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 5장 12-21절]
성경 로마서 5장 20-21절을 보십시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먼저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20절)는 말씀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 주신 율법은 왜 들어왔습니까? 그 이유는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입니다. 여기서 ‘범죄가 더하다’는 말씀은 죄가 아주 많다, 죄가 매우 가득하다, 죄가 팽팽하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풍선에 바람이 가득차면 터질듯이 팽팽하듯이 죄가 팽팽하다는 말입니다. 율법이 들어온 이유가 범죄를 더하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씀의 의미는 율법이 들어온 것이 죄를 더 짓게 하든지 죄를 부풀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범죄를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라는 말입니다[(롬3:20)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예를 들어, 캄캄하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없는 아닙니다. 그러나 빛이 비취면 큰 물체부터해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빛이 밝으면 밝을수록 작은 물체까지도 보이되 심지어 먼지까지도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이 들어온 것은 죄가 있었는데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죄를 몰랐다가 율법으로 인해 죄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부지런히 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알아가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5장 21-22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십시오: “모세의 법에는 '살인하지 말아라. 살인하면 누구든지 재판을 받게 된다.'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형제에게 이유 없이 화내는 사람은 재판을 받고, 자기 형제를 어리석다고 욕하는 사람은 법정에 끌려가게 될 것이며 '이 미련한 놈아!' 하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에 들어갈 것이다.” 우리가 이 성경 말씀을 알아 가면 알아갈 수록 모세의 법에는 “살인하지 말아라. 살인하면 누구든지 재판을 받게 된다”고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형제에게 이유 없이 화내는 사람은 재판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형제, 자매에게 화내는 것, 재판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알아가는 우리는 형제, 자매에게 화를 내는 것이 재판을 받을 정도의 큰 죄임을 깨닫고 화를 내지 않고 절제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27-28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십시오: “또 율법에는 '간음하지 말아라.' 고 쓰여 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정욕의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는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그녀와 간음하였다.” 우리가 이 성경 말씀을 알아 가면 알아갈 수록 모세의 율법에는 “간음하지 말아라”고 쓰여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정욕의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는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그녀와 간음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에 우리 자신을 비춰볼 때 정욕의 눈으로 다른 이성을 바라보는 것은 이미 마음으로 그/녀와 간음했다는 죄를 깨닫고 정욕의 눈으로 바라보지 말고 주님 안에서 형제/자매로 바라보므로 간음의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성경 말씀은 죄를 알려주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알아가므로 죄를 짓지 않고자 결심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 빠지자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몰라서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말씀 충만해야 합니다.
성경 로마서 5장 20절 하반절에서 21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 “죄가 더한 곳”, 즉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을 만큼 죄가 가득 찼을 때 이 힘이 센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했습니다(사망 밖에서는 왕 노릇을 못함). 성경 창세기 6장 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현대인의 성경)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땅에 가득한 것과 그 마음의 생각이 항상 악한 것을 보시고”]. 결국 하나님께서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죄로 인해 다 죽었습니다(육체적 죽음). 그런데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므로 홍수 때 죽지 않았습니다(8절). 그의 경우에는 육체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습니다. 다시 말하면,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을 만큼 죄가 가득 찼을 때 은혜는 한이 없이 더욱 넘치되 놀랍도록 풍성하게 넘쳤다는 말입니다[(요1:16) “… 은혜 위에 은혜러라”]. 이 “은혜”는 무엇입니까? 성경 로마서 5장 16절을 보십시오: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로 많은 죄인들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많은 범죄”란 죄인들인 우리 모두의 원죄, 과거의 죄, 현재 짓고 있는 죄, 미래에 지을 죄를 다 포함합니다. 이 모든 우리의 죄 하나하나를 대신하여 뿐만 아니라 그 죄 하나하나의 대가(형벌)을 예수님께서 다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른 것입니다(18절). 이 얼마나 넘치고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우리는 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말로다 형용 못하며 하늘을 두루 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다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참고: 새 찬송가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성경 로마서 5장 21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이 은혜가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한다는 말씀에서 “의”란 그리스도의 무궁한 의를 말합니다(박윤선). 