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마지막 때인 줄 알아야 합니다.

 

 

 

[요한일서 218-25절 말씀 묵상]

 

 

여러분, 여러분도 “말세”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한 청소년이 엄마 아빠와 대화를 나누다 기분이 상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친구에게 문자를 주고받는데 “ㅁㅊ”과 “ㅈㄹ”이라고 보냈다고 합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저두 처음 보았는데 “ㅁㅊ”는 “미친!”이란 뜻, 즉 그 청소년은 자기 엄마 아빠가 미쳤다고 문자를 보낸 것이고 “ㅈㄹ”는 “지랄!”, 즉 엄마 아빠가 지랄하고 있다고 문자를 보낸 것이라고 합니다.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세태(사람들의 일상생활, 풍습 따위에서 보이는 세상의 상태나 형편)로서 “정말 세상 말세는 말세야!”라고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인터넷). 우리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종종 “정말 세상 말세는 말에야!”라는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니 정말 말세야. 예수님께서 오실 때가 다 되었다’고들 말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그리 말할 때 “말세”란 예수님의 재림이 거의 가까운 때라는 것을 전제하고 말합니다(인터넷).

 

실제로 여러분은 예수님의 재림이 거의 가까운 때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달리 질문한다면, 지금 여러분은 “말세”라고 믿고 계십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말세”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디모데후서 3장 1-5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이 말씀을 보면 말세에 나타날 징조를 한 19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① 자기를 사랑한다. ② 돈을 사랑한다. ③ 자랑한다. ④ 교만하다. ⑤ 비방한다. ⑥ 부모를 거역한다. ⑦ 감사하지 아니한다. ⑧ 거룩하지 아니하다. ⑨ 무정하다. ⑩ 원통함을 풀지 않는다. ⑪ 모함한다. ⑫ 절제하지 못한다. ⑬ 사납다. ⑭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⑮ 배신한다. ⑯ 조급하다. ⑰ 자만한다. ⑱ 쾌락을 사랑한다. ⑲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한다”(인터넷). 그리고 저는 이 19가지 말세에 나타날 징조를 생각할 때 주로 “자기를 사랑한다,” “돈을 사랑한다,” “부모를 거역한다” 이렇게 3가지를 좀 많이 생각했었는데 다시금 묵상해 보면 실제로 지금 우리는 이 19가지 말세에 나타날 징조가 이미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지금 얼마나 많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경건의 모양이 있는데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지금 우리가 거룩하지 못하고 절제하지 못하면서 쾌락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지금 우리는 교만하고 자만하며 자랑하고 있지 않나요? 무정하고 감사하지 않으며 원통함도 풀지 않고 있지 않나요?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배신하며 조급하지 않나요? 그 만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말세요 예수님의 재림이 거의 가까운 때라 생각합니다. 어느 한 인터넷 기사를 보니까 예수님의 재림의 징조를 나름대로 성경에 근거해서 한 5가지로 요약을 해놓은 게 있어 여러분과 나눕니다(인터넷): (1) 복음이 모든 족속에게 전파됩니다, (2) 유대인의 충만한 수가 교회 내에 들어와 채워집니다, (3) 복음을 믿던 자들과 교회들이 배교하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4) 불법의 사람들이 나타나 혼란을 가중시킵니다, (5) 세상 곳곳에 지진과 전쟁등과 같은 것이 발생하며 대 환란이 일어날 것입니다(인터넷).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18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이 말씀을 보면 사도 요한은 자기나 자기의 편지를 받는 수신자 그리스도인들에게 2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사도 요한은 마지막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18절을 다시 보면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를 받는 수신자 그리스도인들에게 “지금은 마지막 때라,”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로 이렇게 두 번이나 “마지막 때”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는 “마지막 때”란 우리가 주로 생각하고 말하는 “말세”를 가리킵니다. 그러면 사도 요한은 주후 1세기에 이 요한일서 편지를 쓰면서 그 때가 이미 “마지막 때”였다면 약 2,000년이 지난 지금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그럼 마지막 때 또는 말세란 어느 시대를 가리키는 것인지 좀 혼동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성경은 말세 또는 마지막 때란 예수님이 처음으로 이 세상에 오셨던 예수님의 초림 때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20절을 보십시오: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린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현대인의 성경)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미리 그리스도를 선택하시고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해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장 1-2절 상반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옛날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수없이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구약인 옛 언약 시대 때에는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를 계속 말씀하셨지만 신약인 새 언약 시대에 와서는 마지막으로 자기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사 이 마지막 때에 아들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다는 것입니다(인터넷). 이렇게 예수님과 함께 이 마지막 때가 시작되었고 그 마지막 때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시므로 끝납니다(종결). 즉, 마지막 때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므로 시작되어서 예수님의 재림 때에 끝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18절에서 사도 요한이 말한 “마지막 때”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를 가리킵니다. 그러면 왜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18절에서 그의 편지를 받는 수신자 그리스도인들에게 두 번이나 “마지막 때”에 대해서 말한 것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적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 18절에서 사도 요한인 말한 두 번째 내용입니다.

