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명령
[마태복음 10 장 1-20 절 말씀 묵상]
새해를 맞이하여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이웃을 사랑하자고 신년 연합 예배 때 권면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이웃을 사모하며(빌 1:8), 기도하며(9-11 절) 또한 복음을 위한 일에 함께 참여하자(5 절)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런 후 우리는 지난 주 선교주일 예배 때 원로 목사님을 통하여 데살로니가에서의 선교 성공에 대한 말씀을 받았습니다(살전 1:5-10). 우리가 바울처럼 선교에 성공하려면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5 절, 2:2, 8, 9)을 말로(1:5) 선포하되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5 절)으로 전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복음을 그리 전했을 때 데살로니가 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2:13). 그들은 많은 환난 가운데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바울과 주님을 본받은 자가 되었습니다(1:6). 더 나아가서, 그들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들의 본이 되었습니다(7 절). 그 뿐만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 그들을 통하여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그들의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습니다(8 절).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기 전의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면서 예수님의 다시 오실 날을 기다렸습니다(9-10 절). 이렇게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선교를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인들을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자신들의 목숨까지도 그들에게 주기를 기뻐했기 때문입니다(2:8). 왜 바울이 그들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주기를 기뻐했습니까? 그 이유는 그들은 바울에게 사랑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8 절). 그러면 왜 바울이 데살로니가인들을 사랑했습니까? 그 이유를 성경 데살로니가전서 1 장 4 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형제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선택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현대인의 성경)]. 결국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의 선교 성공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사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바울을 그들에게 보내사(행 17:1)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게 하시므로 놀라운 복음의 능력, 성령의 능력, 구원의 능력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동일하신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가정으로, 직장으로, 이웃에게로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보냄을 받되 우리는 이 세상으로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되 우리는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우리 이웃을 사모하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그들에게 전도할 뿐만 아니라 또한 물심양면으로 선교사님들을 후원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0 장 1-20 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의 열두 제자들을 부르사(마 10:1) 그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며 명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5 절). 저는 그 장면 속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3 개를 중심으로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말씀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0 장 5-6 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여러분은 주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셨을 때 한국 사람들 중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는 사람들에게로만 가라고 명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여러분 생각엔 주님께서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소위 말하는 예수님의 대계명인 마태복음 28 장 19-20 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마태복음 10 장 5-6 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아니, 왜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사마리아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 모든 민족에게 보내지 않으시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명하셨을까요? 비슷한 말씀이 마태복음 15 장 24 절에도 나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나아와 흉악하게 귀신 들린 자기 딸을 고쳐주시길 원하는 가나안 여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진정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으셨나요?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마태복음 10 장에서 그의 열두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명하신 것일까요? 이 질문을 답하기 위해선 먼저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잃어버린 양”이 누구인가를 답해야 합니다. 성경 예레미야 50 장 6 절을 보십시오: “내 백성은 잃어버린 양 떼로다 그 목자들이 그들을 곁길로 가게하여 산으로 돌이키게 하였으므로 그들이 산에서 언덕으로 돌아다니며 쉴 곳을 잊었도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잃어버린 양”이란 바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한다면, 잃어버린 양이란 하나님의 언약 백성입니다. 그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란 옛 언약인 구약의 관점으로 볼 때에는 유대인들만 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관점인 새 언약의 관점으로 볼 때에는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나 하나님께서 사랑하사 선택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그의 제자들에게 명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결코 이방인들에게는 절대 가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선순위를 유대인들에게 먼저 두라는 말씀입니다(MacArthur).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 장 16 절에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은 우선순위를 자기 자신이 영적으로 병든 자임을 아는 자들(9:13)로서 의사가 필요한 자들(눅 5:31, 32)입니다(MacArthur).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으로 가라는 말씀은 먼저 그의 제자들이 유대인들 중 자기 자신이 영적으로 병든 자임을 앎고 의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가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먼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인 유대인들에게 가서 무엇을 전파하라고 명하셨습니까? 오늘 본문 마태복음 10 장 7 절을 보십시오: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여기서 제자들이 전파해야 할 내용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씀인데 이 말씀은 예수님 이전에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전파했습니다(3:2). 그 후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전파하셨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4:17) 결국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전파하신 예수님께서 그의 열두 제자들에게 가서 동일한 메시지인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전파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주로 우리는 “천국”하면 우리가 죽은 후에 들어가는 곳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 천국이란 곳은 눈물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시는 사망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계 21:4). 또한 성경은 그 곳에는 다시 저주가 없을 뿐만 아니라(계 22:3)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다(5 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장차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이 천국에 들어가면 그 때에는 우리가 주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입니다(고전 13:12). 지금은 비록 우리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님께서 우리를 아신 것 같이 우리가 온전히 알 것입니다(12 절).
