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베푸셨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요한일서 3장 1-10절 말씀 묵상]
이 허무한 인생,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가치 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선 우리는 주님의 인자로 만족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시90:14).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전3:11).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들로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갈 때 만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사랑을 깨달아 가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란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기까지 사랑입니다(요3:16; 롬5:6, 8, 10). 저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이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은 3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은 ‘연약한 자’들(helpless)을 사랑하시는 사랑입니다(롬5:6).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 전에 예정하신대로 나타날 시기에[“기약대로”(6절), 박윤선] 경건히 않은 자들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들(the sinners)을 사랑하시는 사랑입니다(8절). 요한일서 4장9-1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3) 하나님의 사랑은 ‘원수’들을 사랑하시는 사랑입니다(롬5:10).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6절), 즉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8 절)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 관계였습니다(10절).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우리가 깨달아 알아가면 알아갈 수록 우리는 새 찬송가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께 찬양드리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1절)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죄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 제물 삼으시고 죄 용서 하셨네 <후렴>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네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그러나 우리는 향하신 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의심하는 것은 모든 영적인 문제의 뿌리입니다(말1:2). 예수 십자가 대속 죽으심을 통하여 나타내신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인격적으로 경험하지 못한 마음은 다양한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3장 1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큰 사랑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우리를 몰라보는 것은 그들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 우리도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저는 생각해 볼 때 한 2주 전 새벽기도회 때 묵상하다가 생각난 요셉에 관한 창세기 말씀이 다시 생각났습니다. 즉, 요셉은 그의 나이 17살 때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죽임을 당할 뻔 하다가(창37장) 애굽 왕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인 보디발의 노예가 되었지만(39장) 결국에 가서는 그의 나이 30세에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하므로 애굽의 총리가 된 말씀입니다(41장). 저는 그 말씀을 다시금 묵상할 때 애굽에서 노예였던 히브리 청소년 요셉이 그 나라의 총리가 되었다는 이 놀라운 신분의 변화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했을 때 저는 오래 전에 원로 목사님이 설교하신 로마서 5장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 때 원로 목사님께서 설교하시면서 로마서 5장에 나오는 석 절 말씀을 강조하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란 말씀(롬5:6)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8절) 그리고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10절). 저는 이 석절 말씀이 생각나면서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이란 인물의 신분 변화보다 예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의 신분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즉,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연약한 죄인들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젠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저는 이 정도로 놀라운 신분의 변화를 받은 사람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라는 사실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3장 1절 상반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계속해서 편지를 써내려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큰 사랑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 지금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 한번 생각해 보라’고 권면하면서 ‘그 큰 사랑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한 마디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그 사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만큼 지금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하나님의 크신 사랑인지 우리는 깨달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요한일서 3장 2절 상반절에 또 다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자녀라 …”[(현대인의 성경)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 저와 여러분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원수였던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을까요? 신학적으로 간략하게 말한다면, “구원의 서정”으로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구원의 서정”이란 ‘구원의 순서’ (혹은 ‘구원의 방법’)를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행해진 구원의 사역이 죄인들의 마음과 생활에 주관적으로 실현(적용)되는 과정을 서술하는 용어”입니다(인터넷). 이 구원의 서정(순서/방법)은 9가지입니다: (1) 소명(부르심), (2) 중생(거듭남), (3) 회심(회개), (4) 신앙(믿음), (5) 칭의(의롭다 여김), (6) 양자(양자 삼으심), (7) 성화, (8) 성도의 견인, (9) 영화. 이 9가지 순서 중 여섯 번째가 바로 “양자”, 즉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가리킵니다. 이 “양자”에 대한 말씀이 성경에도 나와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5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여러분은 다시 두려워해야 할 종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 라고 부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을 믿기 전에 저와 여러분은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았었습니다(15절). 여기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이란 예수님을 믿기 전에 “본래” 우리는 “죄의 종”이었다는 말입니다(6:17, 20).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8장 34절에서 우리는 죄를 범하는 죄의 종이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를 범하는 죄의 종이었을 때에는 “죄에게 종노릇”했었습니다(롬6:6). 그 때 우리는 “죄의 정욕”이 우리 안에서 작용해서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했었습니다[죽음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음](7:5). 그 때 우리의 “아비”는 마귀였다고 사도 요한은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8:44). 한 마디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거짓의 아비”인 마귀의 자녀로서 마귀의 욕심대로 죄를 범하는 죄의 종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로마서 6장 23절 말씀을 통해 이미 배워 알고 있듯이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우리는 죄의 종으로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랬던 저와 여러분이 영원히 살게 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2장 17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이 세상도 그것에 대한 욕망도 다 지나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삽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까?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한 말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비 마귀의 자녀로서 죄를 범하는 죄의 종으로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저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특권)이 주어졌다고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 말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그분은 자기를 영접 하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우리가 이미 묵상한 요한일서 2장 29절에서도 사도 요한은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안다면 의롭게 사는 사람들이 모두 그분의 자녀들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라고 배웠습니다. 여기서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어 거듭난 자들로서 하나님이 의로우신 것처럼 그들도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아 그들 또한 의로운 자들입니다(롬 4:25). 그러므로 의로운 자들은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가르치시는 대로 언제가 의를 행해야 합니다. 즉, 우리는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요일2:1)께서 행하시는 대로 우리도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6절). 우리는 예수님의 계명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7-11절). 요약하자면, 요한일서 2장 29절에서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는 “의를 행하는 자”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로서 예수님의 계명대로 형제를 사랑하는 자요, 이렇게 예수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의를 행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주님에게서 난 자요(is born of Him), 바로 의로우신 하나님의 자녀들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그 사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생각해 보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3:1).
