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육신이 되어” (7)
[요한복음 1장 1-4, 9-14절]
“말씀”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육신”(사람)이 되신 세 번째 목적은 죽으시기(화목 제물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에 있어서 누군가가 대신 죽어야 했습니다. 우리 사람으로는 대신 죽을 수가 없고 천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셔서 죽으시므로 우리를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 말씀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여기서 “인자가 온 것”이란 말씀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을 말씀합니다(요1:14). 그 목적은 2가지입니다: (1) 첫 번째 목적은 섬기는 것, (2) 두 번째 목적은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는 것.
오늘은 첫 번째 목적인 ‘섬기는 것’에 대해서 묵상을 하고 다음 주 수요기도회 때 두 번째 목적인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는 것’에 대해서 묵상하려고 합니다. 우리 사람의 본능은 섬김을 받으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섬김을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고 오셨습니다. 우리가 섬기려면 우리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은 높여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 3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것 자체가 낮아지신 것입니다(우리는 결코 이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다 헤아릴 수가 없음).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실 정도로 낮아지심은 우리가 개나 돼지가 된다는 것과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낮아지심입니다. 성자 예수님이 얼마나 낮아지셨는지를 말씀하고 있는 빌립보서 2장 6-8절 말씀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의 본체시요 하나님과 동등 되신 분이신 하나님(“말씀”)이 사람(“육신”)이 되신 것이요, 종이 되신 것이요,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낮아지시되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 당시 십자가형은 그 형벌의 가혹함 때문에 항상 하류계층에게만 적용되었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형을 받은 것은 당시 그의 사회적 지위를 말해줍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나 당시 사회의 하류계층에 속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인터넷). 이렇게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낮추사 섬기셨습니다.
성자 예수님이 얼마나 낮아지셨는지를 말씀하고 있는 요한복음 13장 3-1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12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까지 섬기셨습니다. 특히 13-14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하나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실 정도로 낮아지셔서 섬기신 것처럼 우리도 낮아져서 서로 발을 씻어 줄 정도로 겸손히 서로를 섬겨야 합니다. 빌립보 교회는 여성 지도자들이 예수님처럼 겸손히 낮아져서 서로를 섬기지 않았습니다. 먼저 빌립보 교회의 배경을 보면 자주 장사를 하던 루디아란 여자가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서 전도할 때 주님께서 그녀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어(행16:14) 그 집에서 모임이 시작된 것이 빌립보 교회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그 빌립보 교회에는 루디아 같은 여성 지도자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두 여자의 이름이 빌립보서 4장 2절에 기록돼 있습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사도 바울이 두 번이나 ‘권하다’라는 말을 사용한 것을 보면 그가 강조한 것은 그 두 여인인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두 여인은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지 못하고 갈등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두 여인은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2:3). 그들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지 못했습니다(엡 4:3). 그래서 빌립보 교회가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두 여인에게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강하게 권면한 것입니다.
혹시 지금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는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가 가정과 교회의 하나됨을 잘 지켜 나아가기 위해선 예수님처럼 낮아지고 낮아져서 섬겨야 합니다. 우리는 가정과 교회에서 섬김을 받으려고 하기보다 섬겨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면서 섬겨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처럼 죽기까지 섬기면(빌2:8) 우리 가정과 교회의 하나됨을 잘 지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죽기까지 섬기지 못했으면 섬겼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겸손히 낮아지셔서 죽기까지 섬기신 결과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9-11절). 예수님은 지극히 낮아지시기까지 섬기시므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지극히 낮아지기까지 섬겨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