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마태복음 9장 1-8절]
여러분, 여러분은 고통의 문제(The Problem of Pain)를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성경 이사야 38장 17절을 보면 성경은 고통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큰 고통"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고자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좀 이해가 안 됩니다. 어떻게 우리가 "큰 고통"을 통하여 평안을 누릴 수 있는지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큰 고통을 통하여 결국은 회개 기도케 하시므로 말미암아(2-3, 5절) 우리의 모든 죄는 주님의 등 뒤에 던지시고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리 행하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17절). C. S. Lewis는 그의 책 “고통의 문제”에서 고통의 문제를 인간의 항구적인(지속적인) 죄의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인간은 고통을 통하여 만사가 잘 돌아가고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나게 되는데 이것이 고통이 주는 일차적인 영적 유산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통을 통하여 인간이 나아가는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이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다는 모든 주관적인 의지를 꺾는데 있다고 합니다. 이 때 하나님의 뜻은 인간들이 고통을 통하여 자신들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발견하여야 할 더 좋은 것을 추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자아를 완전히 양도하는 일에는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인터넷). 여러분은 이 C. S. Lewis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오늘 본문과 관련에서 동의하는 점은 고통의 문제는 우리의 지속적인 죄의 문제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9장 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제목 아래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세 부류의 사람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9장 2절 상반절을 보면 저자 마태는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사람들”(some men)이라고 말하였는데 마가복음 2장 3절에 가서 보면 마가는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되 그 사람들 중 “네 사람”들(four of them)이 그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이 네 사람들이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중풍병자를 어떻게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마태복음 8장 2절에서는 저자 마태가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왔다고 말하고 있는데 누가복음 5장 18절을 보면 누가는 그 네 사람들은 그 중풍병자를 침상에 매고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누가는 그 네 사람들이 이 중풍병자를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지만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9절). 여기서 “무리 때문에”란 말은 마가복음 2장 2절을 보면 우리는 좀 이해를 할 수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즉, 그 네 사람들은 침상에 누운 한 중풍병자를 침상에 메고 예수님이 계신 집(막2:1)에 데리고 와서 예수님 앞에 들여놓고자 했지만(눅5:18)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여서 집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었던 것입니다(막2:2). 그 때 그 네 사람들은 어떻게 했는가 하면 누가복음 5장 19절을 보면 누가는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마가복음 2장 4절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유대인들이 살던 집은 어떤 지붕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처럼 네 사람들은 그 지붕을 벗겨서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를 내려 보낼 수 있었을까요? 유대인들의 집 지붕을 놓을 때 먼저 대들보를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했다고 합니다. 그 위에 작은 나무토막들을 촘촘히 올려놓고 다시 뒤엉킨 가시나무를 두텁게 깔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회반죽을 해서 가시나무 위에 덮은 뒤에 다시 흙으로 평평하게 다졌다고 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지붕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손으로 뜯어낼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합니다(인터넷). 그 때 예수님께서는 이 네 사람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오늘 본문 마태복음 9장 2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막2:5; 눅5:20). 아마도 이 네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중풍병자도 동일한 믿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과연 이 네 사람들의 믿음은 어떠한 믿음이었습니까? 한 3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1) 이 네 사람들의 믿음은 병을 고치는 주님의 능력이 예수님과 함께 한 것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성경 누가복음 5장 17절을 보십시오: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오늘 본문 마태복음에는 기록이 없지만 누가복음 5장17절에는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한 중풍병자를 침상을 메고 예수님께 온 이 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은 예수님께서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셨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그 중풍병자를 침상을 메고 예수님께로 나온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네 사람들은 예수님의 소문만 듣고 그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온 것이 아니라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마태, 마가, 누가는 다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그 네 사람들이 예수님의 소문만 듣고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는 병을 고치는 주님의 능력이 함께 한 것을 믿었기에(눅5:17) 그 중풍병자를 침상에 메고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지금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부흥사 목사님이 치유의 은사가 있더라는 소문을 듣고 그 목사님이 신유집회를 인도한다고 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듯이 열심히 참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솔직히 저는 그 사람들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 네 사람들처럼 병을 고치는 주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의 병이 낫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그런 신유 집회에 참여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그들이 주님의 치유의 능력을 믿는 것인지 아니면 그 부흥사 목사님의 능력을 믿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게 스스로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내가 병을 고치는 주님의 능력이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믿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주님께서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내 사랑하는 사람을 고쳐 주실 줄을 믿고 있는 것인가?’ 