(1절)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죄범 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 제물 삼으시고 죄 용서 하셨네
(2절) 괴로운 시절 지나가고 땅 위의 영화 쇠할 때
주 믿지 않던 영혼들은 큰 소리 외쳐 울어도
주 믿는 성도들에게 큰 사랑 베푸사
우리의 죄 사했으니 그 은혜 잊을까
(3절) 하늘은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 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후렴>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네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새 찬송가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큰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요?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이미 요한일서 2장 27절과 28절에서 배웠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생활해)야 하는 것일까요? 저는 오늘 본문 요한일서 3장 1-10절 말씀 중심으로 한 5 가지로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베푸신 큰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우리의 아버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란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3장 1절을 보십시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현대인의 성경)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큰 사랑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우리를 몰라보는 것은 그들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알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서, 이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1, 2절). 그들은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습니다(롬8:15).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요한일서 3장 1절 하반절을 보면 그 이유는 그들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현대인의 성경). 당연한 것 아닙니까?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으므로 하나님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들이 저와 여러분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실제로 사도 요한이 이 요한일서 편지를 썼을 당시인 1세기 때 거짓말하는 적그리스도들이 나타나 성도들을 미혹했는데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 예수님을 부인했을 뿐만 아니라(2:22)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과(23절) 육체로 오셨음을 부인했습니다(요이1:7). 이러한 마지막 때에(2:18)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부인하고 모른다고 하는 불신자들이(22절, 현대인의 성경)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인(3:1, 2) 우리를 알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 고린도전서 2장 14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현대인의 성경)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은 하나님의 성령이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영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일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것을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쓴 편지 내용 중 한 부분으로서 그 내용의 문맥을 보면 바울은 그들에게 “육에 속한 사람”(14절) 또는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현대인의 성경)과 “신령한 자”(15절) 또는 “영적인 사람”(현대인의 성경)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대조하면서 바울은 “신령한 자”(영적인 사람)는 “하나님의 지혜”가 있어서(7절) “영광의 주”님을 알고 있지만(8절) “육에 속한 사람”(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은 “이 세상의 지혜”(6절)만 있고 “하나님의 지혜”를 알지 못하기에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8절). 그리고 바울은 “사람의 마음”으로는 영광의 주님을 생각하지도 못하였지만 (9절)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영광의 주님을 우리에게 알려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0절,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그는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했습니다(12절).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예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은 세상의 영을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성령님을 받았으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성령님을 받지 못하고 세상의 영을 받았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을 알 수가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육에 속한 거듭나지 못한 불신자들은 성령님의 일들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들이 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입니다. 또한 그들은 그것들을 알 수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는 영적 분별력이 없기 때문입니다(14절). 그러므로 영적 분별력이 없는 육에 속한 거듭나지 못한 불신자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알지 못합니다(요일3:1).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인 우리를 알 수가 없습니다(1절).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들처럼 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해야 합니다. 성경 히브리서 11장 13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현대인의 성경)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된 것을 받지 못했으나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잠시 머무는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것을 고백했습니다”]. “외국인”이 누구입니까? “다른 나라의 국민”입니다(사전). 즉,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국민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20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 또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우리가 “나그네임”을 증언해야 합니다. 나그네는 누구입니까? “자신이 태어난 고향이나 삶의 터전을 떠나 사는 사람”입니다(성경사전). 우리는 “본향을 찾는 자”들입니다(히11:14).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조상들처럼 우리가 “찾고 있는 고향이 따로 있”습니다(14절, 현대인의 성경). 이제 우리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16절). 즉, 우리는 하늘나라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천국 백성들로서 “하늘의 도성”을 바라고 있습니다(10절, 현대인의 성경).
