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최고입니다!

 

 

 

[사무엘상 15장 12-24절]

 

 

제가 언젠가 헨리 나우웬의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다가오는 단어가 있었습니다.  그 단어는 바로 "Self-rejection"(자기 거절)이란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제 마음에 다가왔던 이유는 저는 '자기 부인'(self-denial)과 '자기 거절'(self-rejection)을 혼동하는 신앙생활을 했었기 때문입니다.  즉, 저는 너무나 많은 때에 자기 거절로 말미암아 제 영혼이 상함을 경험했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겸손인 줄 착각하고 자기를 거절하는 신앙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저는 주님이 원하시는 충분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저는 주님의 사랑으로 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자아 기형아'로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려고 했었습니다.  어떻게 건강하지 못한 자아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지 너무나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모르겠음.  아마 위선의 능력이 아닌가도 생각합니다.  그렇게 잘못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던 저에게 하나님께서는 시편 137편 6절 말씀을 묵상케 하셨습니다(2010. 10. 14.):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현대인의 성경) “내가 너를 기억하지 않거나 내가 너를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내가 다시는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저는 이 말씀 중심으로 “최고의 기쁨”(Chief Joy)라는 제목 아래 말씀 묵상의 글을 적어 내려가면서 도전을 받았었습니다.  시편기자는 자기의 최고의 기쁨보다 주님을 더 기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최고의 기쁨(God's chief joy)으로 여기고 계시다 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 아버지가 이 세상의 최고의 기쁨보다 더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 세상의 최고의 기쁨보다 더 기쁨으로 여길 수 있는 자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향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심을 아는 자입니다(습3:17).  그 기쁨과 사랑에 충만한 자는 자기를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이웃을 건강한 자아로 사랑할 줄 아는 자라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사무엘상 15장 12-24절을 보면 사사시대에 마지막 사사였고 선지자 중의 첫번째 선지자인 사무엘과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인 사울과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대화는 사울 왕이 사무엘을 통하여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3절)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자기 군대를 이끌고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사무엘과 나눈 대화 내용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 사무엘과 사울과의 대화 내용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최고입니다!”라는 제목 아래 한 2가지로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은혜와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 보시기에 제일 좋은 것이 우리가 보기에 제일 좋은 것이어야 합니다.

 

사무엘상 15장 9절 말씀입니다: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사울과 그의 부하들은 아각과 제일 좋은 양과 송아지와 어린 양과 그 밖의 좋은 것을 모두 남기고 없애기를 원치 않았으며 다만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것만 골라서 죽이거나 없애 버렸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를 사울 왕에게 보내셔서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일을 알려주셨습니다: “내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왔을 때 아말렉이 그들을 길에서 대적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을 벌하기로 작정하였다”(2절,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에게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고 명하셨습니다(3절).  그런데 사울 왕과 그의 부하들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아말렉을 쳤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는 말씀은 불순종하고 그들의 왕 아각과 제일 좋은 양과 송아지와 어린 양과 그 밖의 좋은 것을 모두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무가치하고) 하찮은(쓸모없는) 것만 진멸했습니다(9절).  그때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이 후회가 된다.  그가 내게서 떠나고 내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셨고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근심하여 밤새도록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10절, 현대인의 성경).  “다음 날 아침 일찍 사무엘은 사울을 만나러”(12절, 현대인의 성경) 갔을 때 사울은 사무엘을 반갑게 맞으면서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으소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현대인의 성경) “어서 오시오.  나는 여호와의 명령을 그대로 수행하였소”]라고 말했습니다(13절).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사울이 내게서 떠나고 내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는데(10절) 사울은 사무엘에게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현대인의 성경) “나는 여호와의 명령을 그대로 수행하였소"]라고 말한 것입니다(13절).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했다고 충분히 착각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울의 말 둘 다다 들었는데 그 두 말이 일치가 되지 않고 오히려 이처럼 정반대가 될 때에 우리는 사무엘 선지자처럼 당연이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교훈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어쩔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 보다 사람의 말을 더 믿을 때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사도행전 4장 19절 말씀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현대인의 성경)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일인지 한번 판단해 보십시오”].  이 말씀은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인 지도자들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5절, 현대인의 성경)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경고했을 때(18절)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이 그들에게 한 말로서 그 요점은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18절, 현대인의 성경)는 그 유대인 지도자들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의 말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다는 결심과 각오입니다.  그 이유는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은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판단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19절).  우리에게도 이러한 영적 판단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울 왕에게는 이러한 영적 판단력이 없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냐 면 오늘 본문 사무엘상 15장 24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현대인의 성경) “그렇소.  내가 범죄하였소.  내가 당신의 말씀과 여호와의 명령에 불복종하였소.  내가 백성들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었소”].  사울 왕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아말렉을 쳐서 모두 다 진멸하지 않고 아말렉 사람들의 양과 소 중에 제일 좋은 것은 죽이지 않고 살려 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고자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보기에 제일 좋은 양과 소를 죽이지 않고 살려 둔 이유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남겨 둔 것이라고 사무엘에게 말했습니다(15절, 현대인의 성경).  그 외에 자기들이 보기에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것은 다 진멸했다는 것입니다(9절, 현대인의 성경; 15절).  결국 사울 왕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보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입니다.  만일 사울 왕이 사도행전 4장에 나오는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처럼 영적 판단력이 있었다면 그는 자기를 왕으로 모시고 따르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내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4:19)고 말 했어야 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이러한 교훈을 받았습니다: 만일 따르는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있다면 지도자는 그들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므로 자기도 그들과 함께 하나님께 죄를 범하지 말고 오히려 자기 자신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따르는 자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사랑으로 그들을 책망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케 해야 합니다(참고: 삼상 15:24, 현대인의 성경; 겔 2:5, 7; 3:11).  그러기 위해선 교회 지도자들은 올바른 영적 판단력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사람들의 말을 듣는 것이 옳은지 분명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분명한 영적 판단력을 가지고 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묵묵히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비록 따르는 자들이 그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서 지도자들을 그릇 판단하고 비판하고 수군수군할지라도 교회 지도자들은 사람의 말을 듣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보시기에 제일 좋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될 것입니다(삼상12:14, 현대인의 성경).  다시 말하면, 모든 일이 순조롭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며 또한 그분이 명령하신 것을 거역하지 않고 그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는 비결입니다.

