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3)

 

 

 

[로마서 831-34]

 

 

성경 로마서 8장 32절을 보십시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여기서 “내주신 이”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하나님을 말씀합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31절). 그리고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요(신33:27; 사40:28; 롬16:26), 어디나 계시는 편재하시는 하나님이시요(사57:15; 렘23:24),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요(창28:3; 수22:22; 욥8:3, 5; 시50:1; 사 9:6; 겔10:5; 계11:17; 15:3; 16:7, 14; 19:6, 15; 21:22),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요일4:8, 16). 그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되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주셨습니다.

 

성경 로마서 8장 32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그 아들”이란 독생 성자 하나님이신 하나님과 동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은 그 아들(“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주셨습니다. 지난 주에 묵상한 창세기 22장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심에 있어서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셨는데(창22:1-2), 실제로 아브라함에게는 또 다른 아들 이스마엘이 있었습니다(16:16).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독자 이삭(22:1)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경 히브리서 11장 17절을 개역 한글판(1956년)으로 보면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개역 개정판(1998년)으로 보면 “그 외아들”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그 독생자”라고 변역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은 독생자였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에 있어서 자신이 매우 사랑하고 아끼는 독생자 이삭을 아끼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고 했었습니다(창22:9-10).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구원)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습니까(롬8:32).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고 주십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 ‘예수 안에’ 또는 ‘그 안에’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함께”라는 단어는 “말미암아”라고도 말할 수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말미암아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고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란 무엇입니까?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안에서/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셨고 주시는 “모든 것”은 무엇입니까? 성경 에베소서 1장 3절을 보십시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은 “모든 신령한 복”[“모든 영적인 복”(현대인의 성경)]으로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게 모든 신령한 복중에 몇 가지를 에베소서 1장4절부터 말씀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4절에서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고 말씀을 하였는데 이것은 로마서 8장 29절로 말씀한다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 또는 미리 사랑하신 자들’을 ‘미리 정하셨다’(택하셨다)는 말씀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세전에 이미 정하셨다 또는 택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묵상한 구원의 5단계에 두 번째 단계입니다. 간략하게 다시 말한다면, 로마서 8장 3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모든 것”이란 “모든 신령한 복”(엡1:3)으로서 그 모든 신령한 복에는 구원의 5단계가 다 포함돼 있습니다. 여기서 구원의 5단계란 (1) 하나님이 미리 아심/사랑하심, (2)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심/택하심, (3) 하나님께서 부르심, (4)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심, (5)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심을 말합니다(롬8:29-30).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을 생각할 때 디모데후서 1장 9절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사 우리를 부르심도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은혜로 부르신 것입니다. 여기서 “영원 전부터”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은 영원 전부터 계획을 다 세우신 것이란 말입니다. 구원의 5단계에서 하나님께서 영원 전 또는 창세전에 우리를 미리 아시고/사랑하시고 미리 정하셨음/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태어난 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성경 요한복음 10장 3절을 보십시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각각 개별적으로 부르셨습니다. 부르심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우리를 아신 것/사랑하신 것과 정하신 것/택하신 것도 각각 개별적으로 사랑하시고 택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각각 개별적으로 의롭다하셨습니다. 영화롭게 하심도 각각 개별적으로 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에 있어서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 개별적으로 사랑하셔서 택하시고 부르시사 의롭다하시며 영화롭게 하시니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가 있겠습니까(롬8:31). 그래서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 로마서 8장 32절 하반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을 하였는데 여기서 “우리”란 어떠한 사람이었습니까? 성경 로마서 5장 6, 8, 10절에서 3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우리는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경 로마서 5장 6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우리는 연약해서 구원 받음에 있어서, 천국감에 있어서, 주님과 함께 하늘에 보좌에 앉음에 있어서 조금도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고 지금도 없습니다. 결코 구원이란 믿음(은혜) 더하기 행위(선행)이 아닙니다. 이 영광스러운 구원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하지 않은 연약한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입니다. (2) 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 성경 로마서 5장 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이지 우리가 의로울 때 그리하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의(righteousness)는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타락(totally depraved)한 죄인으로서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어떠한 공로를 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시므로 하나님의 의(the righteousness of God)가 우리에게 전가(imputed)된 것입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 성경 로마서 5장 10절을 보십시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사 죽게 하시므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원수 되었던 관계를 우리의 노력이나 행위(선행)으로 화목케 될 수가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 원수 된 관계는 하나님께서만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그 해결의 방법은 독생자를 십자가에 화목제물로 죽게 하시므로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뭔가를 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라면 우리는 결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구원의 확신이 없는 이유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노력해야 하고 선을 행해야 하고 등등 우리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구원을 하시기에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사랑하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결정하시고 계획하시사 그 구원의 5단계를 이루어 나아가시니까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을 개역개정판(1998년)으로 보면 그냥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번역을 했지만 개역한글판(1956년)을 보면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변역을 했습니다. 즉, 다른 점은 “은사로”라는 단어가 개역한글판에는 있지만 개역개정판에는 없습니다. 원어 헬라어를 보면 ‘xarizomai’라는 단어로서 한국어로는 ‘은사로 주지’라는 의미입니다. 즉, 원어 헬라어의 번역을 개역한글판이 “은사로”라고 제대로 번역을 한 것입니다. 이 “은사로”라는 헬라어 단어를 우리는 로마서 6장 23절에서 또 볼 수가 있습니다: “… 하나님의 은사(헬라어로 ‘xarisma’)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성경 에베소서 2장 4-5, 8-9절을 보십시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이 말씀들이 우리에게 주는 매우 중요한 교훈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엡2:5, 8)요 은사(롬6:23; 8:32)이지 결코 우리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엡2:8)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도 아닙니다(9절).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8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세전에 사랑하사 택하셔서 우리를 부르시고 의롭다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이 구원의 5단계, 즉 하나님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이지 우리의 공로가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말씀의 능력, 즉 복음의 능력이 우리 안에 역사하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지 우리의 행위가 결코 아닙니다(엡 2:8, 9).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기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의 구원의 위하여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주셨습니다. 이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롬8:32).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요3:16)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셨는데 어찌 하나님께서 은사로(롬8:32) 우리를 구원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를 창세전부터 사랑하시고 택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의롭다하시며 영화롭게 하시는 이 구원의 역사를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자 주님의 일을 더욱 힘쓰는 자들이 돼야 합니다(고전15:5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