(1절)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내 뜻과 정성 모아서 날마다 기도합니다.
(4절) 험하고 높은 이 길을 싸우며 나아갑니다
다시금 기도하오니 내 주여 인도하소서
<후렴> 내 주여 내 맘 붙드사 그곳에 있게 하소서
그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
[새 찬송가 491장,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둘째로, 하나님께서 베푸신 큰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장차 예수님이 나타나시면 예수님의 형상을 본 받아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3장 2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현대인의 성경)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장차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예수님이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어 그분의 참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소망은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소망의 인내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도하며,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다림이 과연 저와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성도의 죽음을 접할 때 소망 없는 불신자들처럼 슬퍼하지 않습니다(살전 5:13). 그 이유는 재림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믿기 때문입니다(14절). 더 나아가서 재림을 기대하며 준비하는 성도들이 슬퍼하지 않은 이유는 예수님 안에서 잠자는 자들(죽은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실 줄 믿기 때문입니다(14절).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는 소망 가운데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습니다(롬12:12).
저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렸던 교회를 생각하면 데살로니가 교회가 생각납니다. 그 이유는 데살로니가 교회 공동체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렸던 소망의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9-10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바울을 통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적으로 문란 한 생활을 하며 술을 많이 마시고 파티를 자주 하는 종교 생활을 했습니다(김세윤). 이러한 종교생활을 하면서 우상을 숭배했던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바울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어 그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김세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렸습니다(10절). 그러한 가운데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많은 환난 가운데서도 성령님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실루아노와 디모데) 뿐만 아니라 주님을 본받는 자가 되었습니다(6절). 그들이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 및 주님을 본받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많은 환난(고난) 중에서도 성령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기에 주님을 본 받는 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님의 역사는 우리가 많은 고난과 고통 중에 있을 때 더욱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게 하시고 그 말씀을 겸손히 받게 하십니다. 그 뿐만 아니라 성령님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깨달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케 하십니다. 그 결과 성령님은 우리를 고난 중에 말씀으로 빚으시사 거룩케 하시고 주님을 닮아가게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29절에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다고 말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으로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사람들이 자기 아들의 모습을 닮게 하시려고 그들을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세 단어는 ‘미리 아심’과 ‘미리 정하심’과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심’입니다(인터넷). 이 세 가지 하나님의 행동이 로마서 8장 29절에 기록되어 있는 이유는 그 전절인 28절과 18절과 연관해서 묵상할 때 모든 일들이 우리의 선을 위하여 합력하며(28절)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18절)는 것을 우리가 더 확신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이 세 가지 하나님의 행동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1) 첫째로, ‘미리 아심’이란 존스토트와 존 머레이의 말대로 ‘안다’는 말은 ‘사랑한다’와 실제적으로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이란 하나님께서 미리 사랑하신 자들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면, 이 하나님의 첫 번째 행동은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백성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입니다(28절).
(2) 둘째로, ‘미리 정하심’이란 예정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하나님의 두 번째 행동인 미리 정하심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운명을 미리 결정하셨다 혹은 명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결정된 또는 명하신 우리의 운명은 바로 예수님을 닮도록 운명 지어졌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 속에 모든 것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데 그 이유는 모든 것은 합력하여 우리를 그리스도를 닮게 되도록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란 말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사랑받았고 이를 위해 우리는 예정되었다는 것입니다.
(3) 셋째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심’은 결국 하나님의 두 가지 행동인 ‘미리 아심’(미리 사랑하심)과 ‘미리 정하심’(예정)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선택하시고 우리의 운명을 미리 결정(명)하신 목적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 위해서란 말입니다(인터넷).