 

둘째로, 사도 요한은 적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18절을 보십시오: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사도 요한은 자기 편지를 받는 수신자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도 적그리스도가 온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하면서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 일어났”다[이미 많은 적그리스도들이 나타났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사도 요한은 이 요한일서 편지를 쓰면서 그 편지의 수신자들 형제, 자매들에게 그들이 이미 들은 것처럼 이미 많은 적그리스도들이 나타났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를 좀 생각해 봐야 합니다:

 

(1) 오늘 본문 요한일서 218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지금은 마지막 때라고 말한 후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다고 말한 것을 보면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사도 시대인 1세기 때 이 편지를 쓰면서 그 때가 마지막 때요 그 때에 이미 많은 적그리스도들이 나타났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주로 “적그리스도”라고 하면 예수님의 재림이 더 가까이 다가온 이 시대에 적그리스도 나타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신약성경이 쓰였던 당시 주후 1세기 때에 이미 적그리스도들이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2)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요한일서 218절에서 적그리스도를 두 번이나 언급하고 있는데 한번은 단수(singular)적그리스도라고 말했지만 또 다른 한번은 복수(plural)적그리스도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사도 요한이 “적그리스도”라고 처음에 단수를 사용했을 때에는 성경에서 예언하고 있는 어느 한 특정한 사람(a particular person)을 염두해 두고 말한 반면에 두 번째로 “적그리스도들”이라는 복수를 사용했을 때에는 사도 요한 당시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한 사람들을 가리켜 “적그리스도들”(many individuals)이라고 말한 것입니다(MacArthur). 여기서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한 사람들이란 예를 들어 ‘거짓 선생들’(false teachers)과 ‘미혹하는 자들’(deceivers)을 말합니다(MacArthur).

 

(3) 그러면 사도 요한이 오늘 본문 요한일서 218절에서 말한 적그리스도적그리스도들은 누구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18-25절에서 한 2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a) 먼저 오늘 본문 요한일서 219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현대인의 성경) “그들은 우리에게 속하지 않았으므로 우리 가운데서 나갔습니다. 만일 그들이 우리에게 속하였다면 우리와 함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감으로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것이 드러났습니다”].

 

사도 요한은 적그리스도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했다고 말했는데 그 의미는 적그리스도들은 예전에는 사도 요한이나 요한일서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었지만 이젠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예수님을 떠났고 믿는 자들에게서 떠난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적그리스도들은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에 속한 자들이 아니 이기에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거짓 선지자들’이 생각났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을 보내지도 않았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했기 때문입니다(렘14:14; 28:15). 또 생각난 것은 “사탄”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자라나면서 배운 것은 사탄은 원래 천사였으나,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교만 때문에 하나님께 반역의 죄를 지어 타락했고, 사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인터넷). 그래서 사탄은 타락한 천사로서 하나님께 내어 쫓겨나서 세상에 내려왔다고 배웠는데 그 교리에 근거가 되는 성경구절은 이사야 14장 12절에 나오는 “계명성”(금성)을 라틴어로 번역할 때 “루시퍼”라고 알려졌습니다. 이 루시퍼가 땅에 떨어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탄이나 거짓 선지자들은 마치 적그리스도가 사도 요한이나 요한일서 편지를 받는 수신자 그리스도인들에게 속하지 아니했던 것처럼 하나님께 속하지도 않았고 하나님께서 보내시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b) 그 다음에 적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은 오늘 본문 요한일서 222절에 나옵니다: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이 말씀을 보면 성경은 적그리스도란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3절을 보면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하나님 아버지도 없다고 말하는 것 말입니다. 오늘 본문 22절을 다시 보면 성경은 적그리스도는 성자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2절). 이러한 자, 즉 적그리스도는 “거짓말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장 3절에서도 적그리스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적그리스도의 영이란 예수님을 시인하지 않는 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적그리스도의 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적그리스도의 영이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 편지를 쓰고 있었을 약 주후 1세기 당시에 이미 세상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적그리스도의 영은 지금도 있습니다. 즉, 적그리스도의 영은 말세(마지막 때)인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2장 22절과 4장 3절에서 적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의 영에 대해서 말한 후 요한이서 1장 7절에서도 적그리스도를 또 한 번 언급했습니다: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이 말씀을 보면 사도 요한은 “미혹하는 자”를 두 번이나 말하고 있는데 그가 말하는 미혹하는 자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미혹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자란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미혹하는 자가 바로 적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쓴 이 석절 말씀을 종합해서 생각할 때 사도 요한이 말한 적그리스도란 거짓말 하는 자요 미혹하는 자로서 예수님을 시인하지 아니하되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성육신)을 부인하며, 또한 하나님 아버지를 부인하는 자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면, 적그리스도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적그리스도에게는 하나님 아버지가 없습니다(23절).

