 보면 이것은 지극히 정상적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형제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임에도 불구하고 형제가 서로 미워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형제가 서로 미워하는 것을 살인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보통 살인하면 우리는 칼로, 총으로 등등 사람을 죽이는 것을 생각하는데 사도 요한은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살인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요. 우리가 알고 있는 십계명 중 7계명은 “살인하지 말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출20:13). 그런데 이 말씀은 신약에 와서 예수님의 두 번째 계명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막12:31)와 연관해서 생각해 볼 때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요 결국 형제를 살인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28절에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을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5:28). 실제로 그 여자와 간음했다 라기 보다 “음란한 마음”(호5:4; 겔6:9)으로 그 여자를 보았다는 것은 이미 마음으로 간음했다는 말입니다. 즉, 음란한 마음은 간음한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은 ‘살인하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요일3:15). 그리고 이렇게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살인하는 마음이라는 것은 결국에 가서는 실제로 그 형제를 살인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요한일서 3장12절에서 실제로 자기 친동생인 아벨을 죽인 가인에 대해서 말하면서 “가인 같이 하지 말라”고 말한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요, 살인하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5절).

 

여러분, 예수님을 믿어 이미 영생을 얻은 성도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 답게 천국 계명인 예수님의 이중 계명대로 우리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 우리의 하나님을 사랑하며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 같이 사랑합니다(마22:37-39). 그러나 주님의 계명의 불순종하여 형제를 자신 같이 사랑하지 않고 마음으로 미워하여 마음의 살인죄를 범하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이 없다는 것을 우리도 알고 있어야 합니다(요일3:15). 영원한 생명이 없는 사람들은 형제를 미워하고 마음으로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살인죄를 범합니다.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지 않고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입니다(15절). 이렇게 마음으로라도 살인하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자는 아직도 사망에 머물러 있는 자요(14절), 세상이 사랑하는 자요(13절) 그의 행위는 악합니다(12절).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를 미워하는 죄를 가볍게 여겨서는 아니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하나님 앞에서 마음으로라도 살인죄를 범한 것을 회개하기를 더디 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즉시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 자복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요한일서 1장 9절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우리의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의입니다(3:10, 현대인의 성경). 우리가 우리 형제, 자매를 사랑할 때에 우리는 이미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14절, 현대인의 성경).

 

그러면 오늘 본문 요한일서 3장 16-18절 중심으로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요일3:24), 즉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자에 대해서 한 3가지로 생각해 보십시다:

 

첫째로,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자는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3장 16절을 보십시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현대인의 성경)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 일로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여러분,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랑”하면 그 유명한 사랑장인 고린도전서 13장을 말할 것입니다. 특히 우리는 “사랑”하면 4-7절 말씀을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근데 저는 오늘 본문 요한일서 3장 16절 말씀을 묵상할 때 고린도전서 13장보다 요한복음 15장 12-14절이 더 생각납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선 먼저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십자가에서 버리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자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걸머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 죽음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달아 가면 갈수록(엡3:19) 그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3장 16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현대인의 성경)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 일로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사도 요한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서 사랑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6절상). 다시 말하면, 사도 요한이나 그의 편지를 받는 수신자 성도들이나 우리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목숨을 버리신 것으로 말미암아 이로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5장8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현대인의 성경).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원죄,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를 다 담당하시고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영원한 형벌을 다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8절). 거룩하시고 의로우시사 죄를 미워하시고 멸하시는 하나님께서 영원히 형벌을 받아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인 우리에 대한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분명하게 나타내셨습니다(김창세). 또한 오늘 본문 요한일서 3장 16절 말씀을 보면 사도 요한은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자는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를 위해 희생하는 것입니다. 성경 에베소서 5장 2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자기를 바쳐 하나님께 향기로운 예물과 희생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그분을 본받아 사랑으로 생활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을 목숨을 희생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1, 15, 17절을 보십시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 내가 목숨을 버리는 것은 ….” 물론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지만(사53:10) 성자 예수님 또한 “양을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버리길 원하셨습니다(요10:11, 15, 17, 18). 그래서 성자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성부 하나님의 뜻에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복종하시면서(빌2:8; 요14:21)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것입니다(요10:11, 15, 17, 18). 예수님께서 그리하신 이유는 예수님에게는 스스로 목숨을 버릴 권세가 있으셨기 때문입니다(18절).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로서 성부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29절) 양들을 위하여(11절)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 이유는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10절). 한 마디로,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기의 생명을 버리신 이유는 “양들”(11절)에게 “영생”을 주시므로 “영원히 멸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28절).

