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태복음 716-23]

 

 

여러분은 “나무”하면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저는 “나무”하면 6월 달 맞이하여 1박 2일 기도회 첫날인 금요일(7일) 저녁 설교한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 날 저는 에스더 7장 10절 말씀 중심으로 에스더 2장에서 7장까지를 하나님께서 쓰신 드라마를 “나무”의 관점에서 설교했었습니다. 왕후 에스더의 사촌 오라버니인 모르드개를 달고자 한 나무에 오히려 모르드개와 그의 민족인 유다 사람들을 다 진멸하려고 했던 하만이 달리므로 아하수에로 왕의 노가 그쳤다(7:10) 사실을 묵상하면서 저는 나무에 대한 하나님의 최고의 드라마 작품을 나눈 기억이 납니다. 그 작품은 바로 저주의 나무(신21:23)에 높이 달리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왜 “하만”과 같은 교만한 죄인인 나를 위하여 아무 죄도 없으신 겸손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사 죽임을 당하신 것일까 생각할 때 아하수에로 왕이 왕후 에스더를 왕궁 안 뜰에 선 것을 보았을 때 심히 사랑스러웠다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에5:2). 그 이유는 주님께서는 나 같은 죄인이 심히 사랑스러우셔서 저주의 나무에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심히 사랑하셔서 아무 죄도 없으신 독생자 예수님을 저주의 나무인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했을 때 마치 하만이 나무에 달려 죽었을 때 아하수에로 왕의 노가 그쳤던 것처럼(7:10) 하나님의 진노가 그친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진노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다 쏟아 부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이주 동안 마태복음 7장 13-15절까지 중심으로 “두 문”과 “두 동물”에 대해서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교훈을 받았습니다. 그 교훈을 간략하게 다시 요약을 한다면 제목 그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입니다. 저는 지난 주 다시금 이 교훈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가 이미 묵상한 마태복음 7장 1-6절 말씀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비판하지 말아야 할 것(1절)과 외식을 버려야 할 것(5절)과 “우리는 판단을 해야 합니다”(6절)라는 교훈을 받았는데 바로 이 세 번째 교훈이 판단을 해야 한다는 교훈이 우리가 한 이주 동안 묵상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메시지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는 메시지와 연관이 돼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두 문인 넓은 문과 좁은 문 사이에 올바르게 판단을 내려서 좁은 문을 택하여 그 좁은 길을 걸어가야 하며 또한 거짓 선지자들과 참 선지자들을 판별하여 거짓 선지자들을 주의하고 조심하며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해야 합니다(요7:24). 다시 말하면, 우리는 선과 악을 판별(discern)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2장 15절에서 말하고 있듯이 우리는 신령한 자로서 모든 것을 판단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판단하되 특히 우리는 영적인 일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13절).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요한일서4장 1절 말씀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오늘은 이어서 마태복음 7장 16-23절 중심으로 “두 나무”(two trees)에 대해서 묵상을 하고자 합니다. 여기서 두 나무란 “좋은 나무”(a good tree)와 “못된 나무”(a bad tree)입니다. 여러분은 나무들을 볼 때 어느 나무가 좋은 나무고 어느 나무가 못된(나쁜) 나무인지 아십니까? 아신다면 어떻게 아십니까?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16절과 20절을 보면 그 대답이 있습니다. 그 대답은 바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어느 나무가 좋은 나무고 어느 나무고 못된 나무인지를 분별하기 위해선 그 나무들의 열매를 보면 알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오늘 본문 17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좋은 나무”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 게 자연이치입니다. 그리고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18절). 이 이치를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여러분, 가시나무가 어떻게 포도를 맺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있겠습니까? 포도나무에서 포도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에서 무화가 열매를 딸 수 있는 게 아닙니까? 결국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두 나무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어느 나무가 좋은 나무고 어느 나무고 못된 나무인지는 그들의 열매로 알 수 가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계신 좋은 나무와 못된 나무는 무엇입니까?