두 질문이 비슷해 보이지만 다릅니다. 첫 번째 질문의 초점은 주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는 예수님에게 맞춰져 있고 두 번째 질문의 초점은 내 사랑하는 사람이 고침을 받길 간절히 원하는 내 자신에게 맞춰져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할 때 “고쳐 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기도할 때 주님의 뜻이 고쳐지는 것인지 안 고쳐지는 것인지는 우리가 모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고쳐주시길 간절히 기도하면서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면서 ‘고쳐지던지 안 고쳐지던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옵소서'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2) 이 네 사람들의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성경 마가복음 2장 2절을 보십시오: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오셔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1절)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셨다고 마가는 기록하였는데(2절)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도”란 무엇일까요? 짐작 컨데 예수님께서 그 집에서 많은 무리들에게 말씀하신 “도”(the word)는 “하나님의 복음”이요 “하나님의 나라”라 생각됩니다(Black). 성경 마가복음 1장 14-15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바로 이 하나님의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의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 네 사람들은 믿었기에 그 믿음으로 그들은 그 한 중풍병자를 침상에 메고 예수님께로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셨을 때 그 분이 생각하시고 계셨던 하나님의 나라의 대한 개념이 무엇이었을까요? 그 개념을 설명하는 성경구절이 누가복음 10장 9절에 나와있습니다: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또한 성경 누가복음 9장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 이 말씀들을 보면 예수님께서 생각하고 계셨던 하나님의 나라와 병자들을 고치는 것과 연관돼 있다는 인상을 우리는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셨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개념에는 병자들을 고침을 받아 온전케 되는 역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네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침상채 메고 예수님께로 나왔을 때에 그들은 예수님에게는 병을 고치는 주님의 능력이 함께 한 것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눅5:17) 하나님의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고 계셨던 예수님이 그 하나님의 나라에 왕이심을 믿고 그 병자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온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귀한 믿음입니까? 예수님을 하나님의 나라에 왕으로 믿는 이 믿음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왕이신 나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송축하면서 그 왕께 믿음으로 나아갈 때 그 하나님께서 나의 병을 고치시사 온전케 하실 줄 우리도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3) 이 네 사람들의 믿음은 행함이 있는 믿음이요 살아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생각했듯이 이 네 사람들은 침상에 누운 한 중풍병자를 침상에 메고 예수님이 계신 집(막2:1)에 데리고 와서 예수님 앞에 들여놓고자 했지만(눅5:18)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여서 집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었습니다(막2:2). 그래서 그들은 지붕에 올라가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기와를 벗기고 ) 그 중풍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렸습니다(눅5:19, 막2:4). 그들은 예수님에게는 병을 고치는 주님의 능력이 함께 한 것과(눅5:17) 그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에 왕이심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막1:14-15, 2:2, 눅9:2, 10:9) 그 믿음대로 행동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중풍병자를 침상채 예수님 앞에 들여놓고자 예수님이 머물고 계셨던 집의 지붕까지 올라가서 그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그 중풍병자를 침상채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습니다. 성경 야고보서 2장 14절과 17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분명히 사도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만일 우리가 믿음이 있다고 말만하고 믿음으로 행하지 않으면 우리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요 능히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마태복음 9장 1-8절에 나오는 이 네 사람들의 믿음을 결코 죽은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믿음은 살아있는 믿음이요 행함이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이들의 믿음을 사도 야고보는 야고보서 2장 22절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즉, 이 네 사람들의 믿음은 행함으로 온전케 된 믿음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러한 믿음이 있길 기원합니다. 행함으로 온전케 되는 믿음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믿음으로 나음을 받고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길 기원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사람은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9장 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셨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본 동네”란 “가버나움”입니다(막2:1). 