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

 

 

 

[요한일서 212-17절 말씀 묵상]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고민 안 해 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뜻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아 그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고 있지만 연약한 우리의 육신은 자꾸만 “내 뜻”을 추구하며 “내 뜻’대로 살아가길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충돌될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를 들어, 하나님의 뜻은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같이 사랑하는 것인데 내 뜻은 우리 이웃을 사랑하기보다 미워하는 것이라면 우리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전날 밤에 감란 산에서 드리셨던 기도를 우리 또한 하나님께 기도 드려야 합니다: “…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마26:39, 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빌2:8)처럼 우리도 주님의 뜻에 죽기까지 복종하길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17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오직 하나님을 뜻을 행하는 자”란 제목 아래 주시는 교훈을 한 5가지로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오직 하나님을 뜻을 행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압니다.

 

오는 본문 요한일서 2장 13절 상반절과 14절 중반절을 보십시오: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현대인의 성경) “부모들이여, 내가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여러분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계신 분을 알기 때문입니다 … 부모들이여, 내가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여러분이 맨 처음부터 계신 분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위대한 선생? 기독교의 창시자? 혹은 예수는 그저 기독교인들이 만든 신화?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셔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은 인자가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13절). 그러자 제자들은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나 예언자들 중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14절, 현대인의 성경).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다시 물으셨습니다(15절). 그 때 시몬 베드로가 이리 대답하였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절). 이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시하시사 베드로로 하여금 알게 하신 것입니다(17절).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계시하시사 알게 하신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13절 상반절과 14장 중반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동일한 말씀을 두 번이나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 동일한 말씀의 내용은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는 “태초부터 계신 이”는 누구입니까? 우리가 이미 묵상한 요한일서 1장 1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말한 후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되었다고 말했습니다(2절). 지금 사도 요한은 자기가 요한일서라는 편지를 쓰고 있는 이유는 자신의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 중 육신의 부모들처럼 영적으로 성숙한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MacArthur). 이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십니다(2:2). 즉,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 제물로 받쳐져 죽으시므로 죄를 형벌하셔야 했던 하나님의 거룩하신 요구를 만족케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의로우신 대언자이십니다(1절). 하나님의 법정에 섰는데 사탄이 재판장이신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를 기소(prosecutes)를 할 때에 피고측 변호사(defense attorney)가 되신 예수님께서는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십니다.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는 사탄은(계12:10) 우리가 이미 우리 죄를 고백했으므로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셨고 우리를 모든 불의(죄악)에서 깨끗하게 하셨는데도 불구하고(1:9) 우리가 죄가 있는 것처럼 꾸며서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고하여 바칠 때마다 우리의 대언자가 되시는 예수님은 우리를 변호해 주시고 계십니다.

 

여러분,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 오직 하나님을 뜻을 행하는 자는 이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교제(fellowship)를 누립니다(1:3). 다시 말하면, 오직 하나님을 뜻을 행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피가 자신을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심을 믿습니다(7절). 그 뿐만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5절).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킵니다(2:3). 즉,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며 자신의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합니다(마22:37, 39). 그러므로 그/녀의 마음에 기쁨이 충만합니다(요일1:4).

 

둘째로,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 아버지를 압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14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현대인의 성경) “자녀들이여, 내가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를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예수님의 12 제자들 중 한 사람인 빌립은 하나님 아버지를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현대인의 성경) “'주님,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요14:8). 그 때 예수님은 빌립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현대인의 성경)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있었는데도 네가 나를 모르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인데 어째서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느냐?”](9절). 7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현대인의 성경)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제는 너희가 내 아버지를 알고 또 보았다”].

 

우리가 이미 묵상한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13절 상반절과 14절 중반절을 다시 보면 성경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사도 요한의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태초부터 계신 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14절 상반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사도 요한의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요한일서에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누구라고 말씀하고 있을까요? 한 2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요한일서 15절을 보면 성경은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분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5절). 참고로 요한복음 8장 12절과 요한복음 9장 5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또는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세상의 빛이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요한일서 48절과 16절 보면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독생자 예수님을 화목 제물로 이 세상에 보내셨다고 요한일서 4장 9-10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서입니다(10절). 비슷한 말씀이 요한복음 3장 16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 말씀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시되 독생자 예수님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16절하).

 

여러분, 오직 하나님을 뜻을 행하는 자는 이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있는 오직 하나님을 뜻을 행하는 자는 이 하나님 아버지와 더불어 교제를 누립니다(1:3). 그리고 그는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면서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자기도 빛 가운데 행합니다(7절). 다시 말하면,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의 형제를 사랑하므로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습니다(2:10). 그리고 그는 자기의 형제를 사랑하므로 마음이 기쁨이 충만합니다(1:4).

