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마태복음 918-26]

 

 

여러분, 우리 기독교에서 믿음, 믿음 하는데 과연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복음주의 신학계의 영적 거장인 제임스 패커 목사님은 그의 책 “견고한 크리스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인터넷): "기독교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주목하고, 행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단어에는 "믿고 의지하며 헌신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에 헌신해야 한다:

 

(1)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호4:6). 지금 아모스 선지자의 예언처럼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 임하였습니다(암8:11).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고 있습니다(딤후4:3-4). 우리가 신앙의 경주를 끝까지 신실하게 잘 달리기 위해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목소리)을 듣는데 헌신해야 합니다.

 

(2)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목하는데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눈이 있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 가운데 임재하셔서 역사하고 계심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초점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께 온전히 향하여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히12:2). 지금 우리의 눈은 십자가를 향하고 있기보다 세상을 향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눈은 하늘을 향하고 있기보다 이 땅을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눈은 영원한 것을 바라보기보다 순간적인 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안목의 정욕으로 인하여 장님이 된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교회 안에는 장님이 장님들을 인도하는 시대를 맞이한 것 같습니다. 우리의 눈은 하나님에게 고정되어 있어야 합니다(시141:8).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데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목하는데서만 끝나면 아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치 아니하므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을 스스로 속이는 자들이 되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약1:22).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므로 반석 위에 집을 지어야 합니다(마7:24).

 

오늘 본문 마태복음 9장 18-26절을 보면 두 명의 믿음의 사람이 나옵니다. 오늘 이 두 사람에 대해서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 번째 믿음의 사람은 한 관리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9장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 여기서 “한 관리”는 누구입니까? 마태복음에는 그저 “한 관리”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동일한 이야기가 적혀 있는 마가복음 5장 22절이나 누가복음 8장 41절을 보면 이 “한 관리”는 바로 “회당장 야이로라 하는 사람”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회당장이란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며 또한 율법과 선지서를 가르치고 또한 배우는 장소인 회당을 책임지고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회당장은 자기가 살고 있는 커뮤니티에서 중요한 멤버로서 그 커뮤니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대표하는 사람이었습니다(Myers). 그런데 이 회당장 야이로라는 사람이 지금 예수님께 와서 “발아래 엎드리어”(막5:22; 눅8:41) 절하며(마9:18)이렇게 예수님께 간곡히 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마9:18). 이렇게 오늘 본문에서는 이 야이로라는 사람의 딸이 방금 죽었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방금 죽었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고 죽게 되었습니다(막5:23) 또는 죽어갑니다(눅8:42)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 마가복음 5장 23절을 보십시오: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누가복음 8장 41절 하반절부터 42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된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 이 세 복음서에 세 구절들을 종합해서 그 상황을 좀 더 정확하게 그려본 다면 지금 야이로란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발 앞에 엎드려 절하며 간곡히 구한 것은 하나 밖에 없는 12살 된 자기 외동딸(눅8:42, 막5:42)이 죽어가고 있으므로 자기 집에 오셔서 그녀 위에 손을 얹으사 그녀를 치유하사 살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야이로의 이 간청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일어나(마9:19) 그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가셨습니다(막5:24). 