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법인 율법 (2)

 

 

 

[로마서 724-25]

 

 

로마서 7장은 매우 어려운 장중에 한 장입니다. 그 이유는 로마서 7장이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 이야기인지 아니면 그가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이야기인지 논란이 많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로마서 7장은 바울이 예수님을 믿은 후의 이야기로 믿습니다. 그러면 로마서 7장의 바울은 초신자였을까 아니면 믿음이 성장한 자였을까요? 성경 고린도후서 3장 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현대인의 성경) “아직도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처럼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시기와 다툼이 있는데 어찌 육적인 세상 사람들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들 가운데 “육신에 속한 자”에게 이 말씀을 했는데 여기서 “육신에 속한 자”는 고린도 교회 초신자들을 가리킵니다. 성경 로마서 7장의 사도 바울은 초신자라기 보다 믿음이 성장한 선교사로서 제 2 선교 여생을 떠나 고린도에서 3년 동안 있었을 때 로마서 편지를 썼습니다.

 

성경 로마서 7장 25절을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했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여기서 사도 바울이 즐거워했던 “하나님의 법”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가리킵니다. 율법에는 세 가지 용도가 있습니다: (1) 율법은 죄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성경 로마서 7장 7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현대인의 성경) “그러면 율법이 죄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이 없었다면 내가 죄를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일 율법이 '탐내지 말아라.' 하고 말하지 않았다면 탐욕이 무엇인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2) 율법은 몽학선생의 역할을 합니다. 즉,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합니다. 성경 갈라디아서 3장 24절을 보십시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가정교사 구실을 하여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3) 율법은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생활 규범의 역할을 합니다[칼빈의 율법의 용도 3가지: (1) 정치적 용법: 죄의 억제(방지), 강제적인 작용, (2) 교육적 용법: 거울과 같은 용법, 인간의 죄인 됨을 고소, (3) 교훈적 용법: 가이드, 램프와 같은 역할, 성화로의 길잡이(인터넷)].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율법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율법의 완성인 예수님의 이중계명인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와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22:37, 39)를 순종하기를 즐거워해야 합니다[(롬13:10하) “…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사도 바울은 율법을 즐거워했지만(롬7:22) 자기 지체 속에서 죄의 법이 마음의 법인 하나님의 법과 싸워 죄의 법으로 자신을 사로잡는 것을 보았습니다(23절). 다시 말하면, 죄의 법이 사도 바울을 공격하였기에 그는 죄의 법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죄의 법이 자기를 사로잡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법인 예수님의 이중계명을 순종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이웃을 사랑하길 원했지만 죄의 법의 공격이 너무 심해서 자기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탄식을 했습니다(24절). 여기서 “곤고한 사람”이란 고통스러운 사람, 비참한 사람 또는 참혹한 사람을 말합니다. 바울은 자기 안에 있는 죄의 법이 하나님의 법과 싸워 자기를 아직도 죄의 종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는 탄식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 종이 되니 그 결과는 사망이었기에, 바울은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탄식을 한 것입니다(24절). 바울은 자기 자신 스스로 그 사망의 몸에서 건질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자기를 그 사망의 몸에서 건져낼 수가 없음을 알았기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비명/탄식을 했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우리 자신을 뒤돌아 볼 때 이러한 탄식의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경건한 시간은 언제입니까? 새벽입니까? 밤중입니까? 하나님과 독대할 때입니까? 기도할 때입니까? 예배를 드릴 때입니까? 찬양을 드릴 때입니까? 과연 그 때에 우리가 흠도 없는 경건한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까? 우리는 수 없이 실패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는 할 수 (별수) 없구나’라는 고백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엘리야 선지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아합 왕에게 가서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고 담대히 말했고(왕상17:1) 제 삼년에 자기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에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는 말씀(18:1)에 순종하여 아합 왕에게 갔습니다(2, 17절). 그리고 엘리야 선지자는 갈멜산에서 이세벨 상에서 먹는 바울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19절), 도합 850명과 대결하여 승리했습니다(21-38절). 그리고 엘리야는 그 선지자들을 기손 시내로 끌고 가서 모조리 죽였습니다(40절). 그러자 이세벨 왕후가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더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고 말했습니다(19:2). 그래서 엘리야는 두려워서 브엘세바까지 도망을 갔고(3절), 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하나님께 죽기를 간구했습니다(4절). 이 엘리야 선지자의 모습이 로마서 7장 24절의 사도 바울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구원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스스로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낼 수가 없었고 또한 어느 누구도 그를 그 사망의 몸에서 건져낼 수가 없었기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비명/탄식을 했었지만 그러나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25절).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바울을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창세가 3장 15절의 말씀대로 십자가에서 옛 뱀인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셨습니다. 사탄과 싸워 승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시므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 경배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감사로 승리의 개가를 부르면서 이 악한 세상에서 승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