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의 기적을 경험하라!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사도행전 16장 25절).
2023년 1월 1일, 새해를 맞이하여 이렇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와 다 함께 먼저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릴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새해 한 해를 이렇게 여러분들과 함께 하나님께 예배로 시작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감사하고 귀하다 생각합니다. 제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 하나님은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작년 2022년 11월 6일 주일 예배 때 처음으로 제가 기타를 치면서 우리 찬양팀과 함께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었습니다. 그 때 제가 그리하고 싶었던 이유는 그 전 주일(10월 30일)에 선포한 골로새서 1장 11절 현대인의 성경인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힘을 통해 오는 모든 능력으로 여러분이 강해져서 모든 일을 기쁨으로 참고 견디며”란 말씀을 생각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 기간에 저는 개인적으로 제 조카 선교사님의 잠들었다는 소식과 과테말라 선교사님이신 서진국 선교사님의 부인되시는 서희숙 선교사님도 잠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모든 유가족들과 친지들 등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힘을 통해 오는 모든 능력으로 그 분들을 강하게 해주셔서 그 모든 일을 참고 견뎌낼 수 있게 해주시길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11월 6일 주일 예배 때 찬양을 인도하면서 하나님의 힘과 능력에 관한 복음 성가 4곡을 선택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었습니다. 그 4곡은 (1) “위대하고 강하신 주님,” (2) “나의 등 뒤에서,” (3) “약할 때 강함 되시네,” (4)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였습니다.
그 후에도 하나님께서는 어느 목사님 부부와의 만남을 통해서 그 분들이 섬기는 찬양 모임을 우리 교회에서 연습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것을 보고 저는 금년 2023년도 표어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안 그래도 주님께서 주님의 몸 된 승리장로교회를 세워 나아가심에 있어서 두 반주자 자매들을 보내주셨는데 이렇게 찬양 모임도 우리 교회에서 연습하는 것과 또한 또 다른 찬양 모임도 저희 교회에서 연습하길 원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생각할 때 생각난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 사도행전 16장 25절 말씀이었습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 그래서 저는 우리 승리장로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찬양”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새해 표어를 “찬양의 기적을 경험하라!”라고 정했습니다.
저는 오늘 “찬양의 기적을 경험하라!”는 제목 아래 본문 말씀 사도행전 16장 25절 말씀과 문맥의 말씀 중심으로 새해 우리가 주님 안에서 기도하며 추구하고자 하는 찬양의 기적이 무엇인지 한 3가지로 묵상하면서 주시는 은혜와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기도하며 추구하고자 하는 찬양의 기적은 닫혔던 문이 열리고 매인 것이 다 풀어지는 기적입니다.
사도행전 16장 25-26절 말씀입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현대인의 성경) “밤중쯤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자 다른 죄수들이 듣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집터가 흔들리고 감방문이 모두 열리며 죄수들을 묶었던 쇠고랑이 다 풀어졌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힌 바 되었습니다(23절, 현대인의 성경). 그 이유는 그들이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이 여러 날 동안 바울과 실라를 따라와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16-17절). 그 때 바울이 심히 괴로워서 그 귀신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가 명하노니 그(녀)에게서 나오라”고 명하니까 귀신이 즉시 나왔으므로 그 여종이 더 이상 자기의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18절). 그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로마 관리들에게 끌고 가서 행정관들 앞에 세우고 “이 유대인들이 우리 도시를 소란하게 하며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아들일 수도 없고 지킬 수도 없는 풍습을 전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19-21절, 현대인의 성경). 그 때 군중들까지도 그들과 한패가 되어 비난하자 행정관들은 바울과 실라의 옷을 찢어 벗기로 매로 치게 하였습니다(22절,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그들은 바울과 실라를 몹시 때리고 감옥에 가둔 후 간수에게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명령을 받은 간수는 바울과 실라를 깊숙한 감방에 가두고 발에 쇠고랑을 든든하게 채워 놓았습니다(23-24절, 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감옥에 갇힌 바 되었을 때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25절).