그런데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 가고 계셨을 때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야이로에게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막5:35)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야이로에게 뭐라고 말했는가 하면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막5:35) 또는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눅8:49)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눅8:50). 그런데 오늘 본문 마태복음 9장 18절에서는 야이로가 예수님께 와서 절하며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이 회당장 야이로라는 사람의 믿음은 어떠한 믿음 이였다고 생각하십니까? 제 생각은 야이로의 믿음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기 딸도 살리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도 살리실 수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이 야이로의 믿음을 생각할 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생각났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을 때 그는 믿음으로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어떻게 아브라함은 그리할 수 있었습니까? 히브리서 11장 19절을 보십시오: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또한 저는 이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을 생각할 때 요한복음 11장에 죽은 나사로의 여동생인 마르다가 생각났습니다. 그 이유는 마르다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요11:21-22). 그 때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23절). 그 말씀을 들은 마르다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24절). 그 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절).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르다는 이렇게 자기의 신앙을 예수님께 고백하였습니다: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27절). 여러분, 과연 저와 여러분에게 이러한 믿음이 있습니까? 과연 우리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주님이시요 그리스도이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믿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는 무릇 살아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함을 믿고 있습니까? 이러한 믿음을 소유한 야이로에게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신(눅8:50) 후 야이로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마9:23), 즉 사람들이 떠드는 것과 모든 사람이 그 야아로의 딸을 위하여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셨습니다(막5:38; 눅8:52). 그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울지 말라”(눅8:52)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9:24). 그 때 모여 있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24절). 왜 그들이 예수님을 비웃 엇습니까? 그 이유는 그들은 야이로의 딸이 죽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눅8:53). 그 때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다 내보내신 후(마9:25)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인 제자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셨습니다(막5:40; 눅8:51). 그러신 후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딸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즉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5:41). 그 때 그 소녀의 영이 돌아와 그 아이가 곧 일어나서(눅8:55) 걸었습니다(막5:42). 결국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에게 하신 말씀인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개역개정), 즉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러면 딸이 살아날 것이다”(현대인성경)(눅8:50)라는 말씀대로 이뤄진 것입니다. 다시 살아난 그 12살 난 소녀를 보고 그 부모만 놀랐을 뿐만 아니라(눅8:56) 사람들이 크게 놀라고 놀랐습니다(막5:42).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사람들에게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신 후(눅8:56)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5:43). 이 죽었던 회당장 야이로의 외동딸을 예수님께서 다시 살리신 일에 대한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졌습니다(마9:26).

