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육신이 되어” (8)

 

 

 

[요한복음 11-4, 9-14]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의 뜻은 그들이 섬김을 받으라는 것이었나요 아니면 섬기라는 것이었나요? 답은 하나님의 뜻은 섬기라는 목적으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잘 섬겼을 텐데 창세기 3장에 가서는 여자 하와가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한 뱀(창3:1)에게 미혹을 당합니다. 그 미혹에 핵심은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5절). 사탄인 뱀이 왜 여자 하와를 이렇게 미혹을 했을까요? 그 이유는 타락한 천사요 악한 천사인 사탄 자신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과 같아지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14장 12-14절 말씀입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사탄은 “내 자리를 높이”길 원하며, 그 높은 자리에 앉기를 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과 같아지길 원합니다. 그래서 사탄은 뱀으로 가장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창2:9)의 열매를 먹게 만들려고 하와를 미혹함에 있어서 “너희가 …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3:5). 그 미혹에 넘어간 하와는 결국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었던 남편 아담에게 주므로 그도 그것을 먹었습니다(6절). 뱀으로 가장한 사탄의 미혹에 넘어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언약 계명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는 말씀(2:17)에 불순종하여 죄를 범하므로 죄가 이 세상에 들어 왔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습니다(롬5:12). 결국 한 사람인 첫째 아담의 범죄로 인해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므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고, 죄로 인해 사망이 들어오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되었습니다(12절).

 

사탄의 미혹의 핵심은 우리가 높아지는 것이요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섬김을 받는 것입니다. 그 좋은 예가 요한삼서 1장 9-10절에 나오는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입니다: “나는 이 일이 대하여 그 교회에 편지를 몇 자 써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서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가 행한 일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는 악한 말로 우리를 헐뜯고 그것도 부족하여 순회 전도자들을 접대하지 않으며 접대하고자 하는 사람들까지 못하게 하고 그들을 교회에서 쫓아내고 있습니다”(현대인의 성경). 디오드레베는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순회 전도자들을 접대하지 않으며 접대하고자 하는 사람들까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서는 디오드레베와 같이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낮은 자리보다 높은 자리에 앉아 대접하기보다 대접 받기를 좋아합니다. 사탄은 이러한 사람들을 미혹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죄를 짓게 만들므로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지 못하게 만들고(빌4:2)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교회의 연합성을 힘써 지키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엡4:3).

 

그러나 “둘째” 아담이시요 “마지막 아담”(고전15:45, 47)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첫째 아담 안에서 죄로 인해 죽음에 이른 우리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시되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빌2:6-7). 마태복음 20장 28절 말씀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33년 인생은 한 마디로 ‘섬김의 삶’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을 뿐만 아니라 굶주린 사람들을 먹이시고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등등 그 분은 사람들을 섬기시는 삶을 사셨습니다. 섬기시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주시기까지, 즉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시기까지 섬기셨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 6절 말씀입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여기서 “그”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신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가리킵니다(5절).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를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구약 성경 출애굽기 21장 28-36절을 보면 키우던 소가 사람을 들이받는 버릇이 있는 것을 알고도 소 주인이 이를 방치하여 사고가 생겼을 때 소와 소의 주인이 함께 돌로 쳐 죽임을 당하는 사형을 당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소 주인이 사고의 위험을 알면서도 이를 방치했기에 주인은 사람을 들이받아 죽인 소 주인으로서의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예외 규정이 있었는데 그것은 소 주인이 죽은 사람에 대한 배상금을 재판장이 정한만큼 내게 되면 풀어줄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가족의 생계문재가 결부되기 때문입니다[만일 소에 받혀 죽은 사람이 그 집의 가장일 경우 그렇게 소와 그 소 주인을 죽여 원한은 풀 수 있겠지만, 남은 가족은 당장 생계의 위험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고를 낸 사람 역시 마찬가지로 소 때문에 그 집안의 가장이 죽임을 당하게 되면 그 집의 남은 식구 역시 살아갈 일이 막막하게 되기에(인터넷)]. 그래서 소 주인이 죽은 사람에 대한 배상금을 재판장이 정한만큼 내게 되면 사형(죽음)에서 면제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구약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속죄물”을 이해하면 예수님께서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다는 디모데전서 2장 6절 말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종이나 전쟁 포로들이나 노예들이 노예 시장에 팔려고 나왔을 때 그 노예 몸값을 주고 사서 그 노예를 자유롭게 해주는 것처럼, 첫째 아담의 범죄로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어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렀던 우리를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하시고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흘리신 보배로운 피로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에베소서 1장 7절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아 죄에서 자유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섬김의 삶을 살되 우리도 예수님처럼 목숨까지 받칠 수 있는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즉, 우리는 예수님처럼 죽기까지 섬겨야 합니다(빌2:8). 그런데 우리는 연약해서 그렇게 섬김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다시 말하면, 섬기시는 영이신 성령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사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본받아 섬김의 삶을 살도록 하십니다. 로마서 8장 26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 성령님께서는 기도만 도와주시는 게 아니라 우리가 성령님으로 행해야 할 모든 것을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는 모든 일을 주님 안에서 아름답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충만함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눅11:13). 우리는 술 취해서 방탕하지 말고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서(엡5:18) 예수님처럼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예수님처럼 섬김의 삶을 살 때 개인적으로 기쁨과 감사가 넘칠 뿐만 아니라 가정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천국을 이루어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본 받아 섬김을 받으려고 하기보다 섬기는 일에 힘써서 자신과 가정과 교회뿐만 아니라 주님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