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드온과 같은 목사?
[사사기 6장 12-16절]
제가 성경 66권에서 제일 좋아하는 책은 “요나”(The Book of Jonah)입니다. 그 이유는 저는 요나라는 인물에게서 제 자신을 발견(identify)하기 때문입니다. 한 예만 들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 선지자에게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욘1:2)고 명하셨을 때 “그러나 요나는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습니다(3절). 즉,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습니다. 그는 아예 니느웨의 반대 반향인 다시스로 도망갔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예비하신 “벌레”(4:7)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께서 요나의 머리 위에 그늘을 만들어 주심으로 더위를 피하게 하시려고 예비하신 박넝쿨(6절)을 갉아먹었습니다(7절).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저는 요나처럼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되 청개구리처럼 반대로 행할 때가 너무 많기에 저는 제 자신이 벌레만도 못한 요나와 같은 목사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요나란 성경 인물에게 제 자신을 제일 많이 발견하기에 요나서 책을 제일 좋아하지만 두 번째로 제가 제 자신을 많이 발견(identify)하는 성경 인물은 바로 오늘 본문 사사기 6장 12-16절에 나오는 “기드온”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본문 말씀 중심으로 기드온에 대해서 묵상하면서 제 자신을 다시금 영적 거울인 하나님의 말씀에 비취보고자 합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저에게 주시는 교훈도 받아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주님의 종이 되길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 사사기 6장 12-16절 말씀은 하나님과 기드온과의 대화 내용입니다: (1) “여호와의 사자”(천사)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말씀하시고(12절), (2) 기드온이 여호와의 천사에게 대답하고(13절), (3)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시고(14절), (4) 기드온이 “여호와”께 대답하고(15절), (5)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십니다(16절). 저는 이 대화 내용을 하나씩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과 더불어 적용 및 제 자신에게 반영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천사는 기드온에게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12절).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히 “여호와의 천사”(12절, 현대인의 성경)는 기드온에게 “큰 용사여”[“힘쎈 용사여”(현대인의 성경)]이라고 말씀했는데 제가 보기엔 기드온은 “용사”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의 근거는 사사기 7장 9-11절입니다. 현대인의 성경 말씀입니다: “그 날 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일어나 미디안군의 진지를 공격하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넘겨 주겠다. 그러나 만일 네가 공격하는 것이 두려우면 네 부하 부라를 데리고 그 진지로 가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라. 그러면 공격할 용기가 생길 것이다' 그래서 기드온이 부라를 데리고 적군의 진지 끝으로 내려가 보니.” 이 말씀을 보면 분명히 기드온은 미디안군의 진지를 공격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잘 아시고 “네 부하 부라를 데리고 그 진지로 가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라”고 말씀하셨고, 그 말씀대로 기드온이 부라를 데리고 적군의 진지 끝으로 내려간 것을 보면 기드온은 분명히 두려워했습니다. 즉, 그는 미디안군의 진지를 공격할 용기가 처음엔 없었습니다. 나중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기 부하인 부라를 데리고 적군의 진지 끝으로 내려가서 “한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꿈꾼 이야기를 하고, 그 꿈 이야기를 들은 그 친구가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날이야. 하나님이 미디안과 우리 모든 군대를 그의 손에 넘기셨다는 뜻일세”라고 말하는 내용을 듣고 나서야(13-14절, 현대인의 성경) 기드온은 미디안군의 진지를 공격할 용기가 생겼습니다(11절, 현대인의 성경). 이 말씀을 생각할 때 저는 어떻게 하나님의 천사는 기드온에게 “큰 용사”(6:12)라고 말씀하셨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 대답을 사사기 6장 12절 하반절에서 찾게 되었습니다: “…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 즉, 하나님 보시기에 두려워하고 용기가 없는 기드온이 “큰 용사”인 이유는 진정으로 큰 용사이신 하나님께서(참고: 출15:3; 사42:13)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사사기 6장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하시니라.” 큰 용사이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드온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진실하신 하나님은 그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천사는 기드온에게 “큰 용사”라고 말씀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말씀에 제 자신을 반영해 볼 때 저 또한 기드온처럼 용기가 있기보다 두려움이 있는 사람임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비록 제가 기드온처럼 전쟁에 임해야 하는 상황에서 수많은 적군[“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 사람들이 그 골짜기에 메뚜기 떼처럼 수없이 누워있었고 그들의 낙타는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았다”(7:12, 현대인의 성경)]으로 인해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지만 삶 속에 접하는 사람들이나 특히 매우 힘들어 보이는 상황들로 인해 용기를 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않고) 두려워서 머물 머뭇거릴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겁이 많았고 배짱은 아예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오죽 했으면 저희 교회 심방 목사님 이셨던 제 삼촌 목사님은 저에게 “배짱으로 목회하라”는 책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자가 벌써 주님의 몸 된 승리장로교회에서 19년째 담임 목회를 감당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이렇게 목회를 감당할 수 있었고 지금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임마누엘 되시는 주님께서 “… 내가 … 내 교회를 세우리니 …”라는 마태복음 16장 18절의 약속의 말씀을 주셨기 때문이요 그 말씀대로 주님께서는 주님의 교회를 세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저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제일 잘 알고 계시기에 제가 주님과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지 못하고 염려하거나 두려워할 때 저에게 말씀으로 힘을 주시고 용기를 북돋아 주시므로 오늘까지 주님이 저에게 맡기신 목회나 주신 사역들을 부족하나마 묵묵히 감당케 하셨습니다. 지난 날 뿐만 아니라 지금과 앞으로도 주님께서는 저와 함께 하시사 저를 향하신 주님의 뜻을 이루실 줄 믿습니다.
