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마태복음 724-29]

 

 

여러분, 여기 캘리포니아에 사시면서 지진으로 인하여 집이나 건물이 흔들리는 경험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1994년 Northridge 지진(규모 6.7) 때 저희 집 아파트가 크게 흔들리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 때 저는 벙커 베드에 2층에 누워 있었습니다. 얼마나 크게 흔들리는지 놀랬었습니다. 어느 한 인터넷을 보니까 20세기 이후 가장 강력했던 지진 10위 순위에는 미국 Northridge 지진이 순위에는 들어가지 않지만 지진으로 인한 재난피해액 순위에는 Northridge 지진이 2위였습니다(440억$) (1위는 일본 Kobe 지진으로서 재산피해 추정이 1000억$)(인터넷). 한 두어 가지 정보만 나눈다면 20세기 이후 가장 강력했던 지진 1위는 1960년 5월 칠레에서 났던 지진으로 규모가 9.5였다고 합니다. 그 다음 2위와 3위는 미국 알래스카 지진(9.2 & 9.1)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진으로 인한 인명피해 1순위는 2004년 12월 인도네시아에서 난 지진으로 사망자 숫자 추정이 25만 여명이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 2위와 3위는 중국에서 난 지진들로서 24만 2000명과 18만 명이였다고 합니다(인터넷). 칼텍 연구소에 의하면 가주에서 20년 내 초대형 강진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아마 그 규모가 예상했던 7.8보다 훨씬 강력한 8.6 이상 초대형 지진이 될 수 있다고 예측했다고 합니다. 아마 칼텍 지진연구소 측은 지난 100년간 캘리포니아에서 일어난 지진 패턴 분석 결과 그리 예측한 것 같은데 앞으로 20년 내 7.0도 이상 빅원이 올 확률이 80~90%에 이를 것이라고 발표했다고 합니다(인터넷). 그래서 저는 언젠가 건축 설계를 하는 후배 형제에게 지진을 대비하여 캘리포니아는 어떻게 건물을 짓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그 후배의 답을 제가 기억하기론 건물을 건축할 때 기초가 지진이 날 때 같이 흔들리게 한다고 말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번에 알아보니까 그 설계 법을 가리켜 “면진 설계”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면진 설계란 건물지반과의 사이에 절면장치를 함으로 인하여 지진의 힘을 받지 않는 구조입니다. 건물기초 부분에 Isolator(절연체: 소음 진동 절연 장치, 내진성(耐震性)을 높이기 위해 기초와 건물 사이에 끼워 넣는 고무. 금속, 스프링으로 조립)나 Damper [(기계의 진동을 억제하는) 제동자(制動子), 댐퍼] 등을 설치하여 그 위에 건물을 설치함으로 인하여 지반의 흔들림이나 움직임이 건물이 함께 움직이지 않도록 설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설계의 단점은 코스트가 비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지비도 많이 들어간다고 합니다(인터넷). 저는 이 면진 설계를 생각할 때 비록 코스트가 비싸고 유지비가 비싸다 할지라도 앞으로 올 큰 지진을 대비함에 있어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삶 속에서 앞으로 큰 지진 같은 우리를 뿌리 채 흔드는 일이 갑자기 온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설계대로 우리의 신앙(믿음) 기초를 든든히 하여 견고히 한다면 우리는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7장 13-23절까지 묵상해 오면서 “두 문”(two doors)(13-14절)과 “두 동물”(two animals)(15절)과 또한 “두 나무”(two trees)(16-23절)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았습니다. 그 받은 교훈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면 첫째로,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13절). 그 이유는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기 때문입니다(14절). 결코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는 넓은 길로 걸어(13절) 가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넓은 길은 큰 문을 향하는데 그 넓은 문은 멸망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13절). 비록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좁은 길은 협착하여(14절) 고난과 핍박과 환난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 문으로 들어가길 힘써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거짓 선지자들을 주의하고 경계해야 합니다(15절). 그 이유는 거짓 선지자들은 겉으로 볼 때에는 양의 옷을 입고 있지만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이기 때문입니다(15절). 셋째로, 우리는 좋은 나무로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17절). 결코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18절). 그리고 결코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18절).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느니라”(19절). 우리는 영생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사랑의 열매), 그리고 선행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리고 결코 우리는 말로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되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 다 되야 할 것입니다(21절).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두 문”, “두 동물” 그리고 “두 나무”를 통하여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주셨는데 오늘은 예수님께서 본문 마태복음 7장 24-29절에서 “두 건축업자들”(two builders)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두 건축업자들을 묵상하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첫 번째 건축업자는 바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2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짓는 지혜로운 건축업자를 가리킵니다. 왜 예수님께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을 가리켜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지혜로운 건축 없자는 집을 지으면서 집의 주추(its foundation)를 반석 위에 놓기 때문입니다(25절). 여러분, 혹시 한옥을 지을 때에 일반적으로 가장 먼저 하는 작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주추를 놓는 일입니다. 여기서 주추란 기둥 밑에 괴는 돌을 의미합니다. 그 주추를 다 놓으면 그 때서야 기둥을 세우는데 바로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웁니다. 