여러분, 이 천국이 가까이 왔습니다. 여러분은 이 천국에 들어갈 준비가 되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 장 21 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가는 곳이 바로 “천국”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란 달리 말한다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입니다(요 6:29). 여러분, 하나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여러분, 우리는 먼저 우리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서 천국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천국 복음을 전하되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권능)으로 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 1:8).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가족 식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우리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이나 가까운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주님께서 우리의 복음 전파 지경을 점점 더 넓혀 주시길 기원합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말씀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0 장 11 절을 보십시오: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에게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 가라고 명하시면서(6 절) 그들에게 가면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전파하라고도 명하셨습니다(7 절). 그러신 후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8 절). 어떻게 그들이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낼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부르사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1 절) 이러한 능력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거저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거저 받은 능력으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면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전파하면서 그 받은 능력으로 병든 자들을 고치며 죽은 자들을 살리며 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하며 귀신들을 쫓아내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그러신 후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9-10 절에서 무엇을 가지고 가지 말아야 할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전적으로 주님을 믿고 의지하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미 주님께서는 준비해 놓은 너그러운 사람들로 하여금 그 제자들의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시려고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제자들을 통하여 섬김을 받는 이들로도 하여금 그 제자들을 지원하게 하셨습니다(MacArthur).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고 말씀하셨습니다(11 절).
저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합당한 자”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합당한 자”가 누구일까요? 여기서 합당한 자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영접하며 그들의 메시지의 마음이 열린 사람들입니다(MacDonald). 그런데 이러한 사람을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떻게 찾아낼 수가 있었을까요? 직접 만나서 복음을 전해보아야 할지 않았을까요? 그러므로 제자들이 전파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주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사람으로 믿고 그 지역을 떠나기 전까지 그 사람의 집에서 머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12 절). 그러나 만일 누구든지 그 제자들을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그들의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예수님께서는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그들의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14 절). 저는 이 “합당한 자”를 생각할 때 요한삼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진리 안에서 행하는 가이오’가 생각났습니다(요삼 3, 4 절). 사도 요한은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고 심히 기뻐하였습니다(3 절). 과연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하였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그가 형제들을 사랑하되 심지어 그가 모르는 나그네 된 자들에게도 사랑을 베풀었습니다(5, 6 절). 그러므로 가이오에게 사랑을 받은 자들은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하길 사도 요한은 원했습니다(7 절). 그래서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가이오(1 절)에게 편지를 쓰면서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면 좋으리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6 절).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그대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도록 그들을 잘 대접해 보내는 것이 잘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자가 바로 오늘 본문 마태복음 10 장 11 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합당한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합당한 자를 찾아내서 그의 집에 머물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삼서를 다시 보면 진리 안에서 행하고 있었던 가이오란 사람 외에 또 다른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 그 사람의 이름은 바로 “디오드레베”입니다(요삼 9 절). 이 사람에 대해서 사도 요한은 뭐라고 말했는가 하면 디오드레베는 교회에서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디오드레베는 사도 요한과 그의 동역자를 맞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9 절) 악한 말로 그들을 비방하였습니다(10 절). 그리고 그는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았습니다(10 절). 상상이 되십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님의 명령을 받아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에게로 갔는데 가이오와 같은 사람을 못 만나고 오히려 디오드레베와 같은 사람을 만났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집으로 영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말도 듣지도 않았을 것입니다(마 10:14).
여기서 우리는 복음 전파함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시는 중요한 교훈 몇 가지를 명심해야 합니다. 그 중요한 교훈 몇 가지란 먼저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고 의지하되 주님께서 우리의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고 채워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주님의 명령대로 어디를 가던지 그 사람들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영접하고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관하며 마음이 열린 사람을 찾아내야 합니다. 물론 이 사람 또한 주님께서 미리 준비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믿음으로 그러한 사람을 찾아내야 할 책임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찾아낸 후 우리는 주님의 명령대로 그의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세 번째 말씀은,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0 장 16 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우리는 영적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선 지혜가 있어야 하는데 그 지혜란 바로 우리가 뱀같이 지혜로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뱀같이 지혜로 와야 합니까? 그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파송하셨는데 이 세상에는 겉으로는 양의 옷을 입었지만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인 거짓 선지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마 7:15; 10:16). 우리가 영적 전쟁에서 싸워 승리하기 위해선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뱀 같이 지혜로 와야 합니다. 여기서 ‘뱀 같이 지혜로 와야 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한 2 가지 흥미로운 해석이 있습니다:
- 첫째 해석: 뱀이라는 내용은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어감이 매우 부정적입니다. 느낌도 좋지 않고 창세기 3 장 1 절을 보면 뱀은 교활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뱀은 교활할 뿐 아니라 또한 지혜의 상징입니다. 따라서 애굽 사람들은 뱀을 그들의 상용 문자에서 지혜의 상징으로 나타내었습니다. 주님께서 뱀의 지혜를 말씀하신 것은 무엇보다 뱀은 자기에게 닥쳐오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조심성 있게 대처하여서 그 어려움을 모면하는 것을 말합니다. 동물 중에서도 자기에게 닥쳐오는 어려움을 가장 잘 파악하고 신속하게 기술적으로 회피하는 동물이 뱀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어려움을 빨리 예견하여 회피하는 능력을 뱀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제자들이 세상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 제자들의 목숨을 노리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방해하는 자들의 이와 같은 위협과 그리고 협박에 대하여서 지혜와 분별력과 경계심이 필요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에게 누가 해코지를 하거나 해를 끼칠 것을 미리 알아차려 하나님의 나라와 백성 그리고 교회를 해하려는 무리로 말미암아 결코 해를 당하지 않는 지혜로움의 힘을 가져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뱀이 지혜롭다는 것은 신중한 분별력을 말합니다. 뱀의 지혜로움은 모든 사리를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뱀과 같은 지혜라는 것은 우리에게는 어떤 일이 닥칠 것을 생각하여 화를 자처하지 않고 지혜를 발휘하여 갈 곳까지 가고 행할 것을 행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인터넷).