둘째로, 기드온은 하나님의 천사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또 우리 조상들이 일찍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우리를 넘겨 주셨나이다”(삿6:13).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기드온이 가지고 있었던 3가지의 생각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제 자신을 반영해 보았습니다:
(1)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13절상).
기드온의 입장에선 이해가 안 되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계시면 어째서 그들이 7년 동안 “너무 잔인”한 미디안 사람들의 지배를 받으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산 속 동굴과 안전 지대로 피신해 살아야만 했으며(1-2절, 현대인의 성경), 이스라엘 사람이 씨를 심어 놓으면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 사람들이 쳐들어와 그 땅에 진을 치고 가사 지방까지 모든 농작물을 해치며 양과 소와 나귀를 모조리 약탁해 갔고 그 땅을 폐허로 만들었는지(4-5절, 현대인의 성경), 기드온은 이해가 안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 기드온이 모르고 있었던 것은 “이 모든 일”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어난 이유가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1절, 현대인의 성경). 어쩌면 그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이유는 기드온 자신도 자신의 아버지가 바알을 섬기고 있었기에(25절) 우상을 섬기는 삶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랬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우리가 아무 어려움이나 고난 등을 겪지 않고 항상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한다면, 그러한 생각은 성경적인 생각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성경 창세기 39장을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창39:2)고 말씀하고 있지만 요셉의 삶에는 고난과 역경과 심지어 형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까지 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는데 그러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성경은 그가 “형통한 자”(2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형통한 자의 삶에 그러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일까요? 이렇게 성경적인 형통관에서는 고난과 역경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이 형통의 비결이요 그 형통에는 고난과 역경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고난과 역경을 당하고 있을 때 기드온처럼 하나님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째서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습니까?’라고 질문하기보다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 이유는 어쩌면 우리가 하나님께 또 죄를 범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라고 자문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가 겪고 있는 고난과 역경을 통해 하나님께 불명하고 원망하는 죄를 범하든지 또는 ‘왜 의인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악인은 형통하고 있는지 …?’라고 생각하고 또한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질투하면서(시73:2)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고 죄를 짓지 않은 것이 허사구나”(13절, 현대인의 성경)라고 말하기 보다 우리 자신을 자아 성찰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자아 반영하면서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우리의 양심을 찌르시사(참고: 행2:37) 죄를 깨닫는 기회와 회개의 기회로 삼는 것이 더 지혜롭게 행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2) “또 우리 조상들이 일찍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현대인의 성경) “우리 조상들은 여호와께서 놀라운 기적으로 그들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셨다고 우리에게 말해 주었는데 지금 그런 기적이 어디 있습니까?”](삿6:13중).
