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도 놀랍게 여기시는 믿음의 사람

 

 

 

[마태복음 85-13]

 

 

여러분은 믿음으로 행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보는 것으로 행하고 계십니까? 성경 고린도후서 5장 7절을 보면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그런데 실제로 우리는 믿음으로 살려고 노력하다가도 많은 때에 우리 자신을 뒤돌아보면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기보다 보는 것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을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루하루 살아가기보다 보이는 것에 민감하여 보이는 상황에 이끌려 살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의 믿음이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연약한 것은 우리뿐만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의 믿음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6:30; 8:26; 16:8; 눅12:28),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14:31),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마17:20), “너희의 믿음이 어디 있느냐”(눅8:25),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막4:40),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막16:14),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7). 이 성경구절들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의 믿음을 보시고 칭찬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그 제자들의 믿음을 책망하신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목격한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믿음이 작고 또한 없는 자 같이 살아가므로 예수님께서 그들을 책망하셨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혹시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예수님께서 나의 연약한 믿음 또는 믿음이 없는 것을 책망하고 계시는구나?’

 

그런데 오늘 본문 마태복음 8장 5-1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놀랍게 여기신 믿음의 사람이 나옵니다. 이 믿음의 사람은 다름 아닌 가버나움에 살고 있었던 로마 군대 100명을 이끄는 백부장이었습니다(5절). 오늘 본문 1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오늘 저는 예수님도 놀랍게 여기신 이 로마 군대 백부장의 믿음을 한 2 가지로 묵상하면서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로 백부장처럼 예수님도 놀랍게 여기시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길 기원합니다.

 