 

이렇게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18절에서 “마지막 때”와 “적그리스도”에 대해 말한 후 오늘 본문에서 그의 편지 요한일서를 받는 수신자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4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 요한일서 수신자 그리스도인들에게 당신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에게서 성령님을 받아서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20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성령을 받아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지(mark)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즉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가상적인 증거는 무엇일까요? 프랜시스 쉐퍼는 그의 책 “그리스도인의 표지”에서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만 세상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줄 알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가식적인 증거란 예수님의 이중계명대로 마음과 힘과 뜻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우리 이웃을 우리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써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것을 증거하는 표지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요한복음 17장 21절에서 예수님께서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큰 의미는 우리가 주님 안에서 다 하나가 되어야 비로소 세상은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을 것이라는 것입니다(인터넷).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20절에서 사도 요한은 적그리스도와 대조하여 참된 그리스도인은 누구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특유의 표지를 한 가지 말하고 있습니다. 개혁개정에는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고 번역했는데 현대인의 성경에는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 성령을 받아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즉, 참된 그리스도인의 특유의 표지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성령을 받아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 로마서 5장 5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현대인의 성경) “이 희망은 우리에게 실망을 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그분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셨고 또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성령님을 받은 자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받은 참된 그리스도인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사도 요한이 말하였는데 여기서 “이 모든 것”이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20절 말씀에 가까운 문맥인 18-19절을 보면 사도 요한이 말한 “이 모든 것”이란 “지금은 마지막 때라”는 사실과 “지금은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18절). 그리고 참된 그리스도인은 마지막 때에 나타난 많은 적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19절). 좀 더 넓은 문맥인 요한일서 2장 1-17절 말씀에 근거해서 “이 모든 것”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대언자이시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신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1-2절). 그리고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3-5절) 그 형제를 사랑하므로(10절)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 온전하게 되었습니다(5절). 또한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있으며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거하시므로 마귀를 이기고 있습니다(13-14절). 그리고 그/녀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습니다(15절). 오히려 그/녀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합니다(17절). 포괄적으로 말한다면,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20절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이 성령님을 받아 알고 있는 이 모든 것은 성령님께서 그/녀에게 가르쳐 주시는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27절). 현대인의 성경 27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여러분에게는 그리스도께서 부어 주신 성령이 있기 때문에 아무에게서도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 그러면 성령님께서 우리게 가르쳐 주시는 모든 것은 무엇일까요? 사도 요한이 쓴 요한복음을 보면 좀 알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을 보십시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이 말씀을 보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모든 것이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한 모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성령님을 받았습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되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가르쳐 주십니다. 바라기는 성령님께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겸손히 잘 배워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둘째로,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 요한일서 수신자 그리스도인들에게 당신들은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21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이라”[(현대인의 성경)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것은 여러분이 진리를 몰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여러분이 진리를 알고 거짓은 진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두 번째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지(mark), 즉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가식적인 증거는 무엇이냐면 우리가 진리를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진리”를 생각하면 요한복음에 나오는 두 성경 구절이 생각납니다. 하나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요한복음 8장 32절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말씀하신 요한복음 14장 6절입니다. 이 두 성경구절을 연관해서 말한다면, 예수님은 진리시요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묵상했듯이 사도 요한에서 말씀하고 있는 4가지 빛과 어두움 가운데 하나는 바로 진리는 빛이요 거짓은 어두움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 1장 5절에서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란 말씀을 여기에 적용한다면, 하나님은 진리이시요 진리이신 하나님에게는 어두움인 거짓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또한 하나님과 사귐(교제)이 있기에(6절)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7절). 그리고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우리가 진리를 행한다는 것입니다(6절). 그 말은 참된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진리를 행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삼서 1장 4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그리고 이렇게 진리를 행한다는 것은 그 진리가 우리 속에 있다는 말입니다(요일1:8)[그러나 마귀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말을 합니다(요8:44)]. 그리고 진리가 우리 속에 있다면 우리는 어둠에 행하면서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진리를 알고 진리를 행하는 자는 “거짓은 진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요일 2:21, 현대인의 성경).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 편지를 받는 수신자 그리스도인들에게 ‘당신들은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을 때에는 그들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4절을 보십시오: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거짓말쟁이며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달리 묵상한다면 진리가 그 속에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므로 거짓말하는 자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4절). 그 뿐만 아니라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어 이것으로 그들이 주님 안에 있는 줄을 안다는 것입니다(5절).