- 둘째 해석: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여러 고을로 보낼 때 하신 말씀이 바로 “뱀같이 지혜롭고…”라고 말씀하셨는데 유대인들의 상징적인 의미에서 이 말씀은 한마디로 ‘ 지혜롭게 말을 잘하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상징적인 의미에서 볼 때 뱀은‘지혜’와 연결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바로 갈라진 혀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모든 짐승들은 혀가 하나인데 뱀은 두 개입니다. 그래서 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혀’라는 신체 기관은 말을 잘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었으므로 혀가 하나 보다는 둘인 것이 훨씬 더 말을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말을 잘한다는 것은 그만큼 지혜롭다는 이야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토라를 인용해서 지혜롭게 말을 잘했지만 그 결과는 오히려 죽이는 독과 같은 말이었던 것과 비교해서 제자들이 전해야 하는 말은 생명을 담은 말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이는 독이 가득한 혀로 말하는 뱀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을 살리는 뱀으로서 말을 지혜롭게 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복음이었습니다(인터넷).
저는 이 두 해석이 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 복음을 전하며 복음의 합당한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지혜롭게 말하고 지혜롭게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혜가 필수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마태복음 10 장 16 절 하반절에서 예수님께서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비둘기”하면 생각하는 사람은 구약 성경 요나서에 나오는 요나 선지자입니다. 그 이유는 “요나”란 이름의 뜻이 바로 “비둘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나”란 이름의 뜻에는 “어리석다, 무감각하다, 분별이 없다’(senseless)란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0 장 16 절에서 예수님께서는 12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그들에게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에서 “순결하라”(innocent)란 헬라어 단어의 의미는 문자적으로 ‘섞이지 않은,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unmixed, pure)이란 의미입니다(Walvoord). 이 단어가 신약 성경에 여기 외에 딱 두 군데만 더 나옵니다: 로마서 16 장 19 절과 빌립보서 2 장 15 절.
(1) 첫 번째 성경구절은 로마서 16 장 19 절입니다: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 하기를 원하노라.”
오늘 본문 마태복음 10 장 16 절에서 “순결하라”는 단어가 로마서 16 장 19 절에서는 ‘미련하다’라는 말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고 말하였는데 이 말씀을 오늘 본문 마태복음 10 장 16 절과 연관해서 생각해 볼 때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는 말씀은 ‘악한 데 미련하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이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하기를 원했기에(롬 16:19) 그는 그들에게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고 권면하였던 것입니다.(12:9) 또한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쓴 편지를 보면 그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고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길” 원했던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고전 14:20). 그래서 그는 그 성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이렇게 간구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림받은 자 같을지라도 너희는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고후 13:7).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인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길 원하여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가 그리 하나님께 간구한 이유는 그 성도들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2) 두 번째 성경구절은 빌립보서 2 장 15 절입니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여기서는 “순결하라”는 단어가 ‘순전하라’(pure)는 말로 번역되었습니다. 저는 ‘순전하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구약에 나오는 욥이란 인물이 생각납니다. 그 이유는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욥 1:1). 하나님께서도 욥에 대하여 사단에게 이리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8 절). 이 두 성경구절을 볼 때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는 말씀은 ‘악한 데 미련하여 악에서 떠나 순전하라’는 뜻이라 생각됩니다. 어떻게 악한데 미련하여 악에서 떠날 수 있습니까? 바로 욥처럼 하나님을 경외할 때 우리는 악을 미워하므로 악에서 떠날 수가 있습니다(잠 8:13).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0-21). 이것이 바로 “비둘기처럼 순결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열두 제자들에게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이리와 같은 거짓 선생들이 그의 제자들을 핍박할 줄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0 장 17-18 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뱀 같이 지혜롭게 사람들을 삼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들이 제자들을 공회에 넘겨주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줄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갈 줄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지라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 속에 있는 성령님께서 그들에게 할 말을 주시사 그 총독들과 임금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18-20 절). 우리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뱀 같이 지혜롭게 행하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려고 하다가도 예기치 못한 어려움과 역경과 심지어 위기에 쳐한다 할지라도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불신자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들 앞에서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서 말씀하시사 우리에게 할 말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 잃어버린 양들에게 보내셨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라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우리 집으로, 우리 직장으로, 우리 이웃들에게 보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가야 합니다. 우리는 가서 주님의 명령대로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고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전하는 복음 메시지에 열린 마음으로 관심을 갖고 듣고 받아들이는 합당한 자를 찾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을 빌어야 합니다. 이 세상은 이리와 같은 거짓 목사, 거짓 선생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해야 합니다. 그러한 우리 모두가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