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그러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바 되었을 때 바울과 실라는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억울한 일을 당하게 하시는지 충분히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었을 텐데 오히려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그 자체는 귀한 신앙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좀 드는 의문은 그러한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어떻게 그들은 그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했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찬송’이란 주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차원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인데 그들의 입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주권속에서 허락하신 일은 사람의 눈으로 보기엔 결코 좋은(선한) 일이 아닌 나쁜 일로서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나쁜 일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찬송했을까 라는 의문이 듭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과 실라가 그러한 억울한 위기 상황에서도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했을 때 그 결과입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현대인의 성경) “그때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집터가 흔들리고 감방문이 모두 열리며 죄수들을 묶었던 쇠고랑이 다 풀어졌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했을 때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옥터가 움직이고 감방문이 모두 열렸을 뿐만 아니라 죄수들을 묶었던 쇠고랑이 다 풀어진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믿음으로 묵상할 때 우리가 금년부터 기도하고 사모하는 찬양의 첫 번째 기적은 닫혔던 문이 열리고 매인 것이 다 풀어지는 기적입니다. 마치 바울과 실라가 갇혔던 감옥 문이 열렸던 것처럼 우리의 삶에 닫혔던 문이 열리는 기적을 사모합니다. 특히 우리가 출애굽 당시 홍해 앞에서 갇힌 바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 또한 동서남북을 아무리 보아도 우리가 당면한 문제나 어려움의 해결점이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소망이 없어 보일 때에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와 찬송을 받으시사 마치 홍해를 육지로 만드시사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걸어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것처럼 우리 또한 바다와 같은 인생의 어려움 속에서도 길을 내어주시사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길 기원합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과 후손들의 닫힌 문을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기적적으로 열어주시사 그들의 미래에 시온의 대로가 있게 하여 주시길 기원합니다. 또한 교회적으로 기원하는 것은 금년도에도 주님께서 닫혀 있는 복음의 문을 열어주시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시길 기원합니다. 또한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매여 있었던 것(묶여있었던 쇠고랑)이 다 풀어진 것처럼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매여 있는 모든 것에서부터 자유(freedom)를 누리는 기적을 주님께서 베풀어 주시길 사모하며 기원합니다. 지금 많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여러모로 매여있어서 주님과 진리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가정에서 과거에 부모님이나 배우자에게 입은 상처와 아픔 속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성경 요한복음 8장 32절 말씀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 놀라운 자유를 누리는 축복이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송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있길 기원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기도하며 추구하고자 하는 찬양의 기적은 자포 자기하려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해하지 않게 하는 기적입니다.
사도행전 16장 27-28절 말씀입니다: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현대인의 성경) “졸던 간수가 깨어나 감방 문이 다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친 줄로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살하려고 하였다. 그 순간 바울이 큰소리로 '여보시오! 우리가 다 여기 있으니 칼을 놓으시오.' 하고 외쳤다”]. 바울과 실라가 갇혀있었던 감옥을 지키고 있었던 간수는 졸고 있다가 아마도 큰 지진으로 인해 깨어났는지 감옥문들이 다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친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칼을 빼어 자결(자살)하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로마 간수의 책임은 감옥에 갇혀있는 죄수들을 지키는 것인데 만일 그들이 도망을 갔다면 어차피 자신은 책임을 지고 죽임을 당할 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참고: 12:19). 바로 그 순간 바울은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더 여기 있노라”하고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16:28).
