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로마서 7장 14-25절 말씀 묵상]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을 잘 지키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마음속에 사단의 생각 이 들어오려고 할 때에 여러분의 마음을 잘 지키고 계시는지요? 기독교 상담 목사님이신 ‘하인리하 아놀드 목사님이 지은 “생각지킴”(Freedom From Sinful Thoughts)라는 책이 있 습니다(인터넷).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 안에 수 없이 들어오는 악한 생각들, 그 생각들을 방치하고 놓아두면 그 악한 생각들이 자라나 결국은 죄악된 행동의 열매를 맺게 되므로 그 생각들과 맞붙어 싸워서 분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악한 생각을 자발적으로 즐기는 순간, 우리도 미처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우리는 어둠의 세력에 서 농락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행동의 변화는 생각의 변화에서 출발하기에 죄악된 생각으 로부터 자유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과연 우리 안에 생각의 영역에서 우리는 어떻게 악한 생각을 싸워 이길 것입니까? 이 치 열한 내적싸움에서 우리는 어떻게 승리할 수가 있습니까?   저자는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지 말고 대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예수님의 승리의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라고 말하고 있습 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확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 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예수님의 승리의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생각의 영역에서 내적 싸움에서 승 리할 수 없음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 음으로 그리고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선한 생각으로 악한 생각을 싸워 이겨야 합니다. 그 선한 생각이란 하나님의 생각이요 성경 말씀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 는 우리 자신과의 내적 싸움에서 이리저리 패하여 원치 않는 죄를 범할 때가 있습니다. 분 명히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 대로 살기를 원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자신이 악한 생각으로 말미암아 사단의 미혹에 넘어가 죄를 범하는 자신의 모습을 볼 때 얼마나 괴롭습니까?

 

오늘 본문 로마서7장24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의 내적 싸움에서 이러한 고백 을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로 나누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오호라 나 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왜 바울은 자기 자신을 곤 고한 사람, 즉 비참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자신의 “사망의 몸” 때문입 니다(24절). 이 “사망의 몸”이란 무엇입니까? 이것은 “죄의 몸”(6:6)이요 또한 “죽을 몸”(12절)을 가리킵니다. 이 죄의 몸 또는 죽을 몸은 “옛 사람”의 몸으로서(6절) “몸의 사 욕”(12절)과 “죄의 정욕”(7:5)에 좇는 몸입니다. 그리고 이 옛 사람의 몸이 순종하는 법이 있는데 그 법은 바로 “죄의 법”입니다(23절). 이 죄의 법은 바울로 하여금 원치 않는 죄를 범하게 만들고 있었기에(15, 16, 19, 20절)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그는 옛 사람의 몸이 순종하고 있는 “죄의 법”과 예수님 안에 서 새 사람이 되어 그의 속사람으로 즐거워하며 순종하는 “하나님의 법”(22절)과 싸우고 있 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한탄하며 괴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 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새 사람이 되어 자기의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있는데(22절) 자기 지체 속에 또 다른 죄의 법이 자기로 하여금 자꾸만 원치 않는 죄악을 범 하게 하므로 말미암아 바울은 곤고하였습니다. 바울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여 선을 행하기를 원하고 있는데(19, 21절) 죄의 몸인 육체로는 자기가 원하는 선한 것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19절)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24절)라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한탄이 아닙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볼 때 바울처럼 마 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여 선을 행하고 싶은데 자꾸만 원치 아니하는 죄악을 범하는 우리 자신을 모습을 보면서 저와 여러분은 곤고함 가운데 우리 자신에게 실망하며 괴로워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이런 자신과의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 안에서는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23절). 이 두 법이 우리 안 에서 지금도 계속 서로 충돌하고 있습니다. 그 한 예를 든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 는 우리 마음으로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인 ‘탐심하지 말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 다. 그리고 우리는 마음으로 (우리 속사람은) 예수님 한 분으로만 만족(자족)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빌4:11). 그런데 우리의 마음과 달리 우리의 육체는 ‘탐심하라, 예수님 한 분으로 만 만족하지 말고 예수님 + 알파를 추구하라’고 계속 우리 생각과 마음에 외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 우리는 시편 기자 아삽처럼 악인의 형통을 보면서 부러워(질시)할 때가 있습니 다(시73). 왜 저 악인들은 고통과 고난도 없고 건강하며(시73:4-5),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가(7절). 그런데 ‘왜 나는 이렇게 궁핍하게 고난과 고통을 당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우리는 악인들이 항상 평안하고 재물을 더하는 모습을 보면서(12절) 탐 심과 욕심이 우리 안에서 생기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할지라도 우리는 압니다. 아삽처럼 탐심의 죄악된 열매를 맺지 않고 죄를 범치 말아야 하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불구 하고 이 탐심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할 때 결국 이 욕심이 자라나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자 신의 모습을 볼 때도 있습니다(약1:15). 그 때 우리는 양심의 가책 속에서 괴로워하곤 합 니다. 그러다가도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사랑의 징계를 우리 를 치실 때에 우리 는 그 징계를 받으므로 말미암아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께 나아와 용서 를 구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은 아삽처럼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 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25절)라고 고백하면서 참 예수님 밖에 없구나 라고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내적 싸움 또는 영적 싸움 가운데서 바울은 오늘 본문 17절과 20절에서 이 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 라”(17절);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20절). 바울은 자신의 내적 싸움 가운데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 것이 “내 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면서 죄를 범하는 하나의 핑계로 삼아서는 아니 됩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책임 중 하나를 성경 고후7장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 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우리가 우리의 책임인 하 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 러운 것에서 우리 자신을 깨끗케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책임을 감당하지 않으면서 범죄하고 나서 내 속에 거하는 죄가 그렇게 죄를 범한 것입니다 라고 말할 순 없습니다.  그러 나 분명한 사실은 바울처럼 이미 예수님을 믿어 새 사람이 된 우리 안에 내재하는 죄성은 우리로 하여금 원치 않는 죄악을 범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 백서 제13장2조의 “성화론”에 말하기를 “신자의 성화가 온 인격에 관계되어 있으나, 현세 에서는 인격의 모든 부분(영혼도)에 부패가 남아 있으며, 따라서 계속적으로 부조화의 전쟁, 곧 영과 육(몸이 아니고 부패한 성질)의 충동이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거듭난 자도 죄를 범한다는 것입니다(박윤선). 그래서 바울은 자기 속에 거하는 죄로 인하 여 원치 않고 미워하는(15절) 악을 행하는(19절) 자신의 모습을 보기에 “오호라 나는 곤고 한 사람이로다”라고 한탄하였습니다.

