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다.

 

 

[로마서1장15-17절 말씀 묵상]

 

 

여러분이 하나님께 마음의 편지를 쓰시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요? 저의 간절한 기도 제목은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입니다. 특히 1987년도 5월 대학부 수련회 때 주님께서 저를 부르시면서 주신 요한복음 6장 1-15절 말씀대로 오병이어 와 같은 저를 받아 주시사 주님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시길 계속 기도해 오고 있습니다. ‘주님, 저를 통하여 오병이어의 역사를 이루어 주시옵소서’라고 계속 기도해 오는 중에 저는 저의 삶과 또는 저의 죽음을 통해서라도 오병이어의 역사를 이루실 수 있다는 확신이 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낙심하지 않고 기도하며, 기대하며, 오늘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 쓰임 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으로 저는 좀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이렇 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의 불타는 전도자와 위로자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제 가 이렇게 기도하는 이유는 저는 예수님을 전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마음을 원하기 때 문입니다.  또한 그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자로서 위로자 바나바처럼 그 사랑으로 제 이웃 을 위로하며 살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태껏 제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면 과연 나는 주님의 사랑의 불타는 전도자와 위로자로서 제대로 살아드리고 있는가 생각해 볼 때 주님의 위로의 도구론 조금 쓰임 받는다는 생각이 들지만 제 자신이 주님의 사랑으로 불타는 전도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영혼,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할 뿐만 아니라 마음과 입술을 열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들에게 전해야 하는데 마치 벙어리처럼 살아가는 제 자신의 모습을 볼 때 괴롭고 또한 부끄러운 마음이 있습니다.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생각해 볼 때 제 안에 예수 그리스 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1장16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 노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읽고, 생각할 때마다 저는 어떻게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담대히 선포했을까 라는 의문이 듭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도 바울 처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담대히 전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궁금하지 않으십니 까? 만일 저처럼 여러분도 복음을 부끄러워하신다면 오늘 본문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바울처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담대히 선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되 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부끄러움”하면 한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사람이 자기 의 소유가 무가치하여 부끄러워할 수 있고, 둘째로는, 사람이 자기의 성질이 겁약하여 부끄 러워할 수 있습니다(부끄러움을 잘 타는 성격)(더글라스 무). 저나 여러분이나 성격상 부끄 러움을 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소유한 것이 별 가치가 없다고 생각되 어 부끄러워하는 경유가 있을까요? 예를 들자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소유한 믿음, 하나님 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인하여 부끄러워하신 적이 있나요? 즉, 여러분은 여러분이 예 수님을 믿는다는 사실로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워하신 적이 있습니까?   혹여 여러분은 여러 분이 교회를 다니고 있다는 사실로 창피함을 느끼신 적이 있습니까? 또는 혹시 여러분은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 부모님이나 가족, 친척 식구들로 인하여 부끄러워하신 적이 있으신 지요? 혹시 지금 우리는 금보다 더 귀한 믿음의 가치를 가볍게 여기므로 말미암아 믿음 생활을 부끄럽게 여기지는 않았는지요? 만일 저와 여러분에게 최고의 기쁜 소식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최고의 소식을 부끄러워하겠습니까 아니면 그 기쁜 소식을 전하 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겠습니까? 그 최고의 기쁜 소식은 바로 “복음’이라고 성경은 말씀하 고 있습니다. 과연 이 최고의 소식인 복음은 무엇입니까? 복음이란 우리가 이미 묵상한 로마서1장2-4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가리 킵니다.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시사(3절)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 우리 죄를 사하시고자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 3일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시므 로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는 저와 여러분을 의롭다 하신 그 예수님 (4절)이 바로 복음의 핵심 내용입니다.