 

셋째로,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악한 자를 이깁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13절 하반절과 14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현대인의 성경) “청년들이여, 내가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여러분이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 청년들이여, 내가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여러분이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서 마귀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저희 교회 이름은 “승리장로교회”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교회 이름 그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나 자신과 죄악과 세상과 사탄과 죽음과 싸워 승리하는 교회가 되길 기원하고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사탄과 죽음과 싸워 승리하셨으므로 우리 교회는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전투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 투쟁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에서 교회란 공동체는 승리하신 예수님을 대장으로 모시고 영적 전쟁을 하는 전투적인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전투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영적 전쟁을 하고 있는 전투적인 십자가의 군병들로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전신갑주입니다. 에베소서 6장 11-13절을 보십시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여기서 “하나님의 전신 갑주”란 성경 에베소서 6장 14절부터 말씀하고 있는데 그것은 “진리”라는 “허리 띠”와 “의의 호심경”[“의의 가슴받이”(현대인의 성경)], “평안의 복음(기쁜 소식)을 전할 태세로 “신발”을 신고, “능히 악한 자”(마귀)의 모든 불화살을 막을 수 있는 “믿음의 방패”와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14-17절). 그리고 나서 성경은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를 강조하되 언제나 정신을 차리고 모든 성도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18절, 현대인의 성경).

 

우리가 잘 찬양하지 않지만 좀 익히 들어 아는 찬송가 중에 “마귀들과 싸울지라”는 찬송가가 있습니다(새찬송가 348장). 그 찬송가 가사 1절과 2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1절) “마귀들과 싸울지라 죄악 벗은 형제여 담대하게 싸울지라 저기 악한 적병과 심판 날과 멸망의 날 네가 섰는 눈앞에 곧 다가오리라”, (2절) “마귀들과 싸울지라 죄악 벗은 형제여 고함치는 무리들은 흉한 적군 아닌가 무섭고도 더러운 죄 모두 떨쳐버리고 주 예수 붙들라.” 이 찬송가 가사를 보면 우리는 야고보서 4장 7절인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는 말씀을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마귀”란 누구입니까? 요한복음 8장 44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13절 하반절과 14절 하반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현대인의 성경) “청년들이여, 내가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여러분이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 청년들이여, 내가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여러분이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서 마귀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의 편지를 받는 수신자인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그들이 태초부터 계신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기 때문이요 또한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 말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이라 말했습니다. 여기서 “악한 자”를 현대인의 성경은 “마귀”라고 번역을 했는데 실제로 요한일서 3장 8절과 10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마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이 말씀을 보면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을 구분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고 7절에 권면한 후 8절에서부터 10절까지 마귀에게 속한 자들, 곧 마귀의 자녀들은 죄를 짓는 자들로서 의를 행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의를 행하지 않는다는 말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의를 행하는 자”들(7절)로서 그들은 계속해서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9절, 현대인의 성경). 그 말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계속해서 형제를 미워하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마귀의 미혹에 넘어가 그 형제를 미워할 때도 있지만은 계속해서 그 형제를 미워하지 않고 자기가 형제를 미워한 죄를 자백하므로(1:9) 예수님의 이름으로 용서를 받아(2:12) 다시금 형제를 사랑한다는 말입니다(10절).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들은 마귀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것입니까? 어떻게 우리는 형제를 미워하라는 마귀의 유혹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것입니까? 요한일서 2장 14절을 보십시오: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현대인의 성경) “…청년들이여, 내가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여러분이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서 마귀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형제를 미워하라는 마귀의 유혹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비결은 우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강하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강력한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강한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그 말씀을 믿는 우리의 믿음이 그만큼 견고하며 굳게 서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5장 4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의 자녀들은 누구나 세상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것은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새 찬송가 357장 “주 믿는 사람 일어나” 가사가 생각납니다:

 

(1절) 주 믿는 사람 일어나 다 힘을 합하여/

이 세상 모든 마귀를 다 쳐서 멸하세/

저 앞에 오는 적군을 다 싸워 이겨라/

주 예수 믿는 힘으로 온 세상 이기네

(2절) 온 인류 마귀 궤휼로 큰 죄에 빠지니/

진리로 띠를 띠고서 늘 기도 드리세/

참 믿고 의지하면서 겁 없이 나갈 때/

주 예수 믿는 힘으로 온 세상이기네

(3절) 끝까지 이긴 사람은 흰 옷을 입히고/

또 영생 복을 주시니 참 기쁜 일일세/

이 어둔 세상 지나서 저 천성 가도록/

주 예수 믿는 힘으로 온 세상이기네

[후렴]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여러분, 믿음이 이깁니다. 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이 죄악 된 세상과 마귀와 싸워 이깁니다. 비록 마귀가 우리로 하여금 자꾸만(계속해서) 형제, 자매를 미워하게 만들고자 유혹을 하고 있지만 그 유혹을 이기는 승리는 우리의 믿음입니다(요일5:4).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신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은 “세상에 있는 자”보다 더 크시기에[마귀보다 더 능력이 크시기 때문에(현대인의 성경)](4:4) 우리는 믿음으로 이 세상과 마귀와 싸워 승리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믿음에 견고히 서서 예수님의 계명대로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같이 사랑하므로 우리 마음에 기쁨이 충만하길 기원합니다(1:4).

