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마태복음 15 장 21-28 절 말씀 묵상]
지난 주 저는 ‘경제적 두려움에서의 자유’(Freedom from Financial Fear)란 책을 읽어 보았습니다. 제가 그 책을 사서 읽은 이유는 책 제목 자체에 관심이 끌렸고 또한 그 책을 쓴 분이 “전도폭팔”이란 전도지를 만든 고 제임스 케네디(James Kennedy)목사님이 쓰셨기 때문입니다. 그 목사님이 그 책에서 강조한 것 중 하나는 바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 많고 많은 약속의 말씀들 중 그가 초점을 맞춘 성경구절은 바로 말라기 3 장 8-10 절이었습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이 성경구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은 바로 10 절 말씀입니다: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무슨 약속의 말씀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한 십일조를 받치면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열고 우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케네디 목사님은 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고(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저자 케네디 목사님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십일조는 경제적(finance) 문제이기보다 믿음(faith)의 문제입니다’("Tithing is not a matter of finance; it is a matter of faith”). 이 말은 우리가 십일조를 하지 못하는(않는) 이유는 경제적으로 수입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인 말라기 3 장 10 절을 (진정으로) 믿고 있지 않기 때문이란 말입니다. 여러분은 케네디 목사님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과연 저와 여러분의 믿음은 크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작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마태복음을 계속해서 묵상해 오면서 제 자신의 믿음이 얼마나 작은가를 좀 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깨닫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 계기란 바로 마태복음 14 장 22-33 절을 우리가 묵상하면서 배에서 내려 물위로 걷다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물에 빠져 가는 사도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이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과연 저와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베드로는 “믿음이 작은 자”입니까? 과연 저와 여러분 같으면 예수님께서 “오라”고 명령하셨을 때 그 말씀에 순종하여 배에서 나와 물 위로 걸어가겠습니까? 그래도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믿음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으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의 믿음은 주님 보시기에 어떠하겠습니까? 물위로 잠시라고 걸은 베드로의 믿음도 주님 보시기에는 작은 믿음인데 도마처럼 의심 많은 저와 여러분들의 믿음은 주님 보시기에 큰 믿음이겠습니까?
오늘 본문 마태복음 15 장 21-28 절을 보면 예수님이 보시기에 믿음이 큰 자가 나옵니다. 28 절을 보십시오: “이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태는 이 믿음이 큰 자는 가나안 여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22 절). 그리고 그는 이 여인에 대해서 마가복음 7 장 25-26 절 상반절에 좀 더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아래에 엎드리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 마가에 의하면 이 믿음이 큰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녀는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여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먼저 헬라인이란 말은 그녀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여자로서 수로보니게 족속, 즉 수리아에 속하는 베니게 사람으로서 이 민족은 일찍이 유대인들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에 북향하고 쫓겨 갔던 가나안 민족의 자손입니다(박윤선). 그래서 마태는 그 여인을 한 마디로 가나안 여자라고 소개한 것입니다(마 15:22). 그런데 이 가나안 여자에게는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예수님께 나아온 것입니다(22 절). 저는 오늘 예수님이 보시기에 믿음이 큰 이 여인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과연 믿음이 큰 자는 누구인지, 어떻게 행하는지 한 2 가지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믿음이 큰 자는 예수님이 주님과 그리스도 되심을 믿는 자입니다.
성경 마가복음 7 장 24-25 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아래에 엎드리니.” 성경은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셨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거기”는 갈릴리 서북방, 곧 가버나움 지방의 게네사렛 땅을 가리킵니다(마 14:34). 예수님께서 거기 계셨을 때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님께 나아온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마 15:1). 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의 제자들이 장로들의 전통을 어기고 떡을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한 것을 지적하였습니다(2 절). 그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것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9 절). 예수님이 그들을 그리 책망하신 이유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되 마음은 하나님께서 멀었기 때문입니다(8 절). 그들과 대화하던 거기를 떠나 예수님이 가신 곳은 바로 두로 지방이었습니다(막 7:24). 그런데 마가는 예수님께서는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막 7:24).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예수님께서 두로 지방에 있는 한 집에 들어가시면서 아무도 모르게 숨기시려고 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곧 나왔다는 사실입니다(25 절). 이 가나안 여인이 어떻게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는지 그리고 예수님께서 머물고 계셨던 그 두로 지방의 한 집을 어떻게 찾아내었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 여인은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의 소문을 듣자마자 곧 예수님을 찾아 왔다는 것입니다. 주후 1 세기에 살았던 유명한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수님과 그 가나안 여인이 만났던 두로 지방은 수로보니게 땅으로 갈릴리 북편에 붙은 지역으로서 거기에는 이방인들이 거주하였는데 유대인을 원수시하였다고 합니다(박윤선). 그렇다면 예수님께 나아온 가나안 여인도 이방인으로서 유대인인 예수님을 원수시했었지 않았을까요? 아니 적어도, 그녀는 주위에 모든 이방인들처럼 예수님을 원수시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어떻게 그녀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자마자 곧장 예수님께 와서 그의 발아래에 업드렸을까요? 그 이유는 그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을 다른 이방인들처럼 그저 한 유대인 사람으로 여긴 것이 아니라 그녀는 예수님을 주 다윗의 자손으로 믿고(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5 장 22 절을 보십시오: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보십시오. 그 이방 여인은 예수님을 “주”라고 말하였습니다(22,4 25 절). 그녀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말했을 뿐만 아니라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그녀는 예수님을 주님이시요 그리스도(메시아)로 믿고 있었던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녀는 이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왔던 것입니다.
