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27-11절 말씀 묵상]

 

 

여러분, 여러분이 보기에는 우리 교회가 사랑의 교회라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우리 교회에서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계십니까? 우리는 금년 2019년을 시작하면서 “서로 사랑하라”는 표어를 걸고 감사하고, 용서하고 희생하자는 세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가 매 주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헌금 송을 복음성가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를 선택하여 매주일 마다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면서 그 찬양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있습니다. 제가 헌금 송으로 그 찬양을 선택한 이유는 우리가 예배 가운데 물질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하나님 앞에서 사랑하기로 헌신하고 또 헌신하길 위해서 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도 교만도 아니 하며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네 사랑은 모든 걸 감싸주고 바라고 믿고 참아내며 사랑은 영원토록 변함없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이 세상 끝까지 영원하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이 찬양 가사는 성경의 “사랑장”이라는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에 근거한 가사 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매 주일마다 하나님께 헌금을 하면서 이 찬양을 하나님께 드릴 때에 하나님의 말씀인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 라는 헌신하는 마음과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장 12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요즘도 주일 예배 시간에 이 헌금 송을 찬양하면서 “사랑은 모든 걸 감싸주고 바라고 믿고 참아내며”란 가사가 마음에 자꾸만 다가옵니다. 특히 ‘사랑은 바라고 믿는다’는 가사 부분이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 이유는 제 주위에 고통당하는 형제, 자매들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 기원하는 것은 그들이 더 이상 바랄 수 없는 상황에 쳐해 있다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롬 4:18) 견고한 믿음을 주시길 기원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8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내가 다시 여러분에게 새 계명을 씁니다.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치고 있으므로 그 계명은 그리스도와 여러분에게 참된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다가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치고 있”다는 현대인의 성경 말씀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크게 2가지로 나눠서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첫째로 생각하게 된 점은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치고 있다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 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 의미를 2 가지로 나눠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는 “참 빛”이 무엇이고 “어두움”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참 빛”하면 우리는 요한일서 1장 5절에 사도 요한이 말한 조금도 어둠이 없으신 하나님을 생각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 참 빛이 벌써 비치고 있다고 한 것을 보면(2:8) 여기서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는 “참 빛”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좀 더 확증하는 성경구절은 바로 요한복음 1장 9절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이 말씀을 보면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8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참 빛”은 이 세상에 오셨던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8절에서 사도 요한은 “참 빛”(the true Light)을 말했는데 왜 그는 그냥 “빛”(Light)이라고 말하지 않고 “참 빛’이라고 말한 것일까요? 저는 그 이유를 고린도후서 11장 14절에서 찾아보았습니다: (현대인의 성경)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사탄도 자기를 빛의 천사로 가장합니다”[(개역개정)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즉,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 편지를 써내려가면서 어둠이 조금도 없으신 하나님을 가리켜 “참 빛”이라고 말한 이유는 빛의 천사로 가장하는 사탄 때문이란 말입니다. 사도 요한은 ‘거짓 빛’이 있기에 하나님을 가리켜 “참 빛”이라고 말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참 빛”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면 ‘거짓 빛’이란 “사탄과 적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요한일서 2장 18절과 22절을 보십시오: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 편지를 써내려가면서 그 편지의 수신자들을 생각할 때 그는 이미 그들 가운데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난 줄 알고 있었기에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8절에서 하나님을 “참 빛”이라고 말했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 저는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8절의 “참 빛”과 “어두움”을 생각할 때 우리가 이미 요한일서 1장 5-10절 말씀 중심으로 묵상한 4가지 빛과 어두움이 생각났습니다. 그 4가지란 빛이란 (a) 생명/영원한 생명이요 어두움이란 죽음/영원한 죽음(요1:4; 요일1:1, 2), (b) 빛이란 진리요 어두움이란 거짓(요일1:6), (c) 빛이란 사랑(love)이요 어두움이란 미움(hate)(2:9, 11), (d) 빛이란 의로움이요 어두움이란 불의 또는 악(1:9; 3:12)이란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묵상할 때 사도 요한이 “참 빛”과 “어두움”을 말했을 때 그가 염두 해 둔 것은 “사랑”과 “미움”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9절부터 11절까지 사도 요한은 사랑과 미움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한 것은, 사도 요한은 말하고 있는 어두움이 “지나가고”(passing away)와 참 빛이 “벌써 비추고 있”다(already shining)는 의미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먼저 여기서 ‘지나가다’라는 동사는 무슨 의미일까요? 동일한 동사가 요한일서 2장 17절에도 나옵니다: “이 세상도(The world), 그 정욕(its lust)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이 세상도 그것에 대한 욕망도 다 지나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삽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8절에서 어두움이 “지나가고”라는 말씀의 의미는 “이 세상도 그것에 대한 욕망도” 다 지나가고 있다는 말이라 생각됩니다(‘지나가고’란 동사는 현재 진행형).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이세상도, 그 정욕”은 16절에 사도 요한이 말한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인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가리킵니다(16절). 그러면 ‘어두움이 지나가고 있다’는 말은 거짓 빛인 사탄과 적그리스도가 지배하는 사탄의 왕국인 이 세상도, 그 정욕인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및 죽음/영원한 죽음, 거짓, 미움, 불의/악, 이 모든 것이 다 지나가고 있다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왜 이모든 것이 다 지나가고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사도 요한이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8절에서 말한 것처럼 “참 빛”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벌써 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빛이 비취면 어두움이 물러가는 것이 아닌가요? 그러면 참 빛이 ‘벌써 비치고 있다’는 말(the true Light is already shining)은 무슨 의미일까요? (8절) 요한복음 1장 4-5절을 보십시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현대인의 성경)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인류의 빛이었다. 이 빛이 어두움 속에서 빛나고 있었으나 어두움이 이 빛을 깨닫지 못하였다”]. 참 빛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의 빛”(4절)이요 또한 “세상의 빛”으로서(9:5) 이미 약 2,000여 년 전에 이 어두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사실을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1장 2절에서 “이 생명이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으로서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입니다. 즉,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첫째 아담의 죄로 인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의 어두운 세상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이 사실을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8절 하반절에서 “참 빛이 벌써 비침이니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벌써 비침이니라”는 동사는 ‘어둠이 지니가다’라는 말씀의 동사처럼 현재형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둠이 지금도 지나가고 있듯이 이미 과거 약 2,000여 년 전에 이 세상에 사람과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의 빛을 비추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 현재도 비추고 있다는 말입니다.

