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선물을 받은 자들로서의 합당한 삶 (1)
[로마서 6장1-11절 말씀 묵상]
이미 우리는 로마서 5장 12-21절 말씀 묵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이 영생임을 배웠습니다. 이 영생의 선물을 받길 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를 믿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그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어(롬10:9) 이 최고의 선물인 영생을 내 세에서 뿐만 아니라 현세에서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영생의 축복을 아직 받지 못하신 분 들이 있으시면, 오늘 이 영생의 축복을 받으시길 기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또한 여러분들을 의롭 다 하시고자 죽으신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셨음(4:25)을 믿으십시오. 이 예수 그리스 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선물인 영원한 생명을 저와 여러분에게 주실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 중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영생의 축복을 받은 분들은 이 영생의 축복은 내세에서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 이 땅에서의 삶 가운데서도 부분적으로나 누릴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영생의 축복을 누리고 계십니까? 여러분 은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 살아가면서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을 부분적으로나마 누리고 계십 니까?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성화의 역사 속에서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축복을 누리고 계십니까? 또한 성령님의 열매인 사랑의 은사를 누리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 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천국에서의 사랑의 삶을 부분적으로나마 누리고 계십니까? 또한 평 화가 없는 이 세상에 살아가시면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며 살아가고 계 십니까? 이 모든 영생의 축복을 부분적으로나마 이 땅에서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된 것 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5:15). 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면 될 수록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성경 로마서 6장1-11절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영생이란 최고의 선물을 받는 자들로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영생의 선물을 받은 자들로서의 합당한 삶을 한 2 가지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영생의 선물을 받은 자들로서의 합당한 삶은
죄에 대하여 죽은 자 로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6장 11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 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여기서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며 살아간다는 말씀은 어떻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 까?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며 산다는 것은 죄에 거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6장 1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 에 거하겠느뇨.” 여기서,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은 죄에 거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더 이상 죄가 사망 안에서 더 이상 왕노릇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5:21).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죄가 더 이상 영생을 얻는 자들을 주관 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6:14). 이제 영생의 선물을 받은 저와 여러분의 삶에는 죄나 사망이 더 이상 우리를 주장 하지 못합니다(6:9). 이 말씀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들 수 있는 예는 창세기 4장7절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열납 하시고 가인의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 하시므로 말미암아(4-5절)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였던(6절) 가인에게 하나님 께서 “선 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내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 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결과는 가인은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동 생인 아벨을 죽였습니다(8절). 이렇게 죄를 다스리지 못하는 삶, 다스릴 수도 없는 삶이 바 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의 삶의 모습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기 전에 우리의 삶은 죄 가 우리를 다스리고 주관하였습니다. 죄가 왕노릇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지도 않았습니다(3:9). 아니,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 보 시기에 합당한 선을 행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의롭다하심을 받 고 영생 복락을 누리면서부터 더 이상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바로 우리가 죄에 대하여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6:2). 달리 말한다면,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므로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6절) 더 이상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하지 못하고 우리를 주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이미 죽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사람이 죽은 것을 알려면 시신을 보면 알 수 있습 니다. 어느 누구도 장례식에 참석하여서 사늘한 시신으로 관에 누워있는 사람을 보면서 살 아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숨을 거두고 관에 누워있는 시신을 보면서 그 사람은 숨을 거두고 죽었다는 사실을 압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예수님 께 약 2,000년 전 십자가에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자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죽으심을 믿음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사람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흘려 죽으심은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음을 증명해 줍니다. 이것을 바울은 성 도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3, 4절), ‘예수님과 함께 장사되었다’(4 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한 마디로 예수님과 연합함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예수님과의 연합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단번에 죽으심”으로써 (10절) 우리의 옛 사람 또한 예수님의 죽으심 속으로 들어가 죽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 하면,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하여 죽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와 우리 와의 관계도 죽은 것처럼 결국 단절된 것입니다(박윤선). 그래서 바울은 오늘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본문 6-7절 에서 이렇게 분명히 그들에게 말해주었습니다: “우 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 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 을 얻었음이니라.”
우리의 옛 사람, 예수님 믿기 전에 육에 속한 사람, 육체의 욕심 속에서 육에 일을 하면서 죄를 범하던 저와 여러분의 옛 사람은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죄가 또한 사망이 우리를 주장하며 주관하지 못할 뿐 아 니라 할 수도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연합한 신자들은 이미 옛 사람이 죽었기에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에서 자유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찬송하는 것입니다(찬송가202장): (1절)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주 의 보혈 시험을 이기는 승리 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후렴) “주의 보혈 능력있도다 주의 피 믿으로 주의 보혈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그러면 이렇게 우리가 주님 의 보혈로 죄에서 자유를 얻었는데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계속 죄를 짓는 것입니까? 이미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하여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죄를 지는 것입니까? 이것을 바울의 신학으로 설명한다면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고 또한 앞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미”(Already)와 “아직도”(Not-yet)라는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다시 말 하면,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지만 구원의 완성은 예수님 재 림하실 때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 다시 오시는 날 우리는 홀연히 변화되어 영광스러운 몸을 입을 것입니다. 그 때는 죄를 짓지도 않을 뿐 아니라 죄가 무엇인지도 모 르는 영광스러운 영적인 강한 몸을 입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까지는 우리기 "이미"와 " 아직도" 사이인 교회 시대(Church Age)에 살아가면서 우리는 죄와 계속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승리의 교회요 또한 전투적인 교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영적 싸움에 임해야 하는 것입니까?
-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아마 공로 및 자격이 없는 경건치 못한 자요, 죄인이요 하나님과 원 수 되었던 자들인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영생의 축복을 주시고자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 가에 죽게 하시기까지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 싸움에 임하면서 이 하나님의 은혜에 더욱더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 둘째로,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고자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 그의 십자가의 피 흘려 죽으시므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으면 하나님과 화목케 되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면서 교제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셋째로, 우리는 이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은혜를 헛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오늘 성경 로마서 6장 1-2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하나님 의 은혜를 헛되이 하지않기 위해서 죄에 대하여 죽은 자처럼 더 이상 죄 가운데 살아서는 아니 됩니다. 특히 이부분에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말씀(5:20)을 잘못 이해하여서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더하다는 것을 깨닫고자 더욱 죄를 지어서는 아니 됩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생각이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강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2절). 어떻게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 가운데 살 수가 있습니까? 진정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은혜를 깨달아가는 신앙인들은 그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고자 죄와의 단절된 생활을 하고자 힘씁니다.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하여 죽은 자처럼 여기면서 신앙생활 합 니다. 특히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연합한 자들로서 죄가 자기 자신을 주관하지 못하 게 합니다. 성령님의 역사 가운데 죄를 다스리며 살아갑니다.
여러분,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임을 명심하십시다. ‘나는 죄에 대하여 송장이 다’라고 우리 자신에게 외치십시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서 죄가 더 이상 사망 안에서 왕노릇할 수 없음을 명심하십시다. 그러한 가운데 죄의 유혹에 넘어가 죄를 범할 때에라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우리 자신은 죄에 대하여 죽은 자임을 기억하십시다. 우리가 가끔 말하던지 듣는 말 중에 ‘죽은 사람처럼 조용히 살자’라 는 식으로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로서 죄와는 멀리 떨어져서 사십시다. 비록 죄가 우는 사 자처럼 우리를 먹으려고 가까이 다가와 달려들지라도 예수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 여 싸워 이기십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하셨기에 우리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주님의 크신 은혜를 더 이상 헛되게 하지 않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