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신 예수님 (3)

 

 

 

[누가복음 241-12]

 

 

우리가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해 두 번 묵상을 했습니다[요한복음 20장 1-10절 말씀 중심으로 “부활하신 예수님 (1)”, 마태복음 28장 1-15절 말씀 중심으로 “부활하신 예수님 (2)”]. 오늘은 누가복음 24장 1-12절 말씀 중심으로 “부활하신 예수님 (3)”이란 제목 아래 세 번째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24장 1-2절을 보면 성경은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안식 후 첫날”은 “안식”일이 토요일이 지난 첫날인 일요일, 즉 주일을 말합니다. 또한 여기서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입니다(10절). 이 여인들이 주일 새벽에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의 무덤에 갔었을 때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았습니다. 마태복음 28장 2절을 보면 좀 더 자세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예수님의 무덤을 막고 있었던 돌을 굴려 내었기에(28절)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이 여자들”이 본 것입니다(눅24:1-2). 왜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이 돌을 무덤에서 옮겨 놓은 것일까요? 그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무덤에서 나오시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부활하사 영광스러운 몸을 입으신 예수님께서는 돌이 무덤을 막고 있다 할지라도 충분히 그 무덤에서 나오실 수가 있으십니다. 한 예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다음 날인 일요일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인 지도자들이 무서워 “문들을 걸어 잠그고” 모여 있었을 때에 갑자기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 가운데 서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20:19, 현대인의 성경).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예수님의 무덤을 막고 있었던 돌을 옮겨 놓은 이유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다시 살아나신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은 “부활”이 아니라 ‘소생’입니다. 그 이유는 그의 다시 살아난 몸은 영광스럽지 못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에 가셔서 굴 무덤을 막은 “돌을 옮겨 놓으라”(요11:38-40)고 말씀하신 이유는 돌을 옮겨놓아야 죽은 나사로를 예수님이 다시 살리셨을 때 그 동굴 무덤에서 나올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고 부르셨습니다(41-42절). 그러자 죽었던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무덤에서 나왔습니다(44절).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는 나사로와 같지 않습니다.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무덤을 막고 있었던 돌을 옮겨놓은 이유는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무덤에서 나올 수 있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여자들”은(눅24:1, 10)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돌을 무덤에서 굴려 내었기에(마28:2) 그녀들은 그 돌이 옮겨진 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덤에 들어갔습니다(눅24:2-3). “이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들어가 보았으나 예수님의 시체가 보이지 않으므로 “근심”했습니다(4절). 그녀들은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의 무덤에 가서(1절) 예수님의 시신에다가 그 준비한 향품을 부으려고 했는데 예수님의 시체가 보이지 않으므로 근심을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근심하다’란 단어는 원어 헬라어를 보면 ‘당황하다’ 또는 ‘당혹스럽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현대인의 성경은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4절)를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당황하고 있는데”라고 번역했습니다. 그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들어가 예수님의 시체가 없음을 보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분명히 그녀들은 예수님의 시체가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모셔 둔 것을 보았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3장 55절 말씀입니다: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그래서 그녀들은 집으로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였던 것입니다(56절,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안식 후 첫날 새벽에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의 무덤에 와서(24:1)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들어가 보았으나 주 예수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니까(2-3절)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당황했던 것입니다(4절, 현대인의 성경). 그녀들이 당황하고 있었을 때 “두 사람”, 즉 두 천사들이 찬란한 옷을 입고 그녀들 곁에 섰습니다(4절). 그러자 그 여자들은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었습니다(5절). 성경을 보면 천사를 보고 두려워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바로 세례 요한의 아버지인 사가랴입니다. 그는 자기 반의 차례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 대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려고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고 있었을 때 주님의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 향단 오른쪽에 섰습니다. 그 때 사가랴는 천사를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였습니다(1:8-12, 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대제사장인 사가랴도 천사를 보고 무서워했는데 예수님의 무덤에서 두 천사들을 본 여자들이 무서워했던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24:4-5). 그 때 천사들이 그녀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5-6절). 여기서 “기억하라”는 천사들의 말은 예수님께서 살아계셨을 때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살아계셨을 때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6장 21절과 17장 23절과 20장 19절 말씀입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마16:21),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17:23),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20:19).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세 번이나 자신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신 후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천사들은 이 예수님의 말씀을 그 여자들에게 기억하라고 말한 것입니다(눅24:6).

 

예수님께서는 나의 죄, 우리의 죄를 걸머지시고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의 형벌, 지옥의 형벌에서 건져주시고자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즉,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복음은 “그의 아들”, 즉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롬1:2).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고 우리가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습니다(4:25).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 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실 수 있는 길(칭의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에 온 여자들(눅24:1, 10)은 천사들의 말인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6절)는 말씀대로 예수님의 세 번 말씀(마16:21; 17:23; 20:19)을 기억했습니다[(눅24:8) “그(녀)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다시 말하면, 그녀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말씀을 기억한 것입니다. 즉, 그녀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기억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복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즉,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자 십자가에 죽으심과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자 부활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녀들은 기억하고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렸는데(눅24:9) 그녀들의 말을 들은 사도들은 그녀들의 말을 허튼 소리 같아서 믿지 않았습니다(11절,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베드로는 일어나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가 허리를 굽혀 무덤 안을 들여야 보았습니다. 그가 본 것은 세마포였습니다. 베드로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12절, 현대인의 성경). 요한복음 20장을 보면 좀 더 자세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의 무덤에 들어가서 세마포와 머리를 쌌던 수건을 보았고 무덤에 먼저 갔던 사도 요한도 들어가 보고 믿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요20:3-8). 이렇게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무덤 안에서 세마포와 예수님의 머리를 쌌던 수건을 보고 믿었지만[그들은 예수님께서 살아계셨을 때 하신 말씀들을 기억하고 믿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냐면 요한복음 20장 9절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예수님의 무덤에 온 그 여자들은 천사들의 말처럼 예수님께서 살아계셨을 때 하신 세 번의 말씀들(마16:21; 17:23; 20:19)을 기억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우리는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처럼 증거들(evidences)을 보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보다 이 여인들처럼 예수님의 말씀(복음)을 기억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도마처럼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하면 안 됩니다(요20:25).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돼야 합니다. 요한복음 20장 29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그리고 우리도 이 여인들처럼 예수님의 부활의 감격을 가지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