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요한일서 11-4절 말씀 묵상]

 

 

금년 2019년 저희 교회의 표어가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그리고 표어 구절은 바로 요한복음 15장 12절입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나요?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로 여기시사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서 버리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13절). 이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14절). 그래서 우리는 이 예수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자들이 되길 원하여 금년도 표어를 “서로 사랑하라”고 정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여러분과 함께 묵상하고 싶었던 성경 말씀이 바로 “요한일서”입니다. 그 이유는 금년도 표어구절인 요한복음 15장 12절을 쓴 사도 요한이 쓴 요한일서에는 “사랑”에 대한 말씀들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요한일서 4장 7-8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또 요한일서 4장 11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개인적으로 마음에 두는 말씀인 요한일서 4장 18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그래서 저는 오늘부터 요한일서를 묵상하면서 목표는 주님의 뜻이 계시면 요한이서와 요한삼서까지 다 묵상하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귀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길 기원합니다.

 

오늘부터 우리가 묵상하고자하는 요한일서는 사도 요한이 쓴 편지로서 사도 요한은 세베대의 아들이며 또한 사도 야고보의 형제로서 사도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섬긴 사도였습니다. 그는 갈릴리 어부 출신으로 예수님의 행적과 수난(고난) 및 부활의 목격한 예수님의 12제자 중 한 사람으로서 요한일서 외에도 요한이서, 요한삼서 및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도 썼습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를 쓴 목적을 개역개정 성경해설을 보면 2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1) 첫째 목적은, 영지주의를 비롯한 각종 이단에 의해 심각한 위기를 맞은 교회를 진리의 터 위에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영지주의”란 “영적 지식(gnosis)을 추종하는 동방 종교와 희랍철학과 신지학(theosophy),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혼합 형태로 주후 80년부터 150년 사이에 초대교회와 경쟁했던 가장 강력하고 위협적인 운동”이었습니다(인터넷). “영지주의는 플라톤과 같은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아 2 가지 그릇된 전제를 기반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 두 가지 그릇된 전제 중 하나가 바로 정신과 물질에 관한 이원론입니다. 영지주의자는 물질은 본래 악하고 영은 선하다고 주장합니다. 이 영육이원론은 결국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정하고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을 가장 미혹하는 신앙의 양태를 영육이원론의 영지주의로 지목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지주의 사상이 교회에 침투하여 초기 기독교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이단 세력이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흔적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버가모에 있는 교회에 보내신 편지의 내용 중에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계 2:15)라는 내용이 있다. 이것이 초대교회에 침투한 영지주의와 관련된 흔적이다. ‘니골라당’(Nicolaitans)이라는 말은 초기 영지주의의 지도자 니콜라스(Nicolas)라는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니콜라스는 사도행전 6장에 나오는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으로서 안디옥 출신의 개종자로서 사도들에게서 신앙을 전수받고 집사의 직분을 받았으나 결국 이단의 길로 빠지고 말았다고 합니다(인터넷). 뿐만 아니라 요한일서에도 보면 사도 요한은 기독교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이단 세력을 암시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요일2:22)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요일4:1-3)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 요한일서 편지를 써서 영지주의를 비롯한 각종 이단에 의해 심각한 위기를 맞은 교회를 진리의 터 위에 세우고자 했던 것입니다.

 

저는 사도 요한이 이 요한일서를 쓴 목적이 지금 현대 교회에도 충분히 적용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얼마나 각종 이단에 의해 교회가 심각한 위기를 맞이했습니까? 이러한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주님의 교회가 주님의 진리의 터 위에 견고히 서 있어야 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형태의 혼합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말씀, 오직 믿음, 오직 예수,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의 영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기에 저는 우리가 요한일서를 묵상하는 것이 타당하고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요한일서를 묵상하므로 사도 요한이 전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듣고 바른 말씀, 바른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2) 둘째 목적은, 사도 요한이 요한이서를 쓴 목적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유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요한은 교회가 진리의 터 위에 견고히 서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주님의 교회가 주님의 진리 가운데서 하나님과의 참 사랑의 교제를 하므로 어떠한 거짓된 지식과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 가운데 거하길 원했습니다(개역개정 성경해설). 참으로 중요한 목적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이 인격적 관계를 유지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서 참 사랑의 교제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지금 교회의 심각한 문제 중 하나가 주님과 이러한 참 사랑의 교제가 결핍돼 있고 무엇보다도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것이 아닌가요?

