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일 손을 벌리시는 예수님

 

 

[로마서 10장 16-21절 말씀 묵상]

 

 

우리는 이미 로마서 10장1-15절 말씀 중심으로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 란 제목 아래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전파해야 하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 진리의 말씀입니다. 결코 우리는 인간의 노력과 같은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비 진리를 전파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것은 믿음의 말씀이 아니요 참된 복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태신자들에게, 그리고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믿음의 말씀을 전파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라고 우리는 담대히 전파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바울처럼 예수님을 모르고 죽어가는 가족 식구, 친척, 친구 들의 영혼 구원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의 발은 아름답습 니다(15절, 사52:7 인용).

 

오늘 본문 로마서 10장16-21절 말씀을 묵상함에 있어서 특히 21절을 보면 바울은 이사야 65장 2절 말씀을 인용하여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종일 손을 벌리시는 예수님”이란 제목 아래 한 세 가지로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 종일 손을 벌리시고 계시다’는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의 팔을 넓게 펴시사 사람들을 초청하고 계심을 의미합니 다. 초청하시되 예수님께서는 “종일” 사람들을 초청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 들이 돌이켜 회개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품 안에 앉기길 초청하고 계십니다(호즈). 성경 누 가복음 14장15-1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천국의 잔치에 참예할 수 있는 자들의 자격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박윤선). 먼저 예수님께서는 천국 잔치에 초대를 받고도 오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17-21절).  이들은 천국 잔치에 참여할 수 없 는 자들입니다. 이 자들은 먼저 청함을 받은 그 당시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다 육신의 일로 인하여 그 초대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육신의 일로 초대에 응하지 않 았습니까?  밭을 사서 불가불 나가 봐야 하겠다고 초청에 응하지 않은 사람도 있고(18절), 또 다른 사람은 소 다섯 겨리 때문에(19절), 또 다른 사람은 장가들어서 (20절)라는 육신의 일로 다들 초청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초청에 응하지 않음을 종이 그들의 주인에게 고하였을 때 그 집주인은 노하여 그 종에게 이렇게 명하였습니다: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 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21절). 그 명대로 종이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리고 왔음에 도 불구하고 자리가 있는 것을 종이 집주인에게 고하였을 때(22절) 그 주인은 종에게 이렇 게 명하였습니다: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23절). 이것이 저와 여러분을 향하신 주님의 명령이십니다: “…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 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우리 예수님은 종일 손을 벌리시고 초청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종일 손을 벌려 사람들을 초청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 문이 열려 있 어야 하고 우리 집 문도, 우리 교회 문도 활짝 열어 놓고 우리는 사람들을 초청해야 합니 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사람들을 초청해야 합니까?

 

성경 요한복음 1장 45절부터 보면 우리는 빌립이 나다니엘을 초청함에 있어서 몇 가지 원리를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1) 첫째로, 빌립은 다나니엘을 찾았습니다[(45절) “빌 립이 나다니엘을 찾아 …”].   (2) 둘째로, 빌립은 다나니엘에게 자기가 만나 나사렛 예수님 을 소개합니다[(45절) “…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3) 셋째로, 나다니엘이 빌립의 말을 듣 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반응했을 때 빌립은 그에게 “와 보 라”(Come and see)라고 초청하였습니다(46절).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가 사람들을 초청하 여 주님의 집을 채우기 위해서는 이 빌립의 초청원리 중 “와 보라”(Come and see)라는 말 씀과 더불어 추가하고 싶은 것은 3가지가 더 있습니다.

 

  • ‘와서 나를 따르라’(Come, follow me)입니다(마4:19).

 

물론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하신 말씀이지만 우리가 사람들을 초청할 때 “와 보라” 한 다음에 우리가 그들에게 예수님의 본을 보여 주서 그들로 하여금 우리를 통하여 예수님을 따르게 해야 합니다.

 

  • “와서 조반을 먹으라”(Come and have breakfast)입니다(요21:12).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 디베랴 바다 육지에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얻는 교훈은 우리가 식탁 교제 가운데 예수님께서 베 드로에게 보여주셨던 사랑을 우리도 교회로 초청한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 ‘와서 나와 함께 있으라’(Come and be with me)입니다.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마치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거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사람들을 초청하여 예수님과 함께 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와서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라’(마25:21)는 말씀을 경 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람들을 여러분의 교회로 초청하시는 것,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좀 교 회 다니지 않은 사람들을 우리 교회로 초청하시는 것이 선뜻 내키지 않으십니까? 작은 교 회 오라고 초청하는 것 좀 미안하지는 않으십니까? 과연 여러분은 자신 있게 사람들을 초 청하실 만한 것이 여러분의 교회에 있다고 보십니까? 성경 요한복음 6장 66절부터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 어려운 말씀으로 인하여(60절) 제자 중 많이 물러가고 다시 예 수님과 함께 다니지 아니하였을 때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67절)라고 물으셨습니다. 그 때 시몬 베드로가 이렇게 예수님께 대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 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68-69절).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 베드로의 대답이 생각났습 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 저에게 가르쳐 주시는 교훈은 우리 교회는 주님의 영생의 말씀이 있는 교회가 되어 우리가 사람들을 우리 교회로 초청할 때 ‘우리 교회에는 주님의 영생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 와 보십시오’라고 자신 있게 (담대하게) 말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 다. ‘저희 교회 와서 보시고 우리와 함께 있어 보십시오. 저희 교회에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순종하는 기쁨을 누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있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와서 보십시오’라고 초청할 수 있는 우리 교회가 되길 기원합니다.