기드온의 입장에선 과거에 출애굽 당시에 하나님께서 놀라운 기적으로 “우리 조상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애굽)에서 인도해 내신 그 기적이 더 이상 없는 게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기적이 기드온이 살고 있었던 시대에도 있었다면 왜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잔인한 미디안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7년 동안 지배를 받으면서 “이 모든 일”(13절)이 자기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어났는지 충분히 의문을 던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즉, 기드온은 “이 모든 일”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어난 이유는 하나님의 “그 모든 기적”(13절)이 더 이상 없기 때문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한 가지 주목하게 된 점은 기드온이 하나님의 천사에게 “우리 조상들은 여호와께서 놀라운 기적으로 그들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셨다고 우리에게 말해 주었는데 …”(13절중, 현대인의 성경)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는 그의 조상인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기적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문은 과연 기드온이 누구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을까 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그의 아버지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제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기드온의 아버지는 바알이란 우상을 섬기는 자였기 때문입니다(25절, 현대인의 성경). 그렇다면 그의 어머님에게 들은 것인지, 아니면 누구에게 들었는지 알 수가 없지만 분명한 것은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출애굽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하신 기적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디안 사람들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1절) 이스라엘의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놀라운 기적으로”(13절) 자기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디안 사람의 손에서 구원해 주시길 기원했었을 것입니다(참고: 14절). 그러나 어쩌면 기드온은 더 이상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하는 것을 포기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그 때 제 생각엔 하나님의 천사가 기드온에게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12절).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우리가 우리의 대적들이든 또는 우리의 원수들에게 지속적으로 극심한 괴롭힘을 당할 때 고통 속에 있는 우리에게 참으로 치명적인 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기적적인 인도하심이나 건지심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라 생각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 속에서 하나님께 계속해서 구원을 해주시길 간구하는 할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기대하기를 포기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기다리지 않고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그저 생존하고자 하루하루 살아갈 확률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것이 꼭 부정적으로만 보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오히려 그러한 현실이 우리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이고 또한 얼마나 무기력하고 무능력한지를 좀 더 절실히 깨닫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좀 더 철저히 비우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만 바라보며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간절한 기도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하나님을 소망하게 만들므로 결국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인내하며 견디게 하는 가운데 마침내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적인 구원의 사랑을 경험케 하실 것입니다.
(3)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우리를 넘겨 주셨나이다”(13절하).
기드온의 입장에선 충분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셨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미디안 손에 넘겨주셔서 7년 동안이나 잔인한 미디안 사람들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1-2절, 현대인의 성경)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7년 동안 미디안 사람들은 (아말렉 사람들과 동방 사람들도) 쳐들어와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든 농작물을 해치며 양과 소와 나귀를 모조리 약탈해 갔으므로 기드온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셨다고 생각한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우리가 우리의 대적들이든 또는 우리의 원수들에게 지속적으로 극심한 괴롭힘을 당할 때 고통 속에 있는 우리에게 더 이상 하나님의 기적적인 인도하심이나 건지심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우리에게 참으로 치명적이지만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셨다고 생각하는 것도 매우 치명적이라 생각합니다. 그러한 생각은 우리로 하여금 심지어 하나님을 배도하고, 버리며, 심지어 하나님을 떠나게까지 만들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셨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면 하나님을 배도하고, 버리며, 심지어 하나님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깨닫지) 못하고 장막 중에서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므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 넘겨 멸하시려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라고 원망했습니다(신1:27).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미워하셔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목적인 아모리 족속의 손에 넘겨 자기들을 멸하시려고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삿6:14).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주목하게 된 점은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이 말한 3가지 내용(13절)에 대하여 전혀 설명을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설명을 하셨다면 이렇게 하실 수 있지 않으셨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1) 기드온이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13절상)라고 말한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일이 너희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어난 이유는 너희가 다시 나에게 범죄하였기 때문이다’(참고: 1절, 현대인의 성경), (2) 기드온이 “우리 조상들이 일찍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13절중)라고 말한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 기드온과 너의 300명의 군사로 기적을 이루어 메뚜기 때처럼 수없이 많은 적군들과의 싸움에서 승리케 하겠다’(참고: 7:7, 12, 현대인의 성경), (3) 기드온이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우리를 넘겨 주셨나이다”(6:13하)라고 말한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결코 버리지 않고 반드시 미디안 손에서 너희를 구원하겠다’(14, 16절; 7:7, 9).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설명을 전혀 하지 않으시고 기드온에게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6:14)라고 말씀만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리하셨을까요? 왜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설명을 해주시지 않으신 것일까요? 특히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고 말씀하셨는데 기드온의 힘이 무엇이었습니까? 과연 그에겐 그 적군을 이길 힘이 있었나요?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큰 용사”(12절)라고 말씀하신 후 이렇게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요나 2장 9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현대인의 성경 말씀입니다: “구원은 여호와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기드온에게는 이스라엘을 미디안 손에서 구원할 힘이 전혀 없었기에 그는 이스라엘을 적군의 손에서 결코 구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구원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고(삿6:12, 16) 그 임마누엘 구원의 하나님께서 기드온과 그의 300명 군사를 통해 놀라운 기적적인 구원의 능력을 나타내셔서 이스라엘을 “반드시”(16절)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기에 그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은 반드시 이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우리에게는 구원의 힘과 능력이 없지만 우리에게는 구원의 능력이시요(시140:7) 또한 구원의 힘이신 하나님(18:2)이 함께하시기에 그 임마누엘 믿음으로 가지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가면(삿6:14)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힘과 능력을 나타내시사 반드시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예수님의 제자로 삼아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과 성령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합니다(마28:20). 이 예수님의 대계명을 순종하되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도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0절)는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넷째로, 기드온은 하나님에게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라고 답변했습니다(삿6:15).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기드온의 입장에선 충분히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기드온은 자기가 자신의 집을 보아도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또한 자기 자신을 보아도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극히 약”한 집에 “가장 작은 자”가 어떻게 “가서” 무슨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할 수 있었겠습니까(14절). 이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성경에 나오는 다섯 인물이 생각났습니다.
