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 장 25-30 절 말씀 묵상]

 

 

프랑스 과학자 및 수학자로 알려진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고요한 방에 들어가 앉아 휴식할 줄 모르는 데서 비롯된다”(인터넷). “숨 가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안식입니다. 일과 생산성이 삶을 지배하고, 한 사람의 생산성이나 성취가 사람의 가치로 평가되는 문화 속에서 생산과 성취를 위한 노동을 중단하고 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삶의 질을 위해서는 끝없이 계속되는 생산을 위한 노력의 수레바퀴를 멈추는 안식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전략, 계획, 근심, 걱정, 긴장, 노력, 욕구, 폭력, 음란, 쾌락 등 끝없이 밀려오는 긍정적, 부정적 삶의 과제와 유혹을 과감하게 뿌리치고 안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영적인 쉼, 지적인 쉼, 정서적인 쉼, 육체적인 쉼, 사회적인 쉼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인터넷). 여러분, “안식은 창조질서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신 후 안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안식에 인간이 동참하길 원하십니다. 안식일은 생존을 위해 벌이던 잔혹한 싸움을 그치는 날입니다. 모든 갈등 행위를 멈추고 샬롬의 평안을 누리는 날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함께 평화를 누리는 날입니다. 모든 걱정과 두려움, 염려로 부터 해방되어 내면의 평안을 누리는 날입니다. 지친 영혼이 생수 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힘을 얻고 기진해진 육체가 쉼을 통해 회복되는 날입니다. 최고의 우상인 돈으로부터 독립하는 날이며, 긴장으로부터 탈출하고, 지친 세상으로부터 영원한 안식을 맛보는 날입니다. 계획과 시간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고, 내면을 성찰하며, 노동과 수고로 부터 쉼을 얻고, 속된 것을 멀리하는 날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맡겨 형식적인 의무에서 벗어나고, 기술 문명의 우상들을 숭배하지 않으며, 이익의 노예가 되지 않고 이웃을 향해 사랑의 눈을 여는 날입니다. 예배를 통해 참된 속죄와 평안을 회복하고, 기쁨과 희망으로 일어나는 날입니다”(인터넷).

 

이 날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바로 주일이 우리가 주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날입니다. 이 안식일에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마태복음 11 장 28 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제목 아래 오늘 본문을 한 3 가지로 묵상하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받길 원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너희”는 누구인가 입니다.

 