 

둘째로, 과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 종일 손을 벌리시고 계시는 것입니까?

 

한 2 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불신하는 자들에게 종일 손을 벌리시고 계십니다.

 

저는 지난주에 누가복음13장 8절 말씀 중심으로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란 제목 아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했었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열맺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 무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과연 우리가 무슨 열매를 맺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 와 여러분이 맺어야 할 열매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 열매를 한 2 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 다: 외적으로는 전도의 열매, 내적으로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인격 변화의 열매. 그런데 저 는 누가복음 13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열매는 바로 회개의 열매라는 것을 문맥을 통하여 깨 닫게 되었습니다. 과연 저와 여러분이 무슨 죄를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우리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말씀을 들으면 우리가 제일 먼저 생각하는 죄는 고범죄가 아닌가 생 각됩니다.   고범죄는 무엇입니까?   고범죄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무엇이 죄인지를 일 러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충고를 거부하고 고의적으로 같은 죄를 반복해서 범하는 것 을 가리킵니다(인터넷).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또 주의 종으로 고범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 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시19:13). 그러나 우리가 회개해야 할 죄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6장9절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 이요”.   성경은 저와 여러분이 회개해야 하는 죄는 바로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죄라고 말 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10장 16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 니”.   바울은 그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기를 간절히 원하여 그들에게 “믿음의 말씀”을 전파하였지만(10:8) 그들은 다 그 예수 그리스도 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16절). 그래서 그는 오늘 본문 16절에서 이사야 53장1 절 말씀을 인용하여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가 이 이사야 말씀을 인용하는 이유는 선지자 이사야 때나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있었던 때 나 유대인들은 참 메시야이신 십지가의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함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 때나 바울 때만 적용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지금 21세기에 사는 유대인들 중 대부분은 아직도 예수님을 구약에서 예언하였던 메시 야로 믿지 않고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지금 도 않 믿는 것입니까?   그들이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어 보지 못해서입니까?   오늘 본문 로마서 10장 1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 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분 명히 바울은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못해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아 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복음의 소리를 계속 온 땅에 퍼져가고 있습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보냄을 받은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 음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복음을 듣지 못해서 예수님을 믿지 못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복음을 듣지 못해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믿 기를 거부하는 완악한 마음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 로마서 10장19절에서 신명기 32장 21절을 인용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고도 다른 신을 좇은 고로, 하나님께서는 다른 민족에게 큰 은혜를 베푸셔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시기하는 마음이 나도 록 하시겠다고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말하였습니다(박윤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마음 이 완악하고 예수님 믿기를 거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종일 손을 벌리고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못 박혀 죽으시면서 벌리신 팔을 벌리시사 예수님 믿 기를 거부하며 거절하는 저와 여러분을 품에 앉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 예수님께서 종일 손을 벌리시고 계시는 사람들은 바로 불순종하는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10장16절 상반절과 21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저희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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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16절),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 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21절). 여기 16절에 나오는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란 말 씀에서  순종치  아니하였다’는  단어는  “ὑπακούω”라는  헬라어로서  두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밑에서”(under) + “듣다”(hear). 이 합성어 단어는 ‘순종하다, 받아들이다’라는 의미가 있 는데 특히 그 중에 흥미로운 의미는 바로 ‘(문에) 누가 왔는지 나가보다’[answer (the door)]입니다(Newman). 이 의미를 볼 때 저는 요한계시록 3장20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님께서는 문밖에 서서 우리들 의 마음을 두드리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음성인 복음을 우리에게 들여주시고 계십니 다.   질문은 과연 저와 여러분은 그 예수님의 복음의 음성을 겸손히 듣고자 하고 있는가 입 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통하여 들려주시는 예수님의 음성,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겸손 히 듣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바울을 통하여 복음으로 유대인들의 마음을 두들기고 계셨지만 유대인들은 마음 문을 열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의 마음을 강퍅케 하였습 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을 가리켜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이라고 말하였습니다(21절). 왜 이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고 오히려 거스렸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의를 모 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롬10:3).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힘써 지 켜 행함으로 구원을 얻고자 하였기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복종치 아니하였습니 다(3절). 이렇게 불복종하며 불순종하는 유대인들에게도 예수님께서는 종일 손을 벌리셨습 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는 불신하는 자들과 불순종하는 자들을 종일 손을 벌려 초 청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그 분께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벌리신 팔로 우리를 품으시고자 종일 손을 벌리시고 계십 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초청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지막 셋째로, 종일 손을 벌리시는 예수님에게

과연 저와 여러분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초청에 응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불신의 죄와 불순종의 죄를 회개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초청해 겸손히 응해야 합니다.   우리는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하나님께 회개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찬송가 338장 1절).   그리고 우리는 회개의 합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즉,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해야 합니다. 더 이상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살아서는 아니 됩니 다. 우리는 겸손히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 예수님께 서 십자가의 벌리신 팔로 저와 여러분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이 예수님의 초청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믿음으로 예수님의 초청해 응하시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그러 기 위해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10장 1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에서 납니다. 그러므로 우 리는 오늘 들려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바라기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마음 문을 활짝 열어주시사 오늘 전파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고 믿음을 허락해 주시길 기원합니다. 그러므로 손을 벌리시면서 여러분을 초청하시는 예수님의 품 앉에 안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십자가에 벌리신 팔로 나를 앉아 주시고자 종일 초청해 주시는 예수님을 그리워하면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