오늘 본문 요한일서 3장 2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현대인의 성경)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장차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예수님이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어 그분의 참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크신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두 번이나 말한 후(1, 2절) 우리가 주님을 향하여 가신 “소망”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3절). 그 소망의 메시지는 ‘장차 예수님이 나타나시면 우리가 예수님의 형상을 본 받아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2절). 흥미로운 점은, 사도 요한은 이미 요한일서 2장 28절에서 우리가 주님 안에서 생활을 한 결과로 “주께서 나타내신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현대인의 성경)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떳떳이 그분을 뵙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 요한은 이미 요한일서 2장 28절에서 주님의 나타나심, 즉 주님의 강림에 대해서 언급을 했는데 이렇게 오늘 본문 3장 2절에 와서 다시금 주님의 나타나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특히 저는 이 두 성경구절을 연관해서 묵상할 때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재림의 소망을 가지고 요한일서라는 편지를 그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써내려가면서 이렇게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의를 행하는 예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목적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아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주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장차 예수님이 나타나시면 우리가 예수님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2절).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고린도전서 13장 12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현대인의 성경) “우리가 지금은 거울을 보는 것같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것이며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 때에는 하나님이 나를 아신 것처럼 내가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날 우리는 홀연히 변화되어(고전15:51)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을 것입니다(요일3:2).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참 모습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입니다(2절, 고전13:12). 주님을 향하여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게 된 것(요일3:3)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크신 사랑입니다(1절). 그러므로 우리는 그날 그 순간을 기도하며 기대하며 기다리는 가운데 우리의 간절한 소원 기도 제목은 예수님을 닮는 것이어야 합니다. 새 찬송가 452장 “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 1절과 후렴 가사가 생각납니다: (1절) 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 예수님 닮기 원함이라 예수님 형상 나 입기 위해 세상의 보화 아끼잖네 <후렴> 예수님 닮기 내가 원하네 날 구원 하신 예수님을 내 마음속에 지금 곧 오사 주님의 형상 인치소서.”
여러분, 요즘 손을 올바르게 잘 씻고 계신지요? 왜 우리는 손을 올바르게 잘 씻어야 합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느 한 인터넷 기사를 보니까 호주 뉴 사우스 웨일즈 대학교 연구진은 2015년 의대생들을 대상으로 소규모 실험을 진행했다고 하는 게 그 결과 학생들은 평균적으로 한 시간에 23번 얼굴을 만졌다고 합니다. 그 중 입, 코, 눈 같은 얼굴의 점막 부위를 만지는 횟수는 44%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왜 매우 위험하냐면 입과 코는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우리 몸으로 들어오는 핵심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얼굴을 만지지 않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우리가 무의식중에 얼굴을 많이 만지는 만큼 손을 올바르게 씻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하버드 대학 의과대학에서 발행하는 '하버드 헬스 레터'는 수돗물과 비누를 사용해 생일축하 노래를 2번 부르는 시간 동안 손을 골고루 씻어내면 박테리아의 90%가 제거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도 지난주에 아내가 만들어줘서 제가 교회에 부엌과 화장실에 붙여 놓은 올바르게 손 씻기 방법대로 씻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방법에는 “생일 축하 노래”가 아니라 “예수 사랑하심은”(Jesus loves me this I know)을 부르면서 손을 씻는 방법입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베푸신 큰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예수님처럼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3장 3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현대인의 성경)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희망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처럼 자신을 깨끗이 지켜야 합니다”]. 여러분, 은에서 찌꺼기를 어떻게 제하는 줄 대충 아시죠?(잠 25:4) 은을 용광로에 넣고 높은 열을 가하여 불순물인 찌꺼기를 제거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불순물은 쉽게 빠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순수한 은을 얻으려면 여러 번 높은 열로 제련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 일을 위하여 대장장이는 순수한 은을 얻기 위해서 높은 열과 싸우고 수많은 땀을 흘려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장장이는 원하는 순수한 은을 얻기 위해서 이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고 합니다(인터넷). 잠언 17장 3절을 보십시오: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무슨 뜻입니까? 마치 대장장이가 순수한 은을 얻기 위해서 여러 번 높은 열로 은을 제련하듯이 하나님을 우리의 마음을 연단하시고자 “고난의 풀무 불”을 지나가게 하십니다(사48:10).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서 찌꺼기처럼 남아 있는 육신적이고 이 땅에 속한 더러운 것들이 불순물처럼 들어 있을 때에 우리들로부터 이러한 것들을 제하고 이에 대하여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연단의 불인 시련과 고난을 겪도록 허락하신다는 말입니다(인터넷). 그 좋은 예가 바로 구약 욥기에 나오는 욥입니다. 성경 욥기 23장 1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왜 하나님께서는 “은에서 찌꺼기를 제하”시려고 우리를 고난의 풀무 불을 지나가게 하시는 것일까요? 잠언 25장 4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그리하면 장색의 쓸 만한 그릇이 나올 것이요.” 무슨 뜻입니까? 