 

그래서 저는 오늘 본문 요한일서 1장 1-4절 말씀 중심으로 “우리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제목 아래 사도 요한이 오늘 성경 말씀으로 통하여 우리에게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이고, 그 복음을 우리에게 전하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주시는 은혜와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사도 요한이 우리에게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무엇인가 입니다. 2가지로 오늘 본문 요한일서 11-2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1장 1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 [(현대인의 성경)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계신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 여기서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는 “태초부터 있는”이란 말을 생각할 때 우리는 두 성경 구절이 생각날 수가 있습니다. 그 두 성경구절이란 바로 창세기 1장 1절인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란 말씀과 요한복음 1장 1절인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입니다. 이 두 성경구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태초”란 동일한 태초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태초”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그 태초[“시간과 공간의 시초”(인터넷)]를 말씀하고 있는 반면에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태초”는 “초시간적인 영원한 태초”(인터넷)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 요한이 오늘 본문 요한일서 1장 1절에서 말하고 있는 “태초”란 어느 태초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영원한 태초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오늘 본문 2절 하반절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이시니라.”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세 이전에 영원 전부터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계셨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인의 성경은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계신”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이 번역대로 사도 요한이 말한 “태초부터 있는”이란 말은 천지창조 이전인 영원한 태초를 말하고 있습니다. 즉,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영원하심(the eternity of Christ)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성(the divinity of Christ)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영원하신 그리스도를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요한이 말한 “생명의 말씀”(the Word of Life)은 바로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는 말씀과 오늘 본문 요한일서 1장 2절 하반절에서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라는 말씀에 근거해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말씀이 되십니다. 성경 요한복음 14장 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영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로고스)이시요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요1:1) “생명”(영원한 생명)이 되십니다(14:6).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영원한 생명이 되실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란 말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복음을 우리에게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요일1:3)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땅에 나타내신바 된 영원한 생명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1장 2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현대인의 성경) “이 생명이 세상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직접 보았으므로 그분을 여러분에게 증거하며 전합니다. …”]. 여기서 사도 요한은 “영원한 생명”(the eternal life)이 나타내신바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의미는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말씀(로고스)이신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음을 가리킵니다(The Outline Bible).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성(the humanity of Christ)을 말합니다. 이것을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현대인의 성경) “말씀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하나님 아버지의 외아들의 영광이었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이 사실을 가리켜 우리는 예수님께서 “성육신”(incarnation)하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성육신”이란 성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되시는 성자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즉, 성자가 완전한 인성, 즉 영을 포함한 몸과 혼을 취하신 참된 사람이 되셨다는 말입니다(로이드 존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취하신 것은 진정한 육체였다.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취하신 것은 단순한 겉모습이나 형태가 아닌 진정한 성육신이었다. 예수님은 실제로 육체로 오셨다. 영지주의 이단들은 예수님이 단순히 육체의 모양만 가졌다고 주장하였다. 몸의 형체만 있을 뿐 허깨비 같은 몸이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실제 육체로 오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신 것이다”(로이드 존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게 됐냐면 바로 성령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나시게 하시되 성자가 취하신 인성이 죄가 없도록 하셨습니다[“나실 바 거룩한(죄가 없고 순결한) 이는”(눅 1:35)(로이드 존스)]. 사도 요한은 이 성육신 하신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들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눈으로 “똑똑히” “직접” 보았고 자기 손으로 직접 만져 보았다고 오늘 본문 요한일서 1장 1, 2, 3절에서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사도 요한은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2절),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3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 요한은 자기가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직접 보았으므로 그분을 여러분에게 증거하며 전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 전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2, 3절, 현대인의 성경).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고 확실하게 해야 할 것은 사도 요한이 전하고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가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요(1절) 또한 이 땅에 나타나신바 되신 이 “영원한 생명”(2절) 으로서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the divinity of Christ)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the humanity of Christ)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신성뿐만 아니라 인성도 전한 이유는 그 당시 이단인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은 신성만 소유하셨으면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든 물질은 악하고 하나님은 완전히 거룩하심으로 신성을 가지신 그가 실제 물질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인간성인 육체적 본질은 실재가 아니고, 단지 눈에 보인듯하다가 사라지고 마는 하나의 환각과 환영이었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단 중에 하나가 바로 “도케니즘”(Doceticism)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신 사실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실제적인 살과 피로 된 것이 아니라 다만 눈에 보이는 듯하다가 사라져버리는 환각이나 환영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인터넷). 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주장입니까? 이것은 거짓말이요 초대교회를 미혹하는 자들의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이서 1장 7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이 세상에 많은 미혹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셨다는 사실을 부인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합니다. 그래서 한동안 신학계에서 논쟁이 심화되었던 주제가 바로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였습니다. 제가 이해한 바로는 신학자들 중 예수님이 역사적 인물이라는 것을 부인하면서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신화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그들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초대 교회 때 이단 세력인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반대했습니다(인터넷). 그러나 우리는 매주일 예배 때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있듯이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죄 없으신 육신의 몸으로 오셨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즉,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과 예수님의 인성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로마서 1장 3-4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우리는 믿는 진리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입니다 (고전15:3-4).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말씀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입니다(행16:31).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주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은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 요한처럼 “생명의 말씀”이시요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언하고 전해야 합니다(요일1:1-3). 우리는 우리가 듣고 인격적으로 만나 믿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의 소망에 흔들리지 아니하면”서(골1:23) “할 수 있는 대로” 복음 전하기를 원해야 합니다(롬1:15).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을 하면서(빌1:27)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아야 합니다(행14:21).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해야 합니다(빌2:22).