 

여러분,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자는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 (요일3:16).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16절).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15:13). 우리 모두 작은 일부터 사랑하는 형제, 자매를 위해 희생 하십시다. 희생하되 자원하는 마음으로, 겸손히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까지 희생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둘째로,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자는 재물을 가지고 궁핍한 형제를 도와줍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3장 17절을 보십시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현대인의 성경)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 가난한 형제를 보고도 도와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부와 재물의 축복을 구하는 것이 잘못된 것인가요? 과연 우리에게 부와 재물이 많은 면 행복한 것인가요? 성경 전도서 6장 3절과 6절을 보면 “행복”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사람이 비록 백 명의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의 영혼은 그러한 행복(his prosperity)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3절), “그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행복(his prosperity)을 보지 못하면 …”(6절). 이 말씀을 보면 “행복”이란 단어를 영어로 “prosperity”라고 번역하였는데 여기서 prosperity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와 재물입니다(2절).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부와 재물의 축복은 우리의 행복이란 말입니다[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와 재물의 축복을 받지 못했다고 불행한 사람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부와 재물의 축복을 받느냐, 못 받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형통이요 행복이기 때문입니다(창39장)]. 우리가 하나님께 부와 재물의 축복을 받으면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잊지 말아할 것은 부와 재물의 축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 부와 재물의 축복을 받아 누리는 축복입니다. 전도서 5장 19절을 보십시오: “또한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그에게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제 몫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이 말씀을 보면 전도자 솔로몬 왕은 한 4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께서는 부와 재물을 축복을 주십니다, (2)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수고함을 통해서 부와 재물의 축복을 주십니다, (3) 하나님께서는 부와 재물의 축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4) 우리가 그 부와 재물의 축복을 즐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솔로몬 왕은 전도서 6장에 가서는 “한 가지 불행한 일이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6:1).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절). 그 불행한 일이란 사람이 자신의 행복을 보지 못하고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자신의 행복을 보지 못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일까요? 그 사람은 바로 하나님께 부와 재물의 축복은 받았지만 그 축복을 누리도록 허락받지 못한 사람입니다(2절). 아무리 백 명의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천 년의 갑절 이라 할지라도(3, 6절) 하나님께 받은 부와 재물의 축복을 자기 자신이 누릴 수가 없다면 어떻게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부와 재물의 축복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축복을 누리는 축복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참 어리석고 어리석은 사람은 풍부한 재물을 가지고도 그 재물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누린다 해도 헛된 쾌락에 그 재물을 사용하는 자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왜 그들은 어리석게도 풍부한 재물을 누리지 못합니까? 저는 그 이유가 전도서 5장 13절에서 찾아보았습니다: “내가 해 아래서 큰 폐단 되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 되도록 지키는 것이라.” 왜 풍부한 재물을 누리지 못합니까? 그 이유는 재물의 소유주가 자기의 재물을 자기에게 해 되도록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입니까? 왜 자기에게 해가 될 정도로 재물을 왜 지키는 것입니까? 그 근본 이유는 자기 자신보다 돈(재물)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돈이 사람의 생명보다 더 귀할 수 있습니까? 박윤선 박사님은 이러한 말했습니다: “영원히 가지지 못할 것에 생명을 받침은 해로운 일이다"(박윤선). 참 큰 폐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에게 해가 될 정도로 지키려고 했는데 그 재물을 재난으로 인하여 다 잃어버리게 되므로 말미암아 결국 자식들에게도 물려줄게 하나도 없이 빈손이 되는 것을 솔로몬 왕은 이 세상에 보았습니다(14절). 