 

여러분, 성령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십니다(요14:26). 뿐만 아니라 진리의 성령님은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요한복음 16장 13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성령님께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이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모든 진리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가 될 때에 주님께서 보시고 심히 기뻐하실 것입니다(참고: 요이1:4).

 

셋째로,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 요한일서 수신자 그리스도인들에게 당신들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당신들 안에 거하게 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24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현대인의 성경) “여러분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잊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아들과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 소유로 만들 수 있는 것일까요? 제가 시편 말씀을 전체를 묵상하고 설교하면서 잊히 못하는 시편 말씀 중 하나가 바로 시편 119편 56절입니다: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니이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 할수록 시편 기자가 주님의 법도를 지키므로 그 말씀이 자기 소유가 되었던 것처럼 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므로(순종하므로) 말씀 인격화되어 가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시편 119편 56절의 문맥 속에서 얻었던 3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1) 첫 번째 교훈은, 시편 기자는 주님이 자기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잊지 않고 살았습니다.

 

시편 119편 49절을 보십시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 시편 기자가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한 이유는 그 약속의 말씀이 그로 소망이 있게 하였기 때문입니다(49절).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에 로마서 4장18절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생각났습니다. 그는 "바랄 수 없는 중에"(Against all hope) 바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을 주님께서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21절). 즉, 약속에 이끌림을 받는 삶(the promised word-driven life)이야 말로 말씀 인격화 되는 삶을 사는 비결이요 그 주님의 말씀이 '나의 소유'가 되는 비결인 것입니다.

 

(2) 두 번째 교훈은,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를 삼았습니다.

 