그리고 나서 기둥과 기둥을 잡아는 주는 일(창방)을 하며 집을 세워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추 위에 기둥을 세울 때에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레질(그레질 공법)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그레질이란 주춧돌은 보통 자연석을 쓰다 보니까 아무리 넓고 평평한 돌을 골랐다 해도 기둥을 바로 세우기가 어렵기에 주추 위에 기둥을 세우려면 주춧돌의 면과 기둥의 면이 잘 맞아 떨어지도록 하는 선 작업을 해 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그레질입니다. 그레질의 방법은 간단하다고 합니다. 주춧돌 위에 세워지는 기둥의 면을 주춧돌에 맞게 깎고 갈아 내는 것입니다. 기초가 되는 주춧돌에 손을 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 위에 세워지는 기둥의 면을 깎고 다듬어 주추에 맞추는 것입니다. 기준은 기둥이 아니라 항상 주춧돌입니다. 그리고 이 그레질을 잘 하면 잘 할수록 집은 더 안전하고 튼튼하게 세워지게 된다고 합니다(인터넷). 이와 같이, 지혜로운 건축업자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습니다(24절). 그러면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반석”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반석”하면 생각나는 개념은 ‘든든하다, 견고하다’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반석”의 상징적인(figuratively) 의미는 바로 ‘견고함, 단단함’(firmness) 또는 ‘안정성’(stability)입니다(Zodhiates).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 사도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의미는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요 그 교회의 영적 주초는 바로 반석이 되시는 예수님이란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베드로”란 이름의 뜻입니다. 우리는 그 이름의 뜻을 주로 “반석”이란 의미로 알고 있는데 사실 그 뜻은 반석이라기보다 단 하나의 “돌”(isolated stone)을 의미합니다(Friberg). 그러므로 은유적으로(비유적으로)(metaphorically)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반석”이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Friberg). 성경 고린도전서 10장 4절을 보십시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사도 바울은 출애굽 당시에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같이 마신 물을 “신령한 음료”라고 말하였고 또한 “반석”을 “신령한 반석”이라고 말하면서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라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24-25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지혜로운 사람이 집을 짓는 그 반석은 바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과연 지혜로운 건축업자는 어떻게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짓습니까? 그 방법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 즉, 지혜로운 건축업자가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짓기 위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나의 이 말”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28-2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곧, 예수님의 “이 말”씀은 좁게는 마태복음 7장 1-23절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좀 더 넓게는 마태복음 5-7장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가리켜 산상수훈이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공생애 초기에 갈릴리 호수 주변 어느 산에서 그의 제자들과 따르는 수많은 무리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가르치심)은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고 권위 있는 자와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7:29). 이 말씀, 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듣고 행하는 자가 바로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짓는 지혜로운 사람이란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그레질입니다. 영적 그레질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가 반석이 되시는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24절)(인터넷). 다시 말하면, 영적 그레질이란 우리가 그저 “주여 주여”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21절).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치 집을 지음에 있어서 기준이 기둥이 아니라 주초인 것처럼 우리의 삶에 기준은 바로 주님이요 주님의 뜻입니다. 그 말은 마치 주초가 기둥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기둥이 주초에 맞춰야 하는 것처럼 주님의 뜻을 우리 뜻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뜻을 주님의 뜻에 맞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로서(“좋은 나무”)오직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부지런히 십자가 앞에서 내 뜻을 내려놓고 주님께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주님의 뜻대로 세워주기길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주님의 교회를 세우심에 있어서 우리 모두가 반석이 되시는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해야 합니다. 우리는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의 말이나 겉으로는 양의 옷을 입고 속으로는 노략질하는 이리와 같은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듣고 행해서는 아니 됩니다. 도리어 우리는 양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요10:7)을 믿음으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길 힘쓰며 참 선지자가 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해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므로 교회를 반석 위에 지을 때에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25절을 보십시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집인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반석 위에 지을 수 있습니다. 그리할 때 아무리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교회에 부딪쳐도 반석 위에 지은 하나님의 집은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25절).