그러므로 솔로몬 왕은 전도서 5장 15-16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 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이것도 폐단이라 어떻게 왔든지 그대로 가리니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가 저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결국 이 세상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수고를 많이 해서 재물을 많이 모았다 해도 우리가 죽을 때에 가지고 갈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해하면서 재물을 풍부하게 모아쓴들 무엇 합니까? 누리지도 못할 뿐 아니라 재난으로 인해 그 모았던 모든 재물을 잃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 결과 성경은 “일평생을 어두운데서 먹으며 번뇌와 병과 분노가 저에게 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7절). 결국 미련한 부자는 평생 바람을 잡으려는 헛된 수고를 한 것 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아니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지혜로운 자들은 하나님께서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재물의 능을 주셔야 우리가 재물을 풍부하게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풍부한 재물 또한 하나님께서 능히 누리게 하셔야 우리가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부와 재물의 축복을 받은 신자들은 어떻게 그 받은 축복을 누려야 할까요?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되 재물을 가지고 궁핍한 형제를 도와줘야 합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3장 17절을 보십시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사도 요한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 가난한 형제를 보고도 도와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겠습니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7절, 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많은 재산을 가지고도 가난한 형제를 보고도 도와주시는 않는 자를 가리켜 성경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눅12:21). 이러한 자는 자기를 위해서만 재산을 쌓아 두는 자입니다(21절). 그리고 잠언 28장 22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면 “이기적인 사람은 재산을 모으는데 급급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이타적인 사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있는 성도들은(요일3:16) 하나님이 주신 물질의 축복으로 이웃을 사랑하는데 사용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쓴 이 내용을 들어보십시오. 고린도후서 12장 15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도 내어 주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겠느냐”[(현대인의 성경)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서라면 내가 가진 것뿐만 아니라 내 몸까지도 기꺼이 바치겠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이토록 사랑하고 있는데 여러분도 나를 그만큼 사랑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그가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내어주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사랑하는 형제들을 위해 자기가 가진 재물 뿐만 아니라 자기 몸까지도 기꺼이 바쳤습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사랑하여 자기가 가진 재물도 사용했는데 그 또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사랑을 받아 바울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을 때 그들에게 도움을 받았습니다(빌4:14).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복음의 시초에”도 바울이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도와줬을 뿐만 아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었을 때에도 두 번이나 바울에게 쓸 것을 보내줬습니다(15-16절). 그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가 성도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이방인 형제들인 마게도냐와 아가야 형제들이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구제 헌금을 모금해서 바울에게 주므로 바울은 그 헌금을 가지고(롬15:26)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섬겼습니다(25, 31절). 성경 시편 112편 9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십시오: “그가 가난한 사람들을 후하게 구제해 주었으니 그의 의로운 행위가 영원히 남을 것이며 그는 유력하고 존경받는 사람이 될 것이다.”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이탈리아 부대’라는 하는 로마 군대 백부장은 “백성을 많이 구제”했습니다(1-2절). 이 구제는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구제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4절). 그러므로 고넬료는 “유대 온 족속이 칭찬했다 또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22절, 현대인의 성경).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어떤 백부장”은 유대 민족을 사랑하여 그들을 위하여 회당을 지어주었습니다(눅7:2, 5).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되 재물을 가지고 궁핍(가난)한 형제를 도와줘야 합니다(요일3:17). 성경 잠언 14장 24절을 보십시오: “지혜로운 자의 재물은 그의 면류관이요 미련한 자의 소유는 다만 미련한 것이니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하되 주위에 궁핍한 형제, 자매를 물질로도 도와야 합니다. 그리할 때 그 재물은 우리의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

