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가 필요한 병든 자
[마태복음 9장 9-13절]
여러분은 건강하십니까?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세월에 장사 없다 는 말처럼 우리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여기 저기 몸이 아프고 심지어 병까지 들어서 고통을 당하며 고생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병들면 병원에 갑니다. 그 이유는 의사 선생님을 만나서 우리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입니다. 아마도 여러분 중에 몸이 건강한데 일부러 병원에 가서 의사 선생님을 만나는 분은 없으실 것입니다. “생로병사”란 말이 생각납니다. 살고, 늙고, 병들고, 죽고. 우리가 살면서 나이가 들면 들수록 몸이 약해지고 아프고 병드는 것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다만 건강하게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길 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당연히 우리가 아프고 병으로 고생한 경험이 있으면 우리는 더욱더 건강에 관심을 갖고 신경을 쓰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종종 입술로도 자주 ‘건강이 최고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육신의 건강도 중요하지만 정신적으로도 참 건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 주위에는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왠지 점점 더 우리 주위에 아는 사람들이 정신질환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정신 기능에 이상이 있어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일상생활 지장을 초래하는 정신병(mental disease) 혹은 정신질환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는 안타까워합니다. 어떤 사람은 정신분열증으로 망상과 환각 상태로 시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우울장애로 또한 어떤 사람은 조울증으로 등등 이러한 종류의 정신질환으로 고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적으로 건강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저는 육신의 건강과 정신의 건강과 더불어 참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 영혼의 건강입니다. 그 이유는 아무리 육신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건강하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영혼이 병들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영혼이 병들어 있다는 말은 우리의 영적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죄를 회개하지 못하고 죄로 인하여 그 영혼이 범사에 잘되지 못하고 형통하지 못할 때 우리의 육신과 정신이 아무리 건강하다 할지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요한3서 1장 2절 말씀으로 축복하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우리 온 교회 식구들이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다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9장 12-1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이 말씀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에서 한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주시고 또한 그의 병을 고쳐주신 후 그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막2:14), 또는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마9:9, 막2:14, 눅5:27).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를 보시고 그에게 “나를 좇으라(따르라)”(Follow me)고 말씀하셨을 때(마9:9; 막2:14; 눅5:27) 마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그 앉아 있던 세관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습니다(마9:9; 막2:14). 따르데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습니다(눅5:28). 그리고 나서 마태(레위)는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였는데 예수님께서는 그의 집에 가셔서 많은 세리들과 예수님을 따르던 다른 사람들(“죄인들”) (막2:15)과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않으셔서(눅5:29; 마9:10) 음식을 잡수셨습니다(마9:10). 그 모습을 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11절). 심지어 바리새인들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방하였습니다(눅5:30). 그 때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말을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2-13; 막2:17). 마가복음 2장 17절과 누가복음 5장 31-32절을 보면 오늘 본문 마태복음 9장 12-13절과 다른 점들이 한 2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는 말씀이 없습니다(마9:13). 또 하나 다른 점은 누가는 누가복음 5장 32절에서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점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건강한 자”는 누구이고 “병든 자”는 누구인가입니다.
“건강한 자”란 오늘 본문 마태복음 9장 13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인”(the righteous)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인”은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누구였습니까? 그들은 바로 모세의 율법을 지켜 행하므로 ‘자기 의’를 추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자신의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자 하였던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열심히 행한 종교 예식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제사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에 힘을 썼습니다. 그렇게 하므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죄를 없게 한다고 믿었고 그 결과 그들은 실제로 자기 자신을 스스로 의롭다 여겼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와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예수님의 비유를 보면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눅18:11-12). 이 기도 내용을 보면 이 바리새인은 자기 자신을 의롭다 여기고 있었음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8장 9절에서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같은 성전에서 기도하였던 세리를 죄인으로 여기고 그를 멸시하고 있었기에 자기가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13절). 세리는 바리새인과 달리 자기가 죄인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간구한 것입니다(13절). 이 두 사람의 기도를 비유를 드신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14절).
여러분, 과연 수없이 드리는 바리새인들의 제사가 자신들의 죄를 없게 할 수가 있었습니까? 성경 히브리서 10장 11절을 보면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성경은 자주 같은 제사를 드려도 죄를 없게 하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 무수한 제사들을 드리면서 그 제사들이 자신들의 죄를 없게 한다고 믿었고 그 결과 그들은 스스로 의인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9장 1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인으로 여기고 있었던 바리새인들에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13절). 여러분, 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우리가 이 질문을 대답하기 위해선 호세아 6장 6절 말씀을 봐야 합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즉,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바리새인들의 뜻은 무엇이고 주님의 뜻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리새인들의 뜻은 율법을 지켜 행하므로 의롭다 함을 얻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제사를 드리므로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이 죄인으로 여기는 사람들과 스스로 분리하여 살면서 자기 자신들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예수님께서 마태의 집에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앉으셔서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마9:11)고 물은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나 번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과 긍휼을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마태와 같이 그들이 죄인들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주님의 뜻을 배우기 위해선 자기 뜻과 자기 의를 버리고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얻고 구원을 받아 자기들과 같은 죄인을 긍휼이 여기신 주님처럼 그들 또한 세리들이나 죄인들을 긍휼이 여길 수 있길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말씀을 듣고도 배우고자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자신 스스로를 건강한 자요 의인이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스스로 건강하다고 여기는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가 없고 스스로 의인이라고 여기는 자를 부르러 온 것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9:12, 13).