쓸 만한 그릇이 되게 하시고자 은에서 찌꺼기를 제하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고난의 풀무 불을 지나가게 하시사 우리로 하여금 결국에는 순금같이 되어 나오게 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순금같이 되어 나오게 하시는 것입니까? 디모데후서 2장 2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그 이유는 주님께서는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주님의 쓰심에 합당하게 준비 시키셔서 주님께서 귀히 쓰시는 그릇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귀히 쓰시고자 하시는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잠30:5). 그 말씀은 시편 12편 6절을 보면 “…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현대인의 성경) “… 확실하여 용광로에 일곱 번이나 정련한 은처럼 순수합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순수한(순결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정화시키사 깨끗하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3장 3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현대인의 성경)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희망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처럼 자신을 깨끗이 지켜야 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큰 사랑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장차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시면 우리가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으며 그 분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에(2-3절) 주님을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우리는 예수님의 깨끗하심과 같이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의 깨끗하심과 같이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요한일서 3장 4-5절을 보십시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깨끗하심’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즉 예수님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에게는 죄가 없다는 말씀(5절)이 예수님의 깨끗하심이란 말입니다(3절).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죄가 없으십니다(요일3:5). 히브리서 4장 15절을 보십시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베드로전서 2장 22절을 보십시오: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현대인의 성경) “그리스도는 죄를 범하지 않으셨고 그 입에 거짓이 없는 분이십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에게 우리 죄를 대신 지우신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게 의롭다는 인정을 받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시고 죄를 범하지도 않으신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장차 나타나시면 우리가 예수님처럼 될 것이요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보게 될 것이기에(요일3:2) 성경은 주님을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예수님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3절).
저는 이 말씀을 3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1) 이 말씀이 내포된 뜻은 장차 예수님이 나타나시면(이 세상에 다시 오시면) 우리가 예수님처럼 죄를 범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죄를 알지도 못하는 죄가 없는 사람들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주님을 향하여 가진 미래의 소망입니다(3절). 마지막 나팔이 나면 우리는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되(고전15:51) 주님께서는 우리의 “낮은 몸”(“천한 몸”)을 변화시키시사 자기의 “영광의 몸”(“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변하게 하실 것입니다(빌3:21). 그 영광의 몸은 예수님처럼 죄를 범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죄를 알지도 못한 죄가 없는 영광스러운 몸입니다. (2)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는 우리 신자(성도)들은 이미 그리스도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분과 함께 장사되었기에 (롬6:4) “이미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2절, 현대인의 성경). 이것은 이미 과거에 이루어 진 것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도 함께 죽었으므로(5절) 우리는 이미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들이란 말입니다(2절).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우리의 옛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므로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입니다(6절). 이 사실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 7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에 대하여 이미 죽은 사람은 죄에서 해방된 것입니다”(현대인의 성경). (3) 우리가 이미 과거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예수님과 함께 장사되었으므로 이미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지만(롬6:4-5) 앞으로 장차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면 홀연히 변화되어 예수님처럼 죄가 없는 사람들이 되기 전까지(고전15:51, 빌3:21, 요일3:2) 현재 어떻게 주님 안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미래의 소망과 우리가 이미 과거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함께 장사되었다는 사실 사이에 살고 있는 우리는 현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질문입니다. 저는 이 질문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바울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이미”(Already) (과거)와 “아직도”(Not yet)(미래) 사이인 교회 시대(church age)에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냐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오해하여 많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이미 받았기에 한번 구원을 받았으면 잃지 않는다고 배워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죄를 짓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도 담대하게 죄를 짓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빌립보서 2장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의 뜻은 행함(선행)으로 구원을 받으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엡2:8-9, 롬8:22-24). 구원이란 과거, 현재, 미래형입니다. 구원의 과거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요일5:12-13). 