 

셋째로,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자는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합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3장 18절을 보십시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현대인의 성경) “자녀들이여, 우리는 말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 저는 개인적으로 새 찬송가 463장 “신자 되기 원합니다”를 저의 간절한 기도 제목으로 삼고 찬양할 때가 있습니다. 그 찬송가 가사대로 “신자 되기 원합니다”, “사랑하기 원합니다”, “거룩하기 원합니다”, “예수 닮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가 저의 간절한 기도 제목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나 자신이, 우리 자신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돼야 합니다. 제가 2018년 10월 말에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습니다”라는 제목 아래 이런 짧은 묵상의 글을 썼습니다: “거짓말하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것보다 진실을 말하면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멀리함(따돌림)을 받으며 욕을 먹고 내 이름이 더럽힘을 받는 게 훨씬 더 낫습니다(눅6:22, 26).” 그런데 우리 목사님들부터 진실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그리도 습관적으로 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조정민이란 사람이 쓴 “고난이 선물이다”란 책에 이런 내용의 글이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고자 하는 사람 중에 진실한 사람을 찾기가 어렵고, 어디서나 가르치고자 하는 사람 중에 겸손한 사람을 찾기가 어렵습니다”(조정민).

 

여러분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진실 된 사랑의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으시죠? 저는 2018년 12월 말에 “진실 된 사랑의 눈물”이란 제목 아래 이런 짧은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오늘도 눈가에 눈물을 엿보았습니다. 그 눈물의 의미를 충분히 헤아리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그 눈물은 진실 된 사랑의 눈물임을 압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향한 어머니의 눈물 중 끊이지 않는 간절한 기도의 눈물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뜻을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대하며 희망을 갖습니다.” 우리 모두가 사랑하는 자녀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간절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려가면서 기도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 간절한 사랑의 기도의 눈물은 거짓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즉,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진실 된 기도의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려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3장 18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현대인의 성경) “자녀들이여, 우리는 말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 왜 사도 요한은 수신자들에게 편지를 계속해서 써내려가면서 “우리는 말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현대인의 성경)라고 말한 것일까요? 혹시 그 이유가 가까운 문맥인 17절에서 말한 것처럼 요한일서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 중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 가난한 형제를 보고도 도와주지 않는” 성도들이 있어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닐까요? (17절, 현대인의 성경) 혹시 그 이유가 그 성도들 중에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10절, 현대인의 성경)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15절, 현대인의 성경; 참고: 2:11) 그 뿐만 아니라 제 생각에 사도 요한이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을 하자고 권면한 이유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신 바되시되(1:1-2) 육체로 오시고(요이1:7) 또한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로서(요일2:2)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되(2:17)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4:11).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말한 것입니다(11절).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야고보서에서 사도 야고보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라는 내용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약2:14, 17, 20, 26). 그와 같이럼, 행함이 없는 사랑은 죽은 사랑이라 생각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계명인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요일3:11)에 불순종하고 있으면서 “말로만 사랑”하고 있다는 것(18절, 현대인의 성경)은 죽은 사랑이란 말입니다. 달리 말한다면, 순종이 없는 믿음은 거짓된 믿음인 것처럼 순종이 없는 사랑은 거짓된 사랑이란 말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요 거짓된 믿음인 것처럼, 행함이 없는 사랑은 죽은 사랑이요 거짓된 사랑입니다.