시편 119편 50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 곤란 중에, 어느 누구도 나를 위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의 위로를 거절 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주님의 위로만을 구하려고 고독의 자리에서 몸 부리 치며 눈물로 통곡하며 간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할 때에 주님께서는 약속의 말씀으로 위로를 해주십니다. 저에겐 요한복음 6장1-15절 말씀인 오병이어의 약속의 말씀이 제일 큰 위로가 됩니다. 쓰러지고 자빠져 낙심하여 어느 누구도 일으켜 세워주지 못할 때, 또한 어느 누구의 위로를 거절할 수밖에 없는 영적 상태에 놓여 있을 때 오병이어의 약속의 말씀이 저를 살리시고(시119:50) 일으켜 주시므로 말미암아 오늘 날까지 오뚝이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가 약속의 말씀으로 위로를 삼고 살았던 이유는 그 말씀이 그를 살리는 revival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말씀으로 영적 부흥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말씀 순종함이 나의 소유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3) 세 번째 교훈은, 시편 기자는 주님의 말씀을 떠나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시편 119편 51절을 보십시오: "... 나는 주의 법을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교만한 자가 그를 심히 조롱하였어도 시편 기자는 주님의 법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원리를 생각할 때에 요한복음 6장68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주님의 가르침이 너무 어려워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나 다시는 그와 함께 다니지 않았을 때에(요 6:66)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67절)라고 말씀하시니까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68절)라고 답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우리 많은 크리스천들이 주님의 말씀이 너무나 어렵고 믿기가 힘들어 주님과 주님의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주님의 "영생의 말씀"을 맛보지 못하므로 영원한 생명을 주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기보다 순간적인 사단의 가짜 '복음'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우리 목사들과 교회 안에 있는 교인들조차 영생의 말씀보다 '이생의 말'을 선포하고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실정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을지라도, 어느 누가 뭐라고 할지라도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다른 말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이 그에게 소망이 없을 때 소망을 주었고 곤란 중에 위로와 더불어 그를 소생케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24절 상반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요한일서의 편지를 받은 수신자 그리스도인들이 “처음부터 들은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이미 묵상한 요한일서 1장 1-2절을 보십시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이시니라.” 이 말씀을 보면 요한일서의 편지를 받는 수신자 그리스도인들이 처음부터 들은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한 것이요 “영원한 생명”으로서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성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즉, 그 그리스도인들이 처음부터 들은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으로서 한 마디로 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를 받는 수신자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으로 하여금 그들 안에 거하게 하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으로 하여금 우리 안에 거하게 해야 합니다. 과연 어떻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 안에 거하게 할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가 생각납니다. 그 포도나무 비유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5절).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 안에 거하시는 것처럼 가지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포도나무이신 주님 안에 거해야 열매를 맺지 우리가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신 후 주님께서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7절). 이 말씀을 보면 우리가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 안에 거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예수님의 말씀, 즉 예수님의 복음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우리 안에 거하게 하기 위해선 우리는 그 복음의 합당한 생활을 하면서(빌1:27) 그 복음을 이 세상에 전하는 것(고전1:7)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우리 안에 거하게 할 때에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24절 하반절은 우리가 아들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넷째로,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 요한일서 수신자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25절을 보십시오: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현대인의 성경)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직접 우리에게 약속해 주신 영원한 생명입니다”]. 여러분, 성경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6장 23절은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현대인의 성경)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입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인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러면 과연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17장 3절을 보십시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저는 “영원한 생명을 이 땅에서도 부분적으로 누리면서 살아야 합니다”라는 글을 써 보았습니다(2019. 7. 8.): “영원한 생명은 다가오는 저 세상인 천국에서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세상에서도 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영생이란 천국에서 충분히 누리겠지만 이 땅에서도 부분적으로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 땅에서 영원한 생명을 부분적으로 누릴 수 있을까요? 바로 우리가 주님 안에 살면서(요일2:6) 주님의 말씀을 지키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서 온전하게 될 때에(5절) 우리 마음에 주님의 기쁨이 충만하므로(요 15:11) 우리는 이 땅에서도 영원한 생명을 부분적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25절을 보면 성경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영원한 생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말한 이 “영원한 생명”은 요한일서 1장 1-2절을 보면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계신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우리는 들었고 우리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며 손으로 직접 만져 보았습니다. 이 생명이 세상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직접 보았으므로 그분을 여러분에게 증거하며 전합니다. 그분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현대인의 성경). 주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영원한 생명이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생명이 되십니다.

 

대학교 때 성경공부 시간에 배운 5가지 확신 말씀 중에 구원의 확신 성경 구절이 생각납니다. 그 성경구절은 바로 요한일서 5장 11-12절 말씀입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이 말씀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구원의 확신이란 (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는 것, (2) 영생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 (3) 예수님이 있는(믿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 그러나 예수님이 없는(믿지 않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고(딤전1:13) 죄인 중에 괴수였지만(15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을 얻었습니다(16절). 과거에 어떠한 무시무시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바울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당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여러분, 지금은 마지막 때입니다. 지금 많은 적그리스도들이 일어났습니다. 이 많은 적그리스도들은 거짓말하는 자들이요 미혹하는 자들로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를 부인하며 또한 아들 예수님을 부인하며, 예수님께서 육체의 몸으로 오심(성육신)을 부인합니다. 이 적그리스도들과 달리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에게서 성령님을 받아서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또한 처음부터 들은 것을 그들 안게 거하게 합니다. 즉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 안에 거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바라기는 적그리스도들이 많이 나타난 이 마지막 때에 비록 거짓 목사들과 거짓 선생들을 통해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이 전파되고 있고 다른 영을 받게 하고 있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과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육체의 몸을 입고 오심을 믿는 참된 그리스도인들로서 내주하시는 진리의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진리를 깨달아 그 말씀에 순종하되 예수님의 이중계명에 순종하여 우리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하게 되므로 마음의 기쁨이 충만하여 영원한 생명을 이 땅에서도 부분적으로 누리며 살아가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