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마태복음 14 장 22-33 절 말씀 묵상]

 

 

2014 년 4 월 16 일 오전 한국 전라남도 진도군 인근 해상에서 일어난 여객선 사고로 지금 한국 온 국민이 충격에 빠져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에 있는 국민들뿐만 아니라 아마도 전 세계에 펴져있는 교포들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이 사고에 대하여 인터넷 세종신문(2014. 4. 26.)을 보니까 사설/논평에 “안심하고 살수있는 나라가 되었으면”이란 제목아래 글이 있어 읽어 보았습니다(인터넷). 제가 그 글을 읽게 된 이유는 그 사설 제목에 저 또한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자라났던 고국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나라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우리 모두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이번 사고 뿐만 아니라 전에도 여러 사고들이 터진 것을 뒤돌아 볼 때 과연 한국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나라일까 생각해 볼 때 시민들은 불안해 할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1990 년대 이후 주요 대형 사고를 보면 이렇습니다: (1) 1993 년 10 월 10 일 서해훼리호 침몰로 292 명 사망, (2) 1994 년 10 월 21 일 서울 한강 성수대교 붕괴로 32 명 사망, (3) 1994 년 10 월 24 일 충주호 유람선 화재로 30 명 사망, (4) 1995 년 4 월 28 일 대구 지하철 공사 현장 가스 폭발로 101 명 사망, (5) 1995 년 6 월 29 일 서울 삼풍백화점 붕괴로 502 명 사망, (6) 2003 년 2 월 18 일 대구 지하철 방화로 190 명 사망, (7) 2014 년 2 월 17 일 경주 마우나오션 리조트 지붕 붕괴로 10 명 사망.(인터넷) 저는 이 사고들 외에 특히 한국에서 번번히 일어나고 있는 아동 성범죄(최근 조두순, 김수철 사건 등)에 대한 뉴스를 생각하면 과연 한국에 있는 부모님들이 어린 자녀들을 안심하고 학교에 보낼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통계에 의하면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 사건은 지난 2000 년 994 건이던 미성년자 대상 성폭력 사건은 지난해(2009 년) 2699 건으로52%나 급증했”다고 합니다(인터넷). 그러니 어린 자녀를 둔 부모님의 입장에서 살고 있는 동네가 과연 안심할 수 있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사고와 재난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우리 자녀들뿐만 아니라 우리도 생명을 잃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특히 한국과 같은 경우 1990 년 이후 일어났던 대형 사고들을 보면 시민들이 충분히 불안해하고 두려워 할수 있을 것입니다. 구약 성경 욥기 21 장 6 절을 보면 재난을 통하여 고통을 당하고 있었던 욥이 이렇게 말한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내가 기억하기만 하여도 불안하고 두려움이 내 몸을 잡는구나.”

 

오늘 본문 마태복음 14 장 22-33 절을 보면 불안하고 두려움 속에 있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27 절). 저는 오늘 이 말씀을 제목으로 삼고 한 2 가지로 오늘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접한 두려운 상황입니다.

 

과연 그들이 접한 두려운 상황은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본문 마태복음 14 장 24 절을 보십시오: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배에 타고 있었고 그 때 그들이 접한 첫 번째 두려운 상황은 바로 바람이 휘몰아치므로 배가 파도에 시달리고(고난을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바람이 어느 정도 휘몰아 쳤기에 배가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을까요? 같은 이야기가 요한복음 6 장 15-21 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사도 요한은 그 때 불었던 바람을 “큰(강한) 바람”이라고 말하면서 큰(강한)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났다고 기록했습니다(18 절). 여러분, 상상이 되십니까?  만일  지금  여러분이  배에  타고  있고  그  타고  있는  배가  바다  한  가운데 있는데[막 6:47(현대인의 성경)] 강한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고 있다면 여러분이 타고 있는 배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요나서 1 장 4 절을 보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배를 타고 도망하던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므로 바다 가운데 큰 폭풍이 일어났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당연한 것 아닙니까? 큰 바람이 바다 위에 불면 당연히 큰 폭풍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그 때 요나 선지자가 타고 있었던 배가 거의 깨지게 되었습니다(4 절).