여기서 “너희”는 누구인지를 예수님은 한 3 가지로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1)   “너희”는 “어린 아이들”(infants)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1 장 25 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여기서 “어린 아이들”이란 영어 성경(NASB)에는 “infants”(갓난아기들)이라고 번역했는데 그 원어 헬라어의 의미는 어린애 같은 순진한 사람들(childlike, innocent, simple people)을 가리킵니다(Friberg). 이 어린애 같은 순진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25 절에서 말씀하신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the wise and intelligent)과 대조를 이룹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약속의 말씀을 주시면서 초청한 사람들은 세상 적으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이 아니라 바로 어린애 같은 순진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성경 고린도전서 1 장 21 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이 말씀을 보면 성경은 분명히 이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세상 적으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미련한 것(고전 1:21)인 그리스도의 십자가(17 절)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믿는 자들입니다(25 절). 그리고 이 믿는 자들은 어린애 같은 순진한 사람들[단순한 사람들(simple people)]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어린애 같은 순진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자들입니다(벧전 2:2). 즉, 섞이지 않은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는 자들입니다. 이 믿는 자들은 바로 주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한 자들입니다(3 절).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은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고 고백하며 또한 헌신합니다(시 63:3). 이러한 자들에게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   “너희”는 “계시를 받은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1 장 27 절을 보십시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계시를 받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자들입니다(27 절). 그러면 어떻게 이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되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소원대로 그들이 계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계시를 받았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성경 마태복음 10 장 26 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즉, 이 때까지 세상이 모르던 복음이 이제 하나님의 정하신 뜻대로 또는 그의 능력으로 밝히 알려지고 전파되었다는 말입니다(박윤선). 그렇다면“계신 받는 자”들이란 마태복음 10 장 26 절 말씀에 근거해 생각해 볼 때 감추인 것이 드러나므로 숨은 것을 알게된 자들, 즉, 전파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되 어린 아이들(25 절)과 같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자들이 바로 계시를 받은 자들입니다. 이 “계시를 받는 자”들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사도 베드로입니다. 성경 마태복음 16 장 17 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이 말씀의 배경은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15 절) 시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16 절). 그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를 네게 계시해주신 이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17 절) 즉,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너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시하므로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계시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3)   “너희”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1 장 28 절을 보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자기들이 범한 죄와 그 죄의 결과들(sin and its consequences)의 짐을 진 자들을 가리킵니다(Walvoord). 이러한 짐을 진 자들에 대하여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형편은 마치 감옥에 갇히운 죄수와 같고 자유하지 못하고 무거운 짐을 지는 것과 같다. 그는, 자기의 모든 하는 일에 정죄를 받은 자이다”(박윤선).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근심 걱정 무거운 짐들이 많이 있다 할지라도 그 중에 제일 우리의 마음을 짓누르는 무거운 짐은 바로 죄의 짐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우리 마음대로 자행자지 하면서 불순종한 모든 죄들로 인하여 괴로워하며 고통스러워 할 때 우리의 마음은 참으로 무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새찬송가 337 장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의 가사가 생각납니다: (1 절)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근심에 싸인 날 돌아보사 내 근심 모두 맡으시네”, (2 절) “내 모든 괴롬 닥치는 환난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주께서 친히 날 구해주사 넓으신 사랑 베푸시네”, (3 절) “내 짐이 점점 무거워 질 때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주께서 친히 날 구해 주사 내 대신 짐을 져주시네”, (4 절) “마음의 시험 무서운 죄를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예수는 나의 능력이 되사 세상을 이길 힘주시네”, (후렴)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우리의 모둔 시험 무거운 짐, 우리 마음의 시험 무서운 죄들, 그로 인하여 닥치는 환난들로 인하여 우리 마음의 짐이 점점 무거워 질 때 우리는 그 짐을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시편 38 편 4 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여러분은 이 시편 기자의 부르짖음 속에서 죄의 중압감을 좀 느낄 수 있습니까? 바울도 이러한 죄의 중압감이 있었습니다. 성경 로마서 7 장 24 절을 보면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왜 바울은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라”고 말했습니까? 왜 그는 죄의 중압감 속에 있었습니까? 성경 로마서 7 장 15-20 절을 보십시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우리가 원하는 바 선을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바 악(죄)을 범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요? 이 얼마나 곤곤한 사람입니까? 죄의 짐이란 이렇게 무겁고 무거운 것입니다. 이 무거운 짐을 진 자들에게 오늘 예수님께서는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둘째로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내가”는 누구인가 입니다.

 

누가 어린아이들과 같은 자들이요 계시 받은 자들이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약속하신 것입니까? 물론 여기서 “내가”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누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한 3 가지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1)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신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1 장 25 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세상 적으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과 같이 순전한 사람들에게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감사하시되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기뻐하시면서 하나님께 감사하셨습니다(눅 10:21). 무엇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리도 성령으로 충만하게 기뻐하시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케 만든 것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이신 예수님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들에게 아버지 하나님을 알게 하셨기 때문입니다(마 11:27). 이 예수님의 감사하심을 묵상할 때 요한복음 11 장 41-42 절 상반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의 무덤에 가셔서 하나님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신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이신 예수님의 말을 항상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기도 응답의 확신을 가지시고 죽은 나사로에게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고 부르셨을 때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났습니다(43-44 절). 이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6 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역사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 이적을 이루시기 전에 떡을 가져 하나님께 감사하셨습니다(11 절). 감사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떡과 물고기를 나눠 주셨을 때 남자만 5,000 명 되는 사람들이 배부르게 먹었습니다(11-12 절). 이와 같이 생명의 떡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생명의 말씀을 전파하시매 그 당시 세상 적으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했지만(예를 들어 종교 지도자들) 예수님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어린애 같은 자들은 그 생명의 말씀을 받아들이므로 구원을 받았기에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한 것입니다(마 11:25). 이렇게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신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예”하고 순종하신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1 장 26 절을 보십시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이 아버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인 줄 알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 자신과 그의 복음을 세상 적으로 스스로 지혜롭기 여기는 자들에게 숨시기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어린애 같이 겸손한 자들에게 나타내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인 줄 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 이룬 것처럼 이 땅에 이뤄지길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어느 정도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 이뤄지길 원하셨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전날 밤 감람산에서 간구하실 때에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에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26:39).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아버지의 원대로 우리의 모든 죄를 걸머지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빌 2:8).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기에 독생자 예수님께서는 그 아버지의 뜻에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순종하신 것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딤전 2:4). 그래서 독생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원하시는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이란 어린 아이와 같이(마 11:25)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사모하는 자들이요 하나님 아버지의 계시로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아는 자들입니다(27 절). 이들은 그저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입니다(7:21; 참고 12:50). 누가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요 하나님의 뜻입니다(요 6:30). 이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마 11:28).