구원의 미래란 장차 우리가 예수님 재림하시는 날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행16:31, 롬10:9). 구원의 현재란 “너희 구원을 이루라”입니다(빌2:12). 그러면 과거의 구원과 미래의 구원(의 완성) 사이에 현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구원”이란 영생입니다. 즉,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당신들의 영원한 생명을 이루십시오’ (당신들은 영원한 생명이 있는 자들답게 사십시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 있는 자(천국백성)들답게 사는 것은 바로 천국의 계명인 예수님의 이중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하라는 말씀을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마22:37-39). 이것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십니다(빌2:13).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욕도 주시고, 또 그것을 행할 힘도 주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성령의 열매인 사랑을 맺으시사(갈5:22-23)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며 또한 이웃을 사랑하게 만드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장사된바 이미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지만(롬6:4-5) 앞으로 장차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면 홀연히 변화되어 예수님처럼 죄가 없는 사람들이 되기 전까지(고전15:51, 빌3:21, 요일3:2) 현재 어떻게 주님 안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이미 우리가 묵상한 요한일서 2장 29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의를 행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요한일서 2장 29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안다면 의롭게 사는 사람들이 모두 그분의 자녀들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여기서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어 거듭난 자들로서 하나님이 의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아 우리 또한 의로운 자들이란 말입니다(롬 4:25). 그러므로 의로운 자들은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가르치시는 대로 언제나 의를 행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 안에서 생활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의를 행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이미 죄에 대하여 죽었고 장차 예수님처럼 죄가 없는 사람들이 되기 전까지 이 교회에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처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왕이신 의로우신 예수님을 구해야 합니다. 즉, 우리는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일2:1) 행하시는 대로 우리도 행해야 합니다(6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자들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대로 우리고 행해야 하는데(6절)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계명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7-11절). 예수님의 계명은 마태복음 22장 37-4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먼저 의를 행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중계명 중 첫 번째 계명대로 주 하나님을 우리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계명을 요한일서의 관점으로 말한다면 요한일서 2장 15-17절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의미는 다 지나가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인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의 깨끗하심과 같이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는 것(3:3)은 의를 행하는 것인데 그의 행하는 것이란 첫째로 다 지나가는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대로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 뜻을 행하면서 사는 것입니다(2:15-17). 그 다음에 의를 행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중계명 중 두 번째 계명대로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계명을 요한일서의 관점으로 말한다면 요한일서 2장 3-11절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인데 그 말씀을 요약한다면 형제를 사랑하고 미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계명의 순종하여 그 형제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습니다(5절). 그리고 그는 빛 가운데 거하여[“빛 가운데 살기 때문에” (현대인의 성경)] 자기 속에 거리낄 만한 것이 없습니다(10절, 현대인의 성경).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성령 충만하지 못해서 성령님께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데 우리 이웃인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미워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11절). 그 때에 우리는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 자백해야 합니다. 사죄의 확신 구절인 요한일서 1장 9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현대인의 성경)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죄악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시는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2:1)께서 우리 죄를 위해 화목 제물이 되셨다는 사실(2절)을 믿음으로 우리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1:9). 여기서 “화목 제물”(propitiation)이란 단어는 “만족”(satisfaction)이란 의미로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 제물로 받쳐져 죽으시므로 죄를 형벌하셔야 했던 하나님의 거룩하신 요구를 만족케 하신 것을 가리킵니다(MacArthur). 그리하면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죄악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9절, 현대인의 성경). 그런데 여기서 참으로 위험한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우리 죄를 고백했으므로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셨고 우리를 모든 불의(죄악)에서 깨끗하게 하셨는데도 불구하고(9절) 사탄은 우리가 죄가 있는 것처럼 꾸며서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고하여 바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정에 섰는데 사탄이 재판장이신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를 기소(prosecutes)를 하는 장면이 상상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MacArthur). 사탄은 우리를 “참소”합니다(make a false charge)(계12:10). 그 때 우리는 사탄의 참소의 소리를 듣고 죄 사함의 확신이 흔들려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대언자(‘피고를 돕는 변호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요한일서 1장 9절 말씀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말씀하게 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현대인의 성경)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죄악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1절)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그대는 씻기어 있는가
