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는 것은 돌보는 것입니다.
[로마서 15장 22-29절 말씀 묵상]
제가 개인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네이버 블로그 웹사이트가 있습니다. 그 웹사이트 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몇 년 전에 저희 교회 장로님의 조카 형제하고 장로님 댁에서 하룻 밤 함께 지내면서 그 형제에게 도전을 받아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 형제의 말로는 한 국에서는 미국처럼 google.com라는 search engine을 잘 사용하지 않고 naver.com을 더 많이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네이버 블로그 웹사이트를 열어서 거기에 제가 저희 교회에 웹사이트에 올리는 말씀 묵상이나 가정 이야기 등등 글들을 다 올리므로서 많은 한 국에 있는 사람들과 신앙생활 및 가정생활에 유익이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블로그 사역 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지금 매일 제 웹사이트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평균이 하루 에 한 450-500명 정도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한국에서만 들어와서 보 는 것이 아니라 여기 미국에 있는 유학생들이나 네이버 search engine을 사용하는 사람들 이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댓글을 다는 사람들이나 제 글을 스크랩해서 가지고 가 는 사람들을 보면 주로 제가 매주 수요기도회 때마다 묵상했던 시편 말씀을 주로 가지고 가 던지 그 말씀 묵상에 도움이 되었다고 감사 인사하는 댓글이 주로입니다. 한번 들어와 보 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제 네이버 블로그 웹사이트에 표제(title)가 바로 오늘 말씀 묵상 제목 인 “Sharing is Caring” 즉, ‘나누는 것이 돌보는 것입니다’입니다. 제가 이렇게 표제를 정 한 이유는 제 개인 네이버 블로그 웹사이트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가정이야기 등들을 나누면서(share) 웹사이트로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reach out)입니다. 그리고 이 표 제를 저에게 가르쳐 준 사람은 바로 저희 집 망내 딸 예은이입니다. 하루는 예은이가 집에 와서 언니랑 인가 좀 티칵티칵 하더니 아마 언니가 자기에게 무엇을 주지 않으니깐 예은이 가 언니에게 “Sharing is caring”(나누는 게 돌보는 것이다)라고 말하더군요. 제 생각엔 예 은이는 자기가 갇고 싶은 것을 언니가 가지고 있는데 자기에게 안주닌까 학교에서 선생님에 게 배웠는지 ‘나누는 게 돌보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 같습니다. ㅎㅎ 저는 그 때 처음 그 말을 듣고 ‘참 멋있는 말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 들은 이 말이 제 생각 에 각인이 되어서 이렇게 제 네이버 블로그 웹사이트의 표제로 정하고 블로그 사역을 지금 도 감당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과연 여러분도 ‘나누는 것이 돌보 는 것이다’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일 그렇다고 생각하고 계시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사랑 하는 육신의 가족 식구들과 무엇을 나누면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의 영적 식구들 이 교회 공동체 형제, 자매들과 무엇을 나누면서 신앙생활 하고 계십니까?
오늘 본문 로마서 15장 27절을 보면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 내려가면서 이 결론 부분에 와서 유대인 성도들과 이방인 성도들이 서로 나누는 모델이 될 만한 모습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 모델이 될 만한 나눔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27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 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여기서 바울은 로마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모델이 될 만한 나눔의 모습은 바로 유대인 형제 들은 이방인 형제들에게 “신령한 것”(the Jews’ spiritual blessings)을 나누고 이방인 형제들은 유대인 형제들에게 “육신의 것”(the Gentiles’ material blessings)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던지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은 유대인 형제들이 이방인 형제들하고 나 눴던 “신령한 것”은 무엇이고, 이방인 형제들이 유대인 형제들에게 나눴던 “육신의 것”은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먼저 유대인 형제들이 이방인 형제들과 나눴다는 “신령한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 신령한 것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은 영적 은혜를 말합니 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떻게 이방인들에게까지 전파되었습니까? 유대인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이미 묵상한 로마서 1장 16절을 보아도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복음이 먼저 유대인에게 전파되었습니 다. 비록 이방인의 사도였지만 바울은 먼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한 마디로, 이방인 형제들은 유대인 형제들에게 “빚진 자”들입니다(15:27). 무엇을 이방인 형제들이 유대인 형제들에게 빚을 졌습니까? 바로 복음이요 신령한 축복(영적 은혜)입니다. 여러분 은 “신령한 축복”하면 무엇이 생각나십니까? 저는 승리장로교회 30주년 기념 말씀 집회 첫째 날 강사 목사님의 설교 제목인 “하늘의 신령한 복”이란 말이 생각납니다. 그 제목이 어디에 근거한 것입니까? 바로 에베소서 1장 3절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3절을 보십시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과연 유대인 형제들이 이방 인 형제들에게 나눴던 “신령한 것”, 즉 하늘의 신령한 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 스도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므로 말미암아 이방인 형제들이 누리게 된 것으로써 한 마디로 “구원”(영생)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사랑”하시사(엡1:4)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중에서 그가 사랑하시는 자들을 “선택”(4절) “예정”하시사(5 절) 예수님의 피로 구속 곧 죄 사함을 주시고(7절)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것입니 다(양자)(5절). 그러므로 바울은 지금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로마 공동체 안 에 있는 이방인 성도들을 특히 생각하면서 ‘당신들은 당신들의 형제인 유대인 성도들에게 “신령한 것”을 빚졌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신령한 것을 빚진 이방인 성도들은 그의 형제들인 유대인 성도들에게
어떻게 빚을 갚아야 합니까? 과연 신령한 것을 빚진 이방인 형제들은
