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로마서 9장 14-29절 말씀 묵상]
우리는 이미 “끊을 수 없는 사랑”이란 제목아래 로마서9장1-13절 말씀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바울의 마음을 묵상했었습니다.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는 바울이 하나님의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자신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왜 바울은 이스라 엘 백성들을 생각할 떄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었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이스 라엘 백성들의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는 불신앙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 성들에게만 주신 특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독생자 자신들의 구세주로 영접치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러나 그 와중에 그의 마음을 위로하여 주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폐하여질 수 없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었습니다(6절). 그 언약의 말씀의 핵심은 바로 하나님의 주권 적인 선택이였습니다. 그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대해 말씀하면서 바울은 그 예로 하나님 께서 이삭을 택하시고 이스마엘은 택하지 아니하고, 또한 이삭의 두 아들 중 둘째 아들 야 곱을 택하시고 맏아들 에서는 택하지 않으셨다(13절)고 로마 성도들에게 편지를 통하여 말 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로마서 9장11절에서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리고 그들이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야곱은 선택받고 에서는 선택을 받지 못했다고 말 하면서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이 인간의 공로(행위)에 근거하지 않음을 분명히 말 하고 있습니다.
그런 후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로마서 9장 14절을 시작하면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지금 로 마에 있는 성도들이나 지금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는 아무 할 말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없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오늘 본문 로마서9장14-29절에서 한 두 가지 가상 질문과 한 가지 도전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 두 가지 가상 질문이란 (1) 첫번째로,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14절)이며, (2) 두 번째 가상 질문은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19절)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도전적인 질문은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입니다(19절). 저는 오늘 이 두 가지 가상 질 문과 한 가지 도전 질문, 세 가지 질문을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으로 하 여금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겸손한 그리스도인들로 세워 주시길 기원합니다.
첫 번째 가상 질문은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입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9장 14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이 첫 번째 가상 질문인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14 절)는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에 관한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조건 없이 에서와 야 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선과 악을 행하기도 전, 야곱은 택하시고 에서는 택하지 않으셨다는 말씀(11절)을 볼 때 과연 하나님께 불의가 있지 않느냐는 가상 질문입니다. 달리 말한다면, 이 가상 질문은 ‘하나님은 불공평하지 않으시냐?’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누구는 택하시고 누구는 택하지 않으시고 불공평하시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아니 하나님께서는 누구는 사랑하셔서 창세전에 선택하셔서 믿음을 선물 로 주셔서 예수님을 믿게 하셔서 의롭다 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반면에 어느 누구는 그냥 죄 가운데 죽게 놓아 두셨다는 이 사실이 여러분은 하나님이 불공평하신 분이라고 생 각되지 않으십니까? 아직도 생각납니다. 거의 20년 전 어느 분이 저희 교회에 나왔었는 데 교회 정문 앞 층계 있는 데로 예배 후 저에게 한 말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뭐라 그랬는 가 하면 한 마디로, 하나님은 불공평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누구는 선택하시고 누구는 선택하지 않으시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첫 번째 가상 질문에 대한 바울의 답변은 오늘 본문 15-16절에 나와 있습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 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출애굽기 33장19절을 인용한 것으로써 그 의미는 사람이 구원 받는 것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 전적으 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박윤선).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무 조건 없이, 즉 인간의 선행이나 혹은 악행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무조건적으로 그의 백성들을 선 택하여 구원을 베풀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구원을 원하고 또한 구원을 얻 고자 노력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가 구원 받아 천국에 가는 것은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그 예로 바울은 구약 출애굽기에 나오는 애굽 왕 “바로”를 들고 있습니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 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17절). 이 말씀의 배경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선택 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자 하실 때 애굽 왕 바로를 사용하셨는데 하나님 께서는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애굽 왕 바로나 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죄인들이지만 모 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긍휼히 여기시고 또한 불쌍히 여기시므로 말미암아 그들에게는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셨지만 바로 왕은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지 않으셨으므로 말미암 아 그는 그의 범죄 가운데 구원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바로 왕을 그 의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심에 있어서 나름대로 사용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나님 께서는 바로 왕을 사용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바로 왕의 마음을 강퍅케 하시므로 말미 암아 10가지 재앙을 애굽에 내리시사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셨으며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온 땅에 전파케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바로 왕의 마음에 불신이나 어떠한 악한 것을 만드셔서 그랬다는 말씀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신적 영향인 죄를 절제케 하는 것을 바로에게서 거두시사 바로로 하여금 그의 악한 마음으 로 하여금 죄를 좇도록 놓아두셨다는 의미입니다(맥아더). 결론적으로 바울은 이 첫 번째 가상 질문에 대한 대답을 오늘 본문 18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두 번째 가상 질문은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입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9장 19절을 보십시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이 두 번째 가상 질문은 바울이 17-18절에서 예를 들고 있는 애굽 왕 바로와 연관된 것으로서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그의 주권 속에서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시고 나서 그 사람에게 죄와 불신앙에 대하여 책임을 전 가하실 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맥아더).