 

이번에 저나 여러분이나 다 한국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부근 황해 상에서 발생한 여객선 세월호 침몰 사고를 뉴스로 접하였을 것입니다. 물론 그 사고의 원인이 큰 바람이 불어 큰 폭풍이 바다에 일어나서 배가 침몰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한국 정부에서 그 사고 원인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제가 좀 여기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그 사고가 발생한 해역이 “맹골수도”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맹골수도”란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맹골도와 거차도 사이에 있는 수도를 가리킨다고 하는데 한국에서 두 번째로 조류산 센 곳으로 이곳의 물살은 최대 6 노트, 시속 11km 에 달한다고 합니다(인터넷). 그리고 6 시간에 한 번씩 밀물과 썰물이 바뀌므로 이 뱃길은 선원들 사이에서도 대표적인 위험 항로로 꼽힌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맹골수도가 거센 물살뿐만 아니라 제주도로 향하는 국내 여객선들이 항로를 바꾸는 곳으로서 급회전 바닷길인 ‘변침구간’이라고 합니다. 베테랑도 힘들다는 이 구간을 초보 항해사가 수 십분 동안 좌우로 급회전을 반복하므로 무리하게 꺾다가 화물과 승객이 한쪽으로 쏠려서 배가 넘어졌다는 추론도 가능하다고 합니다(인터넷). 이렇게 위험한 항로에서 배가 침몰했을 때 그 순간 가라앉는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두려웠을까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접한 두려웠던 상황은 강한 바람으로 인하여 파도가 치는 가운데 배 안에 그들이 있었습니다. 그 때 그들은 그러한 두려운 상황에서 어떻게 행하였는가 하면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 마가복음 6 장 48 절을 보면 그들은 힘겹게 노를 저었다고 저자 마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들이 노를 젓느라 애썼겠습니까? 살고자 그리했지 않았겠습니까? 요나서 1 장 13 절을 보면 비슷한 상황이 나옵니다. 요나로 인하여 큰 폭풍이 바다에 임하여 배가 거의 깨지게 된 두려운 상황에서도 이방인 사공들은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기 전에 먼저 그를 살려보려고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제자들도 요나서에 나오는 이방인 사공들처럼 강한 바람과 파도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고 있었을 때 그 바람과 파도와 싸우면서 힘써 노를 저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갔다고 요한복음 6 장 19 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십여 리쯤이라면 한 4.5 킬로미터(현대인의 성경)이고 마일(mile)로는 한 3 에서 3.5 마일입니다(NIV).

 

이렇게 한 3-3.5 마일 노를 저어 가던 제자들에게 두 번째 임한 두려운 상황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바다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4 장 26 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오늘 본문 25 절을 보면 제자들이 바다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본 시간이 “밤 사경”이라고 마태는 말하고 있는데 그 시간은 지금 시간으로 말하면 한 새벽 3 시에서 6 시 사이라고 합니다(Walvoord). 이 말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강한 바람과 파도와 싸워 노를 저었던 시간이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들은 새벽 3 시에서 6 시가 되기 전까지 밤새도록 힘써 노를 저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칠 때로 지치고 거의 탈진할 정도까지 되었을 텐데(아무리 그들 중에 전문 어부들이 있었을지라도) 그 때에 그들은 바다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본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물위로 걸어오시는 분이 예수님인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보고 놀라 극심한 두려움 속에서 유령이라고 소리 질렀던 것입니다(26 절). 여러분, 왜 제자들이 바다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못 알아보고 오히려 예수님을 유령이라고 생각했었을까요? 그 이유는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었던 (대중적 이었던) 믿음(popular belief)은 바다는 악한 영의 집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Hagner). 그 말은 어쩌면 제자들은 바다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악한 영으로 생각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큰 바람과 파도로 인하여 고난 속에서 힘써 배를 몇 시간이 저어면서 심신이 많이 지치고 탈진한 상태에서 어느 물체가 바다위로 걸어오는 것을 보았을 때 충분히 유령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극심한 공포심을 느꼈습니다.

 

여러분의 지난날을 뒤돌아 볼 때 제일 극심한 공포를 느꼈었을 때가 언제였습니까? 여러분이 접한 제일 두려웠던 상황은 무엇이었습니까? 혹시 여러분 중에 지금 두려운 상황에 놓이신 분은 없으신지요? 혹시 여러분 중에 죽음의 공포로 시달리는 분은 없으신지요? 만일 있으시다면 오늘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실 수 있길 바랍니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마 14:27).

 

여러분, 왜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는 두려운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처럼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까?

 

둘째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는 두려운 상황에서도 왜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가 입니다.