더러운 죄 희게 하는 능력을 그대는 참 의지 하는가
(4절) 모든 죄에 더러워진 예복을 주 앞에 지금 다 벗어서
샘물 같이 솟아나는 보혈로 눈보다 더 희게 씻으라
<후렴>
예수의 보혈로 그대는 씻기어 있는가
마음속에 여러 가지 죄악이 깨끗이 씻기어 있는가
(새 찬송가 259장,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넷째로, 하나님께서 베푸신 큰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아무도 우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3장 7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현대인의 성경) “자녀들이여, 여러분은 아무에게도 속지 마십시오 …”]. 지금 교회 안에는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모습을 봅니다(마15:14).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계명을 잊어버린(호4:6) 영적 맹인 목사님들이 성경을 비성경적으로 해석하여 선포하고 가르치므로 추종하는 사람들을 세뇌시켜 그들로 하여금 맹목적으로 따라오게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맹목적으로 인도하는 자나 따라가는 자들이 위험한 이유는 그들은 하나님께 열심이 있는 것 같으나 올바른 지식에 따르지 않은 열심이기에(롬10:2) 성급함 속에서 잘못 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잠19:2). 잘못 가되 인도하는 자나 따르는 자들 모두가 다 하나님께 죄를 범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 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불순종하므로 하나님께 죄를 범합니다. 인도하는 자나 따르는 자들이나 모두 다 비성경적인 가르침에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그들의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닌 비성경의 하나님이기에 결국 우상을 섬기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사10:11). 그 범하는 죄 중에 제일 심각한 죄는 교만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교만함이란 우리 스스로 “나는 총명한 자라”고 자랑하는 것입니다(9:13).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다(13절)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주님의 도구일 뿐인데 우리는 주님 앞에서도 스스로 자랑하며 스스로 큰 체를 하고 있습니다(15절). 그러한 우리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같음이로다”(15절). 우리는 주님의 도구로서 주님께서 써주시면 감사 그리고 안 써주셔서 감사해야 하는데 지금 우리는 불만족한 마음과 위선된 입술로 불평과 비판을 쏟아 내고 있습니다(참고: 17절).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노하시사 (사9:12, 17, 21; 10:4, 25) 우리를 징벌하실 것입니다. 징벌하시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대적들과 원수들을 일으켜 우리를 치게 하실 것입니다(9:11).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막대기로 때리며 몽둥이를 들어 우리를 치실 것입니다(10: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들을 치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고 또한 그 분을 찾지도 않으므로 말미암아(13절) 하나님께서는 미혹하는 영적 맹인 지도자들을(9:16) 끊으실 것입니다(14절).
우리는 미혹하는 지도자를 주의해야 합니다(막13:5). 우리는 성경을 비성경적으로 해석하여 선포하고 가르치는 목사님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거짓 선지자들(목사들?)의 미혹을 주의해야 합니다(마24:11). 우리는 결코 그들의 인도함을 받아 멸망을 당해서는 아니 됩니다(사9:16). 우리는 결코 진리를 떠나서는 아니 됩니다(약5:19). 우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 되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고후11:3).
오늘 본문 요한일서 3장 7절 상반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현대인의 성경) “자녀들이여, 여러분은 아무에게도 속지 마십시오 …”]. 사도 요한은 이미 요한일서 2장 26절에서 그의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를 미혹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현대인의 성경) “여러분을 속이려는 사람들에 대하여 내가 이것을 썼습니다”]. 여기서 “미혹하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거짓말하는 자”들입니다(22절). 그리고 이 거짓말하는 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적그리스도들입니다(22절). 이 많은 적그리스도들이 나타났기에 사도 요한은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고 말했습니다(18절). 또한 이 “미혹하는 자들”은 “악한 자”들이요 “흉악한 자”들입니다(13, 14절). 그리고 이 악한 자들과 흉악한 자들은 “마귀”들입니다. 요한일서 3장 8, 10절을 보십시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이 말씀을 보면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을 구분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고 7절에 권면한 후 8절에서부터 10절까지 마귀에게 속한 자들, 곧 마귀의 자녀들은 죄를 짓는 자들로서 의를 행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의를 행하지 않는다는 말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궁극적으로 미혹하는 자들이 우리를 미혹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들려는 것인데 그 죄란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미워하게 만드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요한일서 3장 10절에서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에 대해서 말했을 뿐만 아니라 15절에 가서는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에 대해서도 말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에 대해 이미 2장 9절과 11절에서 말을 했는데 그 요점은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아직도 어두움 속에 있고 어두움 속에서 살고 있”으며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에 그는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12절, 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어두움에 행하면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하나님과 교제한다”(현대인의 성경)]고 하면서 “죄를 짓는 어두운 생활을 그대로” 하고 있는 것이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1:6). 이러한 생활은 “진리대로 살지 않는 거짓말쟁이에 불과”하다고 사도 요한은 말했습니다(6절, 현대인의 성경).
