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서 하신 일곱 말씀 (3)

 

 

 

 

[요한복음 1925-27]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세 번째 말씀입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19:26-27).

 

오늘 본문 요한복음 19장 25-27절 말씀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이 말씀을 보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4명의 여자들과 한 명의 남자가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먼저 4명의 여자들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그 어머니”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말씀합니다. (2) “이모”는 예수님의 어머님인 마리아의 동생으로서 예수님의 12제자들 중 야고보와 요한의 아버지인 세베대의 아내(마27:56) “살로메”입니다(막15:40).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마태복음 27장 56절과 마가복음 15장 4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사람들을 비교하면 됩니다: (마27:56) 막달라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 (막15:40) 막달라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 (3)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요19:25)란 여인은 누구인지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2-4절과 마가복음 3장 1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12명의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에서 알패오의 아들들이 글로바의 아들들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즉, 이름 “글로바”와 “알패오”가 동일한 인물이라는 설입니다. 사복음서들을 대조하여보면 작은 야고보와 요세가 글로바의 아들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데, 또 작은 야고보를 알패오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글로바의 다른 이름이 알패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인터넷). (4) “막달라 마리아”란 여인은 막달라 라는 지방에 사는 마리아로서 일곱 귀신이 들려서 고생을 많이 하다가 예수님께서 고쳐주셔서 예수님을 섬겼던 여인입니다. 누가복음 8장 2절을 보십시오: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이 4명의 여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 곁에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요19:25). 실제로 그녀들은 처음에는 멀리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막15:40). 이렇게 처음에는 멀리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던 이 4명의 여인들이 예수님께서 골고다에 가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그 많은 군중을 다 헤치고 지나서 예수님의 십자가 곁까지 가기까지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요한복음 19장 25-27절에 나오는 한 명의 남자는 누구일까요? 이 한 명의 남자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19:26)[여기서 “제자”란 단어는 단수임]. 예수님께서 12명의 제자들 중에 특별히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사랑하셔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따라오지 못하게 하셨고(막5:37),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셔서 변형되셨을 때에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가셨으며(마17:1-2), 또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을 때에도 8명의 제자들은 동산 입구에 두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데리시고 동산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막14:33). 이 3명의 제자들 중 오늘 본문 요한복음 19장 2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요한”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사도 야고보는 이미 헤롯에게 죽임을 당했으므로(행12: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요19:27) 말씀하셔서 야고보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부양할 수가 없었고, 사도 베드로도 아닌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냐면 예수님께서 유월절 전에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셔서(요13:1)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시면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21절)고도 말씀하셨는데 그 때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워있었을 때 누구를 가리켜 하신 말씀인지 물어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23-24절). 그러면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어디에 있었을까요? 성경을 보면 베드로는 오늘 본문 요한복음 19장 25절에 나오는 4명의 여인들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있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녀들처럼 멀리서라도 예수님을 바라보았다(막15:40)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 말은 사도 베드로는 아예 거기에 있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후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심히 통곡하였던 베드로는 진정으로 회개했다면 예수님을 더욱더 가까이서 따라야 했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어떻습니까? 과연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서 있나요? 아니면 적어도 예수님을 멀리서라도 바라보고 있어야 하지 않나요? 우리도 오늘 본문 요한복음 19장 25-26절 나오는 4명의 여인들과 한 명의 남자인 요한처럼 예수님을 가까이 따라가서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19장 26-27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박윤선 박사님은 여기서 3가지 뜻을 생각했습니다(박윤선): (1) “예수님은 그 최후까지 하나님에게 순종하심에 이어서도 인륜을 잊지 않으셨다. 그는 어머니에게 대하여 하실 바 책임을 다하셨다. 그는, 모친 부양의 책임을 그의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에게 맡기셨다. (2) 그(예수님)는 자기 어머니를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맡기신 것은 영적 사명을 위한 것이다. 그것은, 자연에 속한 것들이 모두 다 영에 속한 것을 위하여 수종들어야 할 것을 가르치시는 중대한 교훈이다. (3) 예수님은 혈육보다 영적 가족을 더 귀히 여기셨다. 그래서 그가 자기 어머니를 동생들보다 사도 요한에게 맡기셨다. 영통은 영원한 것이며 하나님 중심한 것이니 만큼, 그것을 위주 할수록 하나님이 가까워진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4명의 여인들인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 예수님의 이모인 살로메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와 한 명의 남자인 사도 요한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0장 28절의 말씀처럼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고 오셔서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려고(많은 사람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 보혈을 흘려 죽으셨습니다. 로마서 8장 35-37절 말씀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끊을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도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 예수님의 이모인 살로메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와 사도 요한처럼 끝까지 예수님의 곁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죽음)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 영광의 옷 입고 문 열어 주실 때 우리 주님 나라에 들어가 영원히 살아야 합니다(새 찬송가 87장 “내 주님 입으신 그 옷은” 4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