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행하시는 대로 우리도 행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21-6절 말씀 묵상]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토마스 아 켐피스는 그의 책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 이리 말했습니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어둠의 길을 걷지 않을 것이다”(요 8:12 참조). 주님은 이 말씀에서, 진정으로 가르침 받기를 원하고 분별없는 마음에서 해방되기를 원한다면, 그리스도의 생애와 그분이 걸어온 길을 본받아 행하라고 권고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깊이 되새겨 보는 것이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인터넷). 우리가 토마스 아 켐피스의 권면대로 그리스도인으로 올바르게 살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깊이 되새겨 볼 때 무엇이 생각나십니까? 저는 오래전에 즐겨 불렀던 복음성가 “주님 가신 길”이 생각났습니다. 1절 가사는 이렇습니다: “주님 가신 길 십자가의 길 외롭고 무거웠던 길 골고다의 거친 언덕길 지치신 주님의 모습 오 나의 주님 용서하소서 죄인 위해 고난 받으셨네 이 세상에 생명 주시길 그렇게도 원하셨던 길.” 아마도 이 복음성가가 생각난 이유는 제가 예수님의 생애를 되새겨 볼 때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 제 마음에 조금이나마 새겨져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우리 또한 걸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성경 말씀으로 말한다면, 마태복음 7장 13절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우리는 우리 각자가의 십자가를 지고 우리 자신을 부인하면서 예수님을 따라 좁은 길, 고난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6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현대인의 성경) “하나님 안에서 산다고 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하신 것과 똑같이 살아야 합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예수님이 행하시는 대로 우리도 행해야 합니다”란 제목 아래 한 2가지로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1-6절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사도 요한은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어떠한 사람일까요?

 

전에 저희 교회에서도 자주 불렀던 복음성가 중에 “나의 안에 거하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노래의 가사를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나의 안에 거하라 나는 네 하나님이니 모든 환란 가운데 너를 지키는 자라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널 도와주리니 놀라지 말라 네 손 잡아 주리라 (2x)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너의 하나님이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노라 너를 사랑하는 네 여호와라(2x) 너를 사랑하는 네 여호와라(2x).” 저는 이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좋아했던 이유는 이 찬양이 저로 하여금 2개의 성경구절을 생각나게 하므로 그 두 성경구절이 저에게 힘과 위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두 성경구절이란 이사야 41장 10절과 이사야 43장 1, 4절 상반절입니다:

 

(1) 첫 번째 성경구절은 이사야4110절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저는 이 성경구절과 복음성가 “나의 안에 거하라”라는 찬양을 연관해서 생각할 때 왜 이 찬양과 말씀이 저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었던 이유는 제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제가 두려워하지 말고 놀랄 필요가 없는 이유는 나의 하나님이 저와 함께 하시고, 나를 도와주시며, 당신의 오른손으로 나를 붙들어 주시므로 나를 굳세게 해주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 두 번째 성경구절은 이사야 431, 4절상반절입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

 

이 말씀이 생각난 이유는 복음성가 “나의 안에 거하라”의 가사를 보면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너의 하나님이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노라 너를 사랑하는 네 여호와라”고 쓰여 있는데 이 가사는 이사야 43장 1절과 4절 상반절 말씀에 근거한 가사 같습니다. 이 말씀이 참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저를 지명하여 부르셨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저에게 “너는 내 것이라”는 말씀, 그리고 하나님의 눈에 제가 보배롭고 존귀하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제가 제 자신을 볼 때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지지가 않을 때에 하나님께서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신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 죽음으로 사신바 된 저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보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지요.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6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그의 안에 산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동일한 저자인 사도 요한이 쓴 요한복음 15장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특히 저는 4-5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여기 요한복음 15장 4절에서 사도 요한은 “내 안에 거하라”고 말했는데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6절에서는 “그의 안에 산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거하라”는 말과 “산다”는 말은 같은 의미입니다. 즉, 사도 요한은 두 구절에서 ‘주님 안에서 살라/주님 안에 거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6절에서 “그의 안에 산다”는 의미는 주님 안에 거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주님 안에 거한다는 말씀은 요한복음 15장 4-5절 말씀에 근거해서 생각해 볼 때 그 의미는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듯이 주님 안에 산다/거한다는 의미는 주님에게 붙어있다는 말이요 주님을 떠나지 않고 주님과 함께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사도요한에게 있어서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주님 안에 거해있을 때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말한다면, 우리가 주님 안에 살지(거하지) 않고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5절).