 

한 3 가지 이유를 본문에서 찾아보았습니다:

 

(1)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4 장 23 절을 보십시오: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여기서 “무리를 보내신 후”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로 남자만 5,000 명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루신 후를 가리킵니다(13-21 절). 그 후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돌려보내시는 동안 그의 제자들을 서둘러 배를 타고 자기보다 먼저 건너편에 가게 하셨습니다(22 절,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려고 하는 군중들(요 6:15)과 작별하신(보내신) 후에 혼자 산에 올라가셨습니다(마 14:23, 막 6:46). 왜 예수님께서는 혼자 산에 올라가신 것입니까? 바로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신 것입니다(마 14:23, 막 6:46). 성경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러 자주 한적한 곳이나 산에 가신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마 14:23, 26:36; 막 1:35, 6:46, 14:32; 눅 5:16, 6:12, 9:18, 29, 11:1, 22:41, 44). 과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서둘러 배를 타고 보내신 후 혼자 산에 올라가셔서 무슨 기도를 하셨을까요? 물론 오늘 본문 마태복음 14 장에는 기록되 있지 않지만 그 유명한 예수님의 기도장이 요한복음 17 장을 볼 때에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계시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 요한복음 17 장 9 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위해서 무슨 기도를 드리셨습니까? 그 기도 내용 중 하나가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전”해 주시길 간구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안전하게 지켜주시길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11, 15 절). 동일하신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신다고 성경 히브리서 7 장 25 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인 저와 여러분들을 안전하게 지켜주시길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은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2)    우리가 두려운 상황에서도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그저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안전과 보호를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만 하시는 주님이 아니십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요한복음 17 장 12 절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그의 제자들과 함께 계시므로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지키셨습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4 장 25 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밤새도록 기도하신 후 “밤 사경”, 즉 새벽 3 시에서 6 시 사이에 바다에서 강한 바람과 파도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고 있었던 그의 제자들을 육지에서 보시고(막 6:47-48)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로 가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기도하신대로 그의 제자들을 안전하게 지키시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 시편 4 편 8 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 이시니이다.” 저와 여러분이 편안하게 누워 잘 수 있는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 주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하여 저와 여러분에게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마 14:27).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은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3)   우리가 두려운 상황에서도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간구할 때 즉시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4 장 30-31 절을 보십시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이 말씀의 배경은 바다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배에 타고 있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놀라 “유령이라고 무서워 소리 질렀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즉시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26-27 절). 그 때 그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28 절). 그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오라”고 명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그 명령에 순종하여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님께 갔습니다(29 절). 그러나 베드로는 바람을 보고 무서워 바다에 빠졌습니다. 그 때 그는 소리 질러 예수님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30 절). 그 때 예수님께서는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셨고 베드로를 건져주셨습니다(31 절).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으냐”(31 절). 여러분, 이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과연 저와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베드로는 “믿음이 작은 자”입니까? 과연 저와 여러분 같으면 예수님께서 “오라”고 명령하셨을 때 그 말씀에 순종하여 배에서 나와 물 위로 걸어가겠습니까? 그래도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믿음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으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미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마태복음 8 장 23-27 절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었습니다. 그들이 배에 타고 있었을 때 바다에 큰 폭풍이 휘몰아쳐서 배가 침몰하게 되었습니다.(24 절) 그 때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기에 그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면서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25 절)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말씀하신 후 일어나셔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습니다. 그 때 바다는 아주 잔잔해졌습니다(26 절). 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놀랍게 여겨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느가” 라고 수군거렸습니다(27 절). 오늘 본문 마태복음 14 장 32 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물에 빠지는 베드로를 건져내신 후 베드로와 함께 배에 올랐을 때 “바람이 그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심히 놀랬습니다(막 6:51). 왜 그들은 이리도 놀랬을까요? 이미 마태복음 8 장에서 예수님께서 바다를 꾸짖으셨을 때 바다가 아주 잔잔하게 된 것을 경험한 이들이(26 절) 이렇게 또 다시 예수님의 능력을 목격한 후 왜 또 심히 놀랬을까요?(막 6:51) 성경 마가복음 6 장 52 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둔해졌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둔해졌기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바다를 잔잔케 하신 것을 목격하고 심히 놀랬던 것입니다. 그 놀램 속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절하며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마 14:33).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만 물이 빠지는데서 건져내신 것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큰 바람과 푹풍으로 인하여 위험하고 두려운 상황에 있었던 자신의 제자들도 건져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 타시사 바다를 잔잔케 하시므로 그들을 건져주셨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입니다. 그 이름대로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두려운 상황에서 건져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는 우리를 두려원 상황에서 건져 주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떠한 두려운 상황에 우리가 놓여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우리를 보호하고 지켜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위하여 간구하되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사 저와 여러분을 건져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안보하시는 주님으로 인하여 두려워하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