여러분, 우리는 거짓말쟁이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를 짓는 어두운 생활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다고 하면서 형제, 자매를 미워하는 죄를 범해서는 아니 됩니다. 이것은 마귀가 좋아하는 일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죄를 범하는 것을 좋아합니다(3:8). 이것은 주님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부인하는 행동입니다(참고: 2:22). 이것은 “미혹하는 자들”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입니다(26절). 그들은 우리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성령님의 가르침을 거슬러(27절) 예수님의 사랑 계명을 어기면서 사는 것을 원합니다(7-9절).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이 우리 마음을 미혹하는 것을 매우 경계해야 합니다. 사탄은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 마음이 진실 되지 않고 거짓되게, 깨끗하지 않고 더럽히게 만들고자 우리를 미혹하고 있습니다(고후11:3).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미혹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합니다(시95:10).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서 사탄의 미혹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2:14, 현대인의 성경).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알아가며 경험해야 합니다(1:1, 2). 그리고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2절)와 교제를 가져야 합니다(3절,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우리는 빛 가운데서 살면서 주님 안에서 형제, 자매들과 서로 교제를 해야 합니다(7절). 우리는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가르치심대로 예수님의 계명의 순종하여 우리 이웃인 형제, 자매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3:1, 2).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 베풀어 주신 큰 사랑을 받은 자답게 사는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째로, 하나님께서 베푸신 큰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의를 행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3장 7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현대인의 성경) “…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의로운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하고 염려(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6:31, 현대인의 성경). 예수님께서는 “이런 것들은 모두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애써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32절, 현대인의 성경). 그렇게 말씀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33절). 우리의 우선순위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킵니다(다국어성경).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낸다면 벌써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눅11:20; 참고: 마 12:28). 이 말씀을 보면 약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셨을 때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임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임했다는 것은 과거형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7장 2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를 미래형으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9, 11절을 보면 성경은 “…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9절), “…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11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22장 18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현대인의 성경) “나는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올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를 과거형과 미래형으로 둘 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Already) 임했다는 것과 동시에 “아직도”(Not yet) 임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말씀(요일5:13)과 또한 장차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롬8:23, 빌3:12-14)과 더불어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빌2:12), 이렇게 과거, 현재, 미래형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과 유사합니다[구원의 삼중성(인터넷)]. 즉,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도 과거, 현재, 미래형으로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 임했을 뿐만 아니라 장차 임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이미”와 “아직도” 사이에 살고 있는 우리는 지금 현재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 질문할 때 마태복음 6장 33절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의 왕이신 주님의 통치를 받으면서 주님의 말씀에 복종하며 또한 성령님의 능력으로 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3장 7절 하반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현대인의 성경) “…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의로운 사람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미 요한일서 2장 29절에서 “의를 행하는 자”에 대해서 말을 했었는데 이렇게 오늘 본문 3장 7절에서 다시금 “의를 행하는 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를 행하는 자는 의롭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하나님께서 베푸신 큰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의를 행하는 자가 돼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그러면 의를 행한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그것은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2:1) 행하시는 대로 우리도 행하는 것입니다(6절).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사는 것입니다(7-11절). 즉, 우리는 예수님의 이중계명대로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며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 같이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마22:37-40). 저는 이 예수님의 이중계명을 이미 요한일서의 관점에서 두 가지로 묵상했었습니다: 첫째로, 의를 행하는 것이란 다 지나가는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대로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 뜻을 행하면서 사는 것입니다(2:15-17).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이라고 말했습니다(살전4:3). 둘째로, 의를 행하는 것이란 형제를 사랑하고 미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계명대로 형제를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우리 속에서 온전하게 됩니다(요일2:5). 그리고 우리가 주님 안에 있는 줄 알게 됩니다(5절). 그러나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 즉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습니다[“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현대인의 성경)](3:10).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큰 사랑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1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대로 우리도 행해야 합니다(2:1, 6).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시되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마음과 몸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시고 또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자신 스스로가 이중계명을 순종하셨기에 우리에게 그 이중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이중계명을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의를 행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큰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우리의 아버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란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장차 예수님이 나타나시면 예수님의 형상을 본 받아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보게 될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처럼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도 우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큰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의를 행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중계명대로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며 또한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 같이 사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