어느 한국 인터넷 기사를 보니까 한국 중고생 7만여명이 자해를 경험한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상당수 학부모는 ‘우리 아이는 어려서’ ‘우리 아이는 착하니까’ ‘우리 집은 행복하니까’ 청소년 자해를 ‘남의 아이’ 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전문가들은 초등학교 4학년 무렵부터 자해를 시작하는 아이들이 있고, 중학생이 가장 많다고 ‘추정’한다. 예전엔 정신의학적 진단이나 성격장애 진단이 있는 아이들이 주로 자해를 한다고 알려졌으나 요즘은 특별한 증상이 없는, 유복한 가정의, 외향적인, 모범생들이 꽤 많이 자해를 한다”(인터넷). 2017년 라이프웨이(Lifeway) 연구에 따르면 교인 중 3분의 1이 가까운 친구나 가족 중에서 자살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자살자의 3분의 1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지만, 교회 지도자나 교인들이 자신의 어려움을 알고 있다고 답한 사람은 고작 4퍼센트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개인적인 “자살”에 대한 제 생각은 제가 이런 저런 말을 하기 보다 우리 주위에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이 자살을 하기까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심지어 사랑하는 가족, 친척, 가까운 친구의 자살 심정까지도 우리는 전혀 모르고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정도로 홀로 마음에 큰 무거운 짐 속에서 자살을 생각하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마음을 쏟아낼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입니다. 자살을 시도하기 전에 자신의 마음의 큰 무거운 짐을 조금이나마 내려놓고 싶은 친구가 곁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입니다. 그 한 사람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 돼야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기도하며 추구하고자 하는 두 번째 찬양의 기적은 자포 자기하려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해하지 않게 하는 기적입니다. 우리 모두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할 때 닫힌 문이 열리고 매인 것이 풀리는 기적만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자포 자기하려는 사람이나 심지어 자살하려고 자해하려는 사람까지도 알게(만나게)하시길 기원합니다. 물론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어떻게 그러한 사람을 도와야 할지 모를지라도 성령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도구로 사용하시사 그 사람으로 하여금 더 이상 자해하며 자살하지 않도록 막는데 쓰임 받길 기원합니다.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약 2년 전인가 엔지 성도님을 만나러 양로원에 가서 주차창에 차를 세우려고 하는데 어느 형제가 전화가 와서 자기 때문에 자기의 식구가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고 죽고 싶다고 말한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저는 놀라서 무슨 말을 그에게 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때 엔지 성도님을 짧게 만나고 나서 급히 그 형제가 일하는 직장으로 가서 장시간을 그와 함께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참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그 형제를 불쌍히 여기시사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더 이상 자신을 자해하지 않도록 막아 주셨고 오히려 그 가정의 큰 위기로 인해 부부 관계 등 가족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마지막 셋째로, 우리가 기도하며 추구하고자 하는 찬양의 기적은 자포 자기하려고 했던 사람의 육신의 생명만 살리는 기적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영적으로 죽었고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그의 영혼이 다시 살린 바 되는 구원의 기적입니다.
사도행전 16장 29-34절 말씀입니다: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현대인의 성경) “간수는 등불을 구해 가지고 뛰어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렸다. 그리고 그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 '선생님들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래서 그들은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당신과 온 집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고서 그들은 그 간수와 온 가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었다. 그는 바로 그 날 밤에 바울과 실라를 데려다가 매맞은 상처를 씻어 주고 온 집안 식구와 함께 즉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그들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음식을 대접하고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을 온 가족과 함께 기뻐하였다”]. 저는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혀서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했을 때 일어난 기적 중의 기적은 닫혔던 감옥 문이 열리고 매인 것이 풀어진 것이나 자결하려던 간수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는 것보다 그 간수가 주 예수님을 믿고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다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제가 그리 생각하고 믿는 이유는 허물과 죄로 영적으로 죽었던 그 간수가 영적으로 다시 살아나서 예수님을 믿어 구원(영원한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저 자살하지 않아 육적으로만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이젠 영적으로 살아있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했을 때 목격한 기적 중의 기적은 자기들을 지키던 간수가 자결하려다가 육신의 생명만 보전한 것이 아니라 그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았다는 것임. 이 영혼 구원이 바로 찬양의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이 기적을 (더욱더) 경험하는 새해가 되길 기원합니다.
찬양의 기적을 이루시는 주님의 놀라운 역사를 사모하는,
제임스 김 나눔
(2023년 1월 1일, 신년 예배 후 승리장로교회 목양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