 

저와 여러분에게 이 한 관리인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과 같은 믿음이 있길 기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도 살리실 수 있다는 믿음, 이 믿음이 우리에게 있길 기원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묻고 계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바라기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원히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두 번째 믿음의 사람은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9장 20절을 보십시오: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예수님께서 한 관리인 야이로라는 사람의 간청을 들으시고 그의 12 살 난 외동딸을 살리시고자 그와 함께 가실 때에 예수님의 제자들(마9:19)과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가며 에워싸 밀었다(막5:24)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로 밀었냐면 누가복음 8장 42절을 보면 그 무리들이 예수님을 거의 질식시킬 정도로 밀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Vine). 이 상황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선 누가복음 12장 1절 상반절을 봐야 합니다: “그 동안에 무리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 .” 그와 중에 무리 중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님의 뒤로 와서 예수님의 겉옷가를 만진 것입니다(마9:20). 왜 그녀가 그리했습니까? 그 이유는 그녀의 마음에 예수님의 겉옷만 만져도 자기 병이 치유 받을 것이다(21절) 생각했기 때문입니다(막5:28). 좀 더 이 여인의 심정을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선 이 여인이 질병으로 얼마나 고통을 당하고 있었는지를 좀 알 수가 있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그 두 복음서의 말씀들을 종합해서 요약한다면 이 여인은 12년 동안 많은 의사들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가진 물질도 많은 의사들에게 내느라 가진 것도 다 허비했습니다(막5:26). 그런데 자기의 질병인 혈루증을 고치고자 그리도 애쓰고 노력을 했는데 “아무 효험이 없고”(막5:26) 고침을 받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눅8:43) 도리어 더 중해졌습니다(막5:26). 이 두 복음서의 좀 더 구체적인 설명 외에도 우리가 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그 여인이 앓고 있었던 “혈루증”(bleeding, a hemorrhage)이란 질병입니다. 현대 백과사전적 의미는 혈루증이란 헬라어 하이마와 레오의 합성어로, 피의 유출이라는 뜻입니다. 보통 여인은 월경 때에만 피가 나오게 되는데, 이 병은 월경과 무관하게 불규칙하게 출혈됩니다. 이 병에는 기능성자궁출혈과 기질적 자궁출혈(염증, 패혈증, 종양, 백혈병 등에 의한 병)이 있다고 합니다. 기질적 자궁출혈 중에서 악성이 암이고 장기간 출혈되는 것이 증식성 자궁내막염으로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인터넷). 그런데 이 여인의 질병이 그 여인에겐 육신적으로 절망적인면도 있었지만 심적으로도 절망적이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그 이유는 혈루병을 앓고 있는 사람은 부정한 사람으로 여겨서 멸시, 천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혈루병 환자가 누웠던 자리나 앉았던 자리도 부정한 것으로 여겼고, 그녀가 사용했던 침상, 옷, 좌석 모두 다 부정하게 여겼습니다(레 15:19-20). 유출병 환자가 만진 질그릇은 깨뜨려야 했고, 목기(木器)는 씻어야 했습니다. 이 환자와 접촉하면 옷을 빨고, 물로 온몸을 씻어도 저녁까지 부정합니다. 심지어 그 부인과 동침한 남편도 일주일이나 부정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처녀가 이 병이 들면 시집도 못 가고, 결혼한 여자면 대개 남편에게 이혼을 당했습니다. 이러한 여자는 성전에 출입하는 것 곧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과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이 일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이 여인은 가정이나 사회에서 배척을 받을 수밖에 없는 딱한 여인이었습니다. 결혼한 여인이었다면 남편에게서도 버림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이 여인은 가정과 사회 그리고 종교에서까지 버림을 받은 여인이었습니다”(인터넷). 이렇게 육신적으로나 심적으로나 모든 면으로 12년 동안이나 절망 가운데 있었던 차에 그녀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란 사람의 집으로 가실 때에 함께 따라가고 있었던 무리들 가운데 끼어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댄 것입니다(막5:27). 그녀가 그리한 이유를 예수님의 옷만 만져도 자기 병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현대인의 성경)(28절). 그 당시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습니다(막3:10). 마가복음 6장 56절을 보십시오: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무슨 뜻입니까? 병자들이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게 해 달라고 간청한 이유는 “만진 사람은 모두 나았”기 때문입니다(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당하고 있었던 이 여인도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의 겉옷 가를 만진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마가복음 5장 29절을 보십시오: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즉, 그녀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순간 즉시 피가 멎었고 그녀는 자신의 병이 나은 것을 느꼈던 것입니다(현대인의 성경). 그녀는 혈루증이란 질병에서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을 자신의 몸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으냐”고 말씀하셨습니다(30절).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스스로 아셨다는 말은 그는 자기에게 누군가가 손을 댄 자가 있는 것을 아셨다는 말입니다(눅8:46). 그런데 그 때 무리들은 다 아니라 하고 부인하였습니다(45절). 그 때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예수님께 “주여 무리가 밀려들어 미나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45절). 마가복음 5장 31절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자기 옷자락에 손을 댄 자가 정확히 누구이신지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마가복음 5장 3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그 때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다가 나음을 받은 여인이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을 알고 떨며”(눅8:47) 예수님께 나아와 엎드리어 모든 사실을 솔직히 말하였습니다(told him the whole truth)(막5:33). 즉, 그녀는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 대 이유와 자기가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했습니다(눅8:47). 그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 할지어다)”(마9:22; 눅8:48; 막5:34).