유대인 형제들에게 무엇을 마땅히 나눠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육신의 것”입니다(27절). 바울은 이방인 성도들이 육신의 것으로 유 대인 형제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27절).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육신의 것”은 무엇입니까? 영어 성경을 보면 이해하기가 더 쉬습니다. 영어 성경에 는 “육신의 것”을 “the material blessings”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즉, 바울은 이방인 성도 들은 그의 형제들인 유대인 성도들에게 자기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로 받은 물질의 축복 들을 나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흥미롭지 않습니까? 유대인 성도들은 이방인 성도들에게 이미 “신령한 것”인 영적 축복들을 나눴고 이방인 성도들은 유대인 성도들에게 물질의 축복들을 나누는 모습이 말입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 내려가면서 이방인 형제들이 유대인 형제들과 물질의 축복을 나누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면서 그 한 예를 들 고 있습니다. 그 한 예는 바로 이방인 형제들인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교 회 유대인 성도들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즐거운 마음으로 모금한 구제 헌금입니 다(26절). 바울 당시 흉년으로 인하여(행11:28-30) 유대에 기근이 심하였는데 그 결과 예 루살렘 교회 유대인 성도들의 곤란이 컸습니다(참고: 갈 2:8-10). 그 때 마게도냐와 아가 야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이 예루살렘 교회 유대인 성도들을 경제적으로 돕고자 구제금을 모 금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제금을 바울이 가지고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성도들에 게 가서 전달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계획은 예루살렘으로 먼저 갔다가(25절) 그 후에 서바나로 가는 도중에 로마를 방문하기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로나마 약속 하고 있는 것입니다(25-29절)(박윤선). 그리고 그는 자기가 로마에 갈 때 “그리스도의 충 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29절). 무슨 말입니까? 곧, 바울이 영 적 은혜를 충만히 가지고 로마에 가서 그 곳 신자들로 더불어 나누게 될 것을 말합니다(박윤선).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영적 지도자인 바울은 로마에 있는 유대인 성도 들이나 이방인 성도들에게 영적 은혜를 충만히 가지고 가서 나누길 원하면서 그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 또한 서로 나누는 삶을 살라고 편지로 권면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상상해 보십시오. 지도자로서 먼저 바울은 유대인 성도들이든 이방인 성도들이던 주님 안 에서 하나가 된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영적 은혜를 충만히 나누는 가운데 유대인 성도들은 그들의 형제들인 이방인 성도들에게 신령한 것을 나누고, 이방인 성도들은 그들의 형제인 유대인 성도들에게 “육신의 것”을 나눈다고 생각할 때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입 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교회란 공동체의 아름다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것은 바로 서로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교회는 아름 다운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 내려가면서 그는 이미 로마 서 13장에서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8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9절)으로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로마서 15장에 와서는 ‘서로를 기쁘게 하라’(1-2절),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받으신 것 처럼 “너희도 서로 받으라”고 (7절) 말씀한 후 이렇게 오늘 본문 15장 22-29절에 와서는 ‘서로 나누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을 볼 때에 결국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이나 우리 교회 식구들에게 말하고 있는 메시지는 ‘서로 사랑의 빚을 지라’ 또는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 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간략하게 다시 말하면, 바울은 지금 예수님의 두 번째 계명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로마 교회나 우리 교회에게 다시 상기시켜 주 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예수님의 계명대로 서로 이웃을 사랑할 때 교회는 하나 님 보시기에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도 매력이 있는 교회가 될 것이라 저는 믿습니다. 이러한 교회를 여러분 꿈 꾸고 싶지 않으십니까? 아니 이러한 교회로 세 우고 계시는 주님의 사역에 여러분은 동참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지난 주 목요일 새벽기도회 때 이사야 5장 2절 말씀 중심으로 묵상하다가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모든 정성과 공력을 기울이셔서 “극상품 포 도나무”(the choicest vines)로 이 미국 땅에 심으신 후 저에게 좋은 포도 맺기를 바라시고 계시는데 혹시 저는 썩은 냄새를 내는 들 포도를 맺혀드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 그리했 을 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바로 이사야 5장 4절 상반절이였습니다: ”내가 내 포도 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는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극상품처럼 모든 정성과 공력을 기울이시데 독생자 예수님까 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셨는데 이 외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 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연약하고 죄인이며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들을 위하 셔 독생자 예수님의 생명을 우리와 나누셨다면 과연 무엇을 더 나누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오늘 이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나누길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 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누길 원하고 계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나누길 하나님은 원 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우리 이웃과 나누는 저와 여러분이 되 길 기원합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복음을 나누면서 살아가길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나눔의 기쁨을 맛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