 

넷째로,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15절을 보십시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현대인의 성경)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전도의 대상입니다. 우리는 이 죄악 된 세상을 사랑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과 벗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세상과 벗이 되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약4:4).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자들로서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기에 영원한 형벌을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15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현대인의 성경)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현대인의 성경)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요한일서 5장 19절을 보십시오: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현대인의 성경)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온 세상은 마귀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께 속했고 이 세상은 마귀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랑하지 말아야 할 이 “세상에 있는 것들”[(현대인의 성경) “세상에 속한 것들”]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16절을 보십시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현대인의 성경)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신의 정욕과 눈의 욕심과 삶에 대한 자랑은 모두 아버지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마귀의 지배 아래 있는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자들로서 이 모든 것을 사랑해서는 아니 됩니다. 또한 이 세상도, 그 정욕도 다 지나가고 있기에(17절)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들로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해서는 아니 됩니다(15절). 성경은 만일 우리가 이 세상의 이 모든 것을 사랑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지 않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5절). 그 말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기에 우리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의 이중계명대로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우리의 하나님을 사랑하며 또한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 같이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마22:37-39). 그리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우리 속에서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요일2:5).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다 지나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기에 우리는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뜻을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의 이중계명인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우리의 하나님을 사랑하며 또한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기쁨이 충만하길 기원합니다(1:4).

 

마지막 다섯째로,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12절을 보십시오: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현대인의 성경) “자녀들이여, 내가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여러분의 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용서를 받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교제)이 있다고 하면서 우리 형제를 미워하면 우리는 어두움에 행하는 것이요 이것은 거짓말 하는 죄요 또한 진리를 행하지 않는 죄입니다. 어둠에 행하는 것이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4절). 어둠에 행한다는 것은 그 형제를 미워하는 것입니다(9, 11절). 이렇게 어둠에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면서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있으면서도 죄를 자백하지 않지만 빛 가운데 행하는 자들은 자신의 죄를 자백합니다. 그 이유는 빛 가운데 행하는 자들은 어둠에 행하는 자들과 달리 빛에 들춰진 자신의 죄를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깨달은 죄를 그들은 부인하지 않고 인정하며 자백하는 이유는 그들은 죄사함의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피가 자기들을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을 믿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죄를 자백합니다. 또한 빛 가운데 행하는 자들이 자신의 죄를 자백하는 이유는 요한일서 1장 9절의 말씀을 믿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빛 가운데 행하는 자들이 자신의 죄를 자백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 죄를 사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2:1, 2).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12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현대인의 성경) “자녀들이여, 내가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여러분의 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용서를 받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써내려가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서 악한 자 마귀를 이겼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13-14절). 그러면서 사도 요한은 그들에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편지를 받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있기 때문이요 또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인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15-16절). 그리고 이 세상도, 그 정욕도 다 지나가고 있기에(17절)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말한 것입니다(15절). 이렇게 사도 요한은 이 요한일서 편지를 써내려가는 이유를 이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말하면서 오늘 본문 12절에서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자기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4:10).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2:2) 우리가 죄를 범하여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고 계십니다(1절, 현대인의 성경).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1:9).

 

여러분, 우리의 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가 전혀 없으신 분으로써 우리 죄를 없애려고 이 세상에 오셨고(3:5) 실제로 우리의 모든 죄를 걸머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사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죄 사함의 확신을 가지고 주님의 계명을 지켜 행하므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듯이 우리도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데 헌신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원치 않게 주님의 계명을 어기고 형제, 자매를 미워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빛 가운데 있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어두움에 있는 것입니다(9절). 또한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어둠에 행하는 것으로써 진리를 행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1:6).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1:9).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습니다(2:12). 그리고 우리는 진정으로 회개한 증거로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우리 형제, 자매를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는 기쁨이 충만합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새찬송가 549장 “내 주여 뜻대로”가 생각납니다: (1절)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2절) 내 주여 뜻대도 행하시옵소서 큰 근심 중에도 낙심케 마소서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3절)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아멘.” 성경 요한일서 2장 17절은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이 세상도 그것에 대한 욕망도 다 지나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삽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 중심으로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어떠한 자인지 다섯 가지로 묵상을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1) 예수 그리스도를 압니다, (2) 하나님 아버지를 압니다, (3) 악한 자를 이깁니다, (4)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5)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