 

마지막 둘째로 생각하게 된 점은, ‘빛 가운데 있는 자어둠에 있는 자는 누구냐 라는 질문입니다.

 

요한일서 2장 9-11절을 보십시오: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현대인의 성경) “빛 가운데 산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면 아직도 어두움 속에 사는 사람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가운데 살기 때문에 자기에게 거리낄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두움 속에 있고 어두움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에 그는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를 받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처음부터 가졌고 이미 들었던 “옛 계명”을 다시금 “새 계명”이라고 말하면서(7, 8절) 빛 가운데 있는 자와 어둠에 있는 자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리한 이유는 그의 편지를 받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어두움이 지나가고 있고 참 빛이신 예수님이 벌써부터 지금까지 계속 비치고 있으니까 빛의 자녀들답게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가길 원했기 때문입니다(3:23). 그러면 왜 사도 요한은 그들이 빛의 자녀들답게 서로 사랑하면서 살기를 원했을까요? 그 이유는 참 빛이 시요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로서 하나님과 사귐이 있고(1:6)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2:3, 5) 예수님의 이중계명대로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면서 살아가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 속에 온전하게 되며(5절) 또한 그들 안에 하나님의 기쁨이 충만하길 원했기 때문입니다(1:4). 이렇게 사는 것이 바로 천국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이 땅에서도 부분적으로 누리면서 살아가는 삶이기 때문에(1:4)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를 받는 유대인 그리스도들에게 새 계명(“옛 계명”)을 다시금 썼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대로 그들도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6절) 사도 요한은 그들에게 새 계명인 형제를 사랑하면서 살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9절을 보십시오: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현대인의 성경) “빛 가운데 산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면 아직도 어두움 속에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미 묵상한 요한일서 2장 6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이 말씀이 생각난 이유는 오늘 본문 9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면 “빛 가운데 산다고 하면서”란 말씀 때문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산다고 하는 자(6절)는 빛 가운데 산다고 하는 자(9절)란 말입니다. 그리고 빛 가운데 산다고 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6절).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대로란 무슨 뜻입니까? 달리 질문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형제를 사랑하셨습니까 아니면 미워하셨습니까? 너무나 뻔 한 질문이라 생각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안에 산다고 하는 저와 여러분, 빛 가운데 산다고 하는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행해야 합니까? 우리도 예수님처럼 형제를 사랑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마도 사도 요한의 편지를 받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빛 가운데 산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9절).