마가복음 2장 1절에서는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셨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왜 마가는 “다시”(again)란 말을 사용했을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이미 마태복음 8장 5-13절에서 묵상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이미 가버나움에서 중풍 병으로 죽어가는 로마 백부장의 사랑하는 하인을 치유하여 낫게 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지금 예수님께서는 다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곳에서 또 다른 중풍병자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 두 만남을 생각할 때 왠지 예수님 당시에도 중풍병자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아 보이는데 과연 중풍 병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중풍병자들이 많았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 중풍 병이란 우리가 좀 알고 있듯이 그 병은 뇌 질환입니다. 즉, 뇌의 혈관에 이상이 생기거나 터져서 뇌의 기능 일부를 수행하지 못함으로 몸의 마비가 오는 질병입니다(인터넷). 우리는 주로 이 질병을 뇌출혈 또는 뇌경색으로 인한 몸의 마비 상태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현대 의학적으로 뇌출혈/뇌경색의 원인은 3가지라고 합니다: (1) 동맥경화증으로 인해 뇌혈관이 막힌 경우, (2) 고혈압, 스트레스 등으로 인해 뇌혈관이 터진 경우 그리고 (3) 신체 다른 부위에서 생긴 핏덩어리가 혈류를 타고 뇌혈관을 막은 경우(인터넷). 이 3가지 원인 중 왠지 저는 두 번째 원인인 “고혈압, 스트레스 등으로 인해 뇌혈관이 터진 경우”가 마음에 다가옵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제 선배 목사님 중에 한분이 고협압과 스트레스로 뇌출혈이 두 번이나 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오늘 본문 마태복음 9장 2절에 나오는 중풍병자의 병 원인은 그런 의학적인 이유라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지 않고 영적인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영적 이유란 무엇입니까? 바로 “네 죄”(you sins)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9장 2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주로 예수님께서 병자를 치유하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나병환자를 치유하실 때에는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셨을 때 즉시 그 나병환자의 나병이 깨끗하여졌습니다(마8:3). 그리고 우리가 이미 묵상한 로마 백부장의 하인의 중풍 병을 고치실 때에는 “가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았습니다(13절). 또한 베드로의 장모님이 열병으로 앓아누웠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15절). 그리고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들을 많이 데리고 왔을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귀신들을 좇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셨습니다(16절). 그런데 오늘 본문 마태복음 9장 1-8절에 나오는 중풍병자를 고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그 중풍병자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 5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걸어가라”(Get up and walk)고도 말씀하실 수 있으셨을 텐데 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그 중풍병자의 병이 그의 죄로 말미암아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중풍병자의 병인 중풍 병을 고치시기 이전에 그 중풍 병의 원인인 죄를 사해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질병과 우리의 죄는 연관이 있습니다. 물론 모든 병이 우리가 범한 죄로 말미암았다고 말할 수 없다 할지라도 분명히 성경은 어떤 질병들은 우리의 죄와 연관돼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38년 된 병자의 이야기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후(8절)에 그를 성전에서 만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4절). 무슨 말씀입니까? 더 심한 병이 생기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까? 그 38년 된 병자의 병은 그의 죄로 말미암은 것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질병의 궁극적 원인은 죄악이다. 범죄가 본래 없었더라면 이 세상에 질병이 없었을 것이다. 어떤 질병에 있어서는 범죄가 그 직접 원인일 수도 있다. 하나님의 긍휼로 인하여 범죄마다가 직접으로 신병을 발생시키지는 않으나 동일한 범죄를 쌓으면 그것이 원인이 되어 질병이 발생하게 된다”(박윤선). 물론 모든 범죄마다 직접적으로 질병을 발생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똑같은 죄를 계속 범해서 죄를 쌓으면 질병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생각엔 쓴 열매를 먼저 제거해야 합니까 아니면 쓴 뿌리를 먼저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그 대답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쓴 열매를 제거하고 또 제거한다 할지라도 쓴 뿌리를 제거하지 않는 이상은 쓴 열매는 또 맺고 또 맺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15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우리 안에 쓴 뿌리가 나면 우리 자신을 괴롭게 할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을 더럽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 만큼 죄의 악한 영향력은 마치 전염병처럼 번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우리 안에 있는 쓴 뿌리를 제거해합니다. 그리할 때 자동적으로 쓴 열매도 제거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9장 1-8절에 나오는 중풍병자에게 있어서는 쓴 뿌리란 바로 그의 죄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쓴 열매는 바로 중풍 병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중풍병자와 그를 침상체 메고 온 그 네 사람들의 믿음으로 보시고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마9:2).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그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여 주신 후에(5절) 그 “…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6절). 