 

여러분, 먼저 우리는 진실한 그리스도인 돼야 합니다. 우리는 정직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거짓을 말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서로를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뿐만 아니라 서로 앞에서도 진실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로 서로 앞에서 진실해야 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내 증인이십니다’(빌1:8)라고 서로에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진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 보고 계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듯이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도 진실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솔직하고 분명하며 투명한 대화를 해야 합니다. 대화를 하되 우리는 ‘나-중심’적인 대화를 하기보다 ‘상대방-중심’적인 대화를 해야 합니다. 그 말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엇인가 원해서 말을 하기보다 그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해 주길 원하여 말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하는 사람을 세워주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에는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러 나오는 사랑의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말만 ‘사랑합니다’라고 말한 후 행함이 없다면 우리 마음엔 고통이 있어야 합니다(잠14:23). 예를 들어, 우리가 말로만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하면서 실제 삶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이웃을 미워하면 우리 마음에 당연히 고통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행함과 진실함으로 서로 사랑하십시다. 더 이상 말로만 서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하십시다. 만일 우리가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지 않고 말과 혀로만 하면 우리는 진리에 속한 줄 알 수가 없고 또한 우리 마음을 주님 앞에서 굳세게 할 수가 없습니다(요일3:18-19).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행함이 있는 진실 된 사랑을 본받아 우리도 서로를 행함이 있는 진실 된 사랑으로 서로 사랑할 수 있길 기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요한일서 319-24절에서 우리가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했을 때 그 순종의 결과 또는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순종하면 어떠한 축복을 받아 누리는지 2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한 우리 마음이 주님 앞에서 굳세게 합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3장 19절을 보십시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현대인의 성경) “그러면 우리가 진리에 속한 것을 알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도 마음을 편안하게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죄의 문제로 고민하지 않는 사람을 과연 성도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 이유는 ‘성도’란 말은 죄악 된 세상과 구별된 자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도로서의 책임을 신실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그 책임이란 바로 죄악 된 세상과 절교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는 죄로부터 분리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물과 기름이 섞일 수 없듯이 빛의 자녀인 성도는 어두운 세상과 짝지어서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 우리 성도들은 소속감이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요17:16) 빛 되시는 주님께 속한 자들임을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소속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확실한 소속감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그가 쓴 편지 요한일서에서 우리 성도들은 둘 중에 하나에 소속해 있다는 사실을 4가지로 대조를 했습니다. 그 4가지란 빛과 어둠(요일1:5), ‘진리’와 ‘거짓’(6절), ‘사랑’과 ‘미움’(2:9) 그리고 ‘의로움’과 “악” 또는 “불의”입니다(3:12). 이 말씀은 우리 성도들은 빛과 진리와 사랑과 의로움에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어둠과 거짓과 미움과 악 또는 불의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빛의 자녀들로서 진리 안에 거하여 의로움을 행하되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요한일서 3장 19절에서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게 된다고 말했는데 여기서 “이로써”란 말은 18절의 말씀한 것처럼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않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면,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하는 성도야 말로 자신이 진리에 속한 줄을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진리에 속한 성도야 말로 예수님의 참 제자입니다. 그 이유는 진리에 속한 성도야 말로 진리가 되시는 예수님 안에 속해있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되시는 예수님 안에 속해있는 성도는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게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므로 주님 앞에서 마음을 굳세게 합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도 마음을 편안하게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우리가 마음을 굳세게 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20절) 앞에서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21절). 이것은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 2장 10절에서 이미 말한 “거리낌이 없”는 사랑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주님의 계명대로 형제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성도는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하나님에게서 받습니다(3:22).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22절을 보면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의 계명” 즉 주님의 계명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23절).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계명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은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한 우리 마음이 주님 앞에서 굳세게 합니다(19절). 우리가 주님의 계명에 순종할 때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책망할 것이 없으므로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습니다(21절). 그리고 그 담대함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께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하나님에게서 받습니다(22절). 그 이유는 우리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즉 주님을 믿음으로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22, 23절). 이러한 순종의 축복이 우리에게 임하길 기원합니다.