 

여러분, 왜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냥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치유하였다’고 말씀하셔도 되셨을 텐데 말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혈루증을 앓고 있었던 여자도 예수님께 자기 마음에 예수님의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고 생각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1절). 왜 이렇게 성경은 “구원”이란 단어를 사용하였을까요? 그 이유는 그 여인의 질병인 혈루증이 그 여인의 죄와 연관돼 있기 때문입니다. 기억나십니까? 우리가 이미 마태복음 9장에서 묵상한 중풍병자에게 예수님께서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6절)고 명하시기 전에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고 말씀하신 것 기억나십니까?(2절) 결국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을 고쳐주시기 이전에 그의 영적인 병인 죄를 먼저 사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그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 본문 마태복음 9장에 나오는 혈루증 앓고 있었던 여자도 죄의 문제로 질병을 앓고 있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신 후“(마9:22; 눅8:48)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막5:34)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 그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았습니다(마9:22). 즉, 그 즉시 혈루증이 그쳤습니다(눅8:44). 즉, 그녀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았습니다(막5:29). 여러분,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았던 이 여자의 믿음은 어떠한 믿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여자의 믿음은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마태복음 9장 21절을 보십시오: “그 여자는 예수님의 옷만 만져도 자기 병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현대인의 성경). 여기서 이 혈루증을 12년 동안 앓고 있었던 여자는 예수님의 옷만 만져도 자기 병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thought)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 다음 구절인 2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네 믿음이(your faith) 너를 낫게 하였다”(현대인의 성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그 여인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만 대로 예수님의 능력으로 자기의 병이 치유될 줄을 믿었습니다. 이 믿음이 그녀를 낫게 한 것입니다. 성경 야고보서 5장 16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우리는 이 말씀대로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되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고 말씀하셨으니 믿음으로 간절히 기도하십시다. 여기서 믿음이란 기도하면 병이 낫는다고 믿는 믿음이라기보다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주님을 믿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에는 하나님의 주권을 겸허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믿음이여야 합니다. 즉, 우리가 주님의 치유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간구할 때 우리의 뜻은 병 낫는 것이지만 주님의 뜻이 병 낫는 것이면 낫게 해주시고 병 낫기보다 다른 뜻이 있으시면 그 뜻이 선한 줄 믿고 그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능력을 믿음으로 병 낫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지금 제가 병 낫기를 기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분들 중 30대 후반 된 한 자매가 있습니다. 제가 여러 번 새벽기도회 때 나눴지만 약 10여 년 전에 화상을 입은 후 계속해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자매입니다. 벌써 큰 수술을 세 번이나 했었습니다. 그 자매가 한 2주전 카카오톡으로 기도부탁을 하였는데 불교 신자인 자신의 어머님이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주일 1부 예배 가기로 한 것을 저에게 알려주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 때 저는 그 자매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준 것을 감사하면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매의 간절한 기원을 아시기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 응답하시사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라고 답변하였습니다. 그런 후 저는 그 자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자매의 큰 고통을 통해서라도 어머님의 구원을 얻어 영생만을 얻을 수 있다면 ….” 그런데 지난주일 그 자매의 어머님이 교회에 오셔서 예배를 드리신 후 따님의 친한 친구와 예배를 함꼐 드리신 후 식사도 함께 하셨다고 하면서 그 자매의 친한 친구가 저에게 이 메일을 했는데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이란 그 어머니가 그냥 딸이 소원하니까 교회에 가신게 아니고 독실한 불교신자로서 그 신앙을 버린다는 게 십여 년간 엄청난 고통이셨다고 말했다고 하십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기독교 TV를 보며 설교 내용들이 좋았고 일주일 전부터 (교회) 가야겠다고 다짐했으면서도 섣불리 따님에게 말을 못하겠어서 망설이던 차 따님이 속해 있는 부서의 담당목사님이 오셔서 결단하시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단하고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과연 우리는 우리의 질병으로 인한 큰 고통을 통하여서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우리 가족 식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구원을 받을 수만 있다면 그 고통이 참 귀한 가치 있는 고통이라고 생각하고 있나요? 과연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질병이 낫기를 하나님께 간구하기보다 혹여나 회개하지 않은 죄 사함 받기를 간절히 기원하고 있나요? 주님의 죄 사함의 능력과 병 치유의 능력을 믿고 믿음으로 회당장 야이로처럼, 그리고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을 당하였던 그 여인처럼 주님께 간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