 

여러분, 여러분은 왜 물고기가 어항 밖으로 튀어 오르려 하는지 아시나요? 그 이유가 3가지가 있다고 합니다(인터넷 한국일보): (1) 첫물속에 용존 산소가 부족할 경우라고 합니다. 이 때 물고기는 호흡을 위해 물 밖으로 나와 수면에 아기미를 살짝 내밀고 입을 뻐끔거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2) 먹잇감을 잡기 위해, 또는 포식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수면위로 나오기도 한다고 합니다. (3) 물고기가 피부병에 걸렸거나 피부에 이물질이 묻었을 때에도 물 밖으로 몸을 날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한국어에 ‘물고기는 어항을 떠나 살 수 없다’는 말처럼 우리는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요15:5). 이것을 반대로 생각한다면, 만일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성경구절로 말한다면, 빌립보서 4장 13절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현대인의 성경) “나에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입니다(13절). 주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야 우리는 풍부할 때에든지 궁핍할 때에든지 오직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면서 자족하며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11-12절). 그러므로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주님 안에 거하는 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는 자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5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에게서 완전해집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그분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산다고 하는(거하는) 자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하면 바로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인지 아닌지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있으면 이것으로 우리가 주님 안에 있는 줄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즉, 주님 안에서 산다고 하는 자(6절)는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요,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5절). 그 말은 즉, 주님 안에 산다는 자(거한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된 자를 가리킵니다. 이것을 요한복음 15장 9-10절의 말씀으로 좀 달리 말한다면, 주님 안에 산다는 자(거한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란 말입니다. 성경 요한복음 15장 9-10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현대인의 성경)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내 사랑 안에서 살아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의 사랑 안에 있는 것과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서 살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을 보면 사도 요한은 주님 안에 산다는 자, 즉 주님 안에 거한다는 자는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요,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고 있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사도 요한은 ‘주님 안에 거하는 것’과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과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이 3가지를 연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 요한은 ‘주님 안에서 거하는 자’와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와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를 동일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동일시하되 주님 안에 거하는 자는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요,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란 말입니다. 주님 안에 거하는 자는 주님의 말씀을 지키므로 주님의 사랑이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요일2:5-6). 그리고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지키므로 주님의 사랑이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어가는 예수님의 제자 안에는 주님의 기쁨이 충만합니다(넘칩니다)(요15:11).

 

여러분,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를 쓴 목적 중 하나(수평적인 목적)는 우리가 이미 묵상한 요한일서 1장 4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 사도요한이 요한일서를 쓴 수직적인 목적은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교제)이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3절). 즉, 사도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전한 목적은 그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전해들은 사람들이 자기처럼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를 갖게 하는 것이었고 그 이유는 그들 또한 자기처럼 “생명” 또는 “영생”을 누리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전한 목적이 “우리와 교제”(3절, 현대인의 성경)와 “우리의 기쁨”(4절)인 것을 보면 사도 요한은 수직적인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에서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 충만함을 수평적으로 그의 편지를 받는 초대 교회 형제, 자매들도 받아 누리길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6절 상반절에서 사도 요한이 말한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주님 안에 거하는 자들로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교제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킵니다. 그러므로 주님 안에 사는 자(거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므로 주님의 기쁨이 충만합니다. 이러한 주님의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사는 주님 안에 사는(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마지막 둘째로, 사도 요한은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한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문구 중 하나는 “당신이 행하는 일보다 당신이 누구인가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The kind of person you are is far more important than the kind of work you do)입니다. 이 말은 “존재”(being)가 “행함”(doing)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존재에서 행함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그래서 저는 행함보다 존재에 초점을 맞춘 신앙생활을 추구하고 싶습니다. 제가 주님을 위해서 또한 성도님들을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초점을 맞추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는 말만하고 행함이 없을 때 제 마음에 고통이 있길 원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말로만 하나님의 사랑, 이웃 사랑을 하면서 실제 삶 속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이웃을 미워하면 제 마음에 당연히 고통이 있길 원합니다. 저는 지난 번 새벽기도회 때 시편 23편부터 31편까지 읽다가 시편 23편 4절 말씀을 시편 22편 1절 말씀과 연관해서 묵상했었습니다: (시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는 이 두 성경구절 말씀을 연관해서 함께 묵상할 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니이까”라는 마태복음 27장 46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마태복음 27장 46절을 묵상하면서 시편 23편 4절 말씀과 연관해서 묵상하게 되었는데 그 때 제가 던지게 된 질문은 마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십자가상에서 못박혀 죽으시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께 버리심을 받으셨던 예수님이 받으셨던 위로(comfort)가 무엇이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상에서 하나님 아버지께도 버림을 받으시는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예수님께서 위로를 받으신 게 무엇이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리했을 때 생각난 말씀이 그 전 주일 설교했던 이사야 53장 11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 즉,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친히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모든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시는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시고 “만족하게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받으신 위로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십자가상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버리심을 받으시는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예수님께서 받으신 위로란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시므로 하나님 아버지를 만족케 하신 것이라 생각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6절 하반절에서 사도 요한은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한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대로 우리도 행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께서 행하신 대로 우리도 행하려면 우리는 먼저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한 2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는데 하나는 과거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고 다른 하는 지금도 예수님께서 행하고 계신 일입니다:

 

(1) 예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일이란 우리 죄를 위해 화목 제물로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2절을 보십시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현대인의 성경)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해 화해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 죄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해 그렇게 되신 것입니다”]. 여기서 “화목 제물”(propitiation)이란 단어는 “만족”(satisfaction)이란 의미로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 제물로 받쳐져 죽으시므로 죄를 형벌하셔야 했던 하나님의 거룩하신 요구를 만족케 하신 것을 가리킵니다(MacArthur).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2절뿐만 아니라 4장 10절에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아들 예수님을 화목 제물로 이 세상에 보내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리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께서 행하신대로 우리도 행해야 한다는 교훈을 실천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사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걸머지시고 죄를 속하시고자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에 화목 제물로 받쳐져 죽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되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아들 예수님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의 이중계명대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화목하게 하는 직분”(고후5:18)을 신실하게 잘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화목하게 하는 말씀”(19절)을 우리 이웃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화목해야 합니다(살전 5:13).

 

(2) 예수님께서 지금도 행하고 계신 일이란 바로 우리가 죄를 범하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1절을 보십시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현대인의 성경) “나의 믿음의 자녀들이여,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고 나는 이 편지를 씁니다. 그러나 만일 누가 죄를 짓더라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여기서 “대언자”(Advocate)란 말은 요한복음 16장 7절에서는 “보혜사"(Helper)라고 번역돼 있습니다. 그 문자적인 의미는 ‘옆에서 부르다’(one called alongside)란 말로(MacArthur) “성도들의 옆에서 함께하는 신적인 존재”를 의미합니다. 그 종말론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피고를 돕는 변호사’란 뜻입니다(인터넷). 현대 말로 한다면, ‘피고 측 변호사’(defense attorney)란 뜻입니다(MacArthur). 여러분, 상상이 되십니까? 하나님의 법정에 섰는데 사탄이 재판장이신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를 기소(prosecutes)를 하는 장면이 상상이 되십니까?(MacArthur) 성경 요한계시록 12장 10절을 보면 저자 사도 요한은 사탄을 가리켜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the accuser of our brothers)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우리 죄를 고백했으므로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셨고 우리를 모든 불의(죄악)에서 깨끗하게 하셨는데도 불구하고(요일1:9) 사탄은 우리가 죄가 있는 것처럼 꾸며서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고하여 바친다는 것입니다(참소). 그 때에 대제사장이 되시는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변호사가 되셔서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를 변호하실까요? 재판장이신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걸머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의 그 못자국과 창 자국을 보여드리지 않으실까요?(요20:27; 계5:9, 13:8) 이만큼 뚜렷하고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그 확실한 증거를 보시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저와 여러분을 정죄하실 수 있으실까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1절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현대인의 성경)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유죄 판결이 없습니다”]고 말했을 뿐만 아니라 로마서 8장 33-34절 상반절에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감히 고발하겠습니까?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누가 우리를 죄인으로 단정하겠습니까? …”].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시는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요일2:1)께서 우리 죄를 위해 화목 제물이 되셨다는 사실(2절)을 믿음으로 우리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1:9). 그리하면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죄악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9절,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2:3).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한 후 다시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우리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우리 속에 있는 게 아닙니다(4절).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입니다(3절). 달리 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므로 하나님을 더욱더 확실하게 또는 체험적으로 알아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우리 속에 온전하게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5절).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예수님 안에 산다고 하는 우리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대로 우리도 행해야 합니다. 마치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듯이 우리는 주님에게 붙어있어야 하며 결코 주님을 떠나지 않고 주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거하는 자는 주님의 말씀을 지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주님 안에 사는 자는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요,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지키므로 주님의 사랑이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어가는 예수님의 제자 안에는 주님의 기쁨이 충만합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자는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대로 행한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일이란 우리 죄를 위해 화목 제물로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 제물로 받쳐져 죽게 하시므로 우리의 죄를 형벌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요구를 만족케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는 자는 예수님의 이중계명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또한 이웃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화목하게 하는 말씀으로 신실하게 감당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도 행하고 계신 일이란 바로 우리가 죄를 범하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법정에 섰는데 사탄이 재판장이신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를 기소(prosecutes)를 할 때에, 즉 사탄이 우리가 죄가 있는 것처럼 꾸며서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고하여 바칠 때에 예수님은 피고 측 변호사가 되셔서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누가 우리를 죄인으로 단정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