 

과연 바울처럼 곤고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직 구원자이신 예 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 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24절)라고 말하면서 오늘 본문 25절에 와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는 모습을 우리는 봅니다. 어떻게 사도 바 울은 낙망과 좌절과 슬픔 속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한탄하다가 하나님 께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사망의 몸에서 건져 내시고 구원해 내시는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사망의 몸, 죄의 몸을 멸하여 저와 여러분들로 하 여금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게 하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6:6)으로 말미암아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연약한 모습,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길 원하지만 육체로는 죄의 법을 좇아 하나님께 죄악을 범하는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보면 낙심과 좌절과 절망 속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한탄 할 수밖에 없지만 우리의 죄의 몸을 멸하시고자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자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에는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과 즐거운 영원 한 소망이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즐거운 영원한 소망은 무 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5:2). 저와 여러분이 소망하는 “하나님의 영광”이란 예수님 재림 하시는 날 우리가 홀연히 변화되어(고전15:51) 더 이상 욕되지 아니 하고(43절), 약하지 않으며(43절), 썩지 아니하고 죽지 아니하는(54절) “영광의 몸의 형체” 를 입을 것(빌3:21)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신의 성품”(벧후1:4)에 참예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성품에 온전히 참예할 것입니다. 이미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 님께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 우리는 예수님의 성품에 참예하도록 우리를 거룩하게 성화시켜 주고 계십니다. 비록 지금은 온전하지 않지만 예수님 재림하시는 날 우리는 온전히 주님의 성품에 참예하게 될 것입니다. 이 확실하고 즐거운 소망을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셨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 습니다. 바라기는 이러한 감사하는 마음 가운데 우리 모두 영적 전쟁을 신실하게 믿음으로 잘 싸우십시다. 우리 마음의 하나님의 법을 더욱더 즐거워하므로 그 법에 순종하여 선을 행하기를 힘쓰십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으로 죄의 법을 물리치십시다. 선으로 악을 이 기십시다. 비록 우리 안에 죄성이 죄의 법을 즐거워하여 우리로 하여금 원치 않고 미워하 는 악을 자꾸만 행하게 하려고 할지라도 마음으로 원하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면서 선을 행하므로 말미암아 선으로 악을 이겨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내적 싸움 가운데서 심신이 피곤할 때에 오히려 더욱더 주님을 믿음으로 겸손히 바라보길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의 충돌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승리를 믿음으로 전전해 나아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