지난 주 한 기독교 신문을 보니까 현재 미국 기독교인들을 세 부류의 그리스도인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바로 문화적 그리스도인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 가나안 여인을 생각할 때 만일 그녀가 문화적 그리스도인이었으면 과연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곧장 예수님께 나왔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그리 생각해 본 이유는 만일 그 여인이 문화적 그리스도인이었다면 그녀는 문화적으로 원수시 했던 유대인 예수에게 결코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혹시나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문화적으로 우리 이방인이 저 유대인을 원수시 하는 관계라 할지라도 내 사랑하는 자식의 귀신들림을 저 유대인 예수가 혹시나 고칠 수 있을지 모르니 한번 가보자.’ 여러분, 만일 이 가나안 여인이 그런 자세로 예수님께 나왔다면 그녀는 예수님에게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예수님을 칭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런 자세로 그 여인이 예수님께 나왔더라면 예수님은 그녀에게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칭찬도 안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딸도 고침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안그렇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어떠한 그리스도인이십니까? 진정 여러분은 예수님이 여러분의 주님이시요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이십니까?
마지막 둘째로, 믿음이 큰 자는 간절히 주님께 간구하는 자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5 장 22 절을 보면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께 나아와 이렇게 소리 질러 간구하였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그녀는 흉악하게 귀신들려 고통을 당하는 자신의 사랑하는 딸을 위하여 주님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부르짖되 그녀는 그저 한번 예수님께 부르짖고 그만둔 것 같지 않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오늘 본문 23 절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에 예수님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녀)를 보내소서”라고 한 말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한국 성경을 보면 그 여자가 예수님의 제자들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영어 성경을 보면 그녀는 예수님의 제자들 뒤에서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던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특히 그녀는 예수님께서 자기의 간절하 부르짖음에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는데도(23 절) 불구하고 예수님을 뒤따라 가면서 계속해서 부르짖었습니다. 그녀가 그리도 간절히 계속해서 예수님께 구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그녀는 예수님께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계속해서 간절히 구했습니다(막 7:26).
만일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간절한 기도에도 아무 응답을 하지 않으시고 잠잠하신데도 계속해서 주님께 동일한 기도를 드리시겠습니까? 시편 기자는 시편 22 편 2 절에서 이렇게 간구하였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이것이 시편 기자만의 기도입니까? 저와 여러분의 기도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간구해도 하나님의 기도 응답이 없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와 여러분은 계속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까? 웬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고서는 계속해서 주님께 동일한 기도를 드리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웬만한 믿음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잠잠하심을 겸손히 받아들이기가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가 하나님께 그리 간절히 부르짖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잠잠히 계시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가리우시고 우리로 부터 멀리 떠나셨다는 생각도 들 수가 있습니다(시 35:22). 그 때에 우리는 시편 기자가 시편 83 편 1 절에서 기도한 것처럼 우리도 이러한 기도를 충분히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
여러분 생각엔 왜 예수님께서 그 가나안 여자가 그리고 계속해서 부르짖었는데고 불구하고 한 말씀도 대답지 않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님의 침묵은 그 여자의 신앙이 간절한가를 알아보시려는 까닭이었습니다(박윤선).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기도가 응답이 없을 때, 우리가 생각하기에 주님이 침묵하고 계시다고 생각될 때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뒤돌아 봐야 합니다. 뒤돌아보되 우리는 과연 나의 신앙이 간절한가, 과연 나는 주님을 간절히 찾고 있는가를 성찰해 봐야 합니다. 성경 마태복음 7 장 7 절에서 예수님께서는 ‘(계속)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계속)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계속)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우리는 이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계속해서 구하고 계속해서 찾으며 계속해서 간절히 문을 두드리는 신앙과 기도 생활을 하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점검해 봐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께 나와서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마 15:22). 예수님께서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 여자가 뒤에서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녀)를 보내소서”라고 예수님께 청하였습니다(23 절). 그 때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24 절).