첫째로, 예수님도 놀랍게 여기시는 믿음의 사람은 간구하여 기도 응답을 받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8장 5-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 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이 가버나움에 사는 로마 군대 백부장에게는 간절한 기도 제목이 있었습니다. 그 간절한 기도 제목이란 중풍 병으로 괴로워하는 자기 하인을 고침을 받길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왜 이 로마 군대 백부장은 중풍 병으로 괴로워하는 자기 하인이 고침을 받길 그리도 원했을까요? 우리가 그 대답을 찾기 위해선 오늘 본문 마태복음 8장 5-13절과 유사한 말씀인 누가복음 7장 1-10절을 봐야 합니다. 특히 누가복음 7장 2절을 보십시오: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로마 군대 백부장이 중풍 병으로 괴로워하되 심지어 병들어 죽을 지경에 놓인 자기 하인이 고침을 받길 간절히 원하였던 이유는 그 하인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 하인은 유대사람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누가복음 7장 5절에 가서 보면 로마 군대 백부장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 장로 몇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3절) 예수님께서 간절히 구하게 하였는데 그 유대인 장로 몇 사람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5절). 즉, 이 유대인 장로들의 말은 그 로마 군대 백부장은 로마인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민족을 사랑해서 그들을 위하여 회당까지 지어줬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유대인을 사랑하는 백부장은 자기 집에서 자기 종으로 일하는 병들어 죽게 된 하인을 가리켜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라고 저자 누가가 표현한 것을 보면 그 종은 유대인이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이 로마 백부장을 생각할 때 우리가 이미 묵상한 예수님의 여덟 가지 행복의 말씀 중 다섯 번째 행복의 말씀인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란 말씀이 생각나지 않습니까?(마5:7) 사랑하는 종이 중풍 병으로 죽게 되었을 때 함께 고통을 나누는 로마 군대 백부장, 자기의 종인데, 자기보다 지위보다 낮은 하인인데, 그냥 병들어 죽게 되었으면 내 버려두어도 되는데 이 로마 백부장은 그 종에게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그는 그의 종을 선대한 것입니다. 그 백부장은 그의 종의 긍휼이 여겨 그를 질병과 죽음에서 구하고자 예수님을 찾았을 뿐만 아니라 그 종을 위하여 예수님께 고쳐 주시길 간구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긍휼이 여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유대인 중에게 긍휼을 베푼 이 로마 군대 백부장을 생각할 때 한 20년 전에 보았던 영화 “쉰들러 리스트”가 생각이 났습니다. 1993년 유명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만든 이 감동의 전쟁 휴먼 드라마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점령한 폴란드의 어느 마을에서 시류에 맞춰 자신의 성공을 추구하는 기회주의자인 독일 사업가 오스카 쉰들러는 유태인이 경영하는 그릇 공장을 인수합니다. 그는 공장을 인수하기 위해 나찌 당원이 되고 독일군에게 뇌물을 바치는 등 갖은 방법을 동원합니다. 그러나 냉혹한 기회주의자였던 쉰들러는 유태인 회계사인 스턴과 친분을 맺으면서 냉혹한 유태인 학살에 대한 양심의 소리를 듣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될 유태인들을 구해내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독일군 장교에게 빼내는 사람 숫자대로 뇌물을 주는 방법으로 유태인들을 구해내려는 계획을 세우고 스턴과 함께 구해낼 유태인들의 명단, 이른바 쉰들러 리스트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1100명의 유태인을 구해낸다는 이야기입니다(인터넷). 제 기억으로는 그 때 그 영화가 다 끝난 후 실제로 쉰들러 리스트에 포함되어 살아남았던 유대인들을 인터뷰하는 장면이 나온 것을 기억합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저는 저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이미 죽은 독일사람 쉰들러에게 얼마나 감사할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어느 면으로 생각하면 좀 아이러니 하지 않습니까? 전쟁에서 독일 군대에게 점령을 당하여 고통과 죽임을 당하는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또 다른 독일 사람이 자기들을 구해내 줬다는 사실이 좀 아이러니 하지 않습니까? 왜 쉰들러 라는 독일 사람이 1100명이 되는 유태인들을 구해낸 것일까요? 성공을 추구하는 기회주의자였던 독일 사업가 쉰들러가 왜 마음이 비껴서 돈 벌기보다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유태인들을 구했을까요? 오늘 본문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은 로마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로마가 정복하여 지배하고 있었던 나라 사람들인 유대 민족을 사랑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유대인 장로들도 알고 인정하였던 사실입니다(눅7:5). 그리했던 로마 군대 백부장이 병들어 죽게 되었던 자기 종을 사랑하고 있었기에(2절)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 자기 종을 고쳐 주시길 간절히 청했던 것입니다(3절). 그 간청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마태복음 8장 7절을 보면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I will go and heal him)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결국 이 로마 군대 백부장은 자기의 간청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이 로마 군대 백부장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질병으로 고통 중에 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가 고침을 받길 원하는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려보신 적이 있지 않으십니까? 심지어 저와 여러분들은 사랑하는 가족 식구가 질병으로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간절히 울부짖은 적이 있지 않으십니까? 그 때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울부짖으면서 간절히 사모하였던 주님의 음성이 무엇입니까?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7절)가 아니었습니까? 그 때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가족 식구가 질병에서 좀 나아자기는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사 고쳐 주시는 것 같아 너무 기분이 좋아 감사하다가도 건강이 악화되어가는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 고쳐 주시지 않는가 보다 생각하고 낙심하기까지 합니다. 그리 낙심되었을 때 우리는 누가복음 18장에서 예수님께서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하신 말씀(1절)을 생각하면서 그 비유에 나오는 과부처럼 포기하지 않고 끈기 있게 기도하되 하나님 아버지를 번거롭게 할 정도로 끈기 있게 기도해야겠다는 다짐도 해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도하고 기대하던 대로 되지 않고 우리가 사랑하는 그 가족 식구가 죽었을 때 우리의 마음은 어떠했습니까? 슬픔과 절망 가운데서 마음이 너무나 괴로워 우리는 통곡하며 슬피 운적도 있지 않습니까? 질병으로 고통당하다가 그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가족 식구가 죽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것입니까?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워하셔서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데리고 가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 인생의 큰 위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통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경험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더 깨닫게 되는 이들도 있습니다. 좀 아이러니 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넓게 깨닫게 된다는 사실이 좀 아이러니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에 명심해야 할 것 한 3 가지가 있습니다:

 

(1) 우리는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춰서 기도해야지 기도의 내용인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춰서는 아니 됩니다.

 

성경 히브리서 12장 2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 우리는 기도할 때 마땅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봐야 한다는 말씀은 아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꾸만 기도의 대상이신 주님을 바라보기보다 우리 앞에서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보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하고자 하는 우리의 경향을 극복해서 오직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만 바라보고 기도해야 합니다.

