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고다 도상의 예수님 (2)
[누가복음 23장 26-32절]
지난 주 수요기도회 때 “골고다 도상의 예수님 (1)”이란 제목 아래 골고다 도상에 있었던 일 중에 첫 번째 일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일에 대해 묵상을 했었습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23장 26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구레네 시몬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로만 군인이 징집되어 가지고 붙들려서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간 것입니다. 이 십자가는 가로로 된 막대기와 세로로 된 막대기(나무)인데 여기에는 2가지 설이 있습니다. 세로로 된 십자가는 형장에 세워져 있었고, 가로된 막대기(십자가)를 지고 갔는데 그 무게가 20kg로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골고다까지는 험악한 언덕길이었지만 그래도 30대 청년 같으면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께서는 다른 죄수들과 같이 십자가 처형을 받는 자로서 채찍을 많이 맞으셨지만 그 외에도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 들어가셔서 진액을 다 쏟는 기도를 드리시고 또 밤새 안나스, 가야바, 산헤드린 공회라든가, 또한 빌라도 법정에서 심문을 당하시고 재판을 받으시느라고 다른 죄수들과 달리 많은 어려움을 당하셨기 때문에 힘이 부족해서 골고다 형장까지 가지 못 갈 것 같으니까 로마 군인들이 구레네 시몬을 붙잡아 가지고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따라오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골고다로 가시면서 뒤따라오는 백성과 특별히 여자들에게 하신 누가복음 23장 28-31절 말씀 외에는 한 마디로 하지 않으시고 골고다 형장까지 가시고 또 십자가에 못 박히셨어도 3시간 동안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그 고통을 다 참아내시고, 3시간 동안 캄캄한 가운데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을 받으시는 고통을 다 당하셨습니다. 그러신 예수님이 과연 심문을 받으셨던 빌라도 법정에서 골고다 형장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실 힘이 없으셨을까요? 많은 사람이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고 가면 믿게 되고 가정이 다 구원을 받느냐는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억지로라도 하라고 말하기보다 기도하는 중에 감사하며 기쁜 마음으로 하라고 권면을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억지로 하지 말고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면서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달게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골고다 도상에 있었던 일 중에 두 번째 일인 예수님을 뒤따라왔던 사람들에게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23장 27절 말씀입니다: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여기에 나오는 여자의 큰 무리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딸들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28절). 예수님을 따르는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8장 1-3절 말씀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이 여자들은 제자들(주로 갈릴리 출신들이었음)과 같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자기들의 소유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누가복음 23장 27절에 나오는 골고다 형장으로 가시는 예수님을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들은 누가복음 8장 1-3절의 나오는 여자들이 아닌 다른 여자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누가복음 23장 27절에 나오는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면서 예수님을 따라갔던 여자들의 눈물이 고통을 당하시는 예수님께 위로가 되었을까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 질문의 대답은 그 여인들이 흘린 눈물을 예수님에게는 위로나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여인들은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렇게 십자가를 지신 것인데 예수님 자신의 죄로 인해 십자가를 지신 것으로 알고 있다면 그것이 무슨 위로가 되겠습니까.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어는 목사님은 이것은 유대 장례 풍습이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여자들도 습관적으로 눈물을 흘렸을 것이라고 합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여인들의 눈물이 예수님께 위로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23장 28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를 뒤따라오는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녀들에게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그리 말씀하신 것입니까? 29절 말씀입니다: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여자가 잉태하지 못하는 것이 복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무슨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여자들이 잉태하지 못하게 되면 그것은 복을 받지 못한 것이요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잉태하지 못하는 여자와 잉태를 못하니까 해산하지 못하는 배와 아기를 해산하지 못했으니까 아기를 먹이지 못하는 젖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과연 그것이 복입니까? 그런데 그런 날이 온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30절 말씀입니다: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여기서 “그 때”란 29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 “날”입니다. 누가복음 19장 41-44절 말씀입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어째서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23장 29절에서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그 이유는 누가복음 19장 41-44절의 재난/화/멸망이 오기 때문에 그러한 때에는 자녀가 없는 것, 식구들이 적은 것이 더 복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면서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셨기에 우셨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악하고 또한 악을 많이 행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시고 약 40년이 지난 후 누가복음 19장 43-44절 말씀이 성취가 되었습니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여기서 “네 원수들”은 로마 군을 말하고 “토둔”이란 예루살렘은 사방에 둘러싼 높은 벼랑 위에 서있는 천연의 요새입니다. 이 요새는 이중삼중으로 겹쳐진 성벽 곳곳에 높은 탑과 튼튼한 돌 벽으로 둘러싸인 성채가 우뚝 솟아 있으며, 예루살렘 성전도 이중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기에(인터넷) 로마 군인들이 도저히 쳐들어 올 수가 없었기에 그들은 “토둔”[(현대인의 성경) “둑을 쌓고”]을 쌓았습니다. 즉, 그들은 작은 언덕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루살렘을 사면으로 가두었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 성안에서는 사람들이 식량이 다 떨어져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굶어 죽기도 하고 심지어는 자녀를 잡아먹기까지 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오늘 본문 누가복음 23장 30절 말씀입니다: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그 때에 예루살렘 안에 있는 사람들, 즉 유대인들은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자살할 수가 없었기에(자살하면 지옥에 가니까) 차라리 산이 무너져 가지고 자기들을 덮어서 깔려 죽기를 원할 정도였습니다. 31절 말씀입니다: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여기서 “푸른 나무”는 의로우신 예수님을 상징하고 “마른 나무”는 예수님을 따라 오던 사람들과 같은 예루살렘 안에 있는 유대인들은 악인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심문하고 재판했던 로마 총독 빌라도도 예수님이 죄가 없는 줄을 알았기에 예수님을 그렇게 놓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줬습니다. 이렇게 “푸른 나무”이신 의로우신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는데 로마 사람들이 볼 때에 악한 “마른 나무와 같은 너희 유대인들이야 무슨 일인들 당하지 않겠느냐?”(31절, 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23장 28절에서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의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도들의 지도를 따라서 자기와 자기 자녀를 위하여 울고, 예루살렘을 위해 울었던 사람들은 이 멸망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자기와 자녀를 위해 울며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지도자에게 계시에 따라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예루살렘을 떠나 동부 요르단 지방에 있는 펠라로 불리는 베레아로 피신하여 거기의 한 도시에 정착하게 됩니다(인터넷). 그리고 나서야 로마 티투스 장군이 예루살렘에 포위하고 함락시켜 예루살렘을 초토와 시켰습니다. 그 때 예루살렘 성 안에 약 270만 정도의 사람들이 살았었다고 합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그 전쟁에서 죽은 유대인들은 110만 명이고, 포로로 잡혀간 사람이 9만 7000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유대인 저항군들은 마사다라는 곳에 있었는데 결국에는 다 죽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을 어떠합니까? 지금 우리는 오미크론이라는 바이러스로 인해 꼼짝도 못하고 있고 많은 어려움들을 겪고 있습니다. 만일 또 다른 바이러스가 온다면 더욱더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폭설과 지진과 재난 등 여러 가지 일들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인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23:28)는 말씀을 받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야 하는데 이렇게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의 주야로 묵상하지 않으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우리의 후세대들을 어떠할 것 같습니까? 더 어려워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 울며 기도하는 운동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 요한계시록을 보면 점점 더 환란이 심해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나 우리 자녀들이 더 감당하기 어려워 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자녀들을 위하여 깨어 울며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어려움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받아 주님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가 돼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