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2)

 

 

 

[로마서 831-34]

 

 

성경 로마서 8장 32절을 보십시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여기서 “자기 아들”이란 하나님의 독생자, 성자 하나님을 말씀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고, 독생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본 8가지 환상 중에 첫 번째 환상이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 세계에 오시는 것이었습니다(슥1:8). 그가 본 환상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서 계신 모습이었습니다[독생자가 서 계시다는 말씀이 3번이나 나옴(8, 10, 11절)]. 주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모습인데(막16:19; 눅22:69; 골3:1; 히1:3; 10:12; 12:2) 스데반은 순교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행7:55).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스데반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으니까 서 계셔서 도와주신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어려움을 당하는 성도들을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기에 우리를 대적하는 사탄과 그의 졸개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 로마서 8장 32절 상반절을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성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이 아닌 다른 사람을 내어주신 일이 나옵니다(내 자식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자식을 내어주는 일이기에 아깝지가 않을 것임). 성경 이사야 43장 3절을 보십시오: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현대인의 성경)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이며 너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거룩한 자이다. 내가 너를 자유롭게 하려고 이집트와 이디오피아와 스바를 네 몸값으로 내어주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심에 있어서 애굽과 구스(이디오피아)와 스바(넓은 의미로 구스와 같은 지역을 말함)을 이스라엘의 속량물로 내어주셨습니다. 여기서 “속량물”이란 구원 받을 자의 생명을 대신하여 내어주는 보상물 같은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홍해 바다에서 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심에 있어서 애굽인들을 대신하여 홍해 바다에 수장하므로(전멸시키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성경 이사야 43장 4절을 보십시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현대인의 성경) “내가 너를 소중하고 귀한 존재로 여겨 너를 사랑하고 있으니 내가 다른 민족을 희생시켜서라도 네 생명을 구하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대신 사람들(애굽인들, 구스와 스바 사람들)을 내어 주시시므로(그들을 희생시키시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명을 구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배롭고 존귀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부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아끼셨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사랑하시고 아끼셨는지 알 수 있냐면 성부 하나님께서 어느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말씀을 오직 독생자 예수님에게 하신 말씀을 보면 좀 알 수가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3:17);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17:5).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을 향하여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을 하셨을 정도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시고 아끼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로마서 8장 32절을 보면 성경은 성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 이들이신 독생자 성자 예수님을 아끼지 아니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여기서 “아끼지 아니하시고”란 말씀의 뜻은 ‘내주다,’ ‘넘겨주다,’ ‘포기하여 버리다’는 의미로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성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피 흘려 죽는데 내 주셨다/넘겨주셨다/포기하여 버리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위하시므로(31절)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매우 아끼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피 흘려 죽는데 내 주시되 지체함이 없이, 머뭇머뭇 거리지 않으시고 내 주셨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을 받으시므로 (forsaken by God)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forgiven by God).

 

구약 성경 창세기 2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하나님의 시험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는 것이었습니다(창22:1-2). 그 때 아브라함은 머뭇머뭇 거리지 않고 즉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3-10절). 만일 그 때 아브라함이 머뭇머뭇 거렸던지 또는 아내 사라하고 의논하였던지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 순종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실제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르러 그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고 했었습니다(9-10절). 그 때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아브라함을 불러 이삭을 잡는 일을 멈추게 하였습니다(11절).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12절).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이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약속의 씨)(롬9:8)인 줄 알았으면서도, 그리고 그 아들 이삭을 통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바 하늘의 셀 수 없는 뭇별처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5)는 말씀을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믿었는데도 불구하고(롬4:18,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창22:2) 그를 아끼지 아니하고(12절)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고 했었습니다(10절).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대적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려고 했었습니다. 그 대적자들 중에는 유대인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성경 마가복음 14장 1-2절을 보십시오: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민란이 일어날까봐 유월절 명절에는 예수님을 잡아 죽이지 말자고 하고 미뤘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백성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눅22:1-2). 성경 누가복음 22장 3-5절을 보십시오: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매 그들이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그런데 사탄이 가룟 유다를 시켜서 종교 지도자들에게 가서 돈을 받고 예수님을 넘겨주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유월절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였습니다. 또 다른 대적자들은 바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환호하였습니다(마21:9). 그들은 그 때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려고 하지 않았었습니다.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도 대적자였습니다. 그도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이유는 빌라도가 직접 예수님을 심문했는데 예수님에게 죽을죄를 3번이나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눅23:22). 또한 빌라도는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을 알고(막15:10) 죄 없으신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그는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6절)를 사용하여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했는데 (사람의 동정심을 이용해서라도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했는데)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므로(11절) 그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를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습니다(15절). 성경 누가복음 23장 23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의 아내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 마태복음 27장 19절을 보십시오: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 속에서 자기 졸개들을 사용하여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결코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예수님을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 요한복음 10장 17-18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으시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신데 어떻게 사탄이 예수님을 죽일 수가 있었겠습니까? 결코 없습니다. 사탄이 아무리 총력을 다해서 공격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허락이 되었고 하나님의 한도 안에서만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한도란 바로 창세기 3장 15절(원복음)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며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사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한도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탄의 공격의 결과는 바로 요한복음 19장 30절입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부 하나님의 뜻인 창세기 3장 15절 말씀을 다 이루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므로 구원의 역사를 다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의 일에 대하여 이정도로 이렇게 우리를 위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롬8:31). 그 대적자의 공격도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이루는데 도구로 쓰임을 받은 것입니다. 성경 사도행전 2장 23절을 보십시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현대인의 성경) “이 예수님은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정하신 계획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졌는데 여러분이 악한 사람들의 손을 빌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거기에 따라서 독생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 주신바 된 것입니다. 이렇게 허물과 죄로 죽었던(엡2:1)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량물로 십자가에 내어주신바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확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결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돼야 합니다(고전15:57-58).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 설 때에 주님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칭찬을 받길 기원합니다(마2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