 

(2) 우리는 기도할 때 믿음으로 기도해야지 눈으로 보는 데로 기도해서는 아니 됩니다.

 

성경 고린도후서 5장 7절을 보십시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 함이로라.” 우리는 이 말씀을 익히 들어 알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사랑하는 이가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모습을 매일 보다보면 우리는 믿음으로 기도하기보다 보이는 상황에 이끌림을 받아 기도할 때가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상황에 좋아지는 것 같으면 기분이 좋아 감사하지만 상황에 안 좋아지는 것 같으면 우리는 낙심 속에서 불안해하고 힘들어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믿음으로 간구해야 합니다.

 

(3) 우리는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나길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 고린도전서 10장 31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주로 주님의 뜻을 구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고민은 사랑하는 이가 질병으로 고통당하며 심지어 죽어가고 있는데 주님의 뜻이 그 사람이 사는 것인지 죽는 것인지 우리가 알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할 때 주님의 뜻을 찾는 기도보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길 원하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무엇을 하든지 다”라는 말씀은 심지어 우리가 사랑하는 이가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하는 기도 제목은 무엇입니까?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고 계십니까? 사랑하는 가족 식구의 영혼 구원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고 계십니까? 바라기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처럼 믿음으로 간구하여 기도 응답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둘째로, 예수님도 놀랍게 여기시는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8장 8절을 보십시오: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이 백부장의 말은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하인 소식을 들으시고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말씀하시고 나서(7절) 그가 예수님께 한 말입니다(8절). 오늘 본문 마태복음 8장 8절과 유사한 누가복음 7장 6-7절을 보면 저자 누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마태복음에서는 백부장이 직접 예수님에게 말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누가복음에서는 백부장이 보낸 벗들을 통하여 예수님께 말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백부장이 직접 예수님께 말한 것인지 아니면 그의 친구들을 통해서 말한 것인지가 아니고 그 말한 내용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마8:8상). 무슨 말입니까? 왜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말한 것입니까? 그 이유를 John MacArthur 목사님은 뭐라고 말했는가 하면 로마 군대 백부장은 유대인의 전통인 유대인이 이방인의 집에 들어오게 되면 의식적으로 더럽히게 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는 예수님께서 이방인이 자기 때문에 불편하게 되실까봐 그리 말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MacArthur). 일리가 있는 해석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 생각엔 백부장이 예수님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말한 이유는 자기가 주님을 자기 집에 모실만한 자격(worthy)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 하면 오늘 본문 8절에 한국 성경에는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쓰여 있는데 영어 NIV 성경에는 “I do not deserve …”(나는 … 을 받을 만하지 않습니다)라고 쓰여있습니다. 그런데 원어 헬라어를 보면 ‘나는 적합하지 않습니다’(I do not fit) 또는 ‘나는 자격이 없습니다’(I am not worthy)라는 뜻입니다(Friberg). 실제로 누가복음 7장 7절 상반절을 보면 누가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 무슨 말입니까? 백부장은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신 말한 자격도 안 된다고 여긴다는 말입니다. 이 단어가 또 어디 나오는가 하면 요한복음 1장 27절에 나옵니다: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무슨 말입니까?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자기는 없다는 말이 아닙니까? 저는 이 백부장의 말을 생각할 때 우리가 이미 묵상한 예수님의 팔복의 말씀 중 세 번째인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란 말씀이 생각납니다(마5:5).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한 백부장은 온유한 자, 겸손한 자입니다. 즉, 그는 주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던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랬기에 그는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마8:8). 그는 감히 예수님을 친히 대면할 수 없는 낮은 자로 자칭했습니다(눅7:7)(박윤선).