여러분 생각엔 행함으로 구원을 얻고자 하였던 바리새인들이 의사가 필요가 없는 건강한 자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율법을 지켜 행하므로 자기 의를 추구하였던 바리새인들이 여러분 보시기엔 진정한 의인입니까? 요즘 말로 한다면, 여러분 보시기에 선(착한 일?)을 행하므로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건강한 자요 의인입니까? 그러한 자들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예수님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선행으로 구원 받는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예수님(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자기 의,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가 아니라 자기 공로를 의지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은 자기 자신이 건강한 자요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보시기에는 이러한 자들이 진정한 “병든 자”들이요 진정한 “죄인”들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마태복음 9장 12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병든 자”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바로 오늘 본문 13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죄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신 것입니다”(눅5:32).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죄인”들은 바로 바리새인들(과 그의 서기관들)이 말한 마태와 더불어 마태의 집에서 예수님과 함께 앉아 식사하였던 많은 세리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29절). 바리새인들은 그들을 죄인으로 여겼습니다. 그 당시 마태와 같은 세리들은 사회에서 제일 괄시를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백성들로부터 걷었던 돈은 부분적으로 자주 개인 이득을 위하였던 것이었고(참고: 눅19:8) 또 다른 부분적으로는 로마에게 받쳐졌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도둑놈들로 여겨졌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나라를 배반한 자들로 여겨졌습니다(MacArthur). 그러므로 그 당시 유대에서는 세리의 사회적 지위가 매우 천하였기에 세리의 집과는 혼인도 안 하려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방에서도 역시 그러한 관념이 있었는데 어느 정도였냐고 하면 “무엇일 제일 나쁜 짐승이냐?” 할 때에 데오크리투스(Theocritus)란 사람은 대답하기를 “산에서는 곰과 사자요, 시가(시장)에서는 세리니라”고 했다고 합니다(박윤선).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리인 마태를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고 부르셨던 것입니다(마9:9). 그 때 마태는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 순종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예수님을 좇았습니다(눅6:28). 이것은 마태의 신앙을 보여줍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천하게 여김을 받고 있었던 마태에게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부르셨으니 이 얼마나 마태는 기뻐했겠습니까? 그래서 마태는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였던 것입니다(29절). 무엇보다도 자기 스스로 의인으로 여기고 있었던 바리새인들과 달리 마태는 자기 스스로 죄인이라 여기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회적으로도 제일 괄시를 받는 세리로서 바리새인들도 세리를 죄인으로 취급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미 묵상한 누가복음 18장 13절에서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였던 세리의 기도를 다시 한 번 보면 그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세리는 바리새인과 달리 자기가 죄인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죄인 됨을 알고 있었던 마태를 예수님께서 부르셨던 것입니다(마9:9).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5장 32절을 보면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왜 예수님은 죄인인 마태를 불러 회개시키려고 하신 것입니까? 그 이유는 주님께서는 마태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그를 의롭다 하시고자, 그를 의인으로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한 마디로, 주님께서는 마태를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그를 부르셨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과 함께 앉아 식사하는 세리들을 죄인들로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결코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함께 앉아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이 그리 한 이유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기 자신들 스스로를 의롭다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세리들과 죄인들을 멸시했던 것입니다(눅18:9). 그 이유는 스스로 의롭다고 믿고 있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는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마9:13).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의롭다 믿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기 자신들을 스스로 높였습니다(14절). 이렇게 자기 자신들을 스스로 높이는 자는 교만하여 결코 죄인처럼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13절)라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리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리인 마태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낮추는 자였습니다(눅18:14). 그는 자기 자신이 주님 앞에서 죄인을 알았습니다(13절). 이러한 자를 부르시고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병든 자들에게는 참된 의사인신 예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여러분 생각에 진정으로 의사가 필요한 병든 자는 누구입니까? 주님이 보시기에 진정으로 병든 자요 죄인은 바로 자기의 노력과 행함으로 스스로 의롭다함을 얻고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비록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보기에 마태나 세리들은 “병든 자”요 “죄인”일지라도 그들은 주님 보시기에 그들은 건강한 자요 의인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그러한 자들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세리와 같은 자(눅18:13)를 부르시사 건강케 하시고 의롭다 하시고 구원하시고자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주십니다(롬10:13).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여러분과 여러분의 집에 구원을 받는 큰 축복이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