그 때 그 중풍병자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다(7절)고 마태복음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갔다고 말씀하고 있고(막2:12) 누가복음에는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눅5:25)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먼저 그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여 주신 후 그의 병도 고쳐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중풍병자는 온전케 되어서 자기의 침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여러분, 야고보서 5장 16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함이 큼이니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대로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우리는 우리의 죄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자백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흘리신 보혈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겸손히 우리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병도 낫게 해 주실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9장 3절을 보십시오: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2절)고 말씀하셨을 때 어떤 서기관들이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마9:3; 막2:6)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라고 말했습니다. 누가복음 5장 21절을 보면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즉,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의 집에서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했을 때 서기관들뿐만 아니라 함께 있었던 바리새인들도 마음속으로 “이 신성 모독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21절). 곧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생각은 오직 하나님 밖에 죄를 사할 수 있는 분이 없으신데 나사렛 예수라는 목수의 아들이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하니 그들의 입장에선 예수님은 신성 모독하는 죄를 범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아시고(막2: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며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마9:4).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마음속으로 예수님께서 신성을 모독하도다고 생각한 것이 “악한 생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그들의 마음의 생각이 예수님 보시기엔 악한 생각이었습니까? 그 이유는 그들은 악하기에 그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마태복음 12장 34-35절을 보십시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즉,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 보시기에 악한 사람들이기에 그들이 마음에 가득이 쌓은 악에서 악한 생각을 하고 또한 악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악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마9:5-6a, 참고: 막 2:9-10a, 눅5:23-24a). 이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신성 모독하는 죄를 범하였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믿지 않았기에 그들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는 죄 사함의 권능이 예수님에게도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은 믿는다고 하였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지 않았기에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한 말은 신성을 모독하는 죄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좀 웃기지 않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않고 있는 죄는 깨닫지 못하고 그러한 무지함과 불신앙에서 예수님이 신성 모독하는 죄를 범하였다고 생각(마음으로 정죄)하였던 것이 좀 어이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마9:6)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그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2절)고 말씀하시고 그를 죄에서 자유를 누리게 하시므로 말미암아 자신이 메시야요 성자 하나님으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하셨던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불신앙, 즉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지 않는 죄를 책망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신 후 예수님께서는 그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6절)고 말씀하셨고 그 중풍병자는 ‘곧 일어나 그 누웠던 침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7절, 막2:12, 눅5:25). 그는 죄 사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병도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그 때 그 모습을 본 무리들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본문 마태복음 9장 8절, 마가복음 2장 12절 그리고 누가복음 5장 26절을 보십시오: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마9:8), “…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막2:12),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눅5:26). 결국 그 가버나움 집에 모였던 많은 무리들은 예수님의 죄 사함의 권능과 병 고치시는 권능을 보고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O. J. Gibson은 “Survey in Basic Christianity”란 책에서 자기 점검 목록 7개 질문을 던집니다(인터넷): (1) 당신은 항상 비이기적이었습니까? (2) 당신은 항상 시기와 탐심에서 자유로웠습니까? (3) 당신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선을 틀림없이 다 행했습니까? (4) 당신은 항상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했습니까? (5) 당신은 항상 마음과 혼과 생각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였습니까? (6) 당신은 항상 다른 사람들을 당신 자신처럼 사랑하였습니까? (7) 당신은 항상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완전하였습니까?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이들 질문들에 대해서 단 한 가지도 그 대답이 "아니요(No)"라면 성경은 당신을 죄인이라고 말씀합니다. 율법 전체를 지키다가 하나를 범하면 전체에 대해 유죄가 됩니다(약 2:10). 하나님의 완전한 거룩을 단 한 번 더럽혀도 그 사람은 죄인이 됩니다.’ 이 죄의 문제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모든 죄를 사해주십니다. 우리가 질병이란 고통을 통하여서라도 우리의 죄를 깨닫고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오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예수님을 믿음으로 자백하고 회개하므로 죄 사함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