 

바울은 이 최고의 기쁜 소식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16절). 어떻게 바울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바울은 복음에 대한 완전한 신뢰(complete confidence)가 있었기 때문입니다(더글라스 무). 이 복 음에 대한 완전한 신뢰란 오늘 본문 16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바로 “…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 …”을 절대적으로 믿는 것을 말합니다(16 절). 즉, 바울은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을 전적으로 신뢰하였었기에 그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과연 저와 여러분은 이 복음의 능력을 믿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는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을 믿고 있는지요? 많은 때에 우리는 예수 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복음을 나누고 싶어 하지만 좀 머뭇머뭇 거리는 이유 중 하나는 복음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우리 안에 불신 때문입니다.   이러한 불신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전하지 못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바로 전하기 보다 우리는 우리의 지혜나 경험이나 능력을 의지하여 이런 저런 사람의 말로 전도하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저 성경에 쓰여 있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 그대로 전하 면 되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그대로 전하기를 기피하는 것은 복음이 믿는 자 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복음 자체를 지 혜롭게 담대히 잘 전하면 하나님께서 선택한 심령이라면 언젠가는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그 의 마음 문을 열어주시사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받게 하실 것인데 우리는 이러한 단순한 믿 음(simple faith)이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전도는 사람의 인위적인 방법이 더 많이 사용되어 전도를 하고 나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 사 람의 능력이 나타나므로 우리 자신이 그 영광을 받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우리는 사도 바 울처럼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을 전 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즉, 우리는 복음의 능력, 하나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믿음으로 복 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이 복음의 능력,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모든 믿 는 자에게" 나타날 것입니다(16절). 여기서 “모든 믿는 자에게”란 말씀은 이 땅에 독생자 를 보내시사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자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시므로 죄인을 의 롭다 하시는 하나님(4:5)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저와 여러분이 복음의 능력을 믿음으로 담대히 전할 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사 창세전에 선택한 모든 사람 에게는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우리가 전하는 예수님의 복음을 받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 모든 사람이 유대인이던 헬라인 이던 어느 나라 어떠한 민족이던 하나님께서는 그가 선택한 백성들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셔 서 복음을 받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할 때 기도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합 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주신 것처럼(행16:14) 하나님께서 우리 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주셔야만 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셔야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 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 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까? 그 대답을 우리는 오늘 본문 로마서 1장 17절에서 볼 수 있습 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 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저와 여러분이 전하는 복음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이유는 그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씀 하고 있는 “하나님의 의”(the righteousness of God)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의”란 공의로 우신 하나님께서[Justice (an attribute of God)] 하 나님과 원수가 된 연약한 죄인들인 저와 여러분을 마땅히 심판 하셔야 하지만 오히려 독생 자 예수 그리스도를 죄 없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보내시사 십자가의 죽게 하시고 그 를 무덤에서 부활케 하시므로 말미암아[an activity of God(the saving action of God)] 그 예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을 의롭다 칭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시 켜주는 것[a status given by God]을 의미합니다(더글라스 무). 이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 있으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그 하나님의 의가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전가(impute)되어 이젠 더 이상 하나님과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회복되 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의로운 삶, 즉 올바른 일을 행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부터 더 이상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도 아닐 뿐더러 우리의 모든 죄가 예수 십자가의 흘리신 보배로운 피로 다 사함을 받아 이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의로운 삶, 즉 올바른 일을 행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즉, 이제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사람이 다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17절). 여러분,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의 그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만 살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의인들 로서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 음으로 그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담대히 선포하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저와 여 러분을 통하여 더욱더 충만이 일어나길 기원합니다.

 

엘튼 츄루블러드(Elton Trublood) 교수는 ‘재건을 위한 준비’라는 소책자에서 신앙 의 참 원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신앙의 참 원수는 ‘비 신앙’이 아니라 ‘희미한 신앙’이라 말하며 ‘복음에 대한 확신이 없이 교회에 참여하면서 오히려 교회에 대해 오만한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는 교회가 교회다운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부끄 럽지 않는 사람들의 모임’이 되어야 한다고 결론지었습니다(인터넷). 그렇습니다! 교회는 참으로 ‘부끄럽지 않은 사람들의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서 기도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들,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고통당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그리스도를 증거함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의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신앙인들이 되길 기원합니다. 또한 사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사랑의 불타는 전도자와 위로자가 되길 간절히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복음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복음 전파에 힘을 쓰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