 

마지막 둘째로 우리가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사도 요한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1장 3-4절을 보면 사도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목적이 이중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중적인 목적을 수직적인 목적(the vertical purpose)과 수평적인 목적(the horizontal purpose)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Outline Bible 주석):

 

먼저 수직적인 목적은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이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1장 3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현대인의 성경)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 전하는 것은 여러분도 우리와 교제를 갖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교제는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갖는 교제입니다”]. 사도 요한이 그가 들었고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며 손으로 직접 만져 본(1, 2절 현대인의 성경) 태초부터 계셨던 “생명의 말씀”이요(1절) 이 세상에 나타나신바 된 “영원한 생명”(2절, 현대인의 성경)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를 전한 첫 번째 목적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fellowship)이 있게 하려 함”이였습니다[(현대인의 성경) “우리와 교제를 갖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3절).

 

여러분, “사귐” 또는 “교제”란 무엇입니까? 제 개인적인 생각은 교회 안에서 남용되고 있는 기독교 용어 중에 하나가 바로 “교제”(fellowship)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교제란 단어가 남용되고 있는가 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 중 많은 이들이 교제를 “사교”(socializing)나 하나의 “활동”(activity)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거룩한 삶의 추구”(The Pursuit of Holiness)란 책 외에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집필한 저술가인 Jerry Bridges는 “Fellowship is a relationship, but not an activity”(교제란 관계이지 활동이 아닙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1장 3절에서 사도 요한은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전한 목적은 “우리와 교제를 갖도록 하기 위한 것”[“so that you too may have fellowship with us”(NASB)]이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우리와 교제는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갖는 교제입니다” [“our fellowship is with the Father, and with His Son Jesus Christ”(NASB)]라고 말하고 있습니다(3절, 현대인의 성경). 여기서 사도 요한이 말한 “교제”(사귐)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를 갖는 것입니다. 즉, 사도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전한 목적은 그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전해들은 사람들이 자기처럼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를 갖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사도 요한이 그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전해 듣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를 갖기를 원했는가 하면 그 이유는 그들 또한 자기처럼 “생명” 또는 “영생”을 누리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성경 요한일서 5장 11-13절을 보십시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여러분에게는 생명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영생이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생명의 말씀”이 되시며 “영원한 생명”이신(1:1, 2)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면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은혜의 선물로 주신 영생이 있습니다(롬6:23; 요일5:11-13). 여러분에게는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이 영원한 생명이 있었던 사도 요한은 영원한 생명이시요 생명의 말씀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므로 그의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들이 자기처럼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갖되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의 선물이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롬6:23)를 받아 누리길(enjoy)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Word Studies in the N.T. 주석).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목적이 돼야 합니다.