 

(3)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1 장 29 절을 보십시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하십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시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심에  있어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온유 겸손입니다(빌 2:8)(박윤선). 즉, 예수님의 온유하심과 겸손하심은 죄의 짐을 지고 있었던 저와 여러분의 구원을 위하여 자기를 비워 종의 형제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빌 2:7-8) 아버지의 뜻(마 11:26)에 복종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원하셨던 것입니다. 즉, 저와 여러분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예수님께서 원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1 장 27 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소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의 소원은 계시를 받은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우리의 죄를 다 걸머지시고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고자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모든 죄를 사하여주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주님의 마음입니다. 우리 주님의 마음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복종하시므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바로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이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28 절)

 

마지막 셋째로,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28 절)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쉬게 하리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쉬게 하리라”는 말씀은 오늘 본문 마태복음 11 장 29 절 하반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듯이 바로 마음의 쉼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여기서 마음의 쉼이란 바로 영혼의 안식을 말합니다. 여러분, 왜 예수님께서 영혼의 안식을 말씀하셨을까요? 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고 계실까요?(28 절)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의 무거운 짐으로 부터 우리의 영혼의 안식을 주시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혼의 안식이란 바로 죄의 짐으로부터 자유를 누리게 하여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미 묵상했듯이 시편 기자는 시편 38 편 4 절에서 이렇게 고백 했습니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이 시편 기자의 부르짖음 속에서 우리는 죄의 중압감을 느낍니다. 그 정도로 죄는 우리의 영혼을 짓누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영혼에 무거운 짐일 수밖에 없습니다. 시편 기자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말했습니다(롬 7:24). 그러나 바울은 그 다음 구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고 말했습니다(25 절).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했습니까? 그 이유를 로마서 8 장 1-2 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 이유는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의 사망의 법에서 행방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죄와 죄의 결과인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누리게 되었기에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였던 것입니다. 새찬송가 268 장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이란 찬송가가 생각납니다:

 

(1 절)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시험을 이기는 승리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2 절) 육체의 정욕을 이길 힘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정결한 마음을 얻게 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3 절) 구주의 복음을 전할 제목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날마다 나에게 찬송주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후렴)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중동에서 소가 멍에를 메고 밭을 가는 광경은 매우 흥미롭다고 합니다(인터넷). 멍에는 실제로 어미 소의 목에만 걸고, 새끼 소는 그 멍에 속에 목만 집어넣게 하고는 끌고 한다고 합니다. 어미 소는 혼자 멍에를 멨기 때문에 힘들게 밭을 갈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새끼소는 그냥 따라 가기만 하면 됩니다. 아마도 새끼소는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멍에라는 것이 이렇게 쉽고 가벼운데, 엄마는 괜히 땀만 흘리네.’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새끼소가 어미 소와 함께 무거운 멍에를 메고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어미 소 혼자 멍에를 메고, 새끼소는 그냥 따라 가기만 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님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에 순종하여 그 멍에를 같이 메는 자들에게 짝이 되어주십니다. 우리는 새끼 송아지 마냥 따라 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은 예수님께서 다 끌고 가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렵고 힘들 때, 힘든 멍에를 친히 져 주시고 단지 따라오기만 하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참된 안식을 주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