(1) 첫 번째 인물은 바로 사울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왕이 되기 전 사무엘을 통하여 기름 부음을 받아 왕으로 세움 받기 전에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삼상 9:21). 마치 기드온이 “내 집안은 므낫세 지파 중에서 가장 약하고 나는 내 가족 중에서 가장 보잘것 없는 자입니다”(삿 6:15, 현대인의 성경)라고 말한 것처럼, 사울도 “나는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도 가장 작은 베냐민 지파 출신이며 게다가 우리 가족은 우리 지파의 모든 집안 중에서도 가장 보잘것 없는 집안”입니다(삼상9:21, 현대인의 성경)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시작은 겸손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작게 여겼습니다(15:17). 그러나 그는 나중에 교만 해졌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았습니다(19절).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습니다(26절).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습니다(19절). 그는 하나님께 범죄한 것입니다(24, 30절). 그러한 가운데서도 사울은 이스라엘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높임을 받기를 원했습니다(30절). 이렇게 사울 왕은 시작은 겸손했지만 나중은 교만 해졌습니다. 왜 그는 나중에 교만해진 것일까요? 그 원인은 그는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입니다(8-12절). 그는 승리한 후 자기 마음을 지키지 못했기에 마음이 교만 해져서 자기 자신을 위하여 기념비를 세웠습니다(12절). 즉, 그는 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는 패했던 것입니다. 그는 아말렉과의 싸움에서는 승리했지만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는 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겸손하지 못하고 나중에 교만해진 것입니다.
(2) 두 번째 인물은 바울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9절 말씀입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현대인의 성경) “나는 사도들 중에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기 때문에 사도라고 불릴 자격마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맨 나중에는 부족하기 짝이 없는” 자기에게도 나타나셨다고 말하면서(8절, 현대인의 성경) 자기는 사도들 중에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9절,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그는 자기 자신이 “사도라고 불릴 자격마저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9절, 현대인의 성경). 그 이유는 그는 열심으로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기 때문입니다(고전15:9, 현대인의 성경; 빌3:6).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를 불쌍히 여겨 주셨습니다(딤전1:13, 16, 현대인의 성경).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철저하게 참으시는 인내를 보이셨습니다(16절, 현대인의 성경). 그랬던 사울(바울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 이름)이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었습니다(고전15:10). 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있었던 사도 바울은 자기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다른 모든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했습니다(10절).
(3) 세 번째 인물은 바로 모세입니다.
출애굽기 3-4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는(calling) 이야기가 나오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이런 저런 말로 여러 번 변명을 하다가 나중에 가서야 순종하는데 그 변명 중에 하나가 바로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였습니다(출4:10). 그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11-12절). 그러나 모세는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현대인의 성경) “주여, 제발 다른 사람을 보내소서”]라고 말했습니다(13절). 제 생각엔 오늘 본문 사사기 6장 15절 나오는 기드온도 모세와 별 다를 바 없이 자기가 자기 자신과 집을 보아도 자기는 하나님께 보냄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은 우리에게서 났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격은 오직 하나님에게서 납니다(Our adequacy is from God)(고후3:5, 새번역).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실 때에는 우리가 보냄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시고 세우시사 보내실 때에 우리와 반드시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에(삿6:14, 16) 우리는 그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 뿐인 것입니다.
(4) 네 번째 인물은 바로 사라입니다.