여러분, 왜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과연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만 보내심을 받으신 것일까요? 아마도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어쩌면 이런 생각을 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예수님께서는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보내심을 받으셨나 보구나. 우리 예수님은 유대인들 외에 다른 민족(이방인)들을 위해서 보내심을 받으신게 아니시구나.’ 그들이 이렇게 생각했던 안했던지 간에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질문의 대답은 제자들이나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민족주의적 관점에서의 유대인들이라기보다 영적인 관점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 즉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입니다(렘 50:6). 만일 예수님께서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유대인들만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면 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 바울은 이방인 사도로 세우셨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의 그 유명한 기도인 요한복음 17 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위하여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자들, 즉 하나님 아버지의 사람들(9 절)을 위하여 중보 기도한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의 백성들만을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리 말씀하신 이유는 그 가나안 여인의 신앙을 시험하여 보시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박윤선). 과연 그녀의 신앙이 예수님을 주님과 그리스도로 진정 믿고 있는지를 시험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때 이 가나안 여인은 와서 예수님께 절하며 이렇게 간청합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25 절). 여기서 “절하며”란 헬라어 원래 의미는 ‘예배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또한 다윗의 자손인 메시야(그리스도)로 겸손히 엎드려 절하는 예배자의 자세로 예수님께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간청을 드린 것입니다. 그 간청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녀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26 절).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자녀”란 유대인의 관점에서는 오직 유대인만 가리키고 “개들”이란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께서 그 이방인 여자에게 하나님께서 자녀인 유대인에게 주신 “떡”을 당신 같은 이방인에게 던짐이 옳지 않다고 말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자녀인 유대인에게만 베푸는 천국의 축복(병 고쳐 주는 것 같은 은혜)을 이방인에게 베푸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박윤선). 여기서도 예수님께서는 그 가나안 여인의 신앙을 시험해 보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만일 그녀가 신앙이 없었다면 예수님을 원망하고 물러갔을 것입니다(박윤선).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7 절). 여러분, 이 가나안 여인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 여인의 말을 생각할 때 종종 식당 밖에서 식사할 때 비둘기가 식탁 밑과 주위에서 걸어 다니면서 혹시 음식 쪼가리가 떨어져 있지 않나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지난 번 필리핀에 갔었을 때에도 장로님께서 다른 의료 선교 팀원들과 테이블에서 검진하고 있었을 때 개들이 그 주위에 왔다갔다하는 모습이 생각납니다. 개들이 말라보인 것을 보면 잘 못 먹는 개들 같아 보였습니다. 이 가나안 여인이 자기 자신을 유대인들이 여기는 개 같은 이방인으로 인정하였습니다. 또한 그녀는 예수님을 “주인”(주님)으로 인정하였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이 가나안 여인은 개 같은 이방인들도 자기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의미는 비록 예수님의 말씀대로 천국의 축복인 병 고치는 것 같은 은혜를 유대인에게만 베푸시는 것이 옳지만은 개 같은 이방인인 자기를 불쌍히 여겨주시사(마 15:22) 자기에게도 그 천국의 축복의 부스러기라도 베풀어 달라고 주님께 간청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겸손히 주님께 간절히 구하는 모습입니까.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막 7:29),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 15:28). 결국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큰 이 가나안 여인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사 그녀에게도 천국의 축복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녀의 귀신 들린 딸이 치유를 받아 온전케 되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기도 제목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계속해서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는 무엇입니까? 혹시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이 질병에서 속히 낫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계십니까? 심지어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는 사랑하는 식구를 위하여 주님께 계속해서 부르짖고 계십니까? 비록 지금은 아니더라도 혹시 전에 그렇게 기도하신 적이 있지 않으셨습니까? 여러분이 알고 있듯이 앞으로도 그렇게 간절히 기도해야 할 일이 우리 모두에게 생길 것입니다. 그 때에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가나안 여인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큰 믿음으로 겸손히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므로 말미암아 우리의 간절한 소원 기도를 응답 받을 뿐만 아니라 주님께 “네 믿음이 크도다”라는 칭찬을 받을 수 있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