 

마지막 둘째로, 우리가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면 우리는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 압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3장 24절을 보십시오: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살고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해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 복음 성가 “나의 안에 거하라”를 기억하시죠? 가사는 이렇습니다: “나의 안에 거하라 나는 네 하나님이니 모든 환란 가운데 너를 지키는 자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널 도와주리니 놀라지 말라 네 손 잡아 주리라 내가 너를 지명하며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너의 하나님이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노라 너를 사랑하는 내 여호와라.” 이 복음성가 가사를 생각할 때 받는 교훈은 우리는 주님의 것으로서 주님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할 때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도와주시며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 요한일서 3장 24절에서 사도 요한이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은 그의 안에 거한다’고 말한 것을 묵상할 때 우리는 동일한 저자인 사도 요한이 쓴 요한복음 15장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의 말씀이 생각날 수가 있습니다. 특히 저는 요한복음 15장 4-5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여기서 사도 요한은 “내 안에 거하라”고 말했는데 우리가 이미 묵상한 요한일서 2장 6절에서도 그는 “그의 안에 산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거하라”는 말과 “산다”는 말은 같은 의미입니다. 즉, 사도 요한은 두 구절에서 ‘주님 안에서 살라/주님 안에 거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일서 2장 6절에서 “그의 안에 산다”는 의미는 주님 안에 거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주님 안에 거한다’는 말씀은 요한복음 15장 4-5절 말씀에 근거해서 생각해 볼 때 그 의미는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듯이 주님에게 붙어있다는 말이요 주님을 떠나지 않고 주님과 함께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사도요한에게 있어서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주님 안에 거해있을 때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말한다면, 우리가 주님 안에 살지(거하지) 않고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요15:5).

 

우리가 이미 묵상한 요한일서 2장 5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에게서 완전해집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그분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산다고 하는(거하는) 자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하면 바로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인지 아닌지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있으면 이것으로 우리가 주님 안에 있는 줄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즉, 주님 안에서 산다고 하는 자(6절)는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요,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다고 것입니다(5절). 그 말은 즉, 주님 안에 산다는 자(거한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된 자를 가리킵니다. 이것을 요한복음 15장 9-10절의 말씀으로 좀 달리 말한다면, 주님 안에 산다는 자(거한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란 말입니다. 요한복음 15장 9-10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현대인의 성경)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내 사랑 안에서 살아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의 사랑 안에 있는 것과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서 살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을 보면 사도 요한은 주님 안에 산다는 자, 즉 주님 안에 거한다는 자는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요,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고 있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사도 요한은 ‘주님 안에 거하는 것’과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과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이 3가지를 연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 요한은 ‘주님 안에서 거하는 자’와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와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를 동일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동일시하되 주님 안에 거하는 자는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요,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란 말입니다. 주님 안에 거하는 자는 주님의 말씀을 지키므로 주님의 사랑이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요일2:5-6). 그리고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지키므로 주님의 사랑이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어가는 예수님의 제자 안에는 주님의 기쁨이 충만합니다(넘칩니다)(요15:11).

 

그러면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요한일서 3장 24절을 보십시오: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살고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해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24절하). 이 성령님은 요한일서 4장 2절을 보면 “하나님의 영”이요, 하나님의 영이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이시요 “하나님께 속”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절을 보면 그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은 “너희 안에 계신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은 우리 안에 계신 분으로 우리는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 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 주신 성령님은 우리 안에 거하셔서 사랑이란 열매를 맺고 계십니다(갈5:22). 그리고 성령님은 주님의 계명인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순종케 하십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면 우리는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 알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계명인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므로 우리가 받고 누리는 축복입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큰 사랑을 받은 자들로서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지 않고 우리 형제를 미워하는 자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가인같이 자기 동생을 죽이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지 않고 우리 형제를 미워하면 우리는 세상이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또한 우리는 아직도 사망에 머물러 있는 자들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형제를 미워하고 있다면 그것은 살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로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셨던 것처럼 사랑하는 우리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가난하고 궁핍한 형제, 자매를 도와줘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사랑하되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한 우리 마음이 주님 앞에서 굳세게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받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 알 것입니다. 이 귀한 주님의 계명의 순종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