 

여러분, 우리가 자격이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 집에 모실 자격이 있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고린도후서 3장 5절 말씀을 좋아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저는 제 자신이 자격이 없을 뿐만 아니라 너무나 부족한데 왜 하나님께서 나를 한 가정에 가장이 되게 하셨고, 한 교회의 목사가 되게 하셨는가 라고 고민하면서 마음이 무거울 때 이 고린도후서 3장 5절인 ‘나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난다’는 말씀을 생각하면 다시금 힘을 얻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자격도 부족하고 이것저것 다 부족해도 나의 부족함을 채워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겸손히 주님만 의지하면서 가정 사역과 교회 사역을 감당하길 기원하는 것입니다. 백부장이 예수님께 말한 둘째 내용은 다만 말씀만 하여 주시면 자기의 하인이 낫겠다는 말입니다(마8:8b). 이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분명히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7절)는 기도 응답의 말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그리고 그는 예수님께서 수고하시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눅7:6) 다만 말씀만 하시면 자기 하인이 죽을병에서 나을 줄 믿었습니다(7절). 이 백부장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는 놀라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놀라셨습니까? 바로 백부장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왜 백부장의 믿음이 놀랍습니까? 그 이유는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말씀만 하셔도 자기 종이 병에서 나을 줄 믿었습니다. 이 백부장은 주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권위적인 말씀아래 자기 자신을 복종시켰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늘 본문 마태복음 8장 9절에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로마 군대 백부장도 자기 위에 천부장이란 더 지위가 더 높은 사람이 있지만 또한 자기보다 지위가 낮은 아래 군사가 100명이 있어 그들에게 명령만 하면 그들이 자기에게 복종한다는 말입니다. 결국 여기서 백부장이 예수님께 말하고자 한 핵심 내용은 자기는 예수님께서 명령(말씀)만 하시면 무엇이든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박윤선). 그것은 곧 주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자기 하인이 죽어가는 병에서 고침을 받을 줄 확신하는 믿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확신과 믿음대로 주님께서 “가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즉시 하인이 나”음을 받았습니다(13절).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가 인생의 적어도 한번은 사랑하는 사람이 질병으로 괴로워하며 고통당하는 모습을 본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그 사랑하는 사람이 질병으로 괴로워하며 고통당할 때 그들을 향한 우리의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불붙듯 하지 않았습니까? 그 때 우리는 겸손히 무릎을 꿇고 엎드려 사랑하는 사람의 병 낫기를 하나님께 간구하되(약5:16) 우리는 눈물을 흘리면서 간절히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우리는 그 때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그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려고 기도하면서도 그 사랑하는 사람이 질병으로 죽기보다 하나님께서 치유해 주시사 살려주시길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 기도를 응답 받아 사랑하는 사람이 치유를 받은 분들도 있겠지만(또는 삶을 연장 받은 분들도 잇겠지만) 숨을 거둔 분들도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생각납니다. 한 사람은 저의 첫째 아기 주영입니다. 그녀는 결국 제 품안에서 잠들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싶었고 아기가 우는 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하나님께 간구했지만 결국에는 죽은 것입니다. 그 때 비록 통곡을 하였지만 저희 부부는 아기의 죽음을 통하여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주님의 사랑을 더 깊이, 더 넓게 경험하였습니다. 그 분의 구원의 사랑이 얼마나 굉장하고 놀라운지 벅찬 가슴으로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제 장인 어르신입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한 3년 전 안식 월 때 장인, 장모님 댁에 한 1주일 머무는 동안 두 분으로 모시고 병원에 가서 점검을 하였는데 폐암이라는 진단과 6개월 정도 밖에 못사실 것이라고 담당의사에게 들은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저는 침대에 누워계신 장인 어르신에게 찬송을 불러드리고 성경 말씀을 읽어 드리다가 제가 장인 어르신에게 이렇게 질문을 던진 기억이 납니다:’ 아버님, 죽음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그 때 장인 어르신은 두렵지 않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오히려 그 분은 찬양하고 말씀 읽고 특히 기도할 때 제가 주님이 구원의 은총에 감사, 평생 감사, 범사에 감사를 위하여 기도할 때 힘차게 “아멘”하셨습니다. 지금도 종종 장모님이 전화 오셔서 전화로 장인 어르신을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실 때 동일한 기도를 드리면 장인 어르신은 “아멘”하십니다. 지금 장인 어르신은 폐암 진단과 6개월 밖에 못살 것이라 라는 담당의사의 말을 직접 들으시고도 이렇게 3년이란 세월을 연장 받아 살아계십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질병과 고통 속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십시다. 간구하되 우리 모두 믿음으로 기도하십시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십시다. 우리 모두 기도 응답의 결과를 하나님께 다 맡기고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십시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영광만이 들어날 수 있도록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