사라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는 말씀을 “그 뒤 장막 문에서” 듣고(창18:10) “혼자 속으로 웃으며 ‘내가 노쇠하였고 내 남편도 늙었는데 내가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겠는가?’ 하고 중얼거렸”습니다(12절, 현대인의 성경). 그녀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자기나 자기 남편 아브라함은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 자신은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그녀는 갱년기가 지났기 때문임(현대인의 성경)](11절).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어째서 사라가 웃으며 내가 늙었는데 어떻게 아들을 낳을 수 있겠는가? 하고 중얼거리는가? 나 여호와에게 불가능한 일이 있겠느냐? 내년 정한 때에 내가 너에게 돌아올 것이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13-14절, 현대인의 성경). 즉, 사라는 자기에게 아들이 있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 여호와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14절, 현대인의 성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 다섯 번째 인물은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로마서 4장 18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바라고 믿었으므로 '네 후손도 저 별들처럼 많을 것이다.' 라고 하신 약속대로 그는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나이가 백 세가 다 되어 몸은 죽은 것과 다름이 없었고 그의 아내 사라도 나이가 많아 도저히 출산할 수 없는 것을 알고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고 “불신앙으로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에 더욱 굳게 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믿음 때문에 그를 의롭게 여기셨습니다.”(19-22절, 현대인의 성경).
이 성경에 나오는 다섯 인물을 생각할 때 저는 기드온이나 그 다섯 인물인 사울이나 바울이가 모세나 사라나 아브라함이나 다 하나님께 도구로 쓰임 받기에는 자격이 없었지만 그들의 자격이 하나님에게서 났기에(고후3:5, 새 번역)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시사 도구로 사용해주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28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입니다: “형제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셨을 때 여러분이 어떠했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적으로 볼 때 여러분 가운데는 지혜로운 사람도 많지 않았고 유능한 사람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이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의 지혜로운 사람과 강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어리석고 약한 사람들을 택하시고 세상이 대단한 인물로 여기는 사람들을 형편없이 낮추려고 천한 사람과 멸시받는 사람과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다섯째로,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삿6:16).
하나님께서는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15절)라고 말한 기드온에게 이중적인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 이중적인 약속이란 (1)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겠다[(현대인의 성경)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가겠다”]와 (2)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현대인의 성경) “그러므로 너는 한사람을 치듯이 미디안 사람들을 쉽게 칠 수 있을 것이다”]였습니다. 이 이중적인 약속은 마치 동전의 앞면과 뒷면 같아서 뗄레야 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할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께서 기드온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참고: 7:15-8:12).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승리의 비결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사 우리의 대적들을 우리 손에 넘겨주시므로 우리로 하여금 그들을 이길 수 있게 하십니다(참고: 3:10, 현대인의 성경). 제가 쓴 짧은 묵상 글을 나눕니다: 우리가 넉넉히 이기"는 승리의 비결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는 승리의 확신은 어느 누구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과 어느 무엇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입니다(롬 8:35, 37-39). 즉,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끊을 수 없는 (구원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을 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을 받아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않습니다(요일 2:15). 그 이유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요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16절). 그리고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17절). 그러므로 거듭난 우리들은 이 세상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이 세상은 어두운 세상이요, 거짓된 세상이요, 미움의 세상이요 또한 악한 세상이요 불의한 세상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과 싸워야 합니다. 이 영적 싸움에서 승리의 비결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5:4).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나 자신과 세상과 죄와 마귀와 죽음과 싸워 승리해야 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히12:2)께서 우리를 승리케 하실 때에 수많은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게 하실 것입니다(삿6:16).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 2022년 12월 31일 토요일, 저는 토요 새벽기도회 때 사사기 6장 12-16절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기도한 후 지금까지 다시금 이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서 긴 묵상의 글을 적고 있습니다. 이젠 약 3시간 후인 오후 8시면 2022년 송구영신예배를 승리장로교회 성도님들과 하나님께 온라인으로 드리려고 합니다. 장시간 동안 이 하나님의 말씀 묵상의 글을 적어내려 가면서 이 말씀 묵상의 글을 먼저 생명의 떡이 되시는 예수님께 기도로 받치고 사랑하는 주님 안에서 형제, 자매님들에게 보내려고 합니다. 승리교회 식구들 뿐만 아니라 가족 친척 식구들과 인터넷 사역의 형제, 자매님들에게 나누려고 합니다. 이미 새해를 맞이한 한국에 있는 모든 지체들이나 여기 미국에 있는 지체들이나 이 하나님의 말씀 묵상의 글을 통해 기드온과 같은 나의 모습을 발견하는 가운데 기드온과 같은 나 같은 목사와도 함께하시사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과도 반드시 함께하시사 놀랍고 기적적인 일을 이루시는 새해가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드온과 같은 목사,
제임스 김 나눔
(2022년 12월 31일, 불성실한 보잘것 없는 자와 함께하시사 주신 오병이어의 약속의 말씀을 신실하게 성취해 나가시는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