 

여러분, 만일 우리가 주님 안에 산다고 하면서 빛의 자녀답게 예수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이웃을 사랑하면서 살기보다 이웃을 미워하며 살고 있다면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7-11절에서 한 2가지로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1)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아직도 어두움 속에 사는 사람입니다(9, 현대인의 성경).

 

그 뿐만 아니라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아직도 어둠에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1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두움 속에 있고 어두움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묵상한 요한일서 1장 5-6절을 다시 보면 성경은 하나님은 빛이시요 하나님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기에 만일 우리가 그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오늘 본문 2장 9절과 11절과 연관해서 말한다면, 우리가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우리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미워하면 우리는 아직도 어두움 속에 사는 사람이요 아직도 어둠에 행하고 있는 것이며 이것은 거짓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2)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에 그는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요한일서 2장 11절 하반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십시오: “…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에 그는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개역개정) “…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여러분, 만일 우리의 눈을 멀게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과연 우리가 눈이 보이지 않으면 제대로 걸을 수나 있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시력을 잃으면 올바른 방향감각을 가지고 목적지를 향해 똑바로 걷기가 힘듭니다. 누구의 도움이 없이는 쉽지가 않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장 5절에서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11절에서 “…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에 그는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두 말씀을 연관해서 생각할 때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들은 어두움이 그들의 눈을 멀게 했는데 그 의미는 그들은 빛 되신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빛 되신 예수님 안에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들은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영원한 생명)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요1:4-5). 그 말은 빛 되신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은 예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깨닫기에 영생을 가진 자들로서 이웃을 자기 자신같이 사랑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들은 빛 되신 예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인데 그 이유는 어두움이 그들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입니다(요일2:11).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주님 안에 산다고 하면서 빛의 자녀답게 예수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이웃을 사랑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빛 가운데 거하여(살기 때문에) 우리 속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요한일서 2장 10절을 보십시오: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현대인의 성경)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가운데 살기 때문에 자기에게 거리낄 만한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 거한다(산다)고 말하면서 우리 형제, 자매를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미워하면 우리 속에 거리낌이 있지 않습니까? 교회의 형제, 자매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주님의 사랑으로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또한 부모와 자녀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데 주님의 말씀대로 (제일 가까운) 이웃인 우리 가족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고 있으면 당연히 우리 마음에 거리낌이 있지 않나요? 만일 우리 속에 이 거리낌마저 없다면 지금 우리의 마음은 심히 강퍅해져 있는 증거가 아닐까요?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10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거리낌이 없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그 뜻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성경 구절 3개가 요한복음에 있습니다: (1) (요6: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2) (요11: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3) (요16: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동일한 저자인 사도요한이 쓴 요한복음의 이 석절 말씀을 보면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1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거리낌이 없다’는 말씀의 의미는 ‘걸림이 없다’ 또는 ‘실족하지 않는다’는 의미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걸림이 없고 실족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지금 저와 여러분의 마음에는 거리낌이 없으십니까? 참 빛이신 예수님 가운데 거하여 우리가 형제, 자매를 사랑하므로 우리 속에 걸림이 되는 것이 없고 실족하지 않고 있습니까? 아니면 지금 우리가 빛 가운데 있다고 하면서 누군가를 미워하므로 우리 속에 거리낌이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마음에 걸림이 있지 않습니까? 혹시 지그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므로 실족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이 어두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결과 어두움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 어두운 세상도, 그 정욕도 다 지나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벌써 비치고 계시기에 거짓 빛인 사탄과 적그리스도가 지배하는 사탄의 왕국인 이 세상도, 그 정욕인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및 (영원한) 죽음과 거짓과 미움과 불의와 악은 다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빛의 자녀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은 예수님의 계명대로 우리는 우리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우리는 예수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우리 이웃을 사랑할 때에 우리 안에 하나님의 기쁨이 충만할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부분적으로 누리면서 이 땅에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빛 가운데 있다하면서 우리 형제, 자매를 미워하면 우리는 아직도 어두움 속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형제를 미워하면 우리는 아직도 어두움 속에 사는 사람이요 아직도 어둠에 행하고 있는 것이며 이것은 거짓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어두움이 우리 눈을 멀게 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빛 되신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고 있다면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산다고 하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대로 우리도 행해야 합니다. 즉,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생명을 다하기까지 우리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우리 속에 거리낌이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