 

먼저 “못된 나무”부터 생각해 보십시다. 여기서 “못된 나무”는 한 두 부류의 사람들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바로 1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넓은 문으로 들어가고자 넓은 길로 걸어가는 많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당시의 관점으로 보면 외식하는(5절) 율법주의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을 가리킵니다. 이 바리새인들은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보는 자들이요(3-4절) 개와 돼지처럼 “거룩한 것”과 “진주”(6절)의 가치를 모르는 무지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복음을 믿지 않고 오히려 율법을 지키는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결국 이 “못된 나무”란 바리새인과 같은 율법주의자들로서 멸망으로 인도하는 큰 문으로 들어가려고 넓은 길을 걷고 있는 많은 자들을 가리킵니다(13절).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15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겉으로는 양의 옷을 입었지만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와 같은 거짓 선지자들이 바로 못된 나무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17절에서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고 계신데 그럼 여기서 나쁜 열매는 무엇입니까? 이 못된 나무들인 바리새인들이나 거짓 선지자들이 맺는 나쁜 열매는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이들의 나쁜 열매는 멸망입니다(13절). 이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입니다(벧후2:1).

 

여러분, 지금도 못된 나무인 바리새인들이나 거짓 선지자들과 같은 거짓 선생들과 거짓 지도자들이 잘못된 교리의 가르침으로 우리를 미혹하되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부인하게 만들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지금 그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여(마13:22) 멸망의 넓은 길로 우리를 걷게 하려고 우리를 미혹하고 있습니다. 미혹하되 예수님의 예언처럼 그들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 하고 있습니다(22절).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22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심지어 이들은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21, 23절). 무슨 뜻입니까? 못된 나무와 같은 바리새인들이나 거짓 선지자들이나 주님의 이름으로 이것저것 다 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주님 보시기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천국에 결코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지금 그들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을 향하여 넓은 길로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결과를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그러면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계신 “좋은 나무”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바로 참 포도나무가 되시는 예수님(요15:1) 안에 거하는 자들입니다(4절). 다시 말하면, “좋은 나무”란 주님께서 택하여 세운 자들입니다(16절). 한 마디로 말하면, “좋은 나무”란 좋은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이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하여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3가지로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1) 이들은 율법주의자들인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부인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자들입니다. (2) 이들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자들입니다(13-14절). (3) 이들은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 아니라 실제로 행동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입니다(21절). 여기서 이들이 행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무엇입니까? 한 몇 가지를 예를 오늘 본문 말씀의 문맥에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들은 재판장 자리에 앉아서 상대방을 심판(정죄)하지 않습니다(1절). 또한 이들은 외식하지 않습니다(5절). 오히려 이들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좋은 것을 구합니다(7-11절). 또한 이들은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합니다(12절). 그러면 왜 주님께서는 우리를 택하여 세우신 것입니까? 요한복음 15장 16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주님께서 우리를 택하여 세우신 목적이 가서 (영원한) 열매를 맺게 하려고 하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영원한 열매를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17-19절에는 “아름다운 열매”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맺는 “아름다운 열매”(17, 18, 19절)는 무엇입니까? 한 3 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1)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14절).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인 저와 여러분이 맺는 아름다운 열매란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21절). (2)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가 맺는 아름다운 열매란 성령님의 열매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을 보십시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 성령님의 열매 중 특히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랑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서 예수님의 이중 계명인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눅10:27)를 순종하므로 천국 생활을 합니다. (3) 저와 여러분이 맺는 아름다운 열매(the good fruit)란 바로 선행(good deeds)입니다. 에베소서 2장 8-10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구원은 결코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새롭게 지음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힘으로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선행을 한 후에도 결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선을 다 행한 후에도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라고 고백해야 합니다(눅17:10).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성경 욥기 14장 7절을 보십시오: “나무는 희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 저는 ‘나무는 희망이 있다’는 이 성경 말씀을 통하여 힘을 얻고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받은 교훈은 우리가 욥처럼 아무리 극심한 고난과 고통 속에 있을지라도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으신 나무를 바라보면서 욥기 14장 7절인 ‘나무는 희망이 있다’는 말씀을 묵상해야겠다는 마음에 갖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왜 나무는 희망이 있습니까? 그 이유는 저주의 나무인 십자가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독생자 예수님께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저와 여러분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좋은 나무”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나무로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서 또한 선행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우리는 영생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천국에 들어가는 그 날까지 마치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는 것처럼(욥14:7) 어느 무엇도, 어느 누구도 저와 여러분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을 것입니다(롬8:39).