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육신이 되어” (5)
[요한복음 1장 1-4, 9-14절]
왜 “말씀”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육신”(사람)이 되셨습니까?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 목적은 세 가지입니다: (1) 우리 가운데 거하시려고, (2)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가 되시기 위해서, (3) 화목 제물이 되시기 위해서.
“말씀”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육신”(사람)이 되신 첫 번째 목적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여기서 ‘거한다’라는 단어의 뜻은 ‘장막을 치다’ 또는 ‘장막에서 산다’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장막”이란 단어가 제일 먼저 나오는 성경구절은 창세기 4장 20절입니다: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야발이라는 사람이 장막에 거주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창12:1-3)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줄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갔을 때(그의 나이 75세) 그는 자기 고향에 있었을 때처럼 집을 져서 살지 않고 장막을 치고 살되 한 100년(그가 175세에 죽었기에)이나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그의 자손들에게 주셨기에 아브라함은 나그네로서 가나안 땅에서 장막을 치고 한 100년 동안 살다가 그의 나이 175세에 죽었습니다(25:7). 출애굽 당시에도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막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출애굽기 25장 8절과 26장 1절 말씀입니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 너는 성막을 만들되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을 정교하게 수놓은 열 폭의 휘장을 만들지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거할 성소 또는 성막을 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성소 또는 성막에는 휘장이 있었는데 그 목적은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기 위해서입니다(26:33).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지성소에 거하기기 위해서였습니다. 성소에는 일곱 등잔대가 있어서 밤낮 성소를 환하게 했지만 지성소에는 등잔대가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거하고 계셨기에 환하게 밝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 왕은 7년 동안 성소를 지었습니다(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했습니다).
신약 성경을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성소/성막/성전에 거하시지 않고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1:14). 마태복음 27장 51절 말씀입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성소에 있는 휘장에 찢어져 둘이 되므로 사람들이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고, 지성소에 계시던 하나님께 성소에도 계시므로 사람들과 함께 거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마태복음 1장 23절 말씀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강생하기 약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사7:14)으로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임마누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오늘 이 시대에 성전은 어디에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6장 19-20절 말씀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성경은 우리의 몸이 “성령의 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시고 또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성자 하나님께서도 계십니다. 함께 계시되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8:20). 왜 말씀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까?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3가지입니다:
(1)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보기를 원하여 하나님께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출애굽기 33장 18절 말씀입니다: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마치 자녀가 부모의 얼굴을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인 모세는 하나님을 간절히 보고 싶어서 그리 간구했지만 하나님의 답변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였습니다(20절). 그래서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님이 하나님을 보여주시고자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빌립도 하나님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요14:6-7)고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빌립은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8절). 그 때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9절)[(현대인의 성경)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있었는데도 네가 나를 모르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인데 어째서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느냐?”]. 요한복음 1장 18절 말씀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품안에 계시는 외아들이 그분을 알리셨다”]. 하나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심은 하나님 아버지를 나타내시고자 입니다. 여기서 “나타내셨으니라”는 단어는 분명하게, 자세하게, 감추인 것을 다 보여주셨다는 의미입니다. 독생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하나님 아버지를 더욱 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이지만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19절 말씀입니다: “이에 그들이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이렇게 말씀이신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첫째 목적은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보여주시고자 입니다.
(2) 우리를 아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신데 어찌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르시겠습니까.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성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아시고자 사람이 되셨습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지식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안다는 의미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셨다는 말씀은 죄를 체험적으로 알지 못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지어보신 적이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십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죄로 삼으신 목적은 우리를 의롭다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히브리서 2장 9절 말씀입니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음의 고난을 받으셨고 실제로 우리를 위하여 죽음을 맛보셨습니다. 성경의 교훈은 그저 지식으로만 알지 말고 맛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38편 8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 베드로전서 2장 3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주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아야 합니다. 맛보면 맛볼수록 더욱더 사모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체험적으로 아시고자 말씀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진리를 믿음으로 생각할 때 우리 또한 체험적으로 예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말씀이신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둘째 목적은 우리를 아시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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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말씀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죽음의 고난까지 체험적으로 아시기에 우리를 동정하실 수 있으십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또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넉넉히 도우실 수가 있으십니다. 히브리서 2장 18절 말씀입니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주님은 몸소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시험당하는 사람들을 넉넉히 도우실 수 있습니다”].
말씀”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육신”(사람)이 되신 첫 번째 목적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서입니다(요1:14). 성자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목적은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요, 우리를 아시기 위해서요 또한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을 더욱더 알아가되 지식으로 뿐만 아니라 체험적으로도 더욱더 알아가므로 하나님 아버지를 더욱더 알아가면서, 우리를 제일 잘 아시는 성자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사 우리를 반드시 도와주실 것을 믿고 믿음으로 임마누엘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이 땅에서도 영생을 맛보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