믿음으로 무궁한 의를 소유한 신자는 은혜의 왕권 아래 있어서 영생합니다(박윤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한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으니(18절) 이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무궁합니까. 새 찬송가 302장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입니다: (1절)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저 큰 바다 보다 깊다 너 곧 닻줄을 끌러 깊은 데로 저 한가운데 가보라, (2절) 왜 너 인생은 언제나 거기서 저 큰 바다 물결보고 그 밑 모르는 깊은 바다 속을 한번 헤아려 안보나, (3절) 많은 사람이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 찰싹 거리는 작은 파도보고 마음 약하여 못가네, (4절) 자 곧 가거라 이제 곧 가거라 거 큰 은혜 바다 향해 자 곧 네 노를 저어 깊은 데로 가라 망망한 바다로 (후렴)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띄어 내 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저어가라.“ 성경 로마서 5장 21절 하반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영생”이란 무엇입니까? 여기서 “영생”은 요한복음 3장 16절의 영생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은 영생으로서 이것은 육체의 구원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우리가 영화롭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8:30). 한 마디로, 영원한 생명은 구원을 말합니다. 영생은 미래에 될 일이지만 의심할 것 없는 100% 확실한 미래의 현실입니다. 그리고 그 미래의 현실은 예수님을 믿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러(5:18) 다 천국에 들어갈 것입니다. 이것은 미래의 구원으로서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천국에 들어가 영생복락을 누릴 것을 말합니다. 영생은 또한 과거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어 이미 영생을 얻었다는 말입니다(요3:16)(과거 구원). 영생이란 중생(거듭남)으로 부터 시작해서 날마다 전진하여 마침내 완성의 단계에 이를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중생의 증거요, 중생이란 육체가 다시 사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새로워져서(새 창조가 되어서) 중생하기 전에는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되었었지만 중생한 후로부터는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할 때 영생을 그저 내세의 영원한 생명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생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현재에도 우리가 부분적으로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생”이란 단어가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곳은 요한복음입니다. 헬라어로 "영생"은 "조에(life) 아이오니오스(eternal)"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조에"(생명)라는 말과 "아이오니오스"(영원한)라는 말이 합쳐진 말입니다. 즉, "영생"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인터넷). 이것은 첫째로 시간적으로 "끝없이 지속되는 생명"을 의미하고, 둘째로 질적으로 "인간의 삶과는 다른 신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영생이란 말에는 시간적으로 영원한 삶이란 의미와, 하나님 안에서 누리게 되는 신적인 삶이란 의미를 둘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을 보면 "영생"의 의미는 공관복음처럼 내세에서 누릴 영원한 축복도 의미하지만 그보다 현재에 누리는 축복을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주님을 믿는 자는 이미 영원한 생명을 가졌으며, 그 축복을 주님 안에서 현실 속에서도 누릴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과연 현재에 우리가 누리는 영생의 축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원하신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을 통하여 친밀한 인격적인 교제를(요17:3) 나누는 가운데 주시는 내세의 축복들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하나님의 신적 성품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현재 이 땅에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분적으로 누리는 영생의 축복은 바로 성령님의 성화 가운데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현재 부분적으로 누리는 영생의 축복은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된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갈 때에 우리는 천국의 기쁨을 부분적으로나마 맛보는 것입니다. 또한 영생의 축복은 평안입니다. 비록 평화가 없는 세상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부분적으로나마 영생의 축복인 하나님의 평강을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새찬송가 436장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입니다:
(1절)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것은 지나고 새 사람이로다
그 생명 내 맘에 강같이 흐르고 그 사람 내게서 해같이 빛난다
(2절) 주 안에 감추인 새 생명 얻으니 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값없다
하늘의 은혜와 평화를 맛보니 찬송과 기도로 주 함께 살리라
(3절) 산천도 초목도 새 것이 되었고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한다
새 생명 얻은 자 영생을 누리니 주님을 모신 맘 새 하늘이로다
(4절) 주 따라 가는 길 험하고 멀어도 찬송을 부르며 뒤따라가리라
나 주를 모시고 영원히 살리라 난마다 섬기며 주 함께 살리라
(후렴) 영생을 누리며 주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아무리 이 땅에 어려운 일이 많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중생(거듭난)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면서 살 수가 있습니다. 더욱 넘치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며 기뻐하며 찬양하며 천국의 삶을 이 땅에서도 부분적으로 누리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