 

마지막 둘째로, 우리는 변질되지 말고 계속해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사무엘상 15장 17절 말씀입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현대인의 성경) “당신이 자신을 보잘것 없는 존재로 여기고 있을 때 하나님은 당신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소”].  이 말씀은 사무엘상 9장 21절에 근거한 말씀으로서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뜻대로 사울을 왕으로 세우고자 했었을 때 사울이 사무엘에게 한 말입니다: “사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하니”[(현대인의 성경)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도 가장 작은 베냐민 지파 출신이며 게다가 우리 가족은 우리 지파의 모든 집안 중에서도 가장 보잘것 없는 집안인데 어째서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사울이 왕이 되기 전에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작에 여”겼었음(15:17).  현대인의 성경 말씀으로 말하자면, 사울은 왕이 되기 전에는 자기 자신을 ‘보잘것 없는 존재’로 여겼었음(17절, 현대인의 성경).  한 마디로, 사울은 겸손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를 보내어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왕이 되어 아말렉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교만해졌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사무엘상 15장에 나와있는 2 성경구절 말씀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1)  첫 번째 성경 구절은 사무엘상15장 12절입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이 말씀을 보면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근심하여 밤새도록 하나님께 부르짖은 후 다음 날 아침 일찍 사울을 만나러 갔을 때(10, 12절, 현대인의 성경)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사울에 대해 알려준 말입니다.  그 사람의 말에 의하면 사울 왕은 갈멜에 가서 자기를 위해 기념비를 세우고 길갈로 내려 갔다는 내용이었습니다(12절, 현대인의 성경).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자기 자신을 보잘것 없는 존재로 여겼던 사울이 왕이 되어서 아말렉 전쟁에서 승리한 후 자기 자신을 위해 기념비를 세웠다는 것은 그가 교만해진 증거가 생각합니다.  이것은 사울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이긴 다음, 자기 자신이 잘나서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승전을 축하하는 기념비를 세운 것입니다(인터넷).

 

(2)  두 번째 성경 구절은 사무엘상 15장 30절입니다: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현대인의 성경) “내가 범죄하였소. 하지만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할 수 있게 하여 적어도 내 백성의 지도자들과 모든 이스라엘 군중 앞에서만이라도 나를 높여 주시오”].

 

이 말씀을 보면 사울 왕은 자기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자기를 자기 백성(하나님의 백성인데)의 지도자들과 모든 이스라엘 군중 앞에서만이라도 자기를 높여달라고 사무엘 선지자에게 청했습니다.  아니, 자기가 진정 하나님께 죄를 범했다는 것을 깨닫고 사무엘 선지자에게 인정을 한 것이라면 더욱더 낮아지고 더욱더 겸손해져야지 어떻게 자기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군중 앞에서 높여 달라고 요청을 할 수 있나요?

 

저는 이 두 성경구절 말씀을 묵상할 때 겸손했던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교만해졌다고 생각합니다.  한 마디로, 그는 변질되었음.  겸손했던 자가 교만해진 것입니다.  왜 사울은 변질되었을까요?  신약 성경에 나오는 사울은 변화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이 되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변질되기보다 변화 받아야 합니다’라는 교훈을 받습니다.  교만했던 자가 계속해서 겸손해져야지, 겸손하던 자가 계속해서 교만해지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자기 자신을 보잘것 없는 존재로 여기고 있을 때 그를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셨습니다(삼상 15:17, 현대인의 성경; 참고: 9:21,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께서는 "내 가족 중에서 가장 보잘것 없는 자"라고 말한 기드온을 사사로 세우셔서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삿 6:15,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께서는 "나는 사도들 중에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이요(고전 15:9,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 가운데서 가장 보잘것 없는 나"라고 말한 바울(엡 3:8, 현대인의 성경; 참고: 고후 12:11, 현대인의 성경)을 이방인의 사도(롬 11:13; 갈 2:8)로 세우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도 보잘것 없는 사람들(행 4:13, 현대인의 성경)을 택하셔서(고전 1:28, 현대인의 성경) 주님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제일(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촤고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보기에도 최고가 돼야 합니다.  즉, 하나님 보시기에 제일(가장) 좋은 것이 우리가 보기에도 제일(가장) 좋은 것이 돼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변질되는 것을 매우 경계해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성령님의 역사로 계속해서 예수님의 겸손함을 본받아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길 기원합니다.

 

 

 

 

 

 

가장 귀하신 예수님까지도 나의 영혼 구원을 위하여 아낌없이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는,

 

 

 

 

제임스 김 나눔

(2023년 1월 28일, 가장 무가치하고 쓸데없는 이 죄인을 가장 존귀한 자로 삼으시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