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불택자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니, 그가 바로를 허물하실 것 없지 않은가?”라는 질문입니다(박윤선).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참 일리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적인 뜻 가 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택하셔서 애굽에서 모세를 통하여 건져주시고 택하지 않은 애굽 왕 바로는 마음을 강퍅케 하셔놓고 어떻게 바로에게 책임을 전가시키시는 것인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20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무슨 말씀입니까? 한 마디로, ‘너 사람아, 너가 무 엇이관대 감히 하나님께 주제넘게 대꾸하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이러한 예를 들고 있습니다.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따질 수 있 냐는 것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 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자기 뜻대로 만들 권한이 없습니까? 천히 만들어진 그릇이 토기장이에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냐고 말대꾸 하며 따질 권한이 있는 것입니까? 그러면서 바울은 바로 왕 같 은 하나님께서 권고하지 않으시고 내버려 두시므로 자신의 악한 마음에 따라 제멋대로 강퍅 해진 악인들을 가리켜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이라고 말하고(21절)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적인 뜻 가운데 사랑하여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켜서는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22절). 그러면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바로 왕같이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에게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22 절).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같이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 릇”에게는 “그(하나님의)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23절).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바로 왕 같은 진노의 그릇에게도 급히 멸절시키지 않으시 고 오래 참으신다는 것입니다(박윤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진노의 그릇들은 끝까지 회 개하지 아니하고 마음을 스스로 강퍅케 하여 악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 성들도 별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사랑으로 사랑하시사 창세전에 선택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많고 많은 세상 모든 백성들 가운데 사랑하시사 예정하시고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하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요 주권적인 은혜입니다. 그러면 과연 진정으로 이 하나 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누리는 “긍휼의 그릇”은 누구입니까? 오늘 본문 24절을 보십시오: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사 예정하시고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하신”긍휼의 그릇”은 바로 “우리”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바울은 자기 자신이나 로마서 편지를 받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 유대인이던 이방인이던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될 것이며 누리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오늘 본문 25-26절에서 호세아 1장 10절과 2장 23절을 인용하고 또한 오늘 본문 27-29절에서는 이사야 10장 22절을 인용하면서 결론적으로 바울은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롬 9:27). 즉,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적인 뜻 가운데 선택한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들만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백성들이 유대인이던 이방인이던 상관이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들(24절)로서 그들의 아무 공로 없이 하나님의 전적인 주 권적인 선택과 은혜로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나 저와 여러분들에게 던지고 있는
도전적인 질문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입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9장 19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 리니.” 이 질문은 무슨 의미입니까? 만일 우리가 이미 묵상한 바울의 두 가상 질문들이 하나님의 주권적이며 무조건적인 선택(God’s sovereign and unconditional election)에 관 련된 질문 이였다면 이 세 번째 도전적인 질문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God’s irresistible grace)와 관련된 질문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 혜란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란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인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처럼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기로 작정하 신 사람이 그리스도를 아니 믿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인터넷).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타락(전적타락)한 사람들 중 아무 조건 없이 선택(무조건적 선택)한 그의 사람들에 게 믿음을 주시기로 작정하셔서 주실 때에 그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은혜를 저항 할 수 없 고 믿음의 선물을 받아 예수님을 믿을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불가항력적 은혜). 바울은 오늘 본문 19절 하반절에서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누가 감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저항할 수 있느냐’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창세전 에 선택하여 구원하시고자하시는 그 주권적인 뜻을 누가 저항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여 기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선택한 자들을 “부르신 자”들로(24절), 그리고 “남은 자” 들로(27절)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결론은 하나님께서는 그가 부르신 자들, 남은 자들 만 구원을 얻게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27절). 그런데 이 하나님의 구원의 열심을 누가 저항 할수 있겠냐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정하신(예정) 사람들을 부르실 때 그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거부) 혹은 저항할 수가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바울 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 셨느니라”(28절).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그가 말씀하신대로 완전히 이루시고야 만다는 말씀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들만, 즉 그 가 창세전에 선택한 자들만 구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반듯이 그리고 완전히 이루시고야 마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즉 저와 여러분이 무슨 말 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14절)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의 은총에 아무 할 말이 없는,
제임스 김 목사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에 감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