 

먼저 예수님을 믿어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를 하면서 영생의 축복을 받아 누리고 있는 저와 여러분이 생명의 말씀이시요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기쁜 소식)을 전하는 목적은 우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는 자들 또한 우리처럼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를 갖고 영생의 축복을 받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 사역에 힘을 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그 다음 수평적인 목적은 바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요한일서 1장 4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현대인의 성경)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넘치는 기쁨을 나누려고 이 글을 써 보냅니다”]. 사도 요한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계신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요 세상에 나타나신바 되신 이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전했을 뿐만 아니라 “이 글을 써 보”낸 목적은 “우리의 기쁨”이 이 요한일서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에게도 충만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1-4절). 여러분, 좀 흥미롭지 않습니까? 사도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전한 목적이 “우리와 교제”(3절, 현대인의 성경)와 “우리의 기쁨”(4절)이란 사실이 흥미롭지 않습니까? 이 두 목적을 보면 사도 요한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교제를 누리고 있으면서 기쁨이 충만했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수직적인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에서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 충만함을 수평적으로 그의 편지를 받는 초대 교회 형제, 자매들도 받아 누리길 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진정한 교제요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 아닌가요? (빌1:27)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란 수직적인 성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영생을 누리면서 수평적인 형제, 자매들과의 교제 가운데서 함께 기쁨의 충만함을 누리는 것이라 말입니다. 그리고 이 영생을 누리면서 누리를 기쁨의 충만함은 천국 계명인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므로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어 우리의 기쁨이 충만한 것입니다(요15:9-12). 새 찬송가 293장 “주의 사랑 비칠 때에” 가사(1, 4절 후렴)가 생각납니다: (1절) 주의 사랑 비칠 때에 기쁨 오네 근심걱정 물러가고 기쁨 오네 기도하게 하시며 희미한 것 물리쳐 주의 사랑 비칠 때 기쁨 오네, (4절) 주의 사랑 비칠 때에 그 광채가 찬란하게 우리 둘러 비치겠네 세상 모두 이기고 천국 생활 할 때도 주의 사랑 비치네 그 큰 사랑, (후렴) 그 큰 사랑 내 맘속에 충만하게 비칠 때에 찬송하네 그 큰 사랑 내 맘 속에 화평함과 기쁨 주네 그 큰 사랑.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도 사도 요한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살고 있었던 초대교회 시대처럼 각종 이단에 의해 심각한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다른 복음, 섞인 복음, 거짓 복음이 여기저기서 전파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이 식어졌습니다(마24:12). 그리고 더 이상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심각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볼 때 사도 요한이 쓴 요한일서는 충분히 우리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일서의 말씀을 통해 주님의 교회를 진리의 터 위에 견고히 세우는데 헌신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아가는 가운데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더욱더 두텁게 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더욱더 알아 가는데 헌신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요 이 땅에 나타내신바 된 “영원한 생명”입니다(요일1:1, 2). 다시 말하면,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the divinity of Christ)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the humanity of Christ)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 복음을 전한 이중적인 목적은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교제)이 있게 하기 위해서요(수직적인 목적) 또한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수평적인 목적)(3-4절).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면서 사도 요한처럼 이러한 분명한 이중적인 목적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로 전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