 

둘째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두 번째 건축업자는 바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26절을 보십시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짓는 어리석은 건축업자를 가리킵니다. 여러분, 왜 예수님께서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을 가리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어리석은 건축업자는 집을 지으면서 집의 주추(its foundation)를 반석 위에 놓지 않고 모래 위에 놓았기 때문입니다. 상상이 되십니까? 어느 건축업자가 자기 집을 지으면서 집의 주추를 모래 위에 세우겠습니까? 그것은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면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무너지되 그 무너짐이 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27절). 그러면 누가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누가 어리석은 건축업자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입니다(26절). 흥미롭지 않습니까? 지혜로운 사람이던 어리석은 사람이던 다 예수님의 말씀은 듣기 듣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듣고 행하는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듣고도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누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았습니까?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이 아니었습니까? 그들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부인하고 스스로 자신들을 속여 율법을 지켜 행하므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의(Jesus’ righteousness)가 아니라 자기 의(self-righteousness)를 의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의 공로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헛된 믿음이요 바로 모래와 같습니다. 그러기에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무너지되 심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결코 바리새인들처럼 우리 자신의 공로나 우리의 의를 의지해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오 모든 죄 사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리로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의를 덧입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석이 되시는 예수님의 말씀 위에 견고히 서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위에 견고히 서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여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다 되야 합니다. 그리할 때 어떠한 환난과 역경이 우리 삶 속에 몰아친다 할지라도 결코 반석 위에 지은 집은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다시 한 번 기억하길 원합니다. 그 약속의 말씀은 바로 마태복음 16장 18절 말씀입니다: “… 내가 … 내 교회를 세우리니 …” (I will build my church). 여러분, 우리 교회는 주님의 교회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친히 세우시겠다고 우리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주님의 세우시는 사역에 동참하는 저와 여러분은 이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이 약속의 말씀을 주신 우리 반석이신 주님께서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믿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더 나아가서 믿음으로 우리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 행하신 모든 것 완전하시니 나의 생명 되신 하나님 내게 행하신일 찬양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복음성가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해야 합니다. 새 찬송가 204장 “주의 말씀 듣고서” 1절 가사와 후렴을 보십시오: “주의 말씀 듣고서 준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터 닦고 집을 지음 같아 비가 오고 물 나며 바람 부딪쳐도 반석 위에 세운 집 무너지지 않네 잘 짓고 잘 짓세 우리 집 잘 짓세 만세반석 위에다 우